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공명주생중달

죽을
구멍
밝을
달아날
버금
통달할

죽은 공명이 살아있는 중달을 달아나게 한다는 뜻으로, 죽은 뒤에도 적이 두려워했을 정도로 뛰어난 장수나 인물 또는 죽은 사람에게 겁을 먹고 도망치는 겁쟁이를 비유한 고사이다.

유래[편집 | 원본 편집]

정사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에 모두 등장하며,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에서 사마의가 지휘하는 위나라의 철벽수비에 막혀 오장원에서 대치하다 끝내 제갈량이 병사하고 말았다. 지휘관을 잃은 촉군은 군대를 물려 한중으로 퇴각하였는데, 이 사실을 뒤늦게 파악한 사마의가 위군을 몰아 추격에 나섰지만 촉군의 전술에 휘말려 스스로 겁을 먹고 물러서던 일화에서 유래하였다.

정사[편집 | 원본 편집]

漢晉春秋曰 : 楊儀等整軍而出, 百姓奔告宣王, 宣王追焉. 姜維令儀反旗鳴鼓, 若將向宣王者, 宣王乃退, 不敢偪. 於是儀結陳而去, 入谷然後發喪. 宣王之退也, 百姓爲之諺曰 : 「死諸葛走生仲達.」 或以告宣王, 宣王曰 : 「吾能料生, 不便料死也.」
— 촉서 제갈량전

진수가 기록한 《정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 수록된 내용으로, 주석으로 달린 한진춘추에서 언급되었다. 제갈량 사후 촉군은 양의의 지휘에 따라 군을 정돈하고 퇴각하자 현지 백성들이 선왕(宣王, 사마의)에게 이 사실을 급히 고했고 소식을 접한 선왕은 이를 추격했다. 강유는 위군이 추격함을 인지하고 양의에게 명하여 군기를 반대로 하고 북을 울리도록 하면서 위군에게 대응하는 것처럼 하자, 선왕은 이내 물러나 감히 퇴각하는 촉군을 핍박하지 못했다. 이에 양의는 진형을 짠 채 물러나고 계곡으로 들어간 뒤 발상(發喪)했다. 선왕이 퇴각하니 백성들은 "죽은 제갈(諸葛)이 살아있는 중달(仲達)을 달아나게 했다”라고 했다. 어떤 이가 이를 선왕에게 고하자 선왕이 말했다, “나는 산 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있지만 죽은 자의 마음을 헤아려 대적할 수는 없다”

연의[편집 | 원본 편집]

《삼국지연의》에서는 정사와 큰 흐름은 같으나, 소설의 창작을 가미하여 보다 재미난 이야기로 묘사했다.

오장원에서 사마의와 오랜 시간 대치하던 제갈량은 병이 깊어져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지하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촛불을 밝히고 하늘에 자신의 수명을 연장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했지만 장막 안으로 위군의 기습을 보고하려던 위연이 난입하면서 촛불이 꺼져 제갈량은 실의에 빠진다. 강유는 분노하여 위연을 베려 했으나 제갈량은 이를 말리면서 사람의 목숨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서 위연을 용서한다.

결국 병세가 깊어진 제갈량은 죽음에 이르러 강유에게 자신의 죽음 이후 대비책을 남겨놓는다. 결국 제갈량은 오장원의 차가운 가을 바람 아래 숨을 거두고, 촉군은 질서정연하게 진채를 뽑고 후퇴하기 시작한다. 제갈량이 숨을 거두는 시각, 사마의 역시 천문을 살피다가 커다란 별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제갈량의 죽음을 직감했으나 평소 의심이 많았고 제갈량의 속임수에 호되게 당한 아픈 기억이 남아있던 사마의는 쉽사리 추격을 결정하지 못한다. 다음 날 정탐병이 보고하길 이미 촉군은 진채를 뽑아 퇴각하였다고 말하니 이에 사마의는 황급히 촉군을 추격하라 명하고 앞장서서 달려나간다.

위군의 추격대가 촉군의 후미를 잡을 무렵, 갑자기 촉군이 방향을 돌려 위군의 기습에 대응하기 시작했고, 산 위에서는 수레에 앉아 있는 제갈량의 모습이 나타났다. 제갈량의 모습을 본 사마의는 "내가 또 공명의 속임수에 빠졌구나!"라며 황급히 위군을 후퇴시켰고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다가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가 진정시키자 "아직 내 목이 붙어있느냐?"라며 안도한다.

사실 수레에 앉아있던 제갈량은 제갈량의 모습을 본떠 나무를 깍아서 만든 목상이었고, 이 역시 죽기 전 제갈량이 남겨놓은 치밀한 계책이었다. 이런 제갈량의 계책 덕분에 촉군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