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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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一圭. 호는 약산(藥山).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0년 3월 11일 평안남도 증산군 성도면 오화리에서 태어났다. 훗날 백일규 본인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 기와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로 볼때 그는 어린 시절에 유복한 환경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7살 때부터 서당을 다녔고 20세까지 한학을 배우고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가 하와이로 이주하기 전에 국내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의 흥사단 입단 이력서에는 그가 ‘백도접주(白道接主)’라는 단체에 속해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그가 동학에 입도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어떤 경위로 동학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던 1905년, 백일규는 공립학교 교원이었던 강명화를 통해 하와이에 대해 듣게 되고 강명화를 따라 하와이로 떠났다.

하와이에 도착한 백일규는 곧 에와(Ewa)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에 배치되어 고된 노동을 했고 하와이의 한인단체인 '에와친목회'에 가입했다. 에와친목회는 1905년에 윤병구, 정원명, 강영소 등이 결성한 단체로, 단순히 친목만을 위해 조직된 것이 아니라 조선의 국권 상실에 대해 논의하고 방책을 고안하는 곳이었다. 이후 백일규는 1년간 하와이에서 일하다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미국 본도로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샌프란시스코로 향한 그는 그곳을 중심으로 각종 농장이나 광산, 철도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미주 지역의 대표적인 국권회복운동 단체인 대동보국회 창단에 가담해 장경, 이병호, 문양목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대동보국회는 1907년 1월 국민계몽과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공립협회와 함께 미주의 대표적인 민족운동 단체로, 교육과 실업, 자치라는 실력양성론을 내세우면서도 황제권의 강화를 통해 국권회복을 추구하는 보황적 성격도 갖고 있었다.

1908년, 백일규는 대동복국회 중앙회장을 맡았으며 회의 기관지인 <대동공보>의 주필이 되었다. 이무렵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일로 두 의사가 법정에 서게 되자, 백일규는 7인의 전권위원회에 참여하여 의사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이후 네브라스카주로 이주하여 영어를 배웠고, 1909년부터 1911년까지 대학 예비과에 다닌 뒤 1912년에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 입학했다. 입학 후 학업을 열심히 수행하던 그는 1913년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 사로부터 주필로 와달라는 초빙을 받고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1년간 <신한민보>사의 주필을 맡았다. 그 후 다시 버클리 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는 동시에 건물 관리인으로 일하며 매달 19달러를 받았다.

1918년 한국인 최초로 버클리대학을 졸업한 백일규는 1919년 3월부터 <신한민보>에 '한국경제사'를 연재했고 다음해 2월 8일 2.8 독립선언 1주년 기념일에 맞춰 연재한 칼럼을 모아 책으로 발행했다. 백일규 저서 <한국경제사>는 최초의 한국경제사 서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그는 서문에서 자신의 저술이 국가 독립에 있음을 밝혔다.

국가의 경제사는 그 국가의 정치사 보다 더 필요한지라. 정치의 혁명을 먼저 한 법국 보다 공업의 혁명을 먼저 한 영국이 오늘날 세계적 국가를 이루었고 민사형법을 먼저 발전한 법국 보다 통상상법을 먼저 발전한 영국이 오늘날 세계의 상권을 잡은 즉, 이것만 보아도 어느 것이 더 필요한 지 가히 알지라(…)우리의 경제역사를 더 연구하여 발전시키면 우리국민의 경제적 교육과 경제적 독립에 관건이 될까 하여 인하여 국가독립이 신속히 성취되며 영원 무궁할까 하노라.

한편, 백일규는 학업 중에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대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총회장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3.1 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3월 9일에 전해지자, 국민회 총회장 안창호는 곧바로 사무실에 나가 임시의장을 맡고 있던 백일규와 함께 대한독립선언의 후원의 방침에 대해 논의했다. 백일규는 안창호를 도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국민회관이나 예배당에 모여 후속대책을 협의했다. 안창호가 상하이에 마련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석하기 위해 상하이로 간 뒤, 백일규는 미주지역에서의 3.1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미국, 하화이, 멕시코 지역 일대의 독립운동을 통솔하며 각국 수상들에게 호소 편지를 쓰고 일본 상품 배척운동 및 한인 인구등록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백일규는 1926년부터 1933년까지 8년간 북미지방 총회장 겸 신한민보사 사장 겸 주필을 맡았다. 그러던 중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발발하자, 재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에 백일규는 이들을 포섭해 국민회에 끌어들임으로서 안창호가 떠난 뒤 갈수록 활동이 부진해지고 보수적 성격이 강화되는 국민회에 활력을 불어넣으려 했다. 그러나 국민회를 장악한 보수계 인사들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백일규는 국민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한인들이 거의 살지 않는 캔자스 시로 이주하여 동양상품 겸 야채가게를 경영하면서 조용히 살았고, 간간히 진보적인 견해를 <신한민보>에 기고하며 국민회의 보수파 인사들을 비판했다.

그러던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에 참여했다. 조선혁명당 미주총지부는 1942년 6월 3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조선의용대 후원회 연합회가 정치단체로의 변화를 기도하여 결성된 단체이다. 미주지역에서 진보적인 인사들 가운데는 적극적인 군사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추진하고자 하였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의용대 후원회연합회가 조직되었다. 그 후 민족혁명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참가하고 조선 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참가하자, 조선의용대 후원회 연합회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로 개편되었다. 미주총지부는 1943년 기관지로 <독립>이라는 신문을 발간했는데, 백일규는 이 신문의 발기인이자 주요 논객이 되었고 1945년 6월에는 <독립>의 사장 겸 총무로 활동했다.

1945년 8.15 광복이 찾아왔다. 이듬해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 <국민보>의 주필로 초빙을 받게 된 그는 하와이로 이주해 <국민보>의 주필로서 재미 동포들을 위해 여러 칼럼을 기고했고, 조국의 동포들을 도울 방안도 보색했다. 4년 후 70대가 넘은 그는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갔고, 국민회 중앙감찰위원을 맡아 미주 한인사회를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신한민보>에 지속적으로 글을 기고했다. 그러던 1962년 5월 31일, 백일규는 사망했다. 향년 82세. 그의 유해는 로즈데일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2002년 9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백일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