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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1일 발케나이어 총독은 장교들에게 군인들을 통솔하고 약탈을 중지할 것을 명령하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일 뒤 의회는 중국인 머리 1개당 2두카트 <ref>당시 네덜란드의 [[통화]] 단위 </ref>를 군인과 원주민 군속에게 지불할 것을 결의하였고, 일부 갱단이 살아남은 중국인들을 사냥하는 일이 일어난다. 10월 14일  발리인과 부기인 등으로 구성된 척탄병 부대가 네덜란드군에 보강되었다. 10월 22일 발케나이어 총독은 모든 전투를 종식할 것을 명령했다. 장문의 편지에서 그는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을 중국인 반란군에게 돌렸지만 동시에 반란군 수괴를 제외한 모든 중국인들에게 사면령을 선포하였다. 반란군 수괴의 머리에는 현상금이 걸렸다.
10월 11일 발케나이어 총독은 장교들에게 군인들을 통솔하고 약탈을 중지할 것을 명령하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일 뒤 의회는 중국인 머리 1개당 2두카트 <ref>당시 네덜란드의 [[통화]] 단위 </ref>를 군인과 원주민 군속에게 지불할 것을 결의하였고, 일부 갱단이 살아남은 중국인들을 사냥하는 일이 일어난다. 10월 14일  발리인과 부기인 등으로 구성된 척탄병 부대가 네덜란드군에 보강되었다. 10월 22일 발케나이어 총독은 모든 전투를 종식할 것을 명령했다. 장문의 편지에서 그는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을 중국인 반란군에게 돌렸지만 동시에 반란군 수괴를 제외한 모든 중국인들에게 사면령을 선포하였다. 반란군 수괴의 머리에는 현상금이 걸렸다.


성벽 밖에서는 중국계 반란군과 네덜란드군은 계속해서 충돌했다. 10월 25일 500명의 화교군은 탐보라 지방에 근접하였으나 네덜란드군에게 요격당했다. 다음 날 네덜란드 기병대 1600명이 반란군이 요새화한 살라파장 제당소를 공격했다. 비슷하게 보에장 제당소의 요새도 네덜란드 부대에게 공격당했다. 중국인 반란군은 살라파장을 버린 뒤 캄풍 멜라유로 도망쳤다. 살라파장은 크럼멜 대령에 의해 함락되었다. 도망친 화교군들은 자바 섬 서쪽에 위치한 반튼 술탄국으로 이동하지만 반튼군 3000명에 막혀 들어가지 못하고 자바 섬 북쪽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다. 10월 30일 화교군은 [ https://www.google.co.kr/maps/place/%EC%9D%B8%EB%8F%84%EB%84%A4%EC%8B%9C%EC%95%84+%EB%B0%98%ED%85%90+Tangerang+City,+%ED%83%95%EC%97%90%EB%9E%91/@-6.2176455,106.650034,12z/data=!4m2!3m1!1s0x2e69f8e853d2e38d:0x301576d14feb9c0 탕에랑]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성벽 밖에서는 중국계 반란군과 네덜란드군은 계속해서 충돌했다. 10월 25일 500명의 화교군은 탐보라 지방에 근접하였으나 네덜란드군에게 요격당했다. 다음 날 네덜란드 기병대 1600명이 반란군이 요새화한 살라파장 제당소를 공격했다. 비슷하게 보에장 제당소의 요새도 네덜란드 부대에게 공격당했다. 중국인 반란군은 살라파장을 버린 뒤 캄풍 멜라유로 도망쳤다. 살라파장은 크럼멜 대령에 의해 함락되었다. 도망친 화교군들은 자바 섬 서쪽에 위치한 반튼 술탄국으로 이동하지만 반튼군 3000명에 막혀 들어가지 못하고 자바 섬 북쪽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다. 10월 30일 화교군은 [https://www.google.co.kr/maps/place/%EC%9D%B8%EB%8F%84%EB%84%A4%EC%8B%9C%EC%95%84+%EB%B0%98%ED%85%90+Tangerang+City,+%ED%83%95%EC%97%90%EB%9E%91/@-6.2176455,106.650034,12z/data=!4m2!3m1!1s0x2e69f8e853d2e38d:0x301576d14feb9c0 탕에랑]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11월 4일 크럼멜 대령이 모든 화교군들을 몰아내고 정전 명령을 하달받으면서 네덜란드군과 화교군 사이의 충돌은 마무리된다. 2일 뒤 치르본 술탄국의 군대가 중국인 요새가 있던 도시를 방비하기 위해 도착했다. 11월 28일까지 치르본 군대가 요새를 약탈하고, 28일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이 사태는 끝을 보게 된다.
11월 4일 크럼멜 대령이 모든 화교군들을 몰아내고 정전 명령을 하달받으면서 네덜란드군과 화교군 사이의 충돌은 마무리된다. 2일 뒤 치르본 술탄국의 군대가 중국인 요새가 있던 도시를 방비하기 위해 도착했다. 11월 28일까지 치르본 군대가 요새를 약탈하고, 28일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이 사태는 끝을 보게 된다.

2016년 6월 12일 (일) 17:27 판

개괄

바타비아 화교 학살사건은 1740년에 바타비아(오늘날의 자카르타)에서 화교들이 학살당한 사건을 말한다. 시내에서는 10월 9일부터 22일까지 지속되었으며 시외에는 11월까지 소규모 충돌이 있었다. 총 만 여명의 화교이 살해당하고 생존자는 600~3000명 정도의 화교만이 살아 남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1740년 9월 네덜란드 총독부가 화교들을 억압하고 설탕 가격을 낮추자 화교들 사이에서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에 총독 아드리안 발케나이어는 폭동에 대비할 것을 명령했다. 10월 7일 제당소 노동자를 중심으로 폭동이 일어나 50명의 네덜란드 군인이 죽자 총독부는 중국인들로부터 무기를 압수하고 중국인 거류구에 야간 통행 금지 명령을 내린다. 2일 뒤, 화교에 대해 루머가 퍼져 비 화교계 주민들이 바타비아의 화교촌을 불태우고 네덜란드군이 그 화교촌에 대포를 쏘는 사건이 발생했다. 화교 학살은 바타비아 전역으로 퍼졌다. 10월 11일 발케나이어 총독은 루머가 사실무근임을 확인해주지만 일부 주민들은 총독이 학살의 중지를 강력히 명령한 22일까지 화교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시외에서는 제당소 노동자와 네덜란드군간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1741년 자바 섬 전역에서로 확장된 화교와 네덜란드와의 충돌은 자바인들과 중국인들이 손을 잡고 네덜란드에 저항한 2년 자바 전쟁을 촉발시킨다. 후에 발케나이어 총독은 학살에 책임을 물어 본국으로 송환된다. 이 사건은 많은  네덜란드 문학에서 회자되고, 자카르타 몇몇 지역의 어원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학살 이전

네덜란드가 동인도 지방(오늘날의 인도네시아)을 식민화하면서 많은 중국인들이 도시 건설, 제당소 노동자, 상인 등의 명목으로 유입되었다. 바타비아 항을 통한 동인도-중국 무역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중국인 유입도 대폭 늘어났다. 1740년 기준으로 자바 섬의 중심 도시인 바타비아에 중국인이 1만명 가량이 살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수천명의 화교들이 살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그들에게 주민등록증을 발부해 항상 소지하게 하고 충성적이지 않은 화교들은 중국 본토로 추방하였다.

1730년에 말라리아가 창궐하자 화교 추방 정책은 강화되었다. 인도네시아의 역사학자 베니 센티오노는 네덜란드인들과 자바 섬 원주민들은 부가 날날이 증가하는 중국인들에게 의심과 분노를 가지고 있었고, 이 참사가 발생한 이유가 이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1940년 7월 네덜란드 해군 지휘관은 의심스런 화교들을 모아다가 실론(스리랑카의 본섬)으로 추방해 정향을 채취하도록 했다. 부유한 중국인들은 뇌물을 주어 추방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들 또한 고통을 겪기는 매한가지였다. 추방당한 중국인들을 태운 배가 그들을 목적지까지 보내지 않고 바다로 버려버린다는 소문은 바타비아의 화교들을 더 겁내게 했다. 이러한 추방 정책은 남아있는 중국인들을 불안하게 해 중국 노동자의 직률을 떨어트렸다. 한편 바타비아 원주민들도 중국인들을 불신하고 있었다. 원주민들 대부분은 가난했는데 외지의 중국인들이 부를 거두어들이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를 두고 화교들을 "아시아의 유대인"이라고 평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상황은 더 복잡했다. 바타비아 교외의 화교 빈곤층들은 제당소 노동자로 일하면서 네덜란드와 화교 상류층 양쪽으로부터 착취당했다. 하지만 화교 상류층은 제당, 양조, 소작 등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총독부가 설탕 가격을 내리게 되자 화교들의 불만이 커졌다. 1720년대부터  서인도 제도 지방에서 설탕 생산량이 증가해 전세계적으로 설탕 가격이 크게 하락했다. 1740년이 되자 가격은 1720년의 절반 수준으로 까지 떨어졌고 때문에 동인도 지방의 설탕 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처음에 인도 의회(Raad van Indië)[3]는 중국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낮다고 보았으며, 특히 발케나이어 이전의 총독인 임호프 지지파들은 중국인들에게 강력한 제제를 가하는 것에 반대했다. 9월 26일 발케나이어 총독이 중국인 반란이 일어나면 강력히 대처할 것을 주문했을 때에도 반 임호프파의 반대가 있었다. 임호프파와 발케나이어파의 대립은 화교 학살이 발발하는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10월 1일 발케나이어는 보고서를 하나 받는다. 이 보고서에는 9월 26일의 결정에 반발한 중국인들이 성문 밖에 모여있다는 것이다. 발케나이어와 의회는 이 보고를 회의적으로 보았지만, 성문 밖에서 한 발리인이 중국인에게 살해당하자 그들은 중국인들을 막기 위해 강력한 대처를 취하고, 군대를 보강하기로 한다. 이에 50명의 유럽인 부대 2개와 일부 원주민 군속들이 각각 도시 밖의 초소와 동쪽 성벽으로 보내졌다.

참사가 일어나다

화교 학살

10월 7일, 중국인 제당소 노동자들이 수제 무기를 들고 제당소를 약탈하고 불태운 후 니호에콩이 이끄는 중국인 부대는 50명의 네덜란드군을 죽인다. 이렇게 되자 네덜란드군은 1500명의 슈테리어 [4]와 징집병 11개 대대를 화교촌으로 투입한다. 네덜란드군은 화교촌에 계엄령을 내린다. 추후의 습격을 우려한 그들은 모든 화교촌에서 무기를 압수하고 봉화처럼 촛불로 봉기를 모의할까봐 밤중에 촛불을 키는 것 마저 금지시킨다. 다음 날 성벽 부근에서 1만명의  중국인이 네덜란드군을 공격했지만 네덜란드의 반격으로 1800여명 사망자를 냈다. 발케나이어 총독은 이를 처리하기 위해 9일 의회를 소집하였다.

한편 비 화교계 주민들 사이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화교들이 곧 자기네들을 공격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를 듣고 한 화교촌을 급습하였고, 멀지 않아 바타비아 전역의 화교촌으로 확장되었다. 화교들의 가옥들은 불타올랐고, 거기에 살던 사람들은 살해당했다. 19세기의 한 네덜란드 정치인은 이 때 남녀노소는 물론 임산부에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노인들까지도 힉살당했으며, 붙잡힌 포로들은 저항조차도 할 수 없었음에도 양처럼 살해당했다고 한다.

수치텔렌 소위와 오스텐 대령이 이끄는 부대는 초기 중국인의 습격에서 살아남았는데, 이들은 10월 9일 당시 화교촌 지구에 주둔히고 있었다. 오후 5시 즈음에 그들은 화교들의 가옥에 대포를 발사하였다. 대포알을 맞은 건물에 화재가 나면서 일부 중국인들은 불타죽었고 몇몇은 화재를 피하다가 대포에 맞아 죽기도 했으며 절망감에 자살을 선택하는 중국인들도 있었다. 여기서 살아남아 운하로 간 중국인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탈출할 선박을 기다리다가 네덜란드인에게 살해당했다. 불타는 집에서 빠져나와 거리에서 돌아다니던 중국인들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당연하겠지만 약탈도 성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살은 바타비아 내 전 화교촌으로 퍼졌다.

10월 10일, 사태는 더 심각해졌다. 병원의 중국인 환자는 병석에서 끌려나와 죽임을 당했다. 화재 진압에 실패해 불은 10월 12일까지 맹화를 떨쳤다. 한편, 800명의 네덜란드 군인과 2000명의 원주민들은 캄풍 가딩 멜타이의 중국인 난민촌을 공격했다. 케판장이란 자가 이끄는 이 집단은 파닝가란으로 쫓겨났다가, 네덜란드군에 의해 그 지역에서도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군 450여명과 중국인 800여명이 죽었다.

중국계 반란군 진압

10월 11일 발케나이어 총독은 장교들에게 군인들을 통솔하고 약탈을 중지할 것을 명령하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일 뒤 의회는 중국인 머리 1개당 2두카트 [5]를 군인과 원주민 군속에게 지불할 것을 결의하였고, 일부 갱단이 살아남은 중국인들을 사냥하는 일이 일어난다. 10월 14일  발리인과 부기인 등으로 구성된 척탄병 부대가 네덜란드군에 보강되었다. 10월 22일 발케나이어 총독은 모든 전투를 종식할 것을 명령했다. 장문의 편지에서 그는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을 중국인 반란군에게 돌렸지만 동시에 반란군 수괴를 제외한 모든 중국인들에게 사면령을 선포하였다. 반란군 수괴의 머리에는 현상금이 걸렸다.

성벽 밖에서는 중국계 반란군과 네덜란드군은 계속해서 충돌했다. 10월 25일 500명의 화교군은 탐보라 지방에 근접하였으나 네덜란드군에게 요격당했다. 다음 날 네덜란드 기병대 1600명이 반란군이 요새화한 살라파장 제당소를 공격했다. 비슷하게 보에장 제당소의 요새도 네덜란드 부대에게 공격당했다. 중국인 반란군은 살라파장을 버린 뒤 캄풍 멜라유로 도망쳤다. 살라파장은 크럼멜 대령에 의해 함락되었다. 도망친 화교군들은 자바 섬 서쪽에 위치한 반튼 술탄국으로 이동하지만 반튼군 3000명에 막혀 들어가지 못하고 자바 섬 북쪽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다. 10월 30일 화교군은 탕에랑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11월 4일 크럼멜 대령이 모든 화교군들을 몰아내고 정전 명령을 하달받으면서 네덜란드군과 화교군 사이의 충돌은 마무리된다. 2일 뒤 치르본 술탄국의 군대가 중국인 요새가 있던 도시를 방비하기 위해 도착했다. 11월 28일까지 치르본 군대가 요새를 약탈하고, 28일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이 사태는 끝을 보게 된다.

후일담

이 사태로 인해 1만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산된다. 학자들에 따라 다르지만 생존자는 3500명에서 최소 300명 가량으로 추측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역사학자 세티오노는 500명의 포로와 병원의 환자가 이 사태동안 죽임을 당했다고 기술했다. 바타비아 학살 이후로 주변의 도시에 대규모 화교 학살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이후 네덜란드는 중국계 주민들을 관리하기 위해 바타비아 교외 지방에 화교촌을 건립하고 모든 중국인들을 그 지방으로 몰아 넣었다. 이 화교촌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특수 통행증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태가 종식된 지 4년도 채 되지 않은 1743년에 수백명의 중국계 상인들이 바타비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한편 케판장이 이끌던 중국인들은 동부 자바로 이동해 네덜란드 무역소를 파괴하다가 네덜란드와 전쟁 중이던 머타렘 술탄의 밑으로 들어갔다. 1743년 이 전쟁은 네덜란드의 승리로 끝났다.

1740년 12월 6일, 발케나이어 총독은 전임 총독 임호프와 두 명의 의원을 불복종죄로 체포해 본국으로 추방하였다. 하지만 그는 12월 24일 발케나이어 총독이 이 학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 Consideratiën over den tegenwoordigen staat van de Ned. O.I. Comp"(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현재 상황에 관한 숙고)라는 이름의 연설을 통해 네덜란드 의회의 마음을 자신의 편으로 돌렸다. 그렇게 되자 상황은 발케나이어 총독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그 해 임호프는 발케나이어 다음의 총독으로 임명되 1742년 바타비아로 돌아온다.

1740년 말 발케나이어는 총독 임기 연장을 요청하나 1741년 되려 해임 통보를 받고 후임으로 임호프가 올 것임을 알게 된다. 1739년 설탕을 너무 많이, 커피를 너무 적게 수출해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입힌 것이 명목상의 혐의였다. 1741년 6월 그는  임시 총독을 임명하고 바타비아를 떠났지만 1742년 1월 희망봉에서 체포되 바타비아로 송환된다. 그 곳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은 그는 1744년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해 12월 재심에서 그는 긴 연설을 통해 자신을 변호하면서 증거를 요구하지만 1751년 옥사하고만다. 1755년 사후의 재판에서 사형을 확정받았지만, 이는 당시 학살에 분노한 네덜란드의 분위기에 왜곡된 재판의 결과였다. 5년 뒤 그의 아들 아드리안 이잭 발케나이어가 이를 인정받고 72만 5천 굴덴의 보상금을 받았다.

중국인들이 대규모로 투자했던 동인도의 제당 산업은 크게 폭락하였다. 임호프 총독은 이를 수복하기 위해 탕에랑 지방을 식민화한다. 그는 처음에 네덜란드 본국에서부터 사람이 와 정착하길 빌었다. 그가 보기엔 바타비아의 사람들은 게으려 터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높은 세율 때문에 본국의 사람은 정착하길 꺼려했고, 결국 땅은 바타비아에 살던 사람들에게 팔렸다. 그가 예상한 것처럼 그들은 땅을 경작하지않고 중국인들에게 소작하게 했다. 이후 설탕 생산량이 꾸준히 늘어 1760년대에는 1740년의 설탕 생산량 수준에 이르었다. 그러나 설탕 생산량은 이후 감소하였다. 제당소의 수도 줄어서 1710년에 131개소에 이르던 제당소가 1750년에는 66개소까지 떨어진다.

이 사건이 남긴 것

이 사건은 18세기 네덜란드 식민주의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이 사건은 네덜란드 문학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빌헬름 반 하렌이 1742년에 지은 그의 시에서 학살을 비난했다던가 아니면 동 시기 작자 미상의 시에서 이 사건에 관해 중국인을 비판한 것이 이를 예증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레오나르드 블루세는 이 사건이 바타비아의 급속한 팽창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고 19세기 후반까지도 남아있던 화교와 비화교계의 구분을 결정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해당 사건은 자카르타 내 몇몇 지명에도 영향을 주엇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예를 들어 타나 아방은 붉은 땅이라는 의미로 학살 당시 가 그 지역을 덮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슷하게 라와 방케라는 지명은 속어로 시체를 의미하는 방카이에서 나왔는데, 당시 그 지역에서 많은 수의 화교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명 중 일부는 중국인 생존자들이 사면령을 빨리 받아 들이게 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각주

  1. 중국인을 의미하는 chinezen과 학살을 의미하는 moord의 합성
  2. 화교촌 폭동
  3. 네덜란드 총독의 보좌 및 자문 기구
  4. 네덜란드의 도시에서 위기 시에 모집하는 민병대
  5. 당시 네덜란드의 통화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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