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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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

개요

백두산(白頭山)은 현무암질 마그마와 조면암질 마그마가 반복적으로 분출하여 생성된 휴화산[1]이다. 북한과 중국간 국경선 사이에 있으며 높이는 해발 2744 m이다. 백두산 관련 3국인 한국, 북한, 중국 자료에서 백두산의 해발고도에 대해 서로 말이 달라서 남한은 2744 m, 북한은 2750 m, 중국은 2749.2 m라고 하는데, 세 나라에서 사용하는 측량의 수준원점이 달라서 그렇다.[2] 산 정상에는 천지(天池)라는 거대한 칼데라호(湖)가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영토 문제

법적 행정구역은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북한의 행정구역으로는 량강도 삼지연군),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으로는 지린 성에 속한다.

파일:영토

백두산도 미래에 영토분쟁이 될 만한 소지가 있다. 북한과 중국은 1964년 조중변계조약으로 지금의 국경선을 결정하였으나, 아직도 문제의 여지는 있다. 현실적으로는 거의 무시되긴 하지만, 중화민국(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이 행한 모든 것을 부정하므로 백두산에 대해서도 그 전체가 영토라고 주장하긴 한다.

천지

천지(天池)는 백두산 정상에 있는 거대한 칼데라호이다. 최대수심 374 m, 면적은 9.82 ㎢로 수량은 약 20억 톤이다. 비교대상으로 남한에 있는 소양호를 예로 들면, 소양호는 면적은 46.5 ㎢에 수량은 29억 톤이다. 천지가 크기에 비해서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물을 얼마나 많이 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백두산은 선사시대부터 자주 분화했기 때문에 분화구는 그 시절부터 있었겠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는 천지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아마도 기원전 2천 년경 무렵, 그리고 937-8년에 있었던 대분화로 인해 생겼다고 추정한다. 백두산에서 10세기에 매우 화산활동이 활발하여 분화도 많았는데, 937년에 발생한 분화는 매우 폭발적인 것이었으며, 화산폭발지후(VEI)로 가늠해도면 7.4 이상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는 적어도 지난 2천 년간 중에서는 전세계에서도 가장 강력한 화산폭발에 속하며, 이때 날아간 화산재가 일본 홋카이도에서도 발견되었다. 그 외에도 1702년에 있던 분화도 지금의 천지를 형성하는 데 한몫 했을 것으로 보인다.

천지란 이름은 꽤 후대에 들어와서 생긴 듯 보인다. 18세기에 조선에서 서명응(徐命應)이 천지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고지도에서는 천지라고 명기한 것이 없다. 고지도에서 가장 자주 보이는 이름은 '큰 호수'란 뜻의 대지(大池), 대택(大澤)이다. 심지어 그냥 단순하게 지(池)라고만 쓴 사례도 있다. 그 외에 고지도에서 보이는 다른 명칭으로는 달문담(達門潭), 하늘과 가깝다는 뜻인 천상근(天上近)이 있다. 역시 고지도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구한말에 천지를 가리켜 용왕담(龍王潭)이라 부르기도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천지 괴물

천지에 괴물이 산다는 소문이 있다. 사실 이런 소문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는데, 산해경에서는 이런 기록도 있다.

대황(大荒)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이름을 불함(不咸)이라 한다.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 비질(蜚蛭)이 있는데 날개가 넷이다. 짐승 머리에 뱀 몸통을 하였으며 이름을 금충(琴蟲)이라 한다.

파일:금충

백두산에 산다는 금충의 그림

하지만 백두산이 역사시대에만도 이미 여러 번 분화했고, 개중에는 대폭발도 있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 북한에서 천지에 산천어를 풀었는데, 천지가 차갑고 물이 깨끗해서 물고기가 (먹이가 없어서) 살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매우 잘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천지 괴물이 산천어를 잘못 본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

명칭

한반도에서

백두산이란 호칭은 고려시대 문헌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고려사 성종 10년(991년) 10월조에 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압록강 바깥에 거주하는 여진족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어 그곳에 거주하게 했다.)[3] 하지만 삼국유사에서도 백두산이란 이름이 언급되므로, 백두산이란 호칭이 통일신라시대나, 혹은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개연성이 있다. 고구려 건국신화 등에서 나타나는 태백산(太白山) 역시 백두산을 가리킬 가능성이 있으나, 북쪽 지방의 진산(鎭山)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일 가능성도 있다(송용덕).

중국에서

중국 역사에서는 백두산을 가리키는 여러 호칭이 있다. 산해경에는 불함산(不咸山)이라고 언급하는데, 몽고어 Burkwan(신神)을 음차한 이름으로 보인다. 현재 중국에서 사용하는 장백산(長白山)이란 호칭은 요사(遼史)에 처음 보인다. 금사(金史)에서 장백산이 왕조가 일어난 땅이라 하여 덕호를 내리고 제사를 지내는 등 중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장백산이란 이름은 만주어로 길고 흰 산이라는 뜻인 골민 샹기얀 알린(golmin šangiyan alin)을 한자로 의역한 것이다. 청나라 기록인 만류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는 이 외에도 도태산, 종태산 등의 이름이 백두산의 다른 이름이라고 기록하였다.)[4]


역사 속 백두산

백두산은 인근 여러 민족들이 영산으로 숭배하곤 하였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고구려에서도 산악숭배신앙과 결부지어 백두산을 영산으로 받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 시대에 들어서는 백두산은 고려의 영토가 아니며 금나라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면서도, 고려의 영토는 아닐지언정 고려의 천하에는 들어온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백두산이 한반도 모든 산들의 시작, 기원이라고 보았다. 비슷한 시기, 중국 금나라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르면서 흥왕지지(興王之地), 즉 왕조가 일어난 땅으로 생각하며 매우 중시했다. 금 장종(章宗) 시절인 1193년에는 장백산신을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로 봉하며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고려에서는 묘청이 서경(지금의 평양)에 이궁을 세우면서, 궁월 안에 팔성당(八聖堂)을 건립했다. 그런데 팔성당에 모신 신격 중 첫 번째가 호국백두악태백선인실덕문수사리보살(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師利菩薩)이라 주목할 만하다. 특히 백두산이 문수보살과 연결되어 있는데, 불교의 화엄경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 화엄경에서는 국토의 동북방에 청량산(淸凉山)이 있어 여기서 문수보살이 일만 보살 대중을 거느리며 법을 설한다는 구절이 있다. 고구려에서 동북방에 있는 백두산을 청량산과 동일시하여 백두산을 문수보살과 연결지었으며, 고려에서도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후일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에서도 청황실을 문수보살과 연결지었고, 백두산을 민족의 기원지로 본 것도 참고할 만한 일이다.[5]

조선에서도 태종 때에는 고려 시절 영향 때문에 백두산에 소사(小社)로 제사를 드렸다. 하지만 세종 19년(1437년)에 사전을 정비하면서 백두산에는 제사를 드리지 않기로 하였다. 고려는 외왕내제 체제로 하면서, 백두산이 고려의 영토는 아니어도 고려의 천하에는 든다고 했지만, 조선은 좀 더 엄격하게 성리학적 질서를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의 천하를 이야기할 수 없었고, 따라서 조선의 영토가 아닌 백두산에는 제사를 드릴 수 없다고 하였다. 세종 시절에도 양성지는 백두산을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제사를 드리자고 주장하였으나 이 의견은 소수에 불과했다. 특히나 고대에는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백두산 근처를 영토로 인식하기 힘들었다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조선에서도 백두산을 특별하게 인식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팔도총도

원래 조선 중동 때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팔도총도는 전국에서 소사와 중사 제사를 드리는 지역을 그린 것인데, 백두산은 이때까지만 해도 제사를 지내는 곳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수록되었다.

조선이 백두산에 다시 제사를 드리기 시작한 것은 영조 때부터다. 영조는 백두산이 조선의 왕조 건국과 관계가 깊다고 생각해서 1767년(영조 43년)부터 제사를 드리기로 하였다. 그런데도 이 와중에도 백두산에 가기는 너무 힘들었는지, 망제(望祭), 즉 백두산에서 제사를 드리지 않고 멀리서 백두산을 바라보며 제사들 드리기로 하였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백두산은 (무장을 포함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지 않으면 갈 수 없고, 설령 간다고 해도 중간에 되돌아올 가능성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하고 험한 곳이었다.

영조 때에 백두산을 제사대상으로 올릴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는 숙종 때 청나라와 국경 문제로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면서, 청나라도 정식으로 '백두산의 일부는 조선 땅'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백두산에 제사를 드린다고 청나라가 뭐라고 할 거리가 없다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화산 백두산

2840만 년 전에 현무암질 마그마가 분화했으며, 1500만 년 전에 현무암질 마그마가 대량으로 분출하여 넓은 용암대지를 형성하였다. 이후 그 뒤에도 분화를 계속하여 작은 화산을 이루었는데, 60만 년~1만 년 전까지 조면암/유문암질 화산활동이 교대로 발생하여 지금의 백두산을 이루었다. 그 뒤로도 기원전 2천 년에도 분화가 있었고, (위 천지 항목에서도 언급했던) 서기 10세기의 대분화로 인해 지금의 천지가 형성되었다.

그 뒤로도 1014~19년, 1199~1201년, 1702년, 1903년에도 분화한 기록이 있다. 가장 최근의 분화기록은 1925년에 분화했다는 것이다. 여기 언급한 연도만이 아니라 크고 작은 백두산 분화기록이 전해진다. 1702년(조선 숙종 28년)에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음력 5월 14일에 함경도 부령부에서 오시 무렵에 사방이 어두워지고 비릿한 냄새가 나며, 큰 화로에 앉은 듯 너무 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이런 열기가 다음날 축시까지 지속됐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온 들판에 하얀 재가 한 치나 싸여 있었다고 하였다.


  1.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활화산/휴화산/사화산 구분법으로는 휴화산이지만, 미국 스미스소니언 연구소에서 사용하는 활화산/사화산 구분법으로는 활화산으로 구분한다. 단지 휴지기에 들어섰을 뿐 분화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 수준원점은 각국에서 사용하는 평균 해수면의 기준점이다. 한국은 인천 앞바다의 해수면을 기준으로 하는 반면, 북한은 원산 앞바다의 해수면을, 중국은 톈진(天津) 앞바다의 해수면을 기준으로 하는데, 서로 높낮이에 차이가 있다.
  3. 2008년에 경인문화사에서 출판하고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국역 고려사'에서 원문과 번역문을 인용함.
  4. 물론 정말로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원래는 다른 산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던 것을 청왕조가 흥왕지지(왕조가 일어난 땅)으로 숭상한 백두산으로 이런 이름이 모였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5. 국토의 동북방에 있는 청량산에 문수보살이 계신다는 구절 때문에 중국에서는 오대산을 청량산과 동일시하며 문수보살의 성지가 되는 경전적 근거가 되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설화에서도 오대산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그 영향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