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토 무솔리니

베니토 아밀카레 안드레아 무솔리니(Benito Amilcare Andrea Mussolini)는 이탈리아의 정치가, 파시스트 당 당수이다.

생애

태생과 사회주의

1883년 7월 29일, 이탈리아의 포를리 근교의 프레다피오 마을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였던 아버지 알렉산드로와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 로자 말트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알렉산드로는 열렬한 사회주의자로 아들에게 멕시코의 초대 대통령이며 독립영웅인 베니토 후아레스, 사회주의 혁명가인 아밀카레 코스타, 이탈리아 사회당의 안드레아 코스타의 이름을 따서 베니토 아밀카레 안드레아 무솔리니라고 붙여주었다.

무솔리니는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9살때 엄격한 가톨릭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교사를 지망해 사범학교에 입학해 우수한 졸업 성적으로 졸업했다. 1901년에 임시교사로 교편을 잡았지만 병역을 기피하고자 스위스로 건너갔다. 그러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비서 안젤리카 발바노프와 친교를 가져 레닌으로부터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배우게 되었다. 이후 무솔리니는 본격적인 정치활동에 뛰어들어 1904년에 이탈리아 사회당에 입당했다. 농민권익 운동으로 몇 번이나 체포되었지만 활동을 계속 이어나가 당내의 거두로 올라섰다. 그러면서 민족주의적인 사회주의로 그 사상이 변화되었다.

사회주의에서 파시스트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처음엔 당의 방침에 따라 중립을 지지했지만 내심 전쟁의 참전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로 인해 사회당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탈리아가 비밀협정에 의해 참전을 선언하자 무솔리니도 다른 참전론자들과 같이 지원병으로 종군했다. 그는 스스로 원해 최전선으로 가서 용맹히 싸워 중사까지 승진했지만 수류탄 폭발사고로 중상을 입어 후방으로 후송되어 전쟁터에서 물러났다.

1차대전 후 이탈리아 국내의 혼란과 사회주의 운동의 고양에 위기감을 느낀 무솔리니는 퇴역군인과 구 참전론자들을 집결시켜 1919년 3월 23일에 밀라노에서 〈전투자 파쇼〉를 조직하여 사회당과 공산당과 대립하며 무력충돌을 반복했다. 전투자 파쇼는 훗날 <국가 파시스트당>의 토대가 되었다.

1920년 9월, 혁명세력의 퇴조로 무솔리니는 <검은 셔츠대>라 불린 행동대를 조직하여 세력을 확장해 나가 1921년까지 이탈리아 북부 및 중부를 장악하는 거대조직으로 발전해 25만명의 당원을 두고 선거에 참가해 35석을 획득했다. 1921년 11월의 로마 대회에서 <국가 파시스트당>으로 조직을 개조한 무솔리니는 총재에 취임했다. 그리고 1922년 10월 28일에 자신의 행동대를 모아 로마로 진군했다. 당시 국왕이던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3세는 실추되어 가던 왕권을 지키기 위해 무솔리니에게 내각조직을 명령하여 1943년까지 약 20년 간 이탈리아 왕국은 파시즘 국가가 되었다.

1924년~1939년까지 무솔리니는 폰티네 습지의 개간과 같은 공공사업과 대중교통을 위한 기반시설 확충 등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고 경제를 성장시키는 성과를 보였으며 이탈리아 제국 전반의 경제적 안정을 실현하였다. 또한 라테란 조약을 통해 바티칸 시국을 확정하고 교황청과의 문제도 해결하였다. 그러나 선거법 개정을 통한 권력의 장악, 노동조합의 해산, 언론출판 규제, 정적과 공산당 탄압 등으로 독재 정치를 강화했다.

1939년 5월 22일, 무솔리니는 사위인 치아노 외무장관의 반대를 무시하고 강철협약이라 일컬어지는 독일-이탈리아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독일과 종속적인 우호관계를 맺었다. 그래서 이탈리아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에 대한 인종차별정책을 실시했지만 오랫동안 무솔리니와 육체적 관계를 맺었던 마르게리타 사라팟티가 유대인이라서 이탈리아에서는 독일같이 강한 통제와 유대인의 탄압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추축국과 패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배할 것이 확실해지자, 1940년 6월 10일 영국·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이 해 9월 27일에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삼국동맹이 체결되자 이탈리아는 추축국의 일원으로서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전투는 당시 지리적으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와 주변 위성국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지만 공업력이 떨어졌던 이탈리아 왕국군은 장비와 물자 면에서 연합군과 큰 격차를 보였다. 소말리아의 점령과 케냐, 이집트, 수단으로의 침공 및 그리스 침략은 승리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정체상태에 빠졌고 독일의 요청에 의해 이집트로 출격했지만 영국군에게 패해 무솔리니의 전쟁지휘 능력은 생각보다 난관에 직면하고 말았다.

덕택에 무솔리니는 국민과 정치가들에 대한 위신을 잃고 1943년 7월에 연합군이 시칠리아를 점령하자 정부 내에서는 무솔리니의 비판이 본격화되어 군부뿐만 아니라 파시스트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고립되어 버렸다. 덕택에 7월 25일에 실각한 무솔리니는 헌병대에 체포되어 감금되었는데 후임으로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가 수상직을 이어받아 신정부를 구성하지만 1943년 9월 8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아페닌 산의 그랑 삿소 호텔에 감금되어 있던 무솔리니는 1943년 12월, 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나치 친위대의 오토 스콜체니 중령에게 구출되어 감금상태에서 풀려났다. 그 후 독일이 지배한 북부 이탈리아에서 독일의 지원을 받은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사회공화국(RSI)의 수립을 선언했지만 RSI군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패배하자 빨치산들과 게릴라, 레지스탕스들이 차례로 파시스트 당원들을 학살했다.

무솔리니는 망명을 시도하다가 레지스탕스에게 체포되어 1945년 4월 28일 애인 클라렛타 페타치와 함께 총살당했다. 무솔리니가 죽은 후 충격을 받은 히틀러는 자살을 결심하게 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