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방'''(方, 房, 龐, 邦)씨는 [[중국]]과 [[한국의 성씨]]이다. ==모 방 方== '''방'''('''方''')씨는 중국 [[하남성]] 낙양현에서 계출된 성씨이며, [[주나라]] 때 대부(大夫) 방숙(方叔)의 후예이다. 중국 염제 신농씨의 10세손인 유망황제(楡罔皇帝)가 첫째 아들 휘 뢰(雷)에게 중국 하남성 낙양현을 사패지로 주고, 방산지방(方山地方)에 봉하면서 그 곳의 지명을 따서 방(方) 성을 득성하였다. 방(方)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 조사에서 25,472가구, 81,710명으로 조사되어, [[대한민국의 인구순 성씨 목록|한국 성씨 인구]] 58위이다. 본관은 온양을 비롯하여 상주(尙州), 군위(軍威), 신창(新昌), 개성(開城), 강화(江華) 등 26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대종인 '''[[온양 방씨]]'''로 단일화되고 있다. '''[[온양 방씨]]'''(溫陽 方氏)의 시조 '''방지'''(方智)는 [[중국]] [[산둥성|산동]](山東) 출신이며, 방뢰(方雷)의 133세손 방군강(方君講)의 차남(次男)이다. 방지(方智)는 [[당나라|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669년]]([[당 고종]] 총장2, [[신라]] [[문무왕]] 9) 나당동맹(羅唐同盟)의 문화사절(文化使節)로 [[신라]]에 동래(東來)하여 [[설총]](薛聰)과 함께 구경(九經)의 회통(會統)을 국역하였고, 장씨(張氏)와 혼인하여 가유현(嘉猷縣: 현 경북 [[상주시]])에 정착하였다. 방지의 6세손 '''방운'''(方雲)이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를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워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중무장군(中武將軍)과 대장군(大將軍)을 거쳐 좌승지(左承旨), 지성사(知省事) 등을 역임한 후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다. 993년(성종 12) 거란(契丹)이 침입했을 때 방운은 공훈을 세워 온수군(溫水君)에 봉해지고 [[온양동|온양]](溫陽), [[신창면|신창]](新昌), [[아산시|아산]](牙山)의 3읍을 식읍(食邑)으로 하사 받으면서 온양을 관향으로 하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91073 온양 방씨 - 네이버 지식백과]</ref> 방운의 후손들은 [[고려]]시대에 대대로 벼슬을 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목종]] 때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을 지낸 방중탁(仲鐸)과 [[고려 현종]]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강감찬 장군의 휘하에서 무공을 떨쳐 온양군(溫陽君)에 봉해진 방휴(方休)가 유명했으며, 휴의 증손 방유(方裕)는 [[고려 숙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추밀원 직학사(樞密院直學士)를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방재(方宰)가 대호군(大護軍)을 지내고, 증손 [[방희진]](方曦進)이 [[대제학]](大提學)에 오르면서 자손 대대로 가문을 빛냈다.<ref>{{뉴스 인용|제목 = 김진우의 족보이야기 (28)온양방씨(溫陽方氏) 방씨를 우러러보라 배방산(拜方山)|URL = http://www.dtnews24.com/news/article.html?no=304348|출판사 = 디트뉴스24|저자=김진우|날짜 = 2010-04-17}}</ref> 12세손 '''[[방우선]]'''(方于宣)은 [[1269년]]([[고려 원종]] 10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여 [[충렬왕]] 때 국학박사를 역임하였고, 1311년(충선왕 3년) 평양부윤(平壤府尹)이 되어 안정도존무사(安定道存撫使)를 겸하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24294 《고려사》 권34, 충선왕 3년(1311) 신해년]</ref><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5ETC_A9999_1_0017869 방우선 -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온양 방씨는 문정공(文定公) [[방우선]](方于宣)과 그의 아우 방우번(方于蕃), 목사(牧師) 방득세(方得世)의 아들 대(代)인 13세손에서 장암공(莊岩公) 방서(方曙)를 파조(派祖)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 간의대부(諫議大夫) 방현(方玄)을 파조로 하는 간의공파(諫議公派), 안렴사(按廉使) 방훤(方喧)을 파조로 하는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군위군(軍威君) 방적(方迪)을 파조로 하는 태상경공파(太常卿公派), 방우번(方于蕃)을 파조로 하는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평장사(平章事) 방신제(方臣悌)를 파조로 하는 광록대부공파(光祿大夫公派), [[방신우]](方臣佑)를 파조로 하는 상락부원군파(上洛府院君派)로 분파되었다. 방신제(方臣悌)는 금자광록대부평장사(金紫光祿大夫平章事)를 지내고 중국으로 귀환하였는데, [[명나라]] 말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방효유]](方孝孺)는 방신제의 5대손이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99250&cid=40942 방(方) - 두산백과]</ref> 15세손 '''[[방순]]'''(方恂)은 [[고려]] [[공민왕]] 11년([[1362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언, 중서사인(中書舍人), 판전교시사, 관찰사 등을 지내다가 조선이 건국되자 [[예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동료인 이집(李集)과 더불어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부인은 조선 개국공신 [[윤호 (여말선초)|윤호]](尹虎)의 장녀인 [[파평 윤씨]]이고, 사위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영의정]]인 [[남재]](南在)의 장남 [[남경문 (1370년)|남경문]](南景文)이며, 외손자는 [[좌의정]] [[남지]](南智)이다. [[방순]]의 손자 '''[[방강]]'''(方綱)은 1447년([[세종]] 29년) 문과에 급제하여 헌납(獻納)·사성(司成)·정언(正言)·흡곡현령·사간(司諫)·이천부사를 역임하고, 1454년(단종 2) [[승정원]](承政院)좌승지(左承旨)에 올랐으며, [[성종]] 때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지냈다. 방(方)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4명, 무과 급제자 113명, 사마시 28명을 배출하였다. 20세손 '''[[방유령]]'''(方有寧)은 1486년(성종 17) 사마시에 오르고, 1489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청환(淸宦)에 있다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로 파직당하였으나 다음해 4월 [[사헌부]]집의로 등용되었다. 1506년(중종 1) 함경남도[[절도사]], 1512년 좌부승지, 1515년 [[대사헌]](大司憲), 1516년 [[이조]][[참판]](吏曹參議), 1517년(중종 12년)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공조]][[참판]](工曹參判)을 거쳐 1519년 [[병조]][[참판]], 1520년 [[병조]][[판서]]에 특차되었고, 1523년 경상도[[관찰사]], 1524년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가 되었다.<ref>{{한민족백과|E0021765|방유령}}</ref> [[세종]](世宗)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고손녀 사위이자 증 병조판서 [[방윤]](方輪)의 아들인 '''[[방호의]]'''(方好義)는 1514년(중종 9)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1525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 1536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1545년(명종 즉위년) [[충청도]]수군[[절도사]]를 역임하고, 1554년 정2품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1556년 청홍도병마[[절도사]](淸洪道兵馬節度使)로서 왜구의 방어에 공헌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6746 방호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f> [[방호의]]의 손자이자 [[정언각]]의 외손자인 '''[[방덕룡]]'''(方德龍)은 1588년(선조 21년) 무과에 급제하여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내고, 낙안[[군수]]로 재직할 때 [[이순신]]의 선봉으로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여 형조참의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처가도 방(方)씨였으며, [[이순신]]은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方震)의 후원으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조선 선조|선조]] 때 방씨 부인을 정경부인으로 봉하면서 내린 [[이순신처 방씨 고신교지]]는 보물 제1564-8호이다. [[조선 정조]] 때 무과에 급제한 [[방우정]](方禹鼎) 장군은 서정군(西征軍)의 좌초관(左哨官)으로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여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저서 《서정일기(西征日記)》는 역사적인 사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방우정]](方禹鼎)의 동생 방우준(方禹準)의 5대손인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민족사상 혁명의 선구자로서 짧은 일생을 나라를 위해 바쳤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신문」을 인쇄하여 돌렸고, 아동문학가로도 활동하였다. 이 밖에 독립운동가 [[방한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방순희]], 한족회 총관 [[방기전]] 등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다. 근현대 인물로는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방우영]], [[방일영]], [[방상훈]], 대법원 대법관 [[방준경]], [[방순원]], 국회의원 [[방만수]], [[방성출]], [[방일홍]], [[방용석]], [[기획재정부 차관]] [[방문규]] 등이 있다. 학계의 주요 인물로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방영주]] 교수, KAIST [[방효충]] 교수 등이 있다. 체육계에는 대한농구협회 회장 [[방열]], 농구 선수 [[방성윤]], 배구 선수 [[방신봉]], 올림픽 배드민턴 금메달리스트 [[방수현]] 선수가 있다. 방송인으로는 아나운서 [[방현주]], 배우 [[성준 (배우)|방성준]], 가수 걸스데이 [[민아|방민아]], 틴탑 [[방민수]] 등이 있다. 종교인으로는 천주교 신부 [[방유룡]]이 있다. '''방'''(方, Fāng)성은 중국 백가성(百家姓) 제56위이다. 역사 인물로는 중국 [[명나라]] 때의 학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02170 방이지(方以智)], [[청나라]] 때의 학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02142 방동수(方東樹)] 등이 유명하다. [[중국]]의 「방씨원류역사연구회」, 방씨전족통보이사회(方氏全族統譜理事會)와 한국의 [[온양 방씨|온양방씨]]중앙종친회는 인적·물적 교류를 해오고 있다. ==방 방 房== 방(房)씨는 중국 청하(淸河)에서 계출된 성씨이다. [[요임금|요(堯)임금]]의 아들 단주(丹朱)가 방후(房侯)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지명을 성으로 삼게 되었다. '''방'''('''房''', Fáng)성은 중국 백가성(百家姓) 제170위이다. [[당나라|당]](唐) [[당 태종|태종]] 때 재상인 양공(梁公) '''[[방현령]]'''(房玄齡, 578년 ~ 648년)의 둘째 아들 방준(房俊)이 [[634년]]([[당 태종]] 정관 8, [[고구려]] [[영류왕]] 17) [[고구려]]의 주청(奏請)으로 [[당나라]] 8학사 중 한 사람으로서 [[고구려]]에 동래하여 당성(唐城)에 정착하여 살게 되면서 한국 방(房)씨의 기원이 되었다. '''방'''(房)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1,033가구, 35,366명으로 조사되어, [[대한민국의 인구순 성씨 목록|한국 성씨 인구]] 73위이다. 본관은 [[남양 방씨|남양]](南陽)·[[수원시|수원]](水原)·남원(南原) 등 23본까지 문헌에 전하나 '''[[남양 방씨]]''' 단본이다. '''[[남양 방씨]]'''(南陽 房氏)의 시조 '''방계홍'''(房季弘)은 [[방현령]]의 10세손이며,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에 올랐다. 방계홍의 아들 방의강(房儀康)은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서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으며, 손자 방진유(房珍儒)는 추밀원부사겸예부상서(樞密院府使兼禮部尙書)를 역임하였다. 다른 손자 방정유(房貞儒)는 대광(大匡)을 역임하고 [[수원 방씨]](水原房氏)의 시조가 되어 분파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91068 남양 방씨 - 네이버 지식백과]</ref> 고려 중기 선주(宣州)의 향공진사(鄕貢進士) 출신 [[방서란]](房瑞鸞)은 1176년(명종 6년) 조위총의 난이 진압되는 데 기여하여 형 방효진(房孝珍)은 산원(散員)에 오르고, 방득령(房得齡)은 선주 호장(戶長)에 임명되었다. 고려 후기 신진사류 출신이었던 [[방사량]](房士良)은 1377년(고려 우왕 3년)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1391년(고려 공양왕 2년) 중랑장(中郞將)으로서 시무 11조를 올려 [[형조]] 정랑(刑曹正郞)으로 임명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91113 《동국통감》 권56 고려기 공양왕 3년]</ref> [[남양 방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9명, 사마시 34명을 배출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080_117_0177|남양 방씨}}</ref> [[방사량]]의 차남 [[방구달]](房九達)은 1414년(태종 14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 이조좌랑(吏曹佐郞), 예조좌랑(禮曹佐郞),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을 지내고, 장남 [[방구행]](房九行)은 1420년([[조선 세종|세종]] 2년) 문과에 급제하여 [[군자감]]정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인 [[방옥정]](房玉精)은 1472년(성종 3) 문과에서 급제하여 판관(判官)을 거쳐 세자시강원 문학을 역임하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13120 방옥정 - 두산백과]</ref> 정산현감 방구성(九成)의 손자 [[방귀원]](房貴元)은 1465년([[조선 세조]] 11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가 되었다.<ref>{{한민족백과|E0021671|방귀원}}</ref> 12세손 [[방귀온]](房貴溫)은 [[조선 중종]] 때 효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을 지내고,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으며, [[기묘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이조판서 윤인경(尹仁鏡)의 상소로 신원되어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호조좌랑 [[방귀화]](房貴和)의 손자 [[방응현]](房應賢)은 학자로 유명했고, 그가 세운 [[사계정사]]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6호로 지정되어 있다.<ref>{{문화재청 문화재|31,01660000,35|사계정사}}</ref> [[방응현]]의 손자 [[방원정]](房元井)은 1618년(광해군 10)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지내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1646년(인조 24) 문과에 급제한 후 삼례찰방(參禮察訪)에 임명되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국가의 시장정책(市場政策)의 허점을 지적하며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나라가 부강해지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외에도 외교정책(外交政策) 등 다방면에 깊은 식견을 지녔으며, 저서로 《지족와집(知足窩集)》이 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6691 방원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f> [[방원정]]의 형 방원진(房元震)과 창평 [[현령]](昌平縣令) [[방원량]](房元亮)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정묘호란 때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도 의병을 일으켰다. [[방복령]](房復齡)은 1601년(선조 34년)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 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를 거쳐, 1604년 제주판관(濟州判官), 강상현감(康翔縣監)을 지내다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현대 인물로는 법조인 [[방극성]], 제4대 [[대한민국의 고용노동부 장관|고용노동부 장관]] [[방하남]], 작곡가 [[방시혁]], 배우 [[고은아]](방효진), 가수 엠블랙 [[미르 (가수)|미르]](방철용) 등이 있다. 중화권 영화 배우 [[성룡]]의 본명이 방사룡(房仕龍, 팡 스룽)이며, [[방현령]]의 후손이라고 한다. ==클 방 龐== 방(庞, Páng)은 중국 백가성(百家姓) 제120위이다. '''방'''('''龐''')씨는 크게 [[주나라]] 희성 계열과 고대 [[전욱|전욱 고양]]의 영성 계열이 있다. 방씨(龐氏)는 중국 시평(始平 : [[섬서성]] 관중도 흥평현의 진나라 때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다. 역사 인물로는 주(周)나라 현왕(顯王) 때 장군 방연(龐涓)과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 때 장군 방명(龐萌) 등이 있었다. '''방'''(龐)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 조사에서 314가구, 1,080명으로 조사됐다. 본관은 개성, 태원(太原), 갈양 3본이다. '''[[개성 방씨]]'''(開城 龐氏)의 시조 '''방두현'''(龐斗賢)은 [[주나라|주(周)나라]] 현왕(顯王:기원전 368~321년) 때 [[방연위]](龐涓魏) 장군(將軍)의 원손(遠孫)이다. 방두현(龐斗賢)은 원(元)나라의 직성사인(直省舍人)으로서, 1351년([[고려]] [[충정왕]] 3) 고려 [[공민왕]]비(恭愍王妃)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입국할 때 배행한 육시랑(六時郞)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동래하여 개성에 정착했다. 방두현의 증손(曾孫) 천룡(天龍)이 조선(朝鮮)조에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고, 그의 맏아들 예남(禮楠)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차남 영내(永奈)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낸 아들 대건(大建), 손자 종일(宗逸)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그외 인물로는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오른 방세진(龐世珍),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방도명(龐道明)이 가문을 빛냈다.<ref>[http://www.jokbo.re.kr/book/index.html?fnkey=12661008&fn=1266 개성 방씨 - 부천족보전문도서관]</ref> 근현대 인물로는 이화여대 교수, 국제대학 학장을 지낸 [[방용구]](龐溶九), 대한전척토목부장을 지낸 [[방회철]](龐會澈) 등이 있다. 2000년 인구는 847명이다. [[태원 방씨]](太原 龐氏)의 시조 '''방발'''(龐渤)은 [[중국]] 태원(太原) 사람으로 관직은 지휘도총장(指揮都摠將)을 지내고 [[조선]]에 귀화하였다. 시조 방발의 아들 방엄형(龐嚴亨)이 진무사(鎭撫使)로 강화도(江華島) 방어에 공을 세웠고, 그의 증손(曾孫) 방세진(龐世珍)은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2000년 인구는 52명이다. ==나라 방 邦== 방씨(邦氏)는 중국 대군(代郡 : 산서성(山西省) 안문도 대현(鴈門道代縣)의 진나라 때 이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다. 명나라 당왕(唐王) 때 진강(鎭江) 출신인 '''방포'''(邦苞)의 후손이 [[조선]]에 귀화하여 세계를 이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邦)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481가구, 1,547명으로 조사됐다. 본관은 광주(廣州), 무안(務安), 수다(水多), 괴산(槐山) , 영흥(永興), 해주(海州), 예천(醴泉), 철원(鐵原), 파주(坡州), 풍기(豊基) 등 10본이다. 역사 인물로는 [[무안 방씨|무안]](務安)을 본관으로 하는 방준상(邦俊相)이 [[조선 영조]] 26년(1750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무과에 급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ref>《경오식년문무과방목(庚午式年文武科榜目)》</ref> 그의 아버지는 종6품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한 방필원(邦弼元)이며, 형은 방유언(邦有彦)이다. 근대 인물로는 기독교 장로회 최초의 7인 목사 중 한 사람인 [[방기창]](邦基昌, 1851년 ~ 1911년)이 있다. {{각주}} {{한국인의 성씨}} {{퍼온문서|방 (성씨)|15570816}} [[분류:중국의 성씨]] [[분류:한국인의 성씨]]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Skin (원본 보기) (준보호됨)틀:각주 (원본 보기) (준보호됨)틀:날짜 (원본 보기) (준보호됨)틀:뉴스 인용 (편집) 틀:둘러보기 상자 (원본 보기) (보호됨)틀:둘러보기 상자/핵심 (원본 보기) (보호됨)틀:문화재청 문화재 (편집) 틀:알림바 (원본 보기) (보호됨)틀:틀바 (원본 보기) (준보호됨)틀:퍼온문서 (원본 보기) (준보호됨)틀:한국인의 성씨 (편집) 틀: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원본 보기) (준보호됨)틀:한민족백과 (편집) 이 문서는 다음의 숨은 분류 1개에 속해 있습니다: 분류:퍼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