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역사 속 백두산 == 백두산은 인근 여러 민족들이 영산으로 숭배하곤 하였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고구려]]에서도 산악숭배신앙과 결부지어 백두산을 영산으로 받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 시대에 들어서는 백두산은 고려의 영토가 아니며 중국 [[금나라]]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면서도, 고려의 영토는 아닐지언정 고려의 천하에는 들어온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백두산이 한반도 모든 산들의 시작, 기원이라고 보았다. 비슷한 시기, 중국의 금나라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르면서 흥왕지지(興王之地), 즉 왕조가 일어난 땅으로 생각하며 매우 중시했다. 금 세종 때는 [[1172년]]에 장백산의 산신을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으로 봉했고, 금 [[장종]](章宗) 시절인 [[1193년]]에는 장백산신을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로 봉하며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 고려 시대 === [[고려]]에서는 묘청이 서경(지금의 평양)에 이궁을 세우면서, 궁월 안에 팔성당(八聖堂)을 건립했다. 그런데 팔성당에 모신 신격 중 첫 번째가 '''호국백두악태백선인실덕문수사리보살'''(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師利菩薩)이라 주목할 만하다. 특히 백두산이 [[문수보살]]과 연결되어 있는데, [[불교]]의 《[[화엄경]]》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 《화엄경》에서는 국토의 동북방에 청량산(淸凉山)이 있어 여기서 문수보살이 일만 보살 대중을 거느리며 법을 설한다는 구절이 있다. 고구려에서 동북방에 있는 백두산을 청량산과 동일시하여 백두산을 문수보살과 연결지었으며, 고려에서도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후일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에서도 청황실을 문수보살과 연결지었고, 백두산을 민족의 기원지로 본 것도 참고할 만한 일이다.<ref> 국토의 동북방에 있는 청량산에 문수보살이 계신다는 구절 때문에 중국에서는 [[오대산]]을 청량산과 동일시하며 문수보살의 성지가 되는 경전적 근거가 되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설화에서도 오대산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그 영향을 볼 수 있다.</ref> === 조선 시대 === [[조선]]에서도 [[태종]] 때에는 고려 시절 영향 때문에 백두산에 소사(小社)로 제사를 올렸다. 하지만 세종 19년([[1437년]])에 사전을 정비하면서 백두산에는 제사를 올리지 않기로 하였다. 고려는 외왕내제 체제로 하면서, 백두산이 고려의 영토는 아니어도 고려의 천하에는 든다고 했지만, 조선은 좀 더 엄격하게 성리학적 질서를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의 천하'''를 이야기할 수 없었고, 따라서 조선의 영토가 아닌 백두산에는 제사를 올릴 수 없다고 하였다. [[세종]] 시절에도 양성지는 백두산을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제사를 올리자고 주장하였으나 이 의견은 소수에 불과했다. 특히나 고대에는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백두산 근처를 영토로 인식하기 힘들었다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조선에서도 백두산을 특별하게 인식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파일:八道総図.jpg|thumb|right|《신증동국여지승람》 팔도총도]] 원래 조선 [[중종]] 때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팔도총도는 전국에서 소사와 중사 제사를 드리는 지역을 그린 것인데, 백두산은 이때까지만 해도 제사를 지내는 곳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수록되었다. 조선이 백두산에 다시 제사를 올리기 시작한 것은 [[영조]] 때부터다. 영조는 백두산이 조선의 왕조 건국과 관계가 깊다고 생각해서 [[1767년]](영조 43년)부터 제사를 올리기로 하되, 망제(望祭), 즉 백두산에서 제사를 올리지 않고 멀리서 백두산을 '''바라보며''' 제사들 올리기로 하였다. 이후 [[대한제국]] 때 백두산을 정식으로 [[오악|북악]](北岳)으로 정하여 제사를 드렸으나, 한일병합으로 말미암아 금방 사라졌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백두산은 (무장을 포함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지 않으면 갈 수 없고, 설령 간다고 해도 중간에 되돌아올 가능성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하고 험한 곳이었으므로, 영조 때에 백두산에 망제를 지내기로 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영조 때에 백두산을 제사대상으로 올릴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는 [[숙종]] 때 [[청나라]]와 국경 문제로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면서, 청나라도 정식으로 '백두산의 일부는 조선 땅'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백두산에 제사를 올린다고 청나라가 뭐라고 할 거리가 없다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