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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20일 (월) 07:03 판

틀:대한민국의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朴正熙
틀:날짜/출력 ~ 틀:날짜/출력

소개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호는 중수(中樹)이다. 본관은 고령 박씨이다.

생애

젊은 시절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가 만주국 신경군관학교(신징, 현 중국 장춘 소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일본 육사를 학사편입을 통해 입교, 57기로 졸업하였다. 졸업후 만주국 육군 제8단에 임관과 함께 배치되어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장교로 근무하였다. 이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친일파로 규정했지만[1]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파 목록에서 제외하였다. 이 일은 그의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언급되게 된다. 광복 후인 1946년 7월에 광복군 소속으로 귀국하하여 늦은 나이에 육군사관학교(당시명칭은 조선경비 사관학교)에 입교한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 좌익운동에 투신하던 형님 박상희 씨가 대구사건[2]에 휘말려 사망하자, 남로당 측의 제의로 남조선로동당에 입당, 여수·순천 사건이 발생한자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구형, 무기징역 선고를 받게 된다. 이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일본 육사 출신 백선엽(당시 계급 대령)에게 한번 도와달라고 말한 것이 인연이 되어 백선엽이 적극적인 구명운동을 벌이게 되었고 이후 만주군계 선후배 인맥들이 가세하여 남로당에 가입은 하였으되 활동을 한 것이 별로 없고, 수사에 협조적이었단 이유를 들어 감상적 공산주의자에 불과하다는 군내 좌익숙군 책임자인 특무대 장교 김창룡(당시 헌병 대위)이 석방하자는 의견을 제출했고 죽이기에 아까운 인물이란 판단을 받아들여 국방부, 미국의 승인을 거쳐 이승만의 서명을 얻어 불명예제대로 그쳤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알고 있던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모두 바쳤다. 흔히 이것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이라 언급되지만 실제론 큰 의미가 없었다.

이후 강제 예편되었으며 백선엽 대령의 주선으로 군문관(오늘날의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훗날 친인척이 되는 김종필 씨를 만난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복귀하였다. 이후 1953년 11월 준장이 되었고, 1954년에는 제2군단 포병 사령관, 1955년 제5사단 사단장, 1957년 제6군단 부군단장과 제7사단 사단장을 거쳐 1958년 3월 소장으로 진급한 뒤 제1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으며, 1959년에는 6관구 사령관이 되었다. 1960년에 군수기지 사령관, 제1관구 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제2군 부사령관에 이른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혼란을 보고 자체적인 쿠데타를 획책했지만 4.19 혁명이 일어나서 그만두었다. 첨언하자면, 아이러니 하게도 당시 군부는 미국에 의해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장교단으로 구성되었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집단중 하나였다.(OMG!) 4.19 혁명 이후 허정의 임시내각이 집권, 이후 윤보선 대통령의 제 2공화국이 들어섰으나 사회적 혼란은 계속되자 박정희는 접어두었던 쿠데타 계획을 다시 꺼내들어 육군사관학교 8기를 중심으로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켰다. 박정희는 이후 장도영 장군을을 포함한 이른바 알레스카 토벌작전을 통해 군부내 반대파를 숙청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올랐다가 4성장군으로 최종 예편후 민정 이양약속을 실현시키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윤보선 전 대통령과 접전을 벌이며 승리하여 제 5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1963년 12월부터 틀:날짜/출력까지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을 역임하게 된다.이 과정에서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60~70년대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한국의 경제는 이 시기 매년 2자리 수의 경제 성장을 이룩했으며, 현대 한국 경제의 기초가 되는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논란이 많다. 그는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집권을 추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을 탄합하였고, 물리적 정치적 테러 역시 개의치 않았다.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결국 이로말미암아 인권외교를 주창한 미국 카터정부와의 불화와 중화학 공업 몰빵으로 인한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경제가 집권 말기에 악화되기 시작하는 악재가 겹치게 되었고, 그로인해 YH무역 사건과 이를 도화선으로 부마항쟁이 시작된다. 이른바 유신 공화국의 종말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결국 틀:날짜/출력 궁정동에서 차지철 등과 함께 부마항쟁 진압에 대하여 논의하던중 5.16 혁명 동지이자 육사 동기인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쏜 총탄 에 의해 암살당했다(인터넷 상에서는 김재규가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는 발언과 함께 쏘았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김재규는 "차지철 너 이새끼 건방져"라는 말과 함께 차지철을 먼저 쏘고 그 다음 박정희를 쏘았다). 유언은 "난 괜찮아."였다고 한다. 김재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저격한 이유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으며, 그는 저격 후에도 자신의 본거지인 중정이 아니라 육군본부로 향함으로써 더욱 의문을 낳았다. 결과적으로 김재규는 이에 대하여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나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그리 한 것이었다. 아무런 야심도 어떠한 욕심도 없었다." 라고 증언하였을 뿐이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은 틀:날짜/출력 국장으로 치러졌다.

딸인 박근혜는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이 되었다.

평가

틀:학술 관련 정보 현재 대한민국에서의 박정희 대통령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이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의 행적, 5.16 군사정변으로 들어선 정부의 정당성, 유신헌법 등 통치 행위의 정당성, 그리고 70년대의 경제 발전 등이 주된 논쟁의 대상이 된다. 현대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발판을 마련한 것군사독재를 통해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점 이 두 가지 사실의 공과가 그 만큼 크기 때문. 중간론으로 박정희의 경제업적을 인정하는데 10월 유신이 필요했냐는 의견도 있다.

다만 좋은 점이건, 나쁜 점이건 현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이 만들어지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비교되는 인물

산업화를 이뤘다는 점에서 비스마르크와 스탈린과 비교받는 경우가 있다. 그 예로 조희연 사회학 박사가 있다.

개발동원체제는 위로부터 사회를 조직하고 재편하며 아래의 '동원'을 이끌어내는 체제이다. 국가가 단순히 정책 집행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 경제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사회를 재편하면서 특정한 방향으로 선도하는 역할을 한다. 사회에 대한 일종의 국가적 '기동전'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국가가 사회의 반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사회에 대한 역작용하는 체제이다. 근대로의 이행기에 나타났던 독일의 비스마르크 체제, 사회주의적 발전 전략을 구사했던 스탈린 체제, 한국의 박정희 체제,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경제체제, 현재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 타이완의 장제스 체제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3]

왜냐하면, 우파 만화가로 유명한, 경제만화를 썼던 이원복 교수에 따르면, 일본의 근대화와 산업화의 모델이 독일제2제국 비스마르크 정부의 이른바 기술 관료 주도형 경제를 참조하였다고. 또 기시노부스케로 대표되는 일본경제관료들은 여기에 만주국 산업화와 공업화를 위해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을 참조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독일제국의 헌법에 관심이 있었고(소위 대전 전의 그 형식적 법치주의 헌법) 그가 젊어서 복무한곳은 만주이며 한국전후 대한민국은 일본의 몸에 미국의 머리를 단 친구들(이원복)이라는 비유를 들었을 정도로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지지자일수록 스탈린과 비교하는 걸 거부하고, 비판자일수록 비스마르크와 비교하는 걸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사건사고

  1. 5.16 군사정변
  2. 경부고속도로
  3. YH무역사건
  4. 부마항쟁
  5. 전태일 분신자살
  6. 오일쇼크
  7. 10.26 사태


각주

  1. 친일인명사전 박정희 항목 전문(PDF내려받기) - 민족문제연구소
  2. 대구 폭동이라는 서술이 있었는데 일단 이 사건은 국가에서는 10월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고 "항쟁"이냐 "폭동"이냐 하는 역사평가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다.대구 10월사건 진실화해보고서
  3. 조희연,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5.16에서 10.26까지, 12~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