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토 무솔리니

Lolcat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11월 21일 (수) 19:35 판 (→‎생애)

베니토 아밀카레 안드레아 무솔리니(Benito Amilcare Andrea Mussolini)는 이탈리아의 정치가, 파시스트 당 당수이다.

생애

1883년 7월 29일, 이탈리아의 포를리 근교의 프레다피오 마을에서 사회주의 성향인 가난한 대장장이였던 아버지 알렉산드로와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 로자 말트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알렉산드로는 열렬한 사회주의자로 아들에게 멕시코의 초대 대통령이며 독립영웅인 베니토 후아레스, 사회주의 혁명가인 아밀카레 코스타, 이탈리아 사회당의 안드레아 코스타의 이름을 따서 베니토 아밀카레 안드레아 무솔리니라고 붙여주었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그가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물론 초기에는 카톨릭 학교에 가고나서 사범 학교에서 졸업한 후 교사가 되었지만 그만 두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16세 때 성경험으로 인해 여성 편력이 복잡해졌다고 한다. 이후 그는 사회당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처음에는 참전을 반대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참전을 주장해 사회당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참전을 찬성한 그는 직접 참전하다가 사고로 부상당했다. 그러다 국가 파시스트 당을 만들어 1921년 11월에 무솔리니는 통령에 취임했다. 이리하여 1943년 동안 파시스트 당에 의해 통치 하게 되었다. 1924년~1939년까지 무솔리니는 폰티네 습지의 개간과 같은 공공사업과 대중교통을 위한 기반시설 확충 등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고 경제를 성장시키는 성과를 보였으며 이탈리아 제국 전반의 경제적 안정을 실현하였다. 또한 라테란 조약을 통해 바티칸 시국을 확정하고 교황청과의 문제도 해결하였다.[1] 그러나 선거법 개정을 통한 권력의 장악, 노동조합의 해산, 언론출판 규제, 정적과 공산당 탄압 등으로 독재 정치를 강화했다.

1935년 10월 3일에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여기서 이탈리아군은 당시 사용이 금지된 독가스를 에티오피아에서 사용했는데 국제연맹의 추궁을 받게 되자 결국 이에 반발한 무솔리니는 국제연맹을 탈퇴하게 되었다. 1936년 7월 18일에 터진 스페인 내전에도 개입했다. 그러다 히틀러와 관계를 맺고 이탈리아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에 대한 인종차별정책을 실시했지만 오랫동안 무솔리니와 육체적 관계를 맺었던 마르게리타 사라팟티가 유대인이라서 이탈리아에서는 독일같이 강한 통제와 유대인의 탄압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배할 것이 확실해지자, 1940년 6월 10일 영국·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이 해 9월 27일에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삼국동맹이 체결되자 이탈리아는 추축국의 일원으로서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전투는 당시 지리적으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와 주변 위성국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지만 공업력이 떨어졌던 이탈리아 왕국군은 장비와 물자 면에서 연합군과 큰 격차를 보였다. 소말리아의 점령과 케냐, 이집트, 수단으로의 침공 및 그리스 침략은 승리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정체상태에 빠졌고 독일의 요청에 의해 이집트로 출격했지만 영국군에게 패해 무솔리니의 전쟁지휘 능력은 생각보다 난관에 직면하고 말았다. 덕택에 무솔리니는 국민과 정치가들에 대한 위신을 잃고 1943년 7월에 연합군이 시칠리아를 점령하자 정부 내에서는 무솔리니의 비판이 본격화되어 군부뿐만 아니라 파시스트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고립되어 버렸다. 덕택에 7월 25일에 실각한 무솔리니는 헌병대에 체포되어 감금되었는데 후임으로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가 수상직을 이어받아 신정부를 구성하지만 1943년 9월 8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아페닌 산의 그랑 삿소 호텔에 감금되어 있던 무솔리니는 1943년 12월, 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나치 친위대의 오토 스콜체니 중령에게 구출되어 감금상태에서 풀려났다. 그 후 독일이 지배한 북부 이탈리아에서 독일의 지원을 받은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사회공화국(RSI)의 수립을 선언했지만 RSI군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패배하자 빨치산들과 게릴라, 레지스탕스들이 차례로 파시스트 당원들을 학살했다.

무솔리니는 망명을 시도하다가 레지스탕스에게 체포되어 1945년 4월 28일 애인 클라렛타 페타치와 함께 총살당했다. 무솔리니가 죽은 후 충격을 받은 히틀러는 자살을 결심하게 되었다.

여담

  • 건강관리에 철저하여 매일 아침마다 체조를 했으며 생선 외 육식은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 자동차 매니아라서 국제레이스 대회에 자국의 자동차 메이커들을 대거 출진시켰다. 덕택에 이탈리아 자동차 산업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한다.

가족

  • 알렉산드라 무솔리니: 손녀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