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공화국/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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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초기==
베네치아에 최초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5세기 경으로 추측된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건국 설화에 따르면 로마 말기 야만인들의 침공으로 벌벌 떨던 마을 주민들이 그 도시 신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때 신부가 하느님께 도움을 요청하자 하느님이 개펄로 도망치라고 했고, 그 마을이 그렇게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697년 최초로 도제<ref>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도자 명칭</ref>로 파올로 루치오 아나페스토를 선출하였다.
베네치아에 최초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5세기 경으로 추측된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건국 설화에 따르면 로마 말기 야만인들의 침공으로 벌벌 떨던 마을 주민들이 그 도시 신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때 신부가 하느님께 도움을 요청하자 하느님이 개펄로 도망치라고 했고, 그 마을이 그렇게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697년 최초로 도제<ref>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도자 명칭</ref>로 파올로 루치오 아나페스토를 선출하였다.


==초기 중세==
==초기 중세==
[[파일:Republik Venedig.png|250px|섬네일|서기 [[1000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
[[파일:Republik Venedig.png|250px|섬네일|서기 [[1000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
810년에 베네치아에 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서로마 제국<ref>오도아케르의 멸망 이후에 세워진 서로마 제국을 의미한다.</ref>의 황제인 피핀이 침입해 온다. 당시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에 존재하는 마지막 동로마 제국령이었다. 육지와 가까운 편이었던 베네치아의 수도<ref>당시의 수도와 지금의 수도는 위치가 달랐다.</ref>를 점령하고 그들을 추적하였으나.... 베네치아의 복잡한 개뻘에 갇히고만 함선들은 결국 화살 공격을 받고 모두 불타버린다. 그 뒤 베네치아 공화국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덤.
810년에 베네치아에 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서로마 제국<ref>오도아케르의 멸망 이후에 세워진 서로마 제국을 의미한다.</ref>의 황제인 피핀이 침입해 온다. 당시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에 존재하는 마지막 동로마 제국령이었다. 육지와 가까운 편이었던 베네치아의 수도<ref>당시의 수도와 지금의 수도는 위치가 달랐다.</ref>를 점령하고 그들을 추적하였으나.... 베네치아의 복잡한 개뻘에 갇히고만 함선들은 결국 화살 공격을 받고 모두 불타버린다. 그 뒤 베네치아 공화국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덤.

2015년 7월 14일 (화) 00:18 판

다음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697년부터 1797년까지 대략 천년 이상 존속한 국가로 역사가 깊다.

초기

베네치아에 최초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5세기 경으로 추측된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건국 설화에 따르면 로마 말기 야만인들의 침공으로 벌벌 떨던 마을 주민들이 그 도시 신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때 신부가 하느님께 도움을 요청하자 하느님이 개펄로 도망치라고 했고, 그 마을이 그렇게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697년 최초로 도제[1]로 파올로 루치오 아나페스토를 선출하였다.

초기 중세

서기 1000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

810년에 베네치아에 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서로마 제국[2]의 황제인 피핀이 침입해 온다. 당시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에 존재하는 마지막 동로마 제국령이었다. 육지와 가까운 편이었던 베네치아의 수도[3]를 점령하고 그들을 추적하였으나.... 베네치아의 복잡한 개뻘에 갇히고만 함선들은 결국 화살 공격을 받고 모두 불타버린다. 그 뒤 베네치아 공화국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덤.

1000년 그리스도 승천일에 출발하였으며, 도제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가 이끄는 베네치아 함선들은 과거부터 베네치아를 꾸준히 괴롭혀 왔던 아드리아해 연안의 해적들을 소탕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대한 치하로 동로마 제국은 베네치아의 도제에게 달마티아 공작위를 제공한다. 그 이후로 아드리아해 동안은 베네치아가 멸망할 때까지 베네치아령이 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시작한 축제가 바로 바다와의 결혼식으로, 이 역시 베네치아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된다.

십자군

십자군 이전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은 사실상 동지중해의 교역을 독점하여 엄청난 부를 쌓고 있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수백척의 베네치아 함선이 도시 내에 베네치아인 거류구를 얻는다는 조건으로 팔레스타인의 해양 도시를 점령하여, 그들을 돕기도 하였다.

그리고 1202~1204년의 제 4차 십자군 원정에서는... 악마와 계약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1.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와 교역 계약을 갱신하면서 숨은 조항으로 이슬람교도를 공격하거나 십자군에 참가하지 않는 다는 조항을 넣었다.
  2. 그 뒤 제 4차 십자군을 위해 프랑스의 제후들이 그들에게 접근해 왔고, 돈을 받고 그들을 당시 파티마 왕조가 점령하고 있던 예루살렘에 드랍해 주기로 한다.
  3. 제 4차 십자군이 그 돈을 못내고 있자[4]채무 기간을 유예해 준다는 조건으로 당시 가톨릭 교도였던 헝가리 왕의 통치하에 있는 자다르를 공격하게 했다. 다름아닌 십자군[5]
  4. 자다르를 점령한 뒤 동로마 제국에서 왕위 계승에서 밀린 왕자가 찾아온다.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부탁을 하는데 그 왕자가 부탁한 것은 다름아닌 같은 기독교도(정교회라 종파가 다르기는 했지만)이자 당시 유럽권 최대의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플의 공격
    • 도시 점령시 십자군이 베네치아에게 지고 있던 모든 빚을 동로마 제국이 대신 지불한다.
    • 도시 점령시 동로마 제국의 성지 수호를 위해 천 명가량의 기사를 십자군 국가에 파견한다.
    • 가톨릭과 정교회를 통합한다.[6]
  5.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콘스탄티노플의 육지 쪽은 대포 발명 전까지는 함락이 사실상 불가능하였지만 함선들을 이용해 금각만 쪽으로 공격한 것.
  6. 하지만 전임 황제가 돈을 흥청망청 써대서 빚 변제도 못하고, 군대도 못 보내고, 교회 통합은 사실상 불가능하였으니... 계약조건을 이행하지 않는 모습을 본 십자군은 베네치아 거류구와 군사 주둔지가 큰 화재를 당하자, 이를 명분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재점령 한다. 성 마르코 대성당 앞에 있는 네 마리의 청동말도 이때 가져온 것이다.
  7. 그 뒤 성립된 것이 라틴 제국. 제 4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베네치아는 크레타, 에우보이아, 코르푸 섬, 베네치아령 이오니아, 필로폰네소스 반도 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경쟁자였던 제노바나 피사 등의 나라를 동지중해 무역에서 격리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라틴 제국이 존속할 때까지 '동로마제국의 3/8의 주권자'란 칭호도 덤.
  8. 그렇게 베네치아는 동지중해의 여왕이 되었다.

15세기

15세기 초에는 이탈리아 내륙부와 달마티아 연안의 영토를 넓히는 데 주력했다. 밀라노 공국을 쳐서 포 강 연안을 따라 유럽행 교역로를 완성하는 한편, 헝가리가 내전에 휩싸였을 때 이스트리아 반도에서 알바니아에 이르는 아드리아해 동안을 장악하였다.

1489년, 십자군 왕국 중 하나였던 키프로스 왕국 전역을 흡수한다

15세기 말의 대 오스만 전쟁

1463년 필로폰네소스 반도 남단의 모도네에서 오스만 소속의 함선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오스만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아르고스[7]를 함락 당하였으나, 헝가리, 알바니아,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고 페라라 제후국의 에스테 후작을 고용하여 오스만을 공격한다.

하지만 1468년 알바니아 군의 지도자였던 스칸데르베그가 사망하고, 오스만군에 의해 1469년 베네치아의 영토였던 에우보이아가 함락된다.[8]

1472년에 사실상 용병화[9]되어 있던 헝가리 군이 오스만 제국과 강화 협상을 체결하였으며, 1473년에는 페르시아가 오스만에게 크게 깨지는 바람에 전선에서 탈출 하였다.

그 뒤 1474년에는 오스만군은 베네치아의 알바니아 거점이던 스쿠타리(오늘날의 알바니아에 위치한 슈코더르)[10]를 공격하나 실패한다. 동시에 이스켄테르베그가 이끄는 오스만군 기병대가 이탈리아 내륙부를 공격하여 프리올리(현 이탈리아의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 주)를 공격한다. 그 불길이 성 마르코 대성당의 종루에서 보일 정도였다고...

제 1차 스쿠타리 공방전 이후, 1475년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 간의 강화 협상이 진행되기 시작되었다. 처음에 그 결과로 6개월 간의 휴전 을 얻었으나, 그 도중에 오스만 제국이 흑해 연안의 타나(현재의 러시아 돈 강 삼각주에 위치했던 도시로 당시 베네치아령)[11], 카파(현재크림 반도에 위치한 페오도시야로 당시 제노바령)[12]가 오스만군에 함락되어 러시아-흑해 교역 루트가 막힘과 동시에 강화 역시 물 건너 가게 되었다. 1476년 헝가리가 재 참전하였다. 1477년에는 이스켄데르베그가 이끄는 오스만 기병대가 베네치아 본토 속령을 다시 유린하기 시작했으며 오스만군이 스쿠타리를 두 번째로 공격하나 실패하고 만다.

1477년 말 베네치아 공화국의 첩보는 중대한 정보를 얻었다. 이는 나폴리 왕국이 헝가리 왕국과 손을 잡아 오스만 제국과 강화에 나선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되면 아드리아해 서안을 장악하고 있는 나폴리 왕국에 의해 아드리아 해를 통한 교역이 막히게 되고, 또한 헝가리 왕국과 오스만 제국이 각각 에게 해 방면과 달마티아 방면으로 쳐들어오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과 단독 강화를 결정하게 된다. 협상은 1년 간 난항을 격었고, 중간에 오스만군이 다시 스쿠타리를 공격하였으나, 틀:날짜/출력 강화 협상이 타결되었다.

그 결과로 베네치아는

  1. 베네치아는 필로폰네소스 반도 내륙 지방, 에우보이아, 그리고 스쿠타리를 포함한 알바니아 지방을 오스만령으로 인정한다.
  2. 또한 오스만 제국은 코르푸, 모도네와 코로네(필로폰네소스 반도 남단에 위치한 도시, 각각 현재의 메소니와 코로니)[13]의 기지, 그리고 크레타를 포함한 에게 해 상의 섬을 제공한다.
  3. 베네치아는 과거 오스만령에서 발굴한 백반광의 전매료 미불에 대한 배상으로 15만 두카토 중 10만 두카토를 2년 이내로 분할상환으로 지불한다. 또한 관세[14]로 매년 1만 두카토를 지불한다.

엄청나게 굴욕적인 결과였다. 아직 빼앗기지 않았던 스쿠타리를 주어야 했고...[15]그리고 베네치아는 이교도와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욕을 오질나게 퍼먹는다. 자기랑 같이 평화협상을 준비하던 헝가리에게마저도. 그래도 베네치아로써는 동방 무역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었던 셈.

캉브레 동맹 전쟁, 키프로스 함락, 그리고 레판토 해전

1499년에서 1503년까지의 튀르크 제국과의 전쟁의 걀과로 코로네와 모도네를 상실하였으나 케팔로니아 섬[16]과 이타카 섬[17]을 얻었다.

그리고 1508년에 캉브레 동맹 전쟁이 발발한다. 기존의 로마냐 지방을 두고 교황령과 경쟁하다가 최악의 사태가 온 것이다. 돌린 적국만 해도 교황청,신성 로마 제국,.프랑스,스페인,페라라 공국 등. 당대 유럽의 슈퍼파워라 할 수 있는 나라들이 다 모여서 순식간에 베네치아는 본토 속령을 상실하였다.

그 뒤 베네치아가 외교력을 총 동원하여 먼저 아풀리아(현 이탈리아 풀리아 주)의 항구를 스페인에게 할양하여 전쟁에서 나가게 하였다. 그 뒤 교황청이 베네치아 공화국이 사라질 시 스페인과 프랑스가 교황청을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다시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는다. 그 결과 1509년에는 교황청,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를 공격하였고, 다시 본토 속령을 수복하게 된다.

그리고 1570년, 키프로스제 포도주가 너무나도 먹고 싶었던 셀림 2세는 당시 베네치아 령이었던 키프로스를 공격한다. 이에 넓은 키프로스에서 튀르크 군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 베네치아는 파마구스타[18]를 중심으로 방어에 나선다. 그 뒤 유럽 국가들과 함께 신성 동맹[19]을 발족하여 터키를 공격한다. 주요 국가는 스페인과 베네치아 공화국, 그리고 교황청인데, 목표[20], 함대장[21], 함대수[22]로 대립하였고, 그 와중에 파마구스타가 함락되고 말았다. 2개월 후 오스만 해군을 레판토에서 무찌르기는 하지만 스페인에게 완전히 질려버린 베네치아는 튀르크와 단독으로 강화한다.

1575년에는 베네치아 전역에 흑사병이 돌아서 17만 5000명에 이르는 인구가 1581년에는 12만 4000명까지 줄어들게 된다. 이후 베네치아의 인구는 다시 수복하지 못하였다.

17세기

17세기 초에는, 주교가 베네치아 안에서 가지는 지위를 두고 교황청과 대립하게 된다. 당시 반종교개혁의 바람이 가톨릭 세계에서 불고 있었지만 베네치아는 세속적인 편에 속해 있었다. 예를 들면 종교재판소에 경우 판사 3명 중 1명은 성직자가 아닐 정도로 말이다. 당시 본토 속령에서 농업을 통해 세를 불리던 교회에 세금을 거둘려던 베네치아 공화국에 교황청은 베네치아에 성무 금지 명령을 내린다. 이에 베네치아는 강제로 성직자 들에게 성무를 하게 하는 것으로 응수하였고, 이 대립은 베네치아가 세금을 '소극적'으로 걷는 것으로 끝이 났다.

지중해 최후의 성채, 크레타

1644년 몰타 기사단이 동지중해에서 해적질을 한 뒤 크레타 남단에서 잠시동안 정박하고 간 것이 발단이 되어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당시 크레타는 동지중해(아드리아해를 제외한)의 최후의 기독교계 거점이었으며,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전략적 중요성은 매우 높았었다. 또한 베네치아 역시 이를 알았기에, 크레타에는 베네치아가 최대한 할 수 있는 방위시설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1645년 6월, 몰타 기사단을 치는 것처럼 꾸민 튀르크 함대가 크레타에 상륙하였다. 상륙지점에 있던 성 토데로 요새는 이를 공격하려고 달라붙은 터키군 500명과 함께 폭☆발함으로써 15년간 이어지는 크레타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8월 22일에는 칸니아(현 하니아)[23]가 함락되었다. 그 뒤 크레타를 차례차례로 정복하여 베네치아에게 남은 요새는 스피날롱가[24]와 수다[25] 그리고 그람보우사[26], 마지막으로 칸디아(현 그리스의 이라클리오)[27]만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요새들은 끝끝내 함락되지 않았다.[28]

한편 유럽에서는 30년 전쟁이 끝나고 지중해에서 싸우고 있던 베네치아가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럽에서는 스웨덴에서 몰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모여들었고, 또한 크레타를 지키기 위해 베네치아의 자유민들 역시 자원해서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몰타 기사단, 토스카나, 그리고 베네치아가 자체 보유한 함선들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였으며, 유럽의 주요 왕가에서는 기부금을 보내왔다. 한편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튀르크군은 베네치아령 달마티아를 공격한다. 하지만 크레타와 달리 주민의 지원을 무한정으로 얻을 수 있었던 달마티아에서는 되려 영토를 얻기까지 한다.

한편 칸디아에서는 1648년 5월부터 공성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요새에서는 매우 치열한 전쟁이 지속되었는데, 튀르크군에게는 이런 소문이 돌 정도로 매우 치열한 전투였다.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들은 저 요새 안의 사람만이 아니다. 그 동안의 전쟁에서 죽은 베네치아 사람들이 유령이 되어서 저 요새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29]

그럼에도 불구하고 1669년 9월, 이 성채의 수비대장이었던 프란체스코 모로지니는 '이 전쟁이 계속되어서 베네치아가 이기더라도 베네치아가 입을 피해가 더 클 것'[30]이라는 생각으로 오스만 제국에 항복한다. 처음에 시작할 때 민간인 포함 22,000 명 정도되던 요새 내부의 인구는 3,600명 정도로 줄어 있었다. 참고로 이는 베네치아에서 야전 지휘관이 독단적으로 강화를 추진한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로 베네치아는

  1. 수다, 스피날롱가, 그리고 그라보우사를 제외한 크레타 전역을 튀르크군에게 양도한다. 단 위의 3 요새는 연공금을 바칠 필요 없이 유지되는 베네치아의 고유한 권리이다.
  2. 또한 베네치아가 달마티아에서 얻은 영토 역시 베네치아령으로 인정한다.

모레아 전쟁

크레타 전쟁이 끝나고 15년 뒤 1683년에는 크레타 전쟁 당시 칸디아의 수비대장이던 프란체스코 모르시니를 베네치아 해군사령관으로 선출하였다. 그 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폴란드랑 동맹을 맺고 터키 제국을 공격한다. 당시 유럽 쪽 국경에 전력을 집중하던 터키는 에게 해 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맥을 못 추렸다.

1684년 8월에 산타 마우라 섬(현 그리스 레프카타 섬)[31]을 점령한 뒤 차례로 프레베자[32]와 보니차[33]를 차례대로 되찾는다. 그 뒤에 모레아(현재의 필로폰네소스 반도)를 향해 발을 돌리는데, 1685년에는 모레아 남단의 모도네와 코로네를 되찾는데 성공하였으며, 같은 해에는 아르고스와 나우플리온(현 그리스의 나플리오)[34]를 다음 해에는 모레아에 위치했던 베네치아의 기지를 수중에 두는데 성공하였다. 모로시니가 이끄는 베네치아 군은 계속 전진하여 파트라스(현 그리스의 파트라)[35]를 함락하고 레판토도 되찾으며, 코린토도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1687년 8월 이 승리를 보고하기 위해 돌아온 모로시니에게 국회 심의를 중지하고 의원 전원이 마중을 나가는 전례 없는 기쁨을 보여주었을 정도다.심지어 이때야말로 에우보이아와 크레타 섬도 되찾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결국에는 다 일장춘몽이었지만

모르시니 군의 진격은 멈추지 않아서 미스트라[36]를 정복하고 스파르타를 수중에 넣는데 성공한다. 1687년 9월에는 아테네마저 손에 넣는데 성공한다.[37]

1688년 3월에는 모로시니가 베네치아의 도제로 선출되었고, 그 전에는 필로폰네소스인[38]이라는 칭호를 주었을 정도로 베네치아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여겼다.[39]

전쟁은 1699년에 카를로비치 조약으로 인해 끝나서 필로폰네소스 반도 전역을 베네치아가 손에 넣는 걸로 끝난다.

쇠퇴 및 멸망

1796년의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는 결국 일장춘몽으로 끄탄게 된다. 1714년 시작된 전쟁으로 카를로비치로얻었던 땅을 다 잃었을 뿐 만 아니라 크레타의 수다와 스피날롱가 등의 크레타 쪽 영토도 잃게 된 것이다. 그리스에서 모든 발판을 잃은 베네치아는 그나마 코르푸 섬 공방전으로 아드리아 해를 베네치아의 만으로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점은 알바니아와 달마티아 쪽에서 영토를 늘릴 수 있었다는 점?

그 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베네치아군은 당시 질적이나 양적으로(특히 육군은)매우 뒤떨어져서 베네치아가 비무장 비동맹을 펴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만들었다. 1797년에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공화국군이 침공하였고, 중과부적이라 여긴 베네치아는 항복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캄포 포르미오 조약에 의해 본토 대부분과 그리스의 섬은 프랑스에게 본토 일부와 달마티아, 이스트리아 지방, 그리고 베네치아 시가는 오스트리아에게 넘어가게 된다.

멸망 이후

1814년에 베네치아 전역이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가 되며, 1866년에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게 양도한다. 같은 해 11월에는 통일된 이탈리아의 일부로 편입된다.

그리고 현재 2014년에 유럽 전역에 불어 닥친 분리독립의 바람이 베네치아에도 미쳤다. 이탈리아가 경제적으로 좆망하고, 북부 지방이 상대적으로 가난한 남부 지방에 돈을 갖다 받힌다는 생각도 있어서 그런 듯. 2014년의 조사에 의하면(스코틀랜드의 것처럼 공식적인 것은 아니며, 또한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베네토 주[40] 주민 전체 중 69.7%가 투표하여 약 88%가 찬성한다고 나왔다.[41]

각주

  1.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도자 명칭
  2. 오도아케르의 멸망 이후에 세워진 서로마 제국을 의미한다.
  3. 당시의 수도와 지금의 수도는 위치가 달랐다.
  4. 그 돈의 량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프랑스 쪽에서 쪽수 계산 - 왕 급의 제후가 여러 명 참가한다지만 프랑스 왕이 동원 가능한 군데의 몇 배 가량은 되었다. - 을 잘못해서 생각보다 사람들이 덜 오자, 자연스럽게 낼 수 있는 돈이 줄어들었고, 그 결과 베네치아 인근의 섬에 틀여 박힌 채로 십자군이 공중해체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5. 이때 교황 특사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은 아무것도 아닌 정보를 주고 로마로 보낸 뒤에 목적지를 알려주지도 않고 떠나버렸다. 찾아오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6. 이 때문에 자다르를 점령하자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을 파문에 처한 교황도 이때에는 다른 가톨릭 도시를 점령하지 않는 조건으로 허가한다. 가는 길에 가톨릭교도의 도시는 없었으니 사실상 아무런 조건도 없었던 셈
  7. http://ko.wikipedia.org/wiki/아르고스
  8. 이때 베네치아의 수뇌부가 받았던 타격은 꽤나 되었었다.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적에게 오는 보급을 막음과 동시에 요새에 틀어박혀 방어전 때리면 상대가 먼저 GG하리라고 생각했었지만, 해군이 아무것도 못하고 후퇴만 하자, 그대로 함락되어 버린 것. 그때 해군 제독은 종신 추방형 및 전 재산 몰수를 받았다.
  9. 당시 헝가리는 이슬람 교도 침략을 막는 방파제라는 명목하에 베네치아와 교황청이 받는 돈으로 정예화되어 있었다.
  10. http://ko.wikipedia.org/wiki/슈코더르
  11. http://en.wikipedia.org/wiki/Tanais
  12. http://ko.wikipedia.org/wiki/페오도시야
  13. http://en.wikipedia.org/wiki/Methoni,_Messenia
    http://en.wikipedia.org/wiki/Koroni
  14. 사실상의 연공금이었다.
  15. 이때 스쿠타리 인들은 베네치아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로 가서 정착한다.
  16. http://ko.wikipedia.org/wiki/케팔로니아_섬
  17. http://ko.m.wikipedia.org/wiki/이타카
  18. http://ko.wikipedia.org/wiki/파마구스타
  19. 베네치아 공화국, 스페인, 제노바 공화국, 토스카나 대공국, 우르바노 공국, 몰타 기사단, 사보이 공국, 교황청
  20. 스페인의 북아프리카와 베네치아의 키프로스 구원이 대립하여 결국 튀르크 함대의 격멸로 결정 되었다.
  21. 스페인은 그들의 용병대장인 안드레아 도리아를, 베네치아는 또 그들의 해군제독인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를 추천하였고, 교황청은 대안으로 자기네 마르칸토니오 콜론나를 추천하였고, 결국 오스트리아 공 돈 후안으로 결정되었다.
  22. 당장 급하던 베네치아는 자기네 조선소를 총동원 하여 목표량을 맞추었으나 스페인은 당초 약속의 절반만 가지고 왔다.
  23. http://ko.wikipedia.org/wiki/하니아
  24. http://en.m.wikipedia.org/wiki/Spinalonga
  25. http://en.m.wikipedia.org/wiki/Souda_(island)
  26. http://en.m.wikipedia.org/wiki/Gramvousa
  27. http://ko.m.wikipedia.org/wiki/이라클리오
  28. 단 칸디아는 제외, 칸디아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나게 된다.
  29. 15년간 평생을 바쳐 싸워서 옷도 다 헤이해지고, 몰골 역시 유령 비슷하게 변할 정도였다는 의미로 해석가능하다.
  30. 당시 전쟁에 쓰던 돈은 베네치아 전체 세입을 넘었었다.
  31. http://ko.wikipedia.org/wiki/레프카다
  32. http://ko.wikipedia.org/wiki/프레베자
  33. http://en.wikipedia.org/wiki/Vonitsa
  34. http://ko.wikipedia.org/wiki/나플리오
  35. http://ko.wikipedia.org/wiki/파트라
  36. http://en.wikipedia.org/wiki/Mystras
  37. 이때 베네치아인이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공성하던 중 터키군이 파르테논 신전에 화약을 보관히 두었고, 베네치아 군의 대포가 명중하여 파괴되고 말았다.
  38. 로마 원로원이 대 스키피오에게 주어준 칭호인 아프리카누스(아프리카인)를 생각하면 편하다.
  39. 참고로 그는 1694년 나우폴리온 근처에서 죽는다.
  40. 구 베네치아령 본토 중 일부
  41. http://en.m.wikipedia.org/wiki/Venetian_independence_referendum,_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