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베트남 전쟁냉전 시기 한국전쟁과 함께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충돌한 대표적인 전쟁이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분단된 남·북 베트남미국을 비롯한 서방권,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을 비롯한 동구권 양 진영의 군대들이 참전한 국제 전쟁이며 대한민국 국군역시 미군 다음으로 많은 수의 병력을 파견하며 참전한다. 전쟁은 미 국방부 기준으로 1955년 11월 1일에서 1975년 4월 30일까지 거의 20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며 북베트남과 남베트남간의 교전에서 시작되었으나 1964년 미군이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참전하면서 서방권 국가들의 참전이 이루어지며 전쟁은 국제전으로 번지게 된다.

이후 8년간 치열한 전쟁이 이어졌으며 미군은 압도적인 항공 전력과 지상군 전력을 전개하며 북베트남에 대한 공세를 이어갔지만 이후 전황은 점차 교착되며 미군 측에 피해가 누적되는 데다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전쟁 범죄로 인해 군사개입의 명분이 흐려지게 되었으며 결국 미군을 비롯한 서방권 군대들은 1973년 파리 평화 협정 체결 이후 철수가 이루어 졌으며 결국 1975년 사이공이 점령되며 베트남의 통일로 이 기나긴 전쟁은 끝나게 된다.

이 전쟁으로 인해 군인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민간인들의 피해가 발생했으며 불발탄이나 고엽제 살포등의 문제는 2000년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며 1970년대에 끝난 베트남 전쟁의 상흔이 이어지고 있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베트남의 독립[편집 | 원본 편집]

1887년부터 베트남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되어 있었고,[1] 프랑스는 식민지인들을 착취하고 베트남의 유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 식민지 정책을 단행했다.[2] 그래서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던 베트남인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일본태평양 전쟁을 시작하고 일본군들이 동남아로 들어오면서 프랑스인들이 일단 후퇴하게 되었다.

그렇게 베트남일본이 세운 괴뢰정부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1945년 일본의 항복이 다가오자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베트민이 정부를 붕괴시킨다. 그 뒤 1945년 9월 2일, 호찌민하노이바딘 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과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연합국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았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편집 | 원본 편집]

이후 북위 16도를 기준으로 북쪽엔 중화민국군, 남쪽엔 영국군이 주둔하며 전후 처리를 담당한다. 하지만 중화민국국공내전으로 인해 베트남에 병력을 주둔시킬 수 없었고, 영국도 식민지가 워낙 많다보니 베트남에만 집중할 수 없어 프랑스한테 넘겨주게 된다. 그렇게 북부에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3]이 형성되지만, 남부는 상대가 프랑스다보니 협의 하에 프랑스령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베트남에 독립 정부가 생기는 걸 인정하지 않았던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에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를 내세워 남베트남을 수립한다. 그러다 결국 프랑스가 하노이 근처의 항구도시인 하이퐁을 침공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베트남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면서 정글 지형을 활용한 게릴라전을 이어갔고, 거기다 1949년 설립된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으며 전투력을 키우게 된다.

이후 디엔비엔푸 전투가 시작된다. 프랑스는 디엔비엔푸가 완전히 오지라서 보급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베트민군은 민간인들을 동원해서 군수물자를 옮기고, 중기관총, 야포 등의 무기들을 부품 단위로 옮겨 산 정상에서 조립하며 디엔비엔푸에 군수물자를 집결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그렇게 프랑스군들을 성공적으로 공격하고 포위해서, 결국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낸다. 베트민이 승리하자 195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해 프랑스군은 베트남에서 완전히 물러나고,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북쪽에 북베트남으로 독립하게 됐다.

그러나 아직 프랑스가 세운 남베트남이 자리잡고 있었고, 제네바 합의를 통해 2년 내로 남북 총선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호찌민을 중심으로 베트민이 많은 지지를 받고 있던 상황이라, 총선거를 하면 베트민이 이기고 공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4]

이를 꺼려했던 서방 국가들은 남베트남을 지원하고 있었다. 남베트남의 실질적 정치를 맡았던 응오딘지엠[5]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총선거를 거부했고, 이에 호찌민은 남베트남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던 조직 베트콩을 지원하기로 한다.

진행[편집 | 원본 편집]

이후 응오딘지엠의 쿠데타로 완조가 붕괴하고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졌다. 이후 도미노 이론을 내세운 미국베트남에 개입하였으며,[6] 호찌민은 전쟁을 선포하며, 북베트남 해군이 미군을 공격하는 통킹만 사건이 벌어지자, 이를 빌미로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통킹만 사건 이후 3일 만에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보복공습을 선포한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것보다 훨씬 많은 폭탄을 북베트남 지역에 투하하였고, 막강한 화력과 인력을 동원하였다. 거기다 정글 지대라는 낯선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서 고엽제를 살포해 나무들을 썩어버리게 만들기도 했다.[7] 거기다 정작 공격해야 할 중요한 산업 시설은 중국 가까운 곳에 몰려있어서 행여 중국을 자극해서 3차 대전 일어날까봐 애꿎은 민가를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했다. 결국 베트남의 끈질긴 저항과 명분없는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 전 세계와 미국내의 반전 여론이 일어났다. 왜냐면 전쟁을 계속 이어갈 명분도 없을 뿐더러 성과도 나지 않고, 가족들은 불구가 되거나 죽어서 돌아오는 경우도 허다 하니까 프랑스에선 68 운동까지 일어나게 된다. 1968년 구정에는 북베트남대공세를 펼친다. 결국 중부 지역 전선을 대부분 상실하는 바람에 다시 되찾으려고 탈환전을 벌이는데, 이 때 종군 기자들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찍은 사진이 퓰리처상을 받는다.

반전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버틸 수 없던 미국린든 존슨은 재출마를 포기하고, 1969년리처드 닉슨으로 대통령이 바뀌며 베트남 전쟁에서 손을 떼려고 했다.[8] 하지만 남베트남은 미국 없인 살 수 없는 나라였고, 미국이 철군한 사이에 북베트남이 처들어올 걸 염려한 남베트남은 1973년 파리 협정을 맺게 된다. 그렇게 미군은 베트남에서 철군하고 전쟁은 끝이 나게 된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그러나... 1975년북베트남이 파리 협정을 위반하며 침공하자 남베트남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같은 해 4월 30일에는 사이공을 점령하였고, 사이공과 지아딘 성 등의 지역을 합쳐 호찌민시로 개명시킨다. 그리고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베트남은 완전히 공산 국가가 되어버린다.

참전 국가[편집 | 원본 편집]

북베트남[편집 | 원본 편집]

남베트남[편집 | 원본 편집]

창작물[편집 | 원본 편집]

영화[편집 | 원본 편집]

뮤지컬[편집 | 원본 편집]

음악[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사실 코친차이나가 베트남 남부에 있었는데,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장해서 만든 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다만 영국령인 인도와 직접 안 닿기 위한 완충 지대로서 태국은 포함되지 않았다.
  2. 땅을 빼앗아 프랑스인 대지주한테 주고, 기존 농민들에게는 엄청난 세금과 소작료를 매겼다. 또한 프랑스식 교육을 진행하고 로마자 표기인 꾸옥응으를 배포했다.다만 꾸옥응으를 배포해서 인쇄, 출판이 활발해지고 독립운동에 도움을 주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3. 다른 말로 북베트남, 또는 월맹(베트민)이라고 하기도 한다.
  4. 지주들과 자본가들의 수탈을 받으면서 자본가들에 대한 반발이 심했던 상황에 공산주의가 큰 지지를 얻었고, 호찌민은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세우며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5. 남베트남의 국가원수였던 응우옌 왕조의 바오 다이는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고, 1954년부터 실질적인 정치는 응오딘지엠이 하고 있었다. 응오딘지엠은 완강한 반공주의자라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것이다.
  6. 이에 관여했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을 당하며 린든 B. 존슨이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7. 고엽제가 인체에도 해로워서 월남전 참전자들도 고엽제로 인한 피해를 호소하기도 했다.
  8. 이 때 호찌민은 사망하지만, 비밀 작전과 전투로 전쟁을 계속 이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