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三笠宮崇仁
인물 정보
다른이름 스미노미야 다카히토(결혼 전 이름)
출생 1915년 12월 2일
일본 도쿄도 치요다구 고쿄(왕궁)
사망 2016년 10월 27일(향년 100세)
도쿄도 주오구 성루카국제병원
국적 일본
학력 가쿠슈인 초등과
가쿠슈인 중등과
일본육군사관학교
도쿄대학 문학부
직업 왕족(왕자)
종교 신토
배우자 유리코 비
가족 아버지 다이쇼 일왕, 어머니 데이메이왕후(사다코)
첫째 형 쇼와(히로히토) 일왕, 둘째 형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왕자, 셋째 형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왕자
형수: 고준왕후(나가코), 세츠코 비, 키쿠코 비
자녀: 장녀 고노에 야스코, 장남 토모히토 왕자, 차남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왕자, 차녀 센 마사코, 3남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
조카 히가시쿠니 시게코,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 다카츠카사 가즈코, 이케다 아츠코, 아키히토 상왕,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왕자, 시마즈 다카코
손녀 아키코 공주, 요코 공주, 쓰구코 공주, 센게 노리코, 모리야 아야코

일본의 왕족(왕자). 나루히토 일왕의 할아버지인 쇼와(히로히토) 일왕의 막냇동생. 오시루시는 삼나무이다.

탄생[편집 | 원본 편집]

1915년 12월 2일, 다이쇼 일왕과 데이메이왕후(사다코)의 4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칭호는 ‘스미노미야(澄宮)’, 이름은 ‘다카히토’로 지어졌다.

다카히토 왕자는 바로 위의 형인 노부히토 왕자보다도 10살이나 어렸고, 맏형인 히로히토 왕세자보다는 14살이나 어렸다. 당시 왕족의 자녀들은 친부모와 분리되어 유모와 담당 시종들에 의해 양육되는 것이 법도였으나, 늦둥이 막내인 다카히토 왕자는 친부모의 품에서 성장했다. 이는 퍽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후 1960년부터는 아키히토 당시 왕세자와 미치코 왕세자비에 의해, 일본 왕실에서도 아이들이 친부모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보편화된다.

학업과 활동[편집 | 원본 편집]

왕실학교인 가쿠슈인의 초등과를 거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군인이 되었고, 일본군에서 복무하며 중일전쟁에도 참가했다. 이때 중국어를 배웠다.

패전 후로는 도쿄대학에 입학하여 역사학을 공부했고, 도쿄여자대학 등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여 ‘왕자 강사’라는 별명을 얻는다. 중동 역사와 히브리어 등에 조예가 깊어, 관련 학회를 창립하여 명예회장을 맡기도 했다. 히로히토 일왕의 장손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왕자도 역사학자인 다카히토 왕자의 영향을 받아, 훗날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진학했다.

이외에도 작문, 시(詩), 왈츠 등에도 특기가 있어서 ‘동요(童謠)의 왕자’, ‘왈츠의 왕자’라는 별명들도 있었다.

한편 다카히토 왕자는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는 발언도 했고, 초대 일왕으로 알려진 진무(神武) 일왕에 대해서도 “실존인물이 아니라 신화(神話)의 인물”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막내인데다가 형들보다 한참 나이가 어려서 왕위 계승과 거리가 멀었으므로,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고 자유분방하고 거침없이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우익들로부터는 “빨갱이 왕자”라거나 “왕실에서 나가라”는 등의 폭언을 듣고 협박도 받았다.

1970년 영친왕이 사망하자 대한민국을 (비공식적으로) 방문하여 문상했는데, 영친왕의 아내 이방자(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사가 일본 방계 왕족 출신이라는 인연 때문이다. 1989년 이방자 여사가 사망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방한하여 문상했다.

결혼과 가정[편집 | 원본 편집]

1935년 성년(만 20세)이 되자 분가(分家)와 함께 ‘미카사노미야’라는 궁호를 받아, 방계 왕족 미카사노미야 가문을 창설했다. 1941년에는 화족(귀족) 다카기 마사나리(高木正得) 자작의 차녀 다카기 유리코와 결혼했다. 불임이었던 둘째 형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왕자ㆍ셋째 형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왕자와 달리 다카히토 왕자는 5남매를 낳았고, 어머니 사다코 대비는 늦둥이 막내아들에게서 태어난 손주들을 귀여워했다.

자녀교육에 있어 다카히토 왕자는 자유방임주의여서, 학업성적을 가지고 들볶거나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 다카히토 왕자는 아들을 3명이나 낳았으나 3명 모두 아들을 두지 못하고 부모보다 먼저 사망하여, 장차 미카사노미야 가문은 단절될 예정이다.

첫째[편집 | 원본 편집]

장녀 고노에 야스코(近衛寗子)는 1944년 4월 26일생으로, 세이신여학원 유치원에 이어 가쿠슈인 초등과ㆍ여자중등과ㆍ여자고등과를 거쳐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66년에 고노에 타다데루(近衞忠煇)와 결혼하여 왕족 신분을 상실했다.

결혼 당시 타다데루는 일본적십자사 사원이었고, 훗날 사장에까지 오른다. 그의 형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煕)는 제79대 일본 총리를 지냈다. 본래 타다데루의 성씨는 호소카와였으나 외가인 고노에 가문에 양자로 입적되어 성씨가 바뀐 것이다. 타다데루의 외할아버지는 제34대, 38대, 39대 일본 총리를 지낸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이다.

타다데루와 야스코는 1970년 7월 18일 외아들 고노에 타다히로(近衞忠大)를 낳았다. 며느리 구니 케이코(久邇桂子)는 고준왕후의 큰오빠 구니 아사아키라(久邇朝融)의 차남인 아사타케(朝建)의 장녀이다. 타다히로와 케이코는 2남 1녀를 낳았다.

둘째[편집 | 원본 편집]

장남 토모히토 왕자는 1946년 1월 5일생으로, 가쿠슈인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제92대 일본 총리를 지낸 아소 다로(麻生太郞)의 여동생인 아소 노부코와 결혼했다. 1981년 큰딸 아키코 공주를, 1983년 작은딸 요코 공주를 낳았다.

어려서부터 말썽꾼이었으며, 아버지 다카히토 왕자와 달리 우익 성향이었다. 그리고 두 딸도 토모히토 왕자로부터 우익적인 성향과 행보를 물려받았다.

2012년 6월 6일 사망했다(향년 66세). 장남이기에 남동생들과 달리 분가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미카사노미야 가문의 가장이 될 예정이었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여 무산되었다.

한편 그의 큰딸 아키코 공주는 “미카사노미야 가문을 지키기 위해, 시집가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왕실에 남겠다”고 선언했다.

셋째[편집 | 원본 편집]

차남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桂宮宜仁) 왕자는 1948년 2월 11일생으로, 가쿠슈인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호주(오스트레일리아)에 유학도 다녀왔다. 형제들과 달리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학창시절 학우들로부터 “왕족들은 세금으로 잘 먹고 잘 산다”고 놀림을 받아 상처가 되었다고 한다.

40세 무렵부터는 이런저런 병으로 고생했는데,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고 보행도 부자유스러워 휠체어를 사용했다.

본래 궁호는 차남 이하의 왕자가 결혼하여 가장이 되면 받는 것이지만, 요시히토 왕자는 예외적으로 결혼하지 않고도 궁호를 받았다. 그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소문도 있지만 일본 왕실에서 사생아는 가문을 계승할 수 없기에, 설령 정말로 사생아가 있다 하더라도 소용없는 일이다.

2014년 6월 8일, 도쿄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에서 사망했다(향년 66세).

넷째[편집 | 원본 편집]

차녀 센 마사코(千容子)는 1951년 10월 23일생이다.[1] 쇼토유치원가쿠슈인 초등과ㆍ여자중등과ㆍ여자고등과에 이어 가쿠슈인대학 법학부 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에는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대학으로 유학을 갔는데 “마사코 공주가 학업에 전념하지 않고 방탕하게 놀면서 생활하고 있다”는 소문이 일본에까지 들려오는 바람에, 어머니 유리코 비가 크게 걱정하여 프랑스까지 직접 쫓아가서 일본으로 데려오려 했다고 한다. (훗날 남동생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의 장녀인 쓰구코 공주도, 젊은 시절의 작은고모와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

어찌어찌 무사히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로는, 유학 시절 배운 프랑스어를 활용하여 외국인들과 접견하는 등의 공무를 수행했다. 1983년에는 5살 연하인 센 소시츠(千宗室)와 결혼하여 왕족 신분을 상실했다. 이듬해에는 장남 아키부미(明史), 1987년에는 장녀 마키코(万紀子), 1990년에는 차남 다카부미(敬史)를 낳았다.

센 가문은 대대로 다도(茶道)를 가업으로 계승해온 가문으로, 소시츠에 이어 다카부미가 가업을 계승하게 되었다. 장남 아키부미는 시인(詩人)이 되었고 키쿠치(菊地) 가문에 입적했으며, 장녀 마키코는 사카다(阪田) 가문으로 시집갔다.

다섯째[편집 | 원본 편집]

3남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는 1954년 12월 29일생으로[2], 5남매 중 막내이다. 가쿠슈인 초등과ㆍ중등과ㆍ고등과를 거쳐 가쿠슈인대학 법학부를 졸업했고, 이후 캐나다 퀸스대학교에 유학했다.

1984년 돗토리 히사코와 결혼하여 분가, 다카마도노미야 가문을 창설했다. 1986년 장녀 쓰구코 공주, 1988년 차녀 노리코 공주, 1990년 3녀 아야코 공주를 낳았다. 2002 한일 월드컵 때는 아내 히사코 비와 함께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2002년 11월 21일, 아내와 어린 딸들을 남겨두고 급사했다(향년 47세). 막내이지만 형들과 누나들보다도 더 먼저 사망했다.

각주

  1. 코무로 마코(1991년생)와 생일이 같다.
  2. 카코 공주(1994년생)와 생일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