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출생주의

147.41.128.10 (토론)님의 2019년 6월 29일 (토) 10:46 판 (→‎개요)

개요

은 좋고, 죽음은 더 좋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하인리히 하이네
내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알아 버렸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혼, 가족, 더 나아가 모든 사회 규범에 대한 내 두려움은 거기서 온다. 자기 자신의 결함을 자식에게 전달하는 것, 그래서 자신이 겪었던 시련을, 어쩌면 더 지독한 시련을 자식에게 강요하는 것은 범죄 행위다. 내 불행과 내 고통을 이어받을 사람을 낳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부모들이란 모두 무책임한 자들이거나 살인자들이다.
— 에밀 시오랑

반출생주의(反出生主義, Antinatalism)는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이 더 크므로, 자녀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윤리관이다.

출생주의는 생물본능죽음에 대한 거부감, 에 대한 애착, 번식 욕구 등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상이기에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아무래도 지배층과 기득권 입장에서는 피지배 집단의 인구 증가를 원하기 때문에 출산을 장려하는 경향이 있다.[1] 근대까지만 해도 안락사를 포함한 자살, 독신[2], 딩크족, 동성애 등 출산을 저해하는 것으로 보이는 행동은 악랄하게 탄압당했고, 현재도 지역에 따라 탄압당하고 있다. 그리고 탄압까진 아닌 지역도 이러한 개인의 선택권을 무시하려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세상은 온갖 종류의 고통·불행·악이 상존하는 곳이고, 고아나 열악한 환경에서 고통받는 아이들도 많다. 또한 인구도 과밀하여 인간이 충분히 귀하게 여겨지지 못한다. 그런데도 인간은 끊임 없이, 동의 없이 부모에 의해 이 세상에 강제로 던져진다(하이데거의 '피투성').[3] 물론 누군가는 충분히 배가 불러서 세상에는 쾌락행복을 포함해서 좋은 것도 있다고 말하겠지만, 그것들이 개인의 고통과 불행이라는 부조리를 상쇄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는 상존할 수밖에 없다.[4]

반출생주의적 담론에 대해, 혼자 자살하면 되지 않냐는 조롱이 곧잘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이미 태어난 이상 고도로 진화한 생존 본능 때문에 실행이 어렵고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울 뿐더러, 사회 또한 자살을 억제하기 위해 편안한 실행 방법을 최대한 차단하고 불편과 고통으로 유도한다는 것을 망각한 논점 일탈이자 본능적 거부감 표출에 불과하다.

인간과 세상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염세주의, 허무주의[5]와도 맥락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다. 이런 사상들이 자연과학무신론적 사고를 포함해서 인간의 이성이 급격하게 발전하던 근대부터 확립되기 시작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현대코펜하겐 해석 이후에도 여전히 거시계는 결정적이며, 뇌손상·뇌수술·뇌손상·뇌수술·호르몬 등으로 인해 성격이 바뀌기도 한다. 또한 최면 같은 자극은 물론이고 심지어 아무 이유 없이 시간만 지나도 쉽게 기억이 변조되곤 한다. 따라서 영혼·자유의지·사후세계· 등은 존재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으나 존재 가정이 무요하다.[6] 즉 과학적인 관점으로는 반출생주의를 배격하는 일반 종교의 교리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이 부분 또한 종교적, 신비주의적 사고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출생주의 사상에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사실 종교적·신비주의적 입장이라고 모두 반출생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정치 기득권과 이해가 일치한 종교 기득권에 의해 이단, 사이비로 몰려 탄압돼왔다. 단체 항목에서 소개하고 있는 카타리파십자군에 의해 잔혹하게 도륙당하고 마을째로 불살라졌다.

인도 종교[7]윤회 사상도 반출생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고통의 유전적 대물림을 은유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불교에서는 세상을 고통으로 가득찬 곳으로, 인간을 윤회의 고통에 시달리는 존재로 인식하는데, 이는 반출생주의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마찬가지 관점에서, 해탈열반 개념 또한 깨달음을 통해 번식 욕구라는 번뇌를 극복하고 되풀이되는 삶과 고통의 굴레를 거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표제어번역 표기에 대해

우리가 원해서 '출생'한 게 아니니 반출주의 대신 반출주의가 낫다는 의견이 있다. 이런 의견의 배경에는 페미니즘에 반감을 지닌 입장에서 출산 부담을 여성에게만 지운다며 저출을 저출으로 바꿔 부르자페미니스트들의 주장으로 인해, 여성계에 의해 먼저 소개된 편인 반출생주의 역시 페미니즘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보여 생기는 거부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저출생이 페미니즘의 시각을 반영한 정치적인 단어인 것과 달리, 반출생주의는 꼭 페미니즘 때문만이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출생주의'란 단어는 국적과 관련한 동음이의어로도 존재한다.

물론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나 그로 인한 미러링과는 상관 없이, 위 항목 첫 문장에서 설명한 이유로 반출산주의가 어감상 더 낫다는 의견 자체는 나름대로 일리가 일리가 있다. 그런데 직접적인 여성의 출산 문제와는 별개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는 사상이므로 반출생주의가 낫다는 의견 또한 일리가 있다. 결국 말하기 나름인 셈. 따라서 출생이든 출산이든 크게 다른 뜻도 아닌 만큼, 그냥 기존에 쓰던 대로 쓰자는 보수성이 작용하여 굳어질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와의 관계

기독교는 반출생주의(Antinatalism)가 배격하는 출생주의(Natalism)를 기본 이념으로 삼는다.[8] 어차피 정치 기득권이나 종교 기득권이나 부양받을 피지배 계층 인구가 많을 수록 좋은 게 보통이고 이런 면에서는 서로 이해가 일치하는 편이다. 따라서 출생주의는 지배층과 종교가 유착[9]하여 상부상조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반출생주의는 태생적으로 기독교와 상극에 가깝다. 인물 항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기독교의 위세가 절정을 이루던 시대에는 반출생주의적인 화제를 꺼내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기독교는 멋대로 자신이 그렇게 창조해놓고(=피투성) 무고한 아이와 동물까지 홍수몰살시킨 몰살시킨 창조주를 절대으로 숭앙하는 종교이다. 그리고 인류가 의 존재로 인해 고통받는 이유를 자유의지 탓으로 돌리는데, 아담하와가 창조주에 의해 강제로 주입당한 자유의지로 인해 창조주의 맘에 안 드는 일을 하고 에덴에서 추방당했다는 이유로 인류 전체에게 연좌제원죄를 적용,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대속' 신앙을 요구한다.

이 때 불신자는 죽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는데, 자녀가 불신자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만약 기독교인 부모가 그 자녀를 신실한 신자로 신자로 키우지 못하고 천국에 보내는데 실패한다면, 이 부모는 설령 고의가 아니더라도 그 어떤 악질의 아동 방임·학대·살해 부모가 자녀에게 가한 고통보다 더 끔찍한 지옥의 고통을 자녀에게 선사한 죄인이 되고 만다. 이런 끔찍한 리스크를 감수하고 일단 낳고 본다는 것은 너무나도 무책임하다고 볼 수 있으며, 아예 낳지 않는다면 적어도 불신자인 자식은 생기지 않으며 최소한 이런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신학계에서는 연옥 같은 개념을 지어내 물타기를 시도하거나 견강부회식 성경 해석으로 나름의 합리화를 시도하지만, 평신도 중 이런 부분에 대해 충분히 고민한 후 낳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비자발적 불신자의 처우 문제[10] 등은 지옥에 지옥에 대해 회의하게 만든다. 여호와의 증인은 이러한 도덕적 문제들 때문에 지옥을 부정한다.

데이비드 베너타의 논리

위 사상은 본디 개개인의 사고 수준에 머물며 구심점 없이 파편화 된 상태였으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철학자이자 케이프타운 대학교의 철학 교수로 재직 중인 데이비드 베너타가 본격적으로 구체화하였다.

그의 저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존재하게 되는 것의 해악[11]에 따르면,

  • 고통은 나쁘다.
  • 기쁨은 옳다.
  • 고통의 부재는 옳다. 옳음을 즐길 존재가 없더라도.
  • 기쁨의 부재는 나쁘지 않다. 단, 기쁨의 부재가 기쁨이 박탈된 상황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 기쁨이 박탈되는 상황을 겪을 존재가 애초에 없으니 박탈이 아니다.
  • 행복한 사람을 또 만들어야 할 도덕적 의무는 없지만, 불행한 사람을 또 만들지 말아야 할 도덕적 의무는 있다.
  • 아이를 만들기로 한 이유로 아이를 가질 때의 이익을 드는 것은 이상하지만, 아이를 만들지 않기로 한 이유로 아이를 가지지 않을 때의 이익을 드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 우리는 우리의 결정으로 태어난 누가 고통을 느낌으로 인해 그런 결정을 후회할 수 있지만, 우리의 결정으로 태어나지 않은 누가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그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 우리는 누가 태어나고 그가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끼지만, 누가 태어나지 않음으로써 그가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위의 논리에 직관을 가진 인간이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간이 생활의 수준(life's quality)에 대해 비이성적인 평가를 하는 이유.

  • 긍정주의를 향한 편향: 우리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긍정적 관점으로 왜곡해서 보는 경향이 있다.
  • 적응: 우리는 우리의 주변 상황에 적응을 해서, 상황이 더 나빠지면 행복의 기준을 그에 맞춰 낮추고 근거 없이 미래는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한다.
  • 비교: 우리는 주변의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우리 삶을 판단하며, 대부분 자신의 상황보다 더 나쁜 것과 비교해서 자신의 행복의 가치를 과대평가한다.

우리가 우리의 직관에 반하는 사상에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데, 그 이유는 세상은 비합리적으로 돌아가고 인간은 비이성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출생주의가 무조건 옳은 사상이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인간의 직관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기에, 인간의 직관에 반한다고 해서 무조건 잘못된 사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출생주의는 그저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면 문제도 없다는 당연한 이치를 우리가 상기하도록 도울 뿐이다.

한국에서의 대두 배경

가독성 향상을 위해 어느 집단 일부의 잘못을 설명할 때 '일부'를 생략합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자비의 원칙을 환기하기 위해 일러둡니다.

청년층의 경제적·사회적 문제

과거부터 존재는 해왔으나 터부시되던 담론이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재조명되는 것은 이 시기 청년 세대의 청년실업 실업 문제 같은 경제적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현실 여건상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고, 더 이상 자식에게 노후 부양을 기대할 수 없다면 자식을 낳지 않는 편이 예비 부모 입장에서나 태어날 자식 입장에서나 더 나을 수 있다. 실제로 호황이 끝나고 장기 불황 속에서 청년실업이 심화되자 제대로 독립하지 못하는 자식을 계속 부양해야 하는 부모의 사례가 적지 않다. 게다가 이전의 개도국 호황은 다시 기대하기 어렵고, 앞으로도 불황이 더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

자국 이성 혐오와 정치적 올바름 논란 등의 사회 문제도 결국 불황으로 인해 줄어든 파이를 두고 각계각층이 다투는 밥그릇 싸움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출산 기피 현상을 부추긴다.

젊은 여성층의 경우 '비혼 비출산'이란 구호를 통해 한국에서 반출생주의를 구체화하고 재발견하는 데 공헌하였다. 한국 페미니즘의 대두와 함께 국가와 사회가 여성을 애 낳는 기계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에 반발하는 정서가 강화된 것이 그 배경이다. 실제로 '반출생주의'라는 확실한 키워드는 주로 여성계 언론여초 커뮤니티에서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후 '탈연애'라는 구호도 추가되었다. 이는 출산을 야기하는 소위 '정상 연애'를 거부할 것을 의미한다. 낙태 또한 대부분 긍정하는 편이다.[12] 기독교에 대해서도 낙태에 대한 입장차나 교리에 내재된 성차별 때문에 과거에 비해 거부감을 가지는 편이다.

젊은 남성층의 입장에서 보면, 여성계가 가부장제의 폐해나 미투로 가시화된 권력형 성범죄가 대부분 386세대, 베이비붐 세대를 포함한 기성세대에게 책임을 물을 일임에도 불구하고, 국방의 의무만 남았을 뿐 가부장제의 혜택은 더 이상 없는 젊은 남성의 권리를 젠더 감수성, 여성 할당제 등으로 약탈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감탄고토식으로 양성 평등은 주장하면서 편하고 안전한 일만 여성이 먼저고되고 위험한 일은 남성이 하는 게 당연하다며 마초 논리를 들먹이거나, 독박 육아는 죄악이라면서 독박 병역은 애 써 외면하고, 심지어 이익을 위해 페미니스트가 주적으로 삼아야 할 '아내를 하녀처럼 부리고 성범죄를 일삼은 기성 세대'와 정치적으로 영합하는 모습을 보고 페미니즘 세력의 이중적인 행태에 염증을 느끼며, 펜스 룰을 외치고 결혼과 출산에도 강한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다.[13]

즉, 노예처럼 살고 대물림하기 싫다는 심리는 위와 같은 기성 세대의 모습을 보고 학습한 결과이며, 결과적으로 아이 낳기 싫은 나라를 물려준 건 기성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남녀 상관 없이 청년 세대에서 반출생주의적인 사고를 공유하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물론 아직은 결혼과 출산을 원하지만 포기(당)하거나, 단순히 관심이 없는 경우에 머무는 비중이 높다.

도의적 문제

청년층의 경제적 문제나 페미니즘이 반출생주의적 사상에 대한 공감을 촉진한 것은 맞고, 언론 보도 기사도 여기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설령 자신의 노후가 걱정되더라도 자식에게 불행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선의가 본질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반출생주의 사상을 가진 청년 세대의 경우는 결정론[14]수저 계급론[15]을 믿으며 '흙수저 부모(이하 흙부모)'의 출산은 자식에게 죄 짓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진다. '흙부모' 말고도 '번식'이라는 비하적 명칭도 존재한다. 일본의 경우 어느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전형적으로 무능하고 무책임한 저학력자 부모를 지칭하는 '도큔(DQN)'이라는 멸칭도 존재한다.

사실 높은 이혼율, 넘쳐나는 고아와 자격 미달 부모 등을 생각해보면 무작정 결혼, 출산과 다둥이 가정을 장려하는 상황은 적나라하게 말해서 국가와 기성 세대를 부양할 노예를 생산하라고 독촉하는 것이며 결국 세상에 만연한 부조리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오히려 생물본능인 생물의 본능인 번식욕을 극복하여 낳지 않거나, 남이 무책임하게 낳은 아이를 대신 입양하는 부모가 훨씬 양심적이고 이타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친자가 아닌 다른 부모가 무책임하게 낳고 유기한 아이를 입양할 때도 최소한의 자격을 심사하는 게 현실이다.[16] 인간이 아닌 동물판 자격 미달 부모인 애니멀 호더조차도 비난받고 동물 학대로 처벌되며 일부 선진국에선 예방을 위해 키울 자격이 있는지 재산과 주거를 심사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임신과 출산은 지구상 그 어느 나라도 최소한의 자격 심사조차 없으며, 오히려 저출산을 타개하기 위해 여러 불안정한 형태의 출산도 권장하려 드는 판국이다. 이는 도덕적으로 일관성이 없을 뿐더러 국익과 애국을 빙자한 아동 학대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은 '입양아 수출대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그다지 고아 문제가 개선이 되지 않고 있으며, 국내 보육원의 학대 및 비리 문제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어린이집도 아동 학대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항의할 부모조차 없는 아이의 경우는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인데도 무턱대고 새로운 불행 가능성만 더 생산하게 장려하는 건 부도덕하다.

또한 입양은 물론 애완동물조차도 키울 자격을 논하는 추세인데, 입양할 자격조차 없는 무능한 부모가 아이를 낳는 것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는 건 끔찍한 모순이다. 심지어 제3세계에서는 상당수의 부모가 아동노동과 아동 노동과 매춘, 인신매매를 통해 아이를 착취하거나 구호품을 노리기 위한 선전 수단으로 아이를 이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애초에 정말 태어날 아이를 걱정하는 부모라면, 예컨대 본인 치료에 필요한 투약에 기형 유발 우려가 있다면 그동안은 피임을 하는 게 당연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다('비동일성 문제'). 마찬가지로 정말 태어날 아이를 위한다면 경제적으로 곤란할 때는 낳는 것을 주저하는 게 정상이라 할 수 있다. 즉, 단순히 '돈 없으면 애도 낳지 말라는 거냐!'라는 생각으로 부유층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지극히 본능적이고 이기적이다.

설령 부모가 별 미련이나 큰 고통 없이 죽더라도 남겨진 자식은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힘들어질 공산이 큰데, 국가유공자의 유가족조차도 제대로 대우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가 어떤 형태로 남겨진 자녀를 괴롭힐지는 아무도 모르고, 이에 대한 완전한 방비도 불가능하다.

또한 이미 세계 대전이 두 번이나 터진데다, 국제 정세와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생각했을 때 앞으로도 전쟁국지도발[17]로 인해 우리의 후손이 참화를 겪을 가능성은 결코 낮지 않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정확히는 수정란이 고통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태아로 자란 순간부터 절대 고통을 피할 수 없다. 특히 육체적·물질적 고통은 차치하더라도 정신적·감정적 고통은 결코 피할 수 없다. 인간은 무시당할 때는 모멸감을 느끼고, 만인 위에 군림하여 숭배받아도 고독감을 느끼는 등 양면성을 지닌다. 심지어 같은 사건을 놓고도 좋은 동시에 싫은 양가감정마저 느낀다.[18] 그리고 예정된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고통, 더한 삶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미리 자살하려 마음 먹는 것조차 고통, 해탈 끝에 도달한 허무감조차도 고통이다. 따라서 고통을 피해야 할 악이라고 여긴다면, 임신 및 출산 행위를 지양해야 할 악행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출산 이후 뿐만 아니라 출산 행위 자체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비좁은 산도를 비집고 나와 첫 숨을 쉬는 고통은 차치하더라도, 출산은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현대에도 여전히 산모와 산아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행위이다.[19] 결국 이런 위험성을 부모가 정확히 알고 임신했다면, 출산시의 사망 사고는 역설적이게도 미필적 고의에 의한 간접적 자살 또는 살인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산모야 스스로 위험을 감수할 수 있고, 자동차 등 문명의 이기로 인해 발생하는 위험성은 사회적인 호혜 계약으로 감수하는 게 사람이다. 그러나 아이의 생명과 관해서는 아이와 합의할 수가 없다. 이 또한 출산을 권하는 사회와 종교가 내포하는 모순이라 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세계 어디에도 '임신치사죄'는 없다.

결국 아이의 행복이 더 클 수도 있고 자긴 잘 키울 자신이 있으니 낳아도 된다는 주장은 무책임한 낙관론에 불과하다. 특히 부모 자신의 욕심 때문에 아이가 겪을 인생 리스크를 아이 대신 감수한다는 점에서 뻔뻔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아이 인생이 행복으로 끝난다면 다행이지만, 불행하다면 책임질 방법이 전무하다. 그리고 설사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더라도, 계속 자녀를 낳고 이를 대물림하다 보면 개중에 불행한 인생은 반드시 생겨나기 마련이다.

인물

  • 데이비드 베너타: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대학교 교수, 철학자, 작가. 자세한 사항은 소개, 서평 참조.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최종적으로 인생은 싫은 일이 많다고 주장하면서 가장 합리적인 입장은 아이를 이 세계에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에밀 시오랑: 루마니아 출신 작가.
  • 에우메데스: 아리스토텔레스제자.
  • 페테르 웨셀 자페: 노르웨이의 작가. 아이가 동의 없이 태어난다는 것을 고려하여, 결혼했으나 아이를 낳지 않는 걸 선택했다.
  • 마광수: "나는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못내 억울하고, 게다가 적반하장 격으로 세상에 내보내준 은혜를 고마와하라고 들입다 강조해대는 사상이 얄밉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식에게 효도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자식은 그저 '애완용'으로 길러야 한다." - <마광수의 뇌구조> 中

단체

  • 카타리파
    기독교의 교파인 카타리파는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고, 생식을 목적으로 하는 성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손을 생산하는 것은 '육체의 노예'를 만들어내는 행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가톨릭 측에서는 이들이 동성애을 장려하였다고 비난하였다. 결국 출정한 알비 십자군에 의해 보이는 족족 회 떠지고 같은 마을에 있었단 이유만으로 상관 없는 사람들까지 집째로 불태워 죽이는 등 무자비하게 말살당했다.
  • 자발적 인류 멸종 운동(Voluntary Human Extinction Movement, VHEMT)
    미국의 레스 나이트(Les U. Knight)가 주창하고 창립한 환경 보호 사회 운동이자 단체. VHEMT 지지자들은 반출생주의를 통해 인구과잉으로 인한 기아 문제, 자원 고갈 문제 등을 해결 또는 억제할 수 있다고 여긴다.[20] 하지만 이들은 자살 혹은 살인을 권장하지도 않고, 강제 불임 수술을 통해 사람들이 출산을 하지 못하게 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태어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으니까 최대한 오래, 행복하게 살다가 가자는 것(May we live long and die out.)이 모토다. VHEMT 공식 홈페이지

매체

커뮤니티

각주

  1. 물론 이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례도 있다. 계획생육정책 등 여러 국가가 시행한 산아제한정책이 바로 그것. 그러나 이것은 당시 맬서스의 경고 등으로 제기된 인구 과다로 인한 사회 붕괴 우려 때문이었으므로, 현 사회 구조 유지를 추구하는 출산장려정책과 사실상 목적이 같으며 본질적으로는 다를 게 없다. 실제로 맬서스 트랩 이론이 무너지고 당장 더 문제가 되는 저출산 고령화가 진행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선 상태.
  2. 가톨릭의 경우 성직자에 한해 독신을 요구하지만, 이는 세습을 막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3. 소위 '낳음당했다.', '낳은 죄' 등으로 표현되는 부모와 자식 간의 비대칭성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낳아줬으니 감사히 여기고 효도해라.'라는 적반하장세뇌교육을 빙자해 이루어져온 게 현실이다. 비단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욕구를 못 이겨 낳은 이상 당연한 양육 의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키워줬다는 생색을 내는 경우는 흔하다.
  4. 질서혼돈, 논리비논리는 공존하기에 구분될 수 있는 개념이다. 설령 다수의 쾌락과 행복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소수의 불행과 고통을 정당화할 순 없는데, 심지어 현실의 불행과 고통이 소수라고 볼 수도 없다.
  5. 다만 허무주의도 능동적 허무주의가 존재하는 등 꼭 태도가 무기력하지만은 않듯, 반출생주의 또한 이미 태어난 사람은 이왕 사는 거 즐겁게 사는 게 좋다고 말한다. 다만 구태여 아이를 낳지는 말자는 것.
  6. 현상의 원인으로 가정한 존재가 있든 말든 동일하게 해당 현상이 설명 가능하다면 오컴의 면도날 원칙에 의거해서 생략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 예시로 에테르 가설, 플로지스톤 가설,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 등이 있다.
  7. 카르마힌두교카스트 제도는 수저 계급론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8. 다만 기독교 내 근본주의 또는 교조주의적 입장을 제외하면 출생주의가 꼭 절대적인 교리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신학적 근거인 '생육하고 번성하라' 구절에 대한 해석과 적용은 다양할 수 있기 때문. 물론 출생주의가 기독교 주류의 입장인 것은 분명하고, 굳이 나서서 대놓고 출생주의를 부정하는 종파도 딱히 보이지 않는 건 사실이다. 과거에 그런 종파가 있긴 했지만 진작 말살당했다. 단체 항목 참조.
  9. 현대의 정경유착, 경언유착 등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정치인과 대형 교회의 유착 정황은 자주 목격된다. 미국의 초대형 교회는 대기업과도 맞먹는다. 물론 이는 개신교만의 문제는 아니고, 종교의 자유가 없는 공산국가나 일부 예외 사료를 사료를 제외하면 전세계 과거와 현재에서 찾아볼 수 있다.
  10. 개신교 주류 주장에 따르면, 신앙을 알고 선택할 기회 없이 사망한 아이 등의 경우 천국에 간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영유아 살해, 순교 강요, 종교의 자유 박탈과 전도 금지를 포함한 대대적인 종교 탄압 등 극단적이고 반사회적인 범죄 행위가 타인을 천국에 보내기 위한 수단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실제로 아메리카 원주민 영아를 세례해주고 바로 살해한 스페인인들의 사례도 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이런 생각 자체가 신의 뜻에 반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신성모독이므로 생각 자체를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11. 해당 링크의 서평에도 그의 사상이 잘 요약되어 있지만 저작권 문제로 위키에 직접 기재하지 않는다.
  12. 페미니즘과 결부된 여성의 자기결정권 문제를 넘어서 반출생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피임을 안 한 건 죄지만 이미 임신한 이상 낙태를 생각할 정도로 형편 없는 부모한테서 태어나느니 차라리 안 태어나는 게 낫고, 딱히 누가 대신 책임져주는 것도 아니기에 (고통을 느끼는 임신 주차 이전의) 낙태 자체는 어쩔 수 없는 차악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낙태가 정말 범죄라면 '부모자격제', '무단임신죄' 등을 신설하여 만악의 원흉인 무책임한 임신부터 범죄로 취급해야 순서에 맞는다는 맞는다는 문제도 있다.
  13. 그러나 가부장제에 관한 수혜 문제와는 별개로 젊은 여성의 남성 혐오는 마냥 기성 세대 남성만의 문제라고만은 할 수 없다. 정준영 성관계 영상 불법 촬영 및 유포 사건 같이 젊은 남성이 가해자인 경우 또한 상당하기 때문. 단 위와 같은 경우는 누릴 거 다 누리다 복에 겨워 타락한 '기득권' 남성이라는 점에 방점을 찍는 게 옳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그리고 남성 반출생주의자 입장에선 페미니즘을 긍정적으로 볼 여지가 있다. 성갈등과 이권 다툼 문제를 제외하면, 어찌됐든 페미니즘이 위 사상의 전파나 출산율 저하에 기여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
  14. 여기서 말하는 '결정론'은 '확률론적 결정론(Adequate Determinism)'을 의미한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양자역학에서 다루는 미시계의 양상은 비결정론적이기에 기존의 기계론적 결정론은 틀린 것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거시계는 여전히 결정론적이다. 결정론은 교육과정상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최대한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자유의지에 기반한 ·윤리·종교 등의 사회 질서가 흔들릴 우려가 있고, 노력만능주의 분위기를 해쳐 좌절한 하류층이 막 나갈 가능성이 있는 등 결과적으로 국익을 저해할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 그러나 이러한 결정성 자체는 대다수 과학자들이 인정하는 것이며, 특히 신경 관련 분야의 경우 더욱 그렇다. 애초에 실험부터가 인과 관계를 확정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도 운명결정론을 마냥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대중의 오해는 근현대 경제적 낭만기에 대두된 운명개척론이 원인으로 보인다. 또한 '(과거의 기계론적 )결정론'을 부정하는 '비결정론(=확률론적 결정론)'에 대한 몰이해와, 한국의 철학사주풀이·해몽 따위로 인식되게끔 조장하는 개똥철학자·무속인도 그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운명결정론자는 많은 운명개척론자(자유의지주의자)가 남을 편하게 징죄하는 것과 달리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불쌍하게 여기고 용서할 수 있기에, 사회적으로 꼭 바람직하지 않다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15. 비단 재산뿐만 아니라 외모장애 여부 등을 결정하는 유전자와 정서적 환경도 중요하며, 노력 또한 집중력과 노력 가능한 환경에 의한 재능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16. 물론 이렇게 해도 지원금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생긴다. 선진국의 경우 이것을 생계로 삼는 엉터리 부모도 존재한다. 그리고 소아성애자가 더러운 속셈으로 입양하는 것을 다 막진 못하고 아이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17. 한국전쟁, 연평도 포격 사건, 천안함 피격 사건 등의 선례 참고.
  18. '영속성 생식기 발작 증후군'의 사례로 알 수 있듯 너무 오르가슴이 잦아도 일상 생활 영위가 불능하기에 자살 충동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지나치게 행복하다고 생각되면 차후 상대적으로 불행해졌을 때 낙차가 두려워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미리 걱정하는 경우도 흔하다.
  19. 그러나 사람들은 잊을 만하면 출산 사망 사고를 접하면서도 위험성을 잘 실감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과거에는 분만의 고통과 후유증을 경감할 방법도 거의 없었고, 임산부 사망률과 영아 사망률이 지금과 비교도 안 되게 매우 높았는데도 여성에게 출산을 강요했었다. 그리고 아기가 아기가 무사히 일정 기간 동안 자라 아버지에게 아버지에게 '인지'되기 전까지는 사람 취급도 안 했다.
  20. 실제로 중국은 계획생육정책을 시행했고 인도에서도 비슷한 정책을 시행했다. 한국도 군사독재 시절 산아제한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권장이 아닌 강제적인 방식으로 행해졌다는 점에서 인권을 침해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리고 저출산이 경제 성장 둔화의 원인이 되는 등 국익을 저해한다고 여겨지자 오히려 출산장려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