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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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宗植. 자는 윤조(允朝), 호는 퇴초자(退樵子).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의병장.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61년 3월 경기도 여주에서 판서 민영상(閔泳商)과 기계(杞溪) 유(兪)씨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 민씨로, 증조부인 민치병(閔致秉)은 명성황후의 부친인 민치록과 재당질간이다. 민영상은 명성황후의 조카뻘로 문과에 급제하고 충청도 관찰사를 비롯해 이조, 호조, 예조, 형조, 공조판서를 역임한 거물급 인사였다. 민종식 역시 약관 20세에 문과에 응시해 고종으로부터 직부전시(直赴殿試)[1]를 부여받은 덕분에 순조롭게 급제했다.

고종은 그를 매우 아껴 급제를 축하하고자 특별히 사악(賜樂)[2]해줬으며, 1886년엔 시강원 겸 사서로 진급시켰다. 이후 민종식은 출세를 거듭하여 1887년 3월 29일에 이조좌랑에 임명되었고, 그해 12월 말에 시강원 겸필선(侍講院兼弼善)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1월엔 성균관 대사성 겸 사간원 대사관에 봉해졌고, 1889년엔 이조참의, 1890년엔 홍문관 부제학 겸 규장각 직제학에 임명되었으며, 1893년엔 시강원 겸보덕에 임명되었다.

1895년 8월 19일,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그는 이 사건 이후 관직을 버리고 충청도 정산으로 낙향했다. 그러나 낙향 후 1년만인 1896년에 모친을, 1899년에는 부인과 사별했으며, 1901년에는 부친마저 떠나보냈다. 그는 1904년 이은식(李殷植)의 딸인 한산 이씨를 부인으로 삼고 여생을 초가에서 보내고자 했다. 고종은 그런 그에게 시강원 겸보덕, 궁내부 특진관, 장례원 소경 직임을 제수했지만, 민종식은 실제로 부임하지 않았다.

한편 민종식은 을미의병에 참가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그가 민씨 일족으로서 같은 민씨 고관들과 싸우는 것에 망설였기 때문이라면서, 본인은 직접 나서지 않았지만 훗날 을사의병 때 함께 한 김복한과 이용규가 그 대신 의병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반면 다른 이들은 전기 의병에 참여했던 홍주 유생들이 민종식을 소외시켰기 때문에 민종식과 홍주지역 재지유생 간에 소원한 관계가 지속되어왔으며, 민종식이 을사의병에서 영수가 된 것은 이러한 소원한 관계를 회복하는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민종식은 격분했다. 그는 김복한(金福漢)과 이설(李偰)이 을사오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기 위해 상경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인을 데리고 상경해 서울 전동의 여인숙에 투숙하면서 이설에게 상소문의 초래를 의뢰했다. 그러면서 민영익민영휘 등 여흥 민씨의 고관들을 만나 상소를 올리는 것을 의논했다. 하지만 그들이 상소를 올려봤자 소용없으니 그만두라고 권유한 데다 이설과 김복한이 구금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민종식은 할 수 없이 충남 정산으로 돌아갔다.

이설은 감옥에서 풀려난 뒤 홍주로 내려가 민종식에게 편지를 보내 의병을 일으키라고 권유했다.

최근 사론은 분발하여 모두 윤조(允朝)를 영수(領首)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안병찬과 임종식에게 권하여 예의를 갖추어 나아가도록 한 것이니 반드시 이들과 더불어 의거하여 후일 후회의 여한이 없도록 함이 어떻겠습니까. 일찍이 을미년의 의거 때는 윤조께 통고하지 못했는데, 매양 후회할만한 일입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일의 잘못을 되밟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고종은 내시 강석호를 민종식에게 보내 의병을 일으키라는 내용의 밀지를 받았다. 이에 민종식은 가산을 팔아 군자금 2천원을 마련하고 군수품을 준비했다. 그는 의병의 근거지를 자신이 거주하는 정산군 천장리로 삼고 의진의 편제를 정비하였다. 이때의 주요 인물로는 안병찬, 채광묵, 박창로, 이용규, 홍순대, 박윤식, 정재호, 이만직, 성재한 등이 있다. 이어서 통문을 발표하고 각국의 공사에게 청원문을 보냈다. 그 중에서 안병찬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통문만이 현재 전해진다.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나라가 망하고 땅을 잃은 일이 한없이 많지만 일찍이 군사는 있으되 한 번도 피를 흘리지 않고 활 한번 쏘아보지 않고서 담소하는 사이에 온 나라를 빼앗기는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도다. 불쌍한 우리 국민들은 농사를 지으려 해도 경작할 땅이 없고 장사를 하려 해도 기술을 쓸 데가 없으니 장차 그 놈의 노예가 되고 그 놈들의 고기밥이 될 것이다. 아! 오늘날의 화를 누가 불렀는가. 진실로 그 이유를 캐보면 6,7명의 적신(賊臣)들이 안에서 화를 만들어 나라를 들어다 남에게 준 것 아님이 없다. 동방의 피 끓는 남자로서, 누가 그 놈들의 살을 씹어서 한을 씻고자 아니 하겠는가.


(중략)

우리는 조석으로 분격하지만 한 손으로 하늘을 떠받들 힘이 없으므로 이에 큰 소리로 외쳐 팔방의 여러 뜻 있는 군자들에게 고하노라. 원컨대 눈앞의 안일에만 끌리지 말고 바싹 다가온 큰 화를 맹성하여 하나하나가 사기를 진작하고 동성상응(同聲相應)하여 단체를 만들어 충신의 갑옷을 입고 인의의 창을 잡아 먼저 적신의 머리를 베어 저자에 걸어 조금이라도 신인의 분함을 씻으며 만국의 공사와 화합하여 일차 담판하되 우리의 자주적 국권을 잃지 말자. 장차 무너질 종묘사직을 붙들며 죽게 될 백성을 구하여 후세에 할 말이 있도록 한다면 천만 다행이리라.

민종식은 1906년 3월 15일 광수장터에서 의병 600명을 모아 대장단을 세워 천제를 올린 뒤 이튿날 홍주성에 도착해 홍주 동문 밖 하우령에 진을 쳤다. 당시 성 안에 살고 있던 일본인이 6명이었는데, 민종식 의진은 이들을 먼저 처단하기로 결정하고 홍주성 안에 살고 있는 일본인을 잡아오면 머리 하나에 1천냥을 상금으로 주겠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홍주 군수 이교석은 의병 참여를 거부하고 민종식 의병대를 공격했고, 민종식은 광수장터로 후퇴했다.

3월 16일 이세영(李世永)이 의진에 당도하면서 세력을 늘린 민종식은 계획을 바꿔 공주를 공격하기로 했다. 선두 부대가 묵방에 이르렀을 때, 공주 수비대와 경병 300여 명이 청양읍에서 휴식 중이라는 척후병의 보고가 들어왔다. 의병은 진로를 화성으로 옮겨 합천 일대에 진을 쳤다. 이날 관군과 일본군은 오후 6시 묵방에 도착하여 탐문한 뒤 10시 경 합천 인근에 진입해 잠복했다. 3월 17일 오전 5시, 민종식 의병대는 관군-일본군에게 기습을 받아 안병찬, 박창로 외 40여 명이 체포되었고 의병들은 각기 흩어졌다.

민종식은 합천에서 패한 뒤 몸을 피해 각지를 잠행했다가 전주의 친족인 민진양(閔晉錫) 집에서 지내던 중, 조상수(趙尙洙)·이용규·이세영·이상구(李相龜)·이봉학(李鳳學) 등과 재기할 것을 의논했다. 그는 5월 9일 충청남도 홍산군 지티동의 주막에서 60여 인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선봉장으로 박영두(朴永斗), 중군장에 정재호, 후군장에 정해두를 임명했다. 그가 지티에서 봉기할 수 있었던 것은 처남인 이용규가 전주, 진안, 용담, 장수, 무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아준 덕이 컸고, 호남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던 김동신 역시 그에게 물자를 보내 의병을 일으킬 자금 확보에 보탬이 되어줬다.

민종식 의병은 여산에서 며칠을 머문 후 서천으로 진격해 300여 명의 병력을 확보한 뒤 서천군수 이종석(李鍾奭)을 감금하고 양총 7정 등 무기를 획득했으며, 군수의 인장을 이용해 의병을 모집했다. 이후 5월 14일에 비인을 함락하고 남포로 진격하던 중 일본인 한 명을 체포하였으며, 남포에 들어가 읍성을 공격해 4일간의 교전 끝에 함락시키고 남포군수 서상희(徐相喜)를 체포해 감금하고 관군 31명을 의병진에 귀순시키고 군량을 확보했다. 이때 남포의 유생 유준군이 33명을 거느리고 와 합세하자 그를 유병장(儒兵將)으로 삼았고, 남포 부근 용동에서 일본인 2명을 체포해 1명을 총살시켰고, 광천에서도 일본인 6명을 체포했다.

이후 결성에서 하루를 보낸 민종식 의병대는 홍주에서 장날이 열리는 5월 19일에 홍주성을 공격했다. 당시 의병대의 규모는 500~600명으로 홍주성에 주둔한 일본군보다 훨씬 많았다. 더구나 일본군은 탄약이 부족했기에 북문을 통해 덕산 방면으로 퇴각했고, 민종식 의병대는 홍주성을 공략했다. 당시 민종식 의병대에 가담했던 홍순대는 <해암사록>에서 의병대의 홍주성 입성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홍주성으로 가는 도중에 광천장터에 살고 있는 왜놈 6명을 사로잡았다. 4월 26일(양력 5월 19일) 홍주 남산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의 병력은 5천여 명에 이르렀다. 마침 이날은 홍주 장날이기도 하였다. 오후 4시쯤 성을 함락하려고 하였으나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홍주성의 4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우리 진영의 아주 날쌘 병정 2명이 성에 들어갈 곳을 찾다가 하수구를 발견하고 거기로 들어가 4대문을 열었다. 드디어 홍주성은 함락되었다. 대문을 연 두 병정은 신천문(申文天)과 천학순(千學順)이었다. 의병들이 성안에 살고 있던 왜적을 잡으려 했으나 그들은 성이 무너지기 전에 이미 달아나 버렸다.

홍주성을 공략한 의병대는 총기와 탄약, 기타의 무기 및 우편국에서 군자금을 확보하고, 5월 20일 경 군대를 6진으로 나눠서 4문을 지키게 하고 탄환을 군대의 창고에서 꺼내다가 대포를 성 4면에 배치했다. 이무렵, 참봉 송순목이 덕산 방면으로 포군 10여 명을 이끌고 의병을 모으러 가다가 일본 병사에게 잡혔다. 이에 민종식은 홍순대로 하여금 송순목을 구출하라고 지시했고, 홍순대는 송순목을 구출하고 일본 병사 13명을 생포했다. 생포한 일병 13명은 광천 장터에서 잡은 일본인 6명과 함께 북문에서 총살되었다. 여기에 신보균, 신현두, 이식, 안항식, 김상덕, 유호근 등 명망 있는 지방 유생들이 의병을 초모해 차례로 홍주성에 들어오니, 의병대는 총 멘 자 600명, 창 가진 자 300명, 유회군 300명 등 총 1,200명에 달했다.

한편 민종식은 고종에게 보낼 상주문을 작성해 이민학(李敏學)에게 줘 서울로 올라가게 했다. 상주문의 내용은 을사오적이토 히로부미의 처단 등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거기에다 거병(擧兵)한 이유를 들면서 의병을 일으킨 뜻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민학이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홍주성이 일본군 수중에 떨어짐으로써 이 계획은 중지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홍주성에서 패주한 뒤 공주 병력을 지원받아 20일부터 홍주성을 둘러싸고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들은 대포가 없었기에 성 공략에 애를 먹었다. 이후 추가 관병과 일본군이 증파되었고, 5월 27일 기리하라(桐原, 동원) 경시는 히지카타(土坊, 토방)경부와 한국인 경찰 송총순에게 순사 5명을 딸려 서문 밖을 정찰하도록 시켰으나 이들은 오히려 의병에게 체포되었다. 민종식은 29일 밤에 선봉장에게 명해 체포한 일본인 3명과 일진회원 2명을 총살하게 했다.

5월 30일, 일본군 보병 제60연대의 대대장 다나카(田中, 전중) 소좌는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반개 소대 그리고 전주수비대 1개 소대를 거느리고 홍주성을 포위한 뒤 밤 11시에 동문에서 약 500미터 지점의 숲속에 잠복했다. 다음날 새벽 2시, 기마병 폭발반이 동문을 폭파시켰고, 이를 신호로 하여 일본 육군 보병과 헌병대, 일본제국 경찰대가 기관총을 쏘며 성문 안으로 침입했다. 또한 2중대 1소대와 4중대 1소대는 각각 갈매지 남쪽고지와 교동 서쪽 장애물 도로 입구에서 잠복하여 의병부대의 퇴로를 차단했다. 결국 새벽 4시경 홍주성은 일본군에게 함락되었고, 일본군은 기마병을 파견해 의병대를 추격해 사살하는 한편 양민들 역시 다수가 학살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6년 6월 15일자 기사에 홍주성의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홍주군 정형을 들은즉 일본군대가 의병을 습격할 때 의병은 기미를 알고 흩어져 모두 제거하지 못하고 무고한 거주민을 남기지 않고 도륙하고 일로전쟁시 만주를 점령함과 같이 일본인민을 점차 이주케 할 계획이라 하니 한 사람의 무고한 백성을 죽이고 천하를 얻어도 사람들이 참지 못하는 바이거늘 하물며 한 주(州)의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고 한 성을 점령했으니 이를 가히 참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너무나 비참하고 눈물이 흘러내려 할 말을 잇지를 못하겠다.

홍주성 전투에서 일본군 병사는 10여 명이 사살된 반면 의병 측은 참모장 채광묵 부자와 운량과 성재평, 전태진, 서기환, 전경호를 비롯한 300명이 전사했고 체포된 의병의 수는 145명에 달했다. 민종식은 가까스로 빠져나온 뒤 재기를 도모했다. <만세보> 1906년 6월 30일자 기사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되었다.

향일 홍주서 패주한 의병 여당이 해미군으로 취합한다더니 다시 들은 즉, 이 당도(黨徒)들이 전라도로 도주하엿다가 최익현(崔益鉉)씨가 피착 상경한 후에 또 다시 도주하여 은밀히 정산군 등지로 모이는 정적이 있는데 민종식(閔宗植)의 지휘라 하는 설이 있다더라.

민종식은 예산의 한곡에 있는 처남 이남규의 집에서 재기를 도모했지만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에 일본 헌병 10여 명과 지방병 40여 명, 일진회원 수십명의 습격을 받았다. 민종식은 가까스로 공주로 피신했지만 결국 11월 20일 체포되었다. 그는 체포된 뒤 서울로 올라와 취조받았다. 그는 취조를 받으면서 다음과 같이 공술했다.

아! 저 일본과 병자년(1876)에 통상한 이후로 갑신년(1884) 10월의 변고가 있었고 또 갑오년(1894) 6월의 변고가 있었습니다. 을미년(1895) 8월에는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고 이어 을사년(1905) 10월에는 우리나라 정부의 대신들과 결탁하여 우리의 황제를 위협 공갈하고 5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우리의 국권을 약탈하고 우리의 백성들을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충성과 울분이 치밀어 참을 수 없어서 일본사람들을 쳐 없애고 5적들을 처단하여 우리의 국권을 회복하고 우리의 백성들을 구원하며 종묘 사직을 보존하여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함께 태평을 누리고자 계획하였습니다.


병오년(1906) 봄에 동지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같은 해 4월 18일에 홍산(鴻山)에 모여 서천(舒川)으로 들어가 총과 탄환을 취하고 남포(藍浦)에 들어가서도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보령(保寧)을 거쳐 결성(結城)에서 자고 같은 달 26일에 홍주성(洪州城)을 들어가 점거하니, 총을 멘 군사는 600여 명이고 창을 든 군사가 200여 명이었으며 무기를 가지지 못한 백면 서생(白面書生)이 300여 명이었습니다. 제가 대장이 되고 정재호·황영수(黃英秀)·이세영(李世永)은 서로 중군(中軍)이 되어 박영두(朴永斗)를 선봉(先鋒)으로, 정해도(鄭海燾)를 후봉(後鋒)으로, 채경도(蔡敬燾)를 유격장(遊撃將)으로, 최상집을 소모장(召募將)으로, 박윤식을 군량관(軍糧官)으로, 박제현·성재평(成載平)을 운량관(運糧官)으로, 이식(李侙)·곽한일·유준근·채광묵(蔡光默)·김광우(金光佑)·이용규(李容珪)·이상구(李相龜)를 참모(參謀)로 하고 김상덕(金商悳)을 군사(軍師)로 했습니다.

27일부터 윤4월 8일에 이르기까지 싸우기도 하고 지키기도 하다가 죽은 일본 사람이 10여 명 정도이고 생포하였거나 총살한 자는 전후에 걸쳐 도합 4명입니다. 같은 날 한밤중에 제가 패주할 때 저희 무리들이 성 동문에서 전사한 사람이 틀림없이 몇 명 있겠지만 그 수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저는 단신으로 성을 넘어 결성(結城)에 들어갔으며 각지로 돌아다니며 잠복해 있다가 공주(公州) 지방에서 체포되었습니다.

- 고종실록 고종 44년 7월 3일자 기사.

민종식은 1907년 7월 3일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다음날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법부대신 조중응이 민종식의 처벌을 경감해줄 것을 청했다.

평리원(平理院)에서 심리한 내란 죄인 민종식(閔宗植)에 대한 안건을 조사해보고 해당 범인을 《형법대전(刑法大全)》 제195조의 정사를 변경시키기 위하여 난을 일으킨 자에 대한 법조문을 적용하여 교형에 처하기로 하였습니다. 해당 범인으로 말하면 스스로 의병의 괴수가 되어 성을 함락하고 나라의 군사를 대항해서 생명에 화를 끼쳤으니 그 범죄를 추구하면 적용한 원래의 법조문에 부합합니다.


그런데 시국을 오해하고 망녕되게 여러 사람들을 동원하고 의리에 빙자하고 거사하여 스스로 죄를 부른 것은 전적으로 우매한 탓이었으며 제 개인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만큼 사정을 참작하여 법을 살펴보면 참작해주어야 하겠기에 본년 칙령 제35호에 의한 〈내각 관제(內閣官制)〉 제7조 7항에 의하여 내각회의(內閣會議)를 거친 후에 특별히 한 등급을 감해줄 것을 삼가 아룁니다.

- 고종실록 고종 44년 7월 4일자 기사.

고종은 이를 승낙해 민종식에 대한 처벌을 교수형에서 종신유배형으로 감형시켜 진도에 유배보냈다. 그 후 그는 1907년 12월 순종의 즉위를 맞아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말년을 조용히 보내던 그는 1917년 6월 25일 향년 5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민종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각주

  1. 초시와 복시를 면제받고 최종 시험인 전시에 직접 응시할 자격이 주어짐.
  2. 임금이 신하에게 악공을 보내주는 등 풍류(風流)를 내려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