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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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사상사적 측면에서 이 시기의 신앙결사는 수행 뿐만 아니라 대중 교화에도 중점을 두어 실천적 성격을 띠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또한 철학적·교리적 측면에서 당시 신앙결사를 주도한 인물들의 불교 철학적 수준이 매우 높았던 점을 주목할 만하다. 요약하자면, 지눌과 요세 등 고려 신앙결사운동의 주도자들은 13세기 동아시아에서 가장 선진적인 불교 사상가였다.<ref>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n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nh_021_0020_0010_0040_0030&position=-1 <백련사 결사운동의 전개와 추이>]</ref>
또한 사상사적 측면에서 이 시기의 신앙결사는 수행 뿐만 아니라 대중 교화에도 중점을 두어 실천적 성격을 띠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또한 철학적·교리적 측면에서 당시 신앙결사를 주도한 인물들의 불교 철학적 수준이 매우 높았던 점을 주목할 만하다. 요약하자면, 지눌과 요세 등 고려 신앙결사운동의 주도자들은 13세기 동아시아에서 가장 선진적인 불교 사상가였다.<ref>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n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nh_021_0020_0010_0040_0030&position=-1 <백련사 결사운동의 전개와 추이>]</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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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6일 (금) 10:42 판

이 문서는 한국사 가운데 고려시대의 불교에 관해 설명하는 문서이다.

고려 건국 과정에서 불교의 역할

후삼국시대의 지방 세력은 통일신라 하대에 중앙 귀족 사회에서 밀려난 '낙향 호족(落鄕豪族)'들이 지방의 연고지에서 세력을 기르면서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 같은 지방 호족 세력은 선종 불교와 연결되어, 호족들이 선종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후원하고 선종 역시 호족의 세력 형성을 돕는 공생 관계를 이루게 된다. 후에 고려 태조가 되는 왕건(王建)의 조부 작제건(作帝建) 및 부친 용건(龍建) 역시 이 같은 시대적 맥락 하에서 형성된 개성 지방의 호족이었다.

신라 헌앙왕~진성여왕 무렵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승려 순지(順之)는 용건의 후원을 받는 사찰의 주지로서, 삼편성불론(三遍成佛論)으로 대표되는 선 사상 체계를 세워 이후 등장하게 될 의천(義天)의 천태종(天台宗)에 밑거름이 되었다. 순지의 선 사상은 경전의 권위를 중심으로 하는 교종과는 달리, 각 중생이 저마다 자기 안에서 부처와 정토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개인주의적 · 분권주의적 성향을 띠어 중앙 권력에서 벗어나 독자 세력을 구축하려는 지방 호족들을 사상적으로 지원했다.[1]

신라 왕실의 권위가 무너져 본격적인 군웅 할거 시대에 접어들면, 선종 뿐만 아니라 교종 승려들도 신라 왕실을 떠나 지방 호족들과 결합함으로써 권위를 보장받으려는 경향을 띠게 된다. 왕건은 예성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해상 세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특히 903년 전라도 남부 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920년 경상도 남해안 일대를 확보한 이후로는, 중국으로 유학을 다녀 오려는 승려들은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왕건 세력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같은 상황은 왕건이 지식인들과 연결되어 그들의 협조를 얻는 데 있어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

왕건이 독립 세력을 형성하기 전에는 왕건 쪽에서 승려들과의 연결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이는 각 승려들이 각 지방의 호족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연관지어 이해해야 한다. 즉 왕건은 지방 호족 세력과 연합하여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위해 그 호족들과 연결되어 있던 승려들과 연결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왕건과 관련을 맺은 승려들은 대부분 왕건 이전에 다른 호족과도 먼저 연결되어 있어 다중적인 연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고려가 건국된 이후로는 승려들 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왕건과 연결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보인다. 왕건은 독자 세력화 이후로는 승려들과의 연결에 이전처럼 사활을 걸지는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민심 교화의 차원에서 불교는 중시되었고, 승려들은 높은 지위로 대접되었다.[2]

신라 말 ~ 고려 초 불교의 상황

전통적으로는 5교 9산의 종단 체계가 고려 초에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고 보았다. 즉 신라 중기에 이미 교종의 5교가 성립되어 있었고, 고려 초에는 선종에서도 9산 선파가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5교와 9산의 목록은 각각 다음과 같다.[3]

  • 5교
    • 계율종 → 의천 시기에 남산종으로 이름이 바뀜. 이하 공통
    • 법상종 → 자은종
    • 법성종 → 중도종
    • 열반종 → 시흥종
    • 원융종 → 화엄종
  • 9산 : 의천 시기에 조계종으로 통합되어, 천태종과 함께 '양종'을 이룸
    • 가지산문
    • 동리산문
    • 봉림산문
    • 사굴산문
    • 사자산문
    • 성주산문
    • 수미산문
    • 실상산문
    • 희양산문

그러나 고려 초까지 5교 9산이 확고하게 종단으로서 체계를 갖추고 있지는 못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4] 대각국사 의천의 업적이 기록된 비석인 <선봉사 대각국사비(僊鳳寺大覺國師碑)>에 따르면, 고려 초기에 조계종·화엄종·유가종의 3개 종파("3대업")가 있었고, 의천이 천태종을 창립함으로써 4개 종파("4대업")가 되었다는 것이다.[5] 여기서 조계종은 선종을 일컫고, 화엄종과 유가종은 교종의 종파들인데 유가종은 법상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고려 전기 불교 통합 운동

고려 태조 왕건은 지방 호족들과의 연합책의 일환으로 승려들과의 결속을 추구하여, 교종과 선종을 가리지 않고 어느 종파의 승려든지 관련을 맺었다. 이 같은 왕건의 불교 정책은 고려 초기에 교종과 선종의 통합 움직임이 일어나도록 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선종 승려인 현휘(玄暉)와, 사무외사(四無畏士)라 불린 4명의 승려들은 선종 승려임에도 불구하고 교종 사상인 화엄사상에 깊은 이해를 보이며 선종과 화엄 사상의 융합을 시도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화엄종도 세력이 성장하며 선종과의 융합을 시도했다. 신라 하대에 선종이 유행하면서 교종은 잠시 위축되었으나, 고려 초기 화엄종의 성장에 힘입어 다시금 교종이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 시기 교선 통합을 추구한 화엄종 승려로는 탄문(坦文)이 있다.[6]

고려 초기에는 왕권이 안정되지 못하여 태조 이후 즉위한 혜종·정종·광종대까지는 매번 즉위 초마다 "문·무관이 반이나 살상되었다"(최승로)고 할 정도였다.[7] 이에 광종(4대, 재위 949~975)은 왕권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강력한 전제 정치를 펴게 되는데, 이 같은 정치적 맥락에서 광종 대에는 불교 통합 운동이 광종의 후원 하에 활발히 전개된다.

균여

광종 대의 불교 통합 운동을 상징하는 명승인 균여(均如)는 태조 6년인 923년에 태어나 광종 24년인 973년까지 생존해 있던 인물이다.[8] 균여는 광종 9년인 958년부터 광종 대 왕권 강화 정책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여, 불교 통합 운동을 전개하여 광종의 정책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하였다. 고려 전기 불교 통합 운동에 있어서 균여의 업적은 *화엄종 내에서 남·북악의 통합, *성상융회(性相融會) 사상을 통한 교종 내부 종파 간의 통합 시도, *성속무애(聖俗無碍) 사상을 통한 불교계와 세속 서민 사회 간의 통합 시도로 요약될 수 있다.

화엄종 내의 남·북악 분열은 후삼국시대 화엄종단 내에서 고려 태조 왕건을 지지한 북악파와 후백제의 견훤을 지지한 남악파 사이의 분리가 교리 논쟁으로 확대되어 고려 전기까지 이어진 것인데, 북악파가 통일신라 시대의 고승 의상(義湘)의 법통을 이은 화엄종 내 주류 계파라는 것은 확실하나 그에 대립한 남악파의 교리적 입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남악파를 연기(緣起)계라고도 하고, 법장(法藏)계라고도 하고, 혹은 단지 같은 의상계 내에서의 주류·비주류의 분열이었을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9] 균여는 북악파의 법통을 이어받은 승려로서 남악파를 아우름으로써 화엄종을 통합시킨 것으로 평가된다.[10]

성상융회(性相融會)는 원래 의상(義湘)과 함께 지엄(至嚴)으로부터 수학하여 중국 화엄종을 개창한 법장(法藏)이 체계화한 사상인데, 화엄종 사상 내에 법상종 사상을 융합하고자 하는 시도로 요약할 수 있다. 성상융회에 관하여 균여의 업적은 '주측(周側)'을 주장하여 의상과 법장의 화엄 사상을 통합한 것에 있다.[11] 즉, 의상에 뿌리를 두는 한국(해동) 화엄종 사상에, 법장에 뿌리를 두는 중국 화엄종 사상을 통합함으로써, 중국 화엄종의 성상융회 사상을 한국 화엄종에 도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속무애(聖俗無碍)는 말 그대로 출가한 불자들의 세계와 세속 서민들의 세계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사상이다. 균여는 향가를 짓고, 토착 신앙의 신비적 측면을 흡수하여 서민 대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다가가려 하였다.

각 종단의 성립

선종의 종파들('9산선파') 가운데에서도 교선 통합 및 성상융회적 사상 경향을 띠었던 봉림산파(鳳林山派)와 희양산파(曦陽山派)가 광종의 관심 하에 특히 융성했다. 선종 내의 성상융회적 경향은 광종 19년인 968년 무렵에 법안종(法眼宗)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법안종은 원래 중국 당 초기에 등장한 선종 종파로서, 교종 내부의 화엄종과 법상종 사이의 대립을 해결하고 더 나아가 선종 주도로 교·선종을 융합하고자 했다. 마찬가지로 고려의 법안종 역시 선종의 입장에서 선종 주도의 교선 통합을 추구하였다.[12]

고려 초기의 교선일치적 분위기는 또한 천태종 사상에 대한 연구인 천태교학이 진흥되는 토양이 되었다. 이 시기 천태학을 깊이 연구하여 발전시킨 승려로는 제관(諦觀)이 있다. 이후 고려 숙종 시기의 승려 의천의 등장으로 종단으로서의 천태종이 성립하게 된다. 천태종은 교종 종파이나, 특히 한국에서는 법안종 등과 매우 근접하여 선종에 가까운 종단으로 성립한 것이 특징이다.[13]

고려 중기 불교의 귀족화와 불교 개혁 운동

고려 중기에는 문벌귀족이 대두하면서 선종의 세력은 약화되었고 교종이 강성해졌는데, 특히 화엄종과 법상종이 강하게 일어나서 서로 대립했다. 또한 고려 사회가 문벌귀족 사회로 변모해 가고 교종불교 역시 그와 연관되어 부패해 가는 모습이 보이자, 이 같은 정치 및 종교계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하는 사람들이 은둔하여 거사(居士)가 되면서 '거사불교'라는 제3의 흐름이 나타나기도 하였다.[14]

현종(8대, 재위 1009~1031)은 왕자 시절 궁중의 세력 다툼을 피해 법상종 사찰에 은거했던 인연으로 즉위 후 현화사(玄化寺)를 개창하는 등 법상종과 관련을 맺게 되며, 이를 계기로 현종 대에 법상종이 크게 융성했다. 법상종은 한강 유역의 토호인 인주 이씨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인주 이씨가 고려 왕실의 외척 가문이 되면서 법상종은 문벌귀족을 후원세력으로 두게 된다. 법상종의 교리는 현상계 사물들 사이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에 특징을 두어, '비정물(非情物)'인 사물들도 '정물(情物)'인 인간과 마찬가지로 성불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같은 측면은 법상종이 화엄종이나 다른 종파들과 융회할 수 있도록 하는 측면이 되었다.[15]

의천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1055~1101)은 고려 문종(11대, 재위 1046~1083) 때부터 숙종(15대, 1095~1105)때까지 활동한 승려로서, 문종의 4남이자 선종·숙종의 동생이다. 의천은 원래 화엄종 승려로서, 탄문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경덕국사 난원(景德國師 爛圓)에게서 수학하였으며 또한 균여의 계승자인 창운(昶雲)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화엄종 내에서의 대립

탄문은 균여와 함께 광종 대의 화엄종을 대표하는 명승이지만 탄문의 사상 경향은 균여와 상당히 대조되는 것이었는데, 의천의 사상은 탄문과 유사한 경향을 띠어 의천과 대립된다. 문종 대에도 균여파는 여전히 화엄종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의천파는 빠르게 성장하여 곧 균여파를 압도하고 화엄종의 주류 지위를 차지한다. 의천은 교관겸수(敎觀幷修)를 기치로 내세우며 균여를 비판했는데, 이를 의천은 실천적 수행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균여의 가르침은 경론에만 치우친 관념적인 것으로 비판받았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균여파 대 의천파의 대립은 교리 사상과 세속 정치의 양 측면에서 여러 성격을 띤다. 한국(해동) 화엄종을 개창한 통일신라의 명승 의상과 중국 화엄종을 사실상 개창한 법장은 지엄을 함께 스승으로 모시고 동문수학한 사이이나, 둘의 사상 경향은 대조적이었다. 의상의 사상은 통합적인 경향을 띠는 반면 법장의 사상은 하나하나의 차이를 인정하고자 하는 경향을 띠었다. 균여가 의상을 계승했다면 의천은 법장을 계승했다고 요약할 수 있다. 법상종은 균여의 성상융회 사상에 친화적이었던 반면 의천은 법상종과 대립했다. 세속인 가운데에서 김부식 등 개경파는 의천의 사상을 계승한 반면 균여의 사상은 혁련정 등 서경파에게 계승되었다.[16]

천태종 개창

의천은 31세가 되던 해인 선종 2년(1085년) 송에 유학하여, 고려에서 많은 양의 화엄종 서적을 가져다 주어 중국 화엄종을 중흥시키는 한편, 교선 종파를 가리지 않고 50여 명의 고승을 방문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천태종의 산가파(山家派)에 속하는 자변대사 종간(慈辯大師 從諫)에게 천태학을 배웠으며, 이 때 고려로 돌아가면 천태종을 세워 널리 가르칠 것을 맹세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 때 의천은 화엄종에서 천태종으로 개종을 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4개월 간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의천은 유학 과정에서 수집한 불서들을 목록으로 정리하여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펴낸다. 이 『교장총록』은 신라, 요(거란), 송, 일본 등 동아시아 각지의 1,010부의 책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 『교장총록』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첫째, 균여 뿐만 아니라 고려의 화엄종 승려들이 쓴 서적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둘째, 선종 관련 서적들도 제외되어 있다. 셋째, 3권 말미에는 거의 천태종 관련 저술들만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같은 특징은 의천이 추구한 사상적 방향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의천이 보기에 균여 및 그의 뒤를 이은 고려 화엄종은 '관문(觀門)', 즉 수행이 결여된 채 교학, 즉 이론적이고 학술적인 측면에만 치중해 있었다. 또한 균여는 '신이와 신통'을 보여 불교의 '정법(正法)'에서 벗어나 '사도(邪道)'로 빠졌으며, 또한 광종과 결합했기 때문에 세속적 권력과 영합하여 명리를 추구했다. 이 때문에 의천은 고려 화엄종을 인정할 수 없었다. 또한 의천은 선종도 인정할 수 없었는데, 이는 선종은 화엄종과 반대로 '교(敎)를 떠나 선을 말함', 즉 문자로 이루어진 경전과 경론을 아예 무시해버리는 또다른 일방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17]

결론적으로 의천은 수행과 이론이 균형을 이루는 교선 통합적 불교를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기존 고려 불교계의 종파 가운데에서는 이를 만족시킬 수 있는 종단이 없었고, 결국 의천은 고려에 천태종을 새로 일으키게 된다. 의천은 귀국 후 35세가 되던 해인 선종 6년(1089년)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고려 초 승려 제관이 쓴 책)를 중간하고 국청사(國淸寺)를 짓기 시작하며, 43세가 되던 해인 숙종 2년(1097년) 국청사가 완공되자 공식적으로 천태종을 개창한다. 의천은 신라의 고승 원효가 처음 천태학에 관해 책에서 다뤘기 때문에 원효를 한국 천태종의 시조로 보았다.

무신정권기의 신앙결사운동

무신정변 이전 고려 중기에는 화엄종·법상종 등 교종불교가 문벌귀족과 결합하여 득세하고 있었으며, 사상적으로는 관념화되고 경제적 기반 측면에서는 부유해져서 기층 서민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무신정변에 따른 기존 문벌귀족의 몰락은 교종에게도 큰 타격이 되었다. 따라서 교종 불교계는 문신 귀족들과 합세하여 무신정권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보였는데, 무신정권 초기의 혼란기에는 교종 불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교종의 저항도 부분적인 것에 그쳤으나, 최씨 정권이 집권하면서 무신정권이 안정되자 무신정권과 교종 불교 간의 대결이 조직화·본격화되었다.

불교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려 사회를 안정적으로 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씨 정권은 교종 세력과 대결할 수밖에 없다면 자연스럽게 선종과 깊은 관련을 맺어야만 했다. 최씨 정권의 2대 집권자인 최이(崔怡)는 선불교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수선사(修禪社; 오늘날의 송광사(松廣寺))에 두 아들을 출가시키고 많은 재물과 불교용품을 선물하는 등 공을 들였다.

무신정권의 정치적 기반 확보를 위한 정권 차원의 지원 외에도, 대몽 항쟁기에 왕실이 개경을 떠나 강화도로 천도한 것도 당대 불교의 중심이 개경에서 지방 사찰로 옮겨가는 데 영향을 끼쳤다. 수선사나 백련사(白蓮社) 등의 사찰을 중심으로 신앙 결사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이같은 맥락에서였다.[18]

지눌의 정혜결사(수선사 결사)와 조계종

지눌(知訥)(1158년(의종 12년)~1210년(희종 6년))은 무신정권기 초기에 정혜결사(定慧結社) 혹은 수선사 결사를 결성하여 불교 개혁 운동을 전개한 선종 승려이자, 조계종을 조직화된 종단으로서 사실상 개창한 것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의천이 왕족 출신으로서 교종에서부터 출발하여 교종 주도의 교·선 통합을 시도했다면, 지눌은 서민 출신의 승려로서 선종으로부터 출발하여 교종을 포용하는 방식의 통합을 추구했다고 요약할 수 있다.[19]

지눌은 24세 되던 해인 1182년(명종 12년)에 승과에 응시하여 출사하였으나, 이내 당대 승려들의 타락상을 비판하며 세속적 명리를 거부하고 정혜(定慧; 선정(禪定)과 지혜(智慧ㆍ知慧))를 닦는 데 힘쓸 것을 촉구하여, 그에 호응하는 동료 승려들과 함께 정혜결사의 결성을 결의한다. 그러나 결의한 동료들이 승직 등용 등의 이유로 흩어져 실제 결사의 결성이 수 년간 지체되었으므로, 그 기간 동안 지눌은 홀로 고승들의 저술을 읽으며 수행한다. 지눌은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공부하며 수행했는데, 특히 화엄종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고 『화엄경(華嚴經)』을 연구하던 중, 중국 당의 이통현(李通玄)이 쓴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에서 크게 감명을 받아 교·선 통합적 사상에 뜻을 두게 된다.

실제로 승려들이 모여 결사를 창설한 것은 1188년(명종 18년)이었으나 참여가 저조하여, 32세가 되던 해인 1190년(명종 20년)에는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이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저술·배포하여 큰 호응을 얻는다. 정혜결사는 원래 공산(公山; 오늘날의 팔공산) 거조사(居祖社)에서 시작되었으나 규모가 커지자 송광산(松廣山; 오늘날의 조계산) 길상사(吉祥寺; 오늘날의 송광사)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1205년(희종 원년)에는 길상사의 중건 사업이 끝나 희종으로부터 수선사(修禪社)의 이름을 받게 되어 이후 수선사 결사라고도 불리게 된다. 지눌이 원래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했기에 결사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정혜사(定慧社)의 이름을 받았으면 자연스러웠을 것이나, 송광산에 이미 정혜사라는 이름의 사찰이 따로 있어 수선사라는 이름을 받은 것인데, '정혜사'와 '수선사'는 자주 혼동되어 동일시되곤 한다.

지눌은 1190년의 <정혜결사문>에서 당시의 불교에 관해 두 가지 비판점을 지적했다. 하나는 정토(淨土) 신앙이 지나치게 타율적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으로, 스스로 자기 마음 속에서 부처를 찾기 위한 수행의 노력을 하지 않고 부처의 이름만 불러 극락에 가기만을 바라는 세태를 비판한 것이다. 지눌은 이에 대해 유심정토설(唯心淨土說)을 설파하여 수행을 강조했다. 또 하나는 선종과 교종의 대립에 대한 비판으로, 참선과 문자적 지혜가 서로 분리되어 대립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며 둘의 통합, 즉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했다.

지눌은 또한 당시의 선종 풍토와 달리 서민층과 교감하며 그들을 참여시키기를 지향했다. 수선사 결사는 중앙 정치 권력이 아닌 지방 향리층과 일반 서민을 후원세력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원 규모가 작아 세력이 크지 못했지만, 정치 권력과 밀착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은 오히려 결사 본연의 정신을 추구하는 데는 이롭게 작용했다. 지눌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수선사 결사는 희종으로부터 공식 인정받았다는 것 외에는 당대 무신정권의 집권자인 최충헌(崔忠獻, 집권기 1196∼1219)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않았다.[20]

수선사가 최씨 정권과 관련을 맺게 되는 것은 지눌 입적 이후로서, 이는 수선사 결사의 성격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수선사 제2대 지도자인 혜심(慧諶)은 최충헌 집권기인 1216년(고종 3년)에 승계 최고직인 대선사에 임명되었다. 최우(崔瑀=최이(崔怡), 집권기 1219~1249)의 지원 하에 수선사는 재정적 빈곤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하게 당대 제일의 사찰이 되었다. 혜심 시기에 수선사는 거란과 몽골의 잇따른 침입에 직면하고 있던 최우 정권에 공개적 지지를 보냄으로써 정권 기반 안정에 도움을 주는 한편으로, 정권을 향해 빈민 구제를 촉구하기도 하는 등 어느 정도 사회적 기능도 수행했다.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최씨 정권에 대한 수선사의 관계는 점차 종속적 관계로 변해간다. 혜심 시기에 재정적으로 부유해진 수선사는 제3대 지도자인 몽여 때에는 정권의 요구에 따라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기도 하며, 제4대 지도자인 혼원은 최우·최항(崔沆, 집권기 1249~1257)의 후원에 힘입어 수선사의 지도자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수선사와 최씨 정권 간의 밀착 관계는, 한편으로는 몽골 침입 시기에 수선사가 대몽 항쟁에 적극 참여하여 고려인들의 항몽 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배경이 되었다는 의의가 있기도 하다.[21]

무신정권이 무너진 이후 원 간섭기의 수선사는 친원불교로 변모하여, 원 황제를 칭송하고 고려에 대한 원의 간섭을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무신정권기와 달리 원 간섭기에는 천태종과 법상종이 원 황실, 고려 왕실, 각 정치세력 등의 후원을 받으며 불교계를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수선사의 교세는 위축되었다. 수선사의 법통은 고려 말기까지 이어지나, 지배층에 영합하여 왕권 강화에 복무하는 성격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22]

요세의 백련사 결사운동

요세(了世)(1163~1245)는 지눌과 비슷한 시기에 백련결사(白蓮結社) 운동을 전개한 천태종 승려로서, 지눌과 함께 무신정권기 불교 개혁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요세 역시 초기에 승과에 합격했으나 불교계의 타락상에 환멸을 느껴 출사하지 않고 신앙 결사에 뜻을 두게 된 인물로, 지눌의 정혜결사가 공산에 있을 무렵에 잠시 정혜결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요세는 지눌과 달리 당대 불교계의 모순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은 천태종 사상이라고 생각하여 1208년(희종 4년) 무렵부터 지눌과 노선을 달리한다. 이후 요세는 참회 수행에 열중하다가 1216년(고종 3년) 전남 강진 일대 토호들의 지원 하에 만덕산(萬德山)에서 백련결사를 결성한다.[23]

요세의 백련결사는 지눌의 정혜결사와 달리 정토신앙에 긍정적이어서 정토신앙을 통한 중생 구제에 중점을 두었다. 이는 지눌과 요세의 중생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한데, 지눌이 생각하기에 중생은 어느 정도 '근기(根機)'가 있는 존재여서 알려주면 듣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존재였던 반면, 요세가 인식하기에 중생은 도저히 스스로는 깨달을 수 없어 전적으로 도와주어야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24]

1230년대 이후 대몽 항쟁기에 백련사는 강력한 항전 의지를 표방했고, 이에 무신정권의 집권자 최이 등이 백련사에 주목하게 되면서 백련사는 지방 토호에서 중앙 조정으로 후원 세력 기반이 이동하게 된다.[25] 이후 원 간섭기에 백련사는 쇠퇴하여 사실상 사라진다.[26]

신앙결사운동의 역사적 의의

13세기를 전후하여 전개된 신앙 결사 운동은, 고려 중기 문벌귀족과 지방 토호·식자층·일반 서민들 사이의 괴리로 인해 쌓여가던 모순과 갈등의 잠재력이 사회 변혁의 동력으로 작동하게 된 시기라고 이해할 수 있다.

사회 계층적 측면에서, 신앙결사운동의 의의는 보수적 문벌귀족에 장악된 불교계의 제반 모순을 지방 토호층과 식자층이 비판하고 나서면서 개혁을 시도했다는 것에 있다. 이 점에 주목할 때, 신앙결사운동은 몇몇 명승들의 행적에만 주목하기보다도 사회 구조적 측면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또한 사상사적 측면에서 이 시기의 신앙결사는 수행 뿐만 아니라 대중 교화에도 중점을 두어 실천적 성격을 띠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또한 철학적·교리적 측면에서 당시 신앙결사를 주도한 인물들의 불교 철학적 수준이 매우 높았던 점을 주목할 만하다. 요약하자면, 지눌과 요세 등 고려 신앙결사운동의 주도자들은 13세기 동아시아에서 가장 선진적인 불교 사상가였다.[27]

대장경판 조판

초조대장경

속장경

고려대장경

각주

  1.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왕건의 선대 세력과 선종>
  2.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왕건과 승려의 결합>
  3.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한국불교의 종파' 항목
  4.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고려 초기의 천태교학>
  5.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불교계의 개혁>
  6.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고려 초의 교선융합사조>
  7.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정종의 왕위계승과 왕권의 동향>
  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균여(均如)' 항목
  9.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교학 불교의 전개>
  10. 한국사 콘텐츠 '균여 (均如)' 항목
  11.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균여의 통합불교>
  12.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법안종의 성립>
  13.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고려 초기의 천태교학>
  14.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거사불교의 유행>
  15.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법상종의 대두>
  16.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화엄종의 성행>
  17.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불교계의 개혁>
  18.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무신정권기 불교계의 현황>
  19.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지눌의 생애>
  20.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정혜결사의 취지와 창립 과정>
  21.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최씨무신정권의 후원과 결사이념의 변화>
  22.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원의 간섭과 수선사의 친원불교화>
  23.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백련사 결사운동의 성립과 불교관>
  24.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정혜결사의 취지와 창립 과정>
  25.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백련사 결사의 사회적 기반>
  26.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백련사 결사운동의 전개와 추이>
  27.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백련사 결사운동의 전개와 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