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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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를 하나로 묶은 세계 제국
몽골 제국과 현대 몽골족의 주요 거주지

몽골 제국(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ᠦᠯᠦᠰ 예케 몽골 울루스)은 1206년 몽골리아에서 발흥한 유목 제국이다. 일반적으로 1206년 칭기스 칸이 몽골리아를 통일한 것을 건국 시점으로 본다. 건국 후 1세기 가까이 이어진 정복전을 통하여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일대를 호령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몽골 제국은 세계사상 가장 거대한 연속적 육상 제국이었으며, 세력 판도는 서쪽으로는 레반트, 이란, 동유럽부터 동쪽으로는 중국, 몽골리아, 만주까지 미쳤다.

그 거대한 영역만큼 몽골이 세계사에 남긴 영향 역시 지대했다. 몽골의 지배 하에 지중해 세계와 동아시아 세계 양쪽이 연결되었으며, 상업과 기술, 문화가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동아시아와 지중해 세계는 처음으로 서로를 "세계"의 일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전에 없이 활발해진 교류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가 잉태된 시기였던 것이다. 이 시기를 팍스 몽골리카, 즉 몽골의 평화라고 부른다.

14세기까지 각 지역의 몽골 정권들은 강력한 힘을 발휘했으나, 14세기 중반 이후 서서히 그 힘이 약화되어 15세기 무렵 몽골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몽골 제국의 문화와 정치는 세계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칭기스 칸 이전의 초원 세계

몽골인의 몽골리아 이주

훌룬부이르 지역 (빨간 표시)

몽골리아 초원이라는 이름은 "몽골"에서 유래된 것이다. 하지만 이 지역이 항상 몽골인의 영역이었던 것은 아니다. 4세기 경 투르크계 유목민 고차가 유입되었으며, 이후 강성해진 투르크계 유목민들은 6세기부터 9세기 중반까지 돌궐, 위구르 등 유목 제국을 세워 몽골리아를 지배했다. 이 시기 몽골계 유목민 세력은 훌룬-부이르 지방을 경계로 몽골리아 초원 동쪽에 머무르며 투르크계 유목 제국들과 대립했다. 이들은 『구당서』 등의 중국 기록에서 '실위(室韋)'로 불리는 집단이었다. 실위라고 불리던 집단 가운데 몽올(蒙兀) 실위가 후에 "몽골"이라고 불리게 되는 집단이라고 추정된다. 중국측 사료에서는 달단(達靼) 실위라고 불리는 집단의 활동이 눈에 띄는데, 이들이 바로 타타르였다. 타타르는 돌궐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르는 등 강대한 세력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840년 위구르 제국이 키르기즈 인들의 공격으로 멸망한 이후에야 몽골계 유목민들은 서서히 몽골리아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이동한 집단은 타타르였다. 이들은 10세기 후반 이미 몽골리아 중앙부에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1]

요나라의 세력 판도

"몽골"이라고 불리는 집단의 이주는 훨씬 늦어 12세기 중반 무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몽골인들의 특징적 매장 양식[2]의 분포를 살펴 보면 이들의 분포를 알 수 있다. 몽골인들은 아르군 강 유역에 머물다 11세기 무렵에는 오논 강 하류에, 12세기 중반 무렵에는 오는 강 중류 유역에 진출했던 것으로 보인다.[3] 몽골인들의 이주가 늦은 것은 앞서 자리잡은 타타르가 위협을 가했을 뿐 아니라, 10세기 전반 몽골 초원의 신흥 강자로 부상한 거란의 존재 때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만주에서 몽골리아 동남부에 걸친 요나라를 건설한 거란인들은 장벽을 건설하고, 요새를 구축하는 등 타타르를 비롯한 몽골계 유목민들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1125년 요가 멸망하면서 몽골인들의 몽골리아 진출을 막던 힘이 약화되었다. 게다가 11세기 이후 북방 고원의 기후가 한랭화되자 몽골인들은 유목 생활의 영위가 어렵게 되었다. 몽골인들은 본격적으로 몽골리아 초원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12세기 후반~13세기 초 몽골리아의 정세

12세기 후반 각 울루스의 분포

12세기 초원의 사회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사회였다. 11세기부터 시작된 초원 기후의 한랭화, 몽골리아 전체를 다스리는 강력한 유목 제국의 부재 등으로 인해 모든 유목 집단이 생존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몽골리아 유목민의 사회는 전쟁과 약탈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사회였다. 유목민들은 생존을 위해 좀 더 강한 집단에 의탁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집단 간에도, 개인 간에도 좀 더 수직적인 질서가 들어섰다. 세월이 흐르면서 몽골리아는 몇 개의 거대 '울루스'의 세력권으로 나뉘게 되었다.

울루스는 몽골리아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울루스는 '오복'들의 연합체였다. 오복(Oboq)은 한 가문이 이끄는 유목민 사회의 단위로, 대체로 "씨족", "가문"으로 번역된다. 울루스의 지배층은 여러 오복들을 군사적, 정치적으로 통솔하며 국가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했다. 단, 울루스는 영역 국가의 개념이라기보다 사람의 집합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지녔다.[4]

북방에는 삼림 지역에 접한 오이라트와 메르키트 울루스가 있었으며, 동쪽에는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는 타타르 울루스가 자리했다. 타타르는 교역과 약탈을 수행하기 유리한 중국과 접한 위치에 자리했으며 , 철 산지를 장악하여 매우 강력한 세력으로 군림하였다. 타타르 동북방에 몽골 울루스가 위치했다. 몽골인들은 몽골리아에 늦게 진출하였지만 전쟁을 통하여 서서히 영역을 확장시켜 부르칸 칼둔 산 부근에 근거지를 두었다. 타타르의 서쪽에는 케레이트 울루스가 있었다. 케레이트 울루스 서쪽, 알타이 산맥 부근에는 나이만 울루스가 있었다. 나이만 울루스의 귀족층은 투르크 계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위구르와 교류하며 높은 문화 수준을 누렸다.[5]

몽골 울루스의 세는 점차 확장되었다. 금의 건국 이후 초원에 대한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중국 변경 지대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1135년부터 시작된 약탈전은 1139년 몽골군이 금 토벌군을 격파하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몽골군은 금의 요새 20여 개를 점령하는 등 금을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결국 1146년 금과 몽골 사이에 화평 조약이 체결되었다. 금이 몽골 지도자 올룬 베일레(카불)을 몽골 국왕으로 임명하고 매년 콩, 소, 양, 쌀을 보내겠다는 조건의 조약이었다. 이 조약 이후 카불은 몽골 전체의 칸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금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정세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금나라는 각 울루스 간의 갈등을 이용하여 몽골 울루스를 견제한다. 카불 칸의 뒤를 이은 암바가이 칸은 타타르인들에게 붙잡혀 금나라로 압송되었으며, 금나라에서 나무 나귀에 못박혀 처형된다. 그는"너희들의 다섯 손가락의 손톱이 다 빠지도록, 너희들의 열 손가락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나의 원수를 갚아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6]

이처럼 당시 몽골리아 초원은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에 입각한 질서가 지배하고 있었다. 유목민들은 일상적으로 전쟁을 벌이고, 서로를 죽이고, 서로를 약탈했다. 몽골비사에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한다.

그대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별이 있는 하늘은 돌고 있었다
여러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
제 자리에 들지 아니하고
서로 빼앗고 있었다
흙이 있는 대지는 뒤집히고 있었다
모든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
제 담요에서 아니 자고
서로 공격하고 있었다.[7]

칭기스 칸의 등장

버려지다

예수게이 (상상도)

칭기스 칸은 보르지긴 오복 출신이며, 이름은 테무진이다. 12세기 중반 이후 카불 칸, 암바가이 칸, 쿠툴라 칸 등 보르지긴 오복의 지도자들은 몽골 울루스 전체의 칸을 칭했다. 그러나 쿠툴라 칸 사후 보르지긴 오복은 쪼개졌다. 암바가이 칸 가문인 타이치우드와 카불 칸 가문인 키야트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다. 칭기스 칸의 아버지인 예수게이는 키야트, 암바가이 칸의 손자 타르쿠타이는 타이치우드를 각각 이끌었다. 두 가문[8]은 협력을 하기도 했지만 갈등하는 일도 많았다. 어느 한 쪽도 주도권을 잡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어 보르지긴 오복 전체를 대표하며 몽골의 칸을 칭하는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1171년 예수게이가 타타르인들에게 독살당하면서 보르지긴 오복의 주도권이 타이치우드로 넘어간다. 예수게이의 맏아들이었던 테무진의 일족은 순식간에 그들을 따르던 전사들과 친족 대부분에게 버림받게 된다. 테무진이 성장하자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친족들이 그의 일족을 공격하여 그를 포로로 잡는 일까지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돌아온 그의 곁에는 동생들과 어머니 뿐, 지지 세력이라고는 없었다. 테무진은 이 시절을 이렇게 표현했다.[9]

그림자말고는 벗도 없고, 꼬리말고는 채찍도 없다

이족과의 연합

울란바토르에 있는 보오르추의 동상

테무진 일족은 살아남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족(異族)과의 연합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생전에 정혼해준 보르테(ᠪᠥᠷᠲᠡ)와 결혼이 그 시작이었다. 혼인을 통해 두 가문이 사돈 관계를 맺는 것을 "쿠다(Quda)"라고 불렀다. 보르테는 콩키라트(옹기라트라고도 불림)라는 집단 출신이었다. 이들은 큰 세력은 아니었으나, 중국과의 교역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어 부를 누렸다. 테무진은 아버지와 의형제 관계를 맺은 토그릴(후에 옹 칸이라는 칭호를 받음)에게 찾아갈 때 혼수품으로 받은 모피 외투를 바쳤는데, 콩키라트와의 연합을 통하여 얻은 부를 활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토그릴은 케레이트 울루스의 군주로, 예수게이와 의형제, 즉 '안다(Anda)'를 맺은 사이였다. 언급했듯 테무진은 모피 외투를 들고 그에게 찾아가 의부자 관계를 확인받았다. 안다는 피로 맺어진 형제라는 의미로, 안다를 맺은 사이에는 서로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주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된다. 안다는 개인적인 관계를 넘어 두 집단 간의 매우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동맹을 의미했다. 테무진 스스로도 여러 집단의 지도자들과 안다를 맺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자지라트의 지도자 자무카와의 관계였다. 보르테가 1184년 약탈당했을 때 자무카는 테무진을 도와 보르테를 되찾아왔으며, 이후 테무진 일족과 자무카는 한동안 같이 생활하기도 했다. 망쿠트의 지도자 쿠일다르와도 안다를 맺었다. 쿠일다르는 케레이트와의 전투에서 테무진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바쳤다.

그 외에도 '친구, 벗' 등을 뜻하는 누케르(nöker)라는 방식도 사용되었다. 테무진과 처음으로 누케르가 된 사람은 보오르추였다. 보오르추는 말을 도둑맞은 테무진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말을 빌려주었으며, 말 도둑을 함께 추적해 말을 되찾도록 도와주었다. 누케르는 평등한 관계로, 단순한 친구 관계를 넘어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군사 동맹의 성격 역시 지녔다. 테무진칭기스 칸으로 즉위한 후에는 누케르의 성격이 평등한 관계에서 주종관계로 변화하였다. 칭기스 칸의 누케르들은 칭기스 칸에게 충성하는 전사 집단으로 활약하며 신생 몽골 제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10]

초원의 지배자로

1182년, 테무진은 생존을 위해서 아버지와 안다를 맺었던 토그릴(ᠲᠥᠥᠷᠢᠯ)에게 찾아가 의부자 관계를 확인받았다. 옹 칸은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케레이트 울루스의 군주였다. 케레이트와의 연합으로 테무진 일가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해 허덕이지는 않게 되었다.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던 테무진 일가에 다시 고난이 닥친 것은 1184년이었다. 예수게이는 후엘룬을 메르키트로부터 약탈하여 결혼했는데, 이 일 이후로 메르키트는 예수게이의 일족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1184년, 메르키트는 테무진 일가를 습격하여 그의 아내 보르테를 약탈한다.

아직도 이렇다 할 지지 세력이 없던 테무진은 토그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 때 테무진은 혼수품으로 받았던 모피 외투를 옹 칸에게 바치며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토그릴테무진에게 2만의 병력을 주었으며, 자무카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다.[11] 자무카(ᠵᠠᠮᠤᠭ ᠠ)는 테무진과 어릴 적 안다를 맺은 사이로, 당시 막 자지라트 (쟈다란이라고도 불림)의 군주로 올라선 상태였다. 자무카는 흔쾌히 테무진을 도와 메르키트를 공격했다. 토그릴과 자무카의 협력으로 테무진은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보르테를 되찾은 기쁨도 잠시, 테무진은 곧 보르테가 임신을 한 상태임을 알게 된다. 보르테는 메르키트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칠게르라는 인물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이 때문에 보르테가 밴 아이가 칠게르의 아이인지, 테무진의 아이인지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보르테가 아이를 낳자 테무진은 이름을 '손님'이라는 뜻의 '주치(Jöchi)'로 짓고 그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였다. 이로서 논란은 일단락되었지만, 주치의 혈통 문제는 칭기스 일족 내에서 분쟁의 씨앗으로 남게 된다.

이후 테무진 일족과 자무카는 같이 생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둘 사이는 점차 악화된다. 테무진이 점차 세력을 불려나가면서 둘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형성된다. 결국 테무진1186년 자무카와 결별하고 친족들만으로 구성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몽골 울루스의 칸으로 즉위한다 (1차 즉위). 그러나 이는 이름 뿐인 즉위였다.

1187년, 테무진은 자무카와 타이치우드 세력 연합군과 전투를 치르게 된다. 이를 달란-발주트 전투라고 부른다. 이 전투에서 테무진은 대패를 당한다. 케레이트 울루스의 토그릴 역시 실각하여 서요(카라키타이)로 쫓겨났다. 테무진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까지에는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1196년, 금나라 군대는 케레이트와 몽골 일부 세력과 연합하여 타타르를 정벌하였다. 테무진과 토그릴은 각각 몽골군과 케레이트군을 이끌었다. 승전 이후 토그릴은 케레이트 칸의 자리를 되찾았으며, 금으로부터 옹 칸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테무진 역시 몽골 울루스를 지배하는 위치에 다시 설 수 있었다. 이후 테무진1198년 케레이트와 연합하여 몽골을 견제하던 나이만 울루스를 공격하는 등 몽골 울루스의 세를 빠르게 불려나갔다.

테무진에게 복종하지 않은 나이만 집단들과 타이치우드 세력은 자무카와 연맹했다. 자무카는 이들 사이에서 쿠릴타이를 통해 '모든 것을 다스리는 군주'라는 뜻인 구르 칸으로 추대되었다. 1201년, 자무카와 테무진은 쿠이텐에서 맡붙게 된다. 쿠이텐에서 테무진은 천운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쿠이텐 전투 이후 자무카는 다시는 테무진과 필적할 만한 세력을 회복하지 못한다.

이 시기 이후 테무진은 케레이트의 도움 없이 독자적인 군사 행동을 개시한다. 바로 타타르 원정의 시작이었다. 테무진에게 타타르는 용서할 수 없는 적이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타타르를 정복한 몽골인들은 수레 굴대보다 키가 큰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나머지는 몽골 울루스 안으로 흡수하였다고 한다. 여성들은 몽골 울루스의 남성들과 결혼시켰으며, 아이들은 몽골 울루스에서 양육하도록 한 것이다.

칭기스 칸과 옹 칸

토그릴 (옹 칸)은 테무진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지만, 이 시기부터 테무진과 옹 칸과의 관계가 악화된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옹칸의 아들 셍굼은 초원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던 테무진이 아버지 옹 칸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시기하여 테무진을 암살하고자 하였다. 옹 칸은 수 차례 거절하다가 결국 아들의 말에 따라 테무진과의 협력을 중지하였다. 테무진은 이를 알고 셍굼을 격파하였다. 이 기록만을 보면 관계 악화의 주범은 옹 칸이 아니라 셍굼이지만, 관계 악화에는 아마도 무섭게 불어나는 테무진의 세를 견제하고자 하는 옹 칸의 의중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쿠이텐 전투 당시부터 옹 칸은 테무진을 견제하기 위해 자무카와 연합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12]

옹 칸과 테무진 간의 관계는 계속해서 악화되었다. 결정적으로 둘 사이의 갈등이 폭발한 것은 결혼 문제 때문이었다. 옹 칸은 단독으로 나이만 원정을 떠났다가 처절한 패배를 당하고 서요, 천산 위구르 등을 떠도는 비참한 신세가 된다. 결국 그는 테무진에게 손을 벌렸고, 테무진은 옹 칸을 도와 왕위를 되찾게 해 준다. 이후 테무진은 자신의 맏아들 주치와 옹 칸의 딸을 결혼시키기를 청한다. 그러나 옹 칸은 테무진의 요청을 거절한다. 이는 초원의 사회에서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이로서 둘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치닫게 된다. 결국 옹 칸은 자무카와 연합하여 1203년부터 테무진과 전쟁에 돌입한다. 전쟁 초반에는 테무진열세에 몰려 퇴각하였으나, 1204년 케레이트를 습격하여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어서 테무진은 메르키트와 나이만에 대한 정벌을 시작하여 1206년 둘을 정복한다.

1205년 자무카가 수하들의 배신으로 잡혀와 처형된 후, 칭기스 칸1206년 다시금 쿠릴타이를 열고 칭기스 칸으로 등극한다. 이를 2차 즉위라고 부른다. 이로서 1206년은 유목민의 역사에서 거대한 전환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206년, 칭기스 칸 휘하에 통일된 몽골리아의 유목민들은 밖으로 뻗어나가기 위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초원 사회의 재편

칭기스 칸으로 즉위하기 전부터 진행되던 초원 사회에 대한 개혁은 그가 몽골리아를 통일하고 칭기스 칸으로 등극한 1206년부터 가속화된다. 초원 사회는 봉건적인 구조를 띠었다. 유력 가문들이 각 오복, 나아가 각 울루스의 정치를 좌지우지하였으며, 울루스, 즉 국가의 조직 역시 분권적이었다. 군주가 직접 다스리는 영역이 있고, 나머지 영역은 휘하의 수령들이 분봉하여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칭기스 칸은 분봉의 구조는 따르면서도 가문 중심의 질서는 파괴하는 노선을 택했다.

만호의 배치

테무진은 새로이 천호제를 마련했다. 천호는 1천명의 전사를 배출하는 집단이라는 뜻이다. 그는 그에게 충성했던 자들 가운데 88명의 천호장을 뽑아 95개의 천호를 맡겼다. 천호 휘하에는 백호, 십호 등의 하위 조직들이 구성되었으며, 백호장과 십호장 역시 칭기스 칸에게 충성했던 사람들로 채워졌다. 천호는 무칼리가 이끄는 좌익 만호, 보오르추가 이끄는 우익 만호, 그리고 보로굴이 이끄는 중앙 만호 세 개 만호로 나뉘어 배속되었다. 이렇게 구성된 천호제는 신생 몽골 제국의 기초가 된 사회, 군사 조직이었다. 이들은 몽골 제국이 정복전을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 군사력의 중추를 담당하였다.[13]이는 유력 가문 중심의 질서를 타파하고 칭기스 칸에 대한 충성으로 짜인 새로운 질서를 마련한 것이었다.

동시에 칭기스 칸은 자신의 친위대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을 시작했다. 이전 시대 몽골 수령들 역시 친위 부대를 조직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칭기스 칸이 조직한 1만명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의 친위대는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이를 케식(Keshig)이라고 불렀다. 칭기스 칸의 케식의 지도부를 맡은 것은 칭기스 칸의 누케르들과 보골(Boghol)들이었다. 보골이란 '집의 아이들'(ev oghlan)으로도 불리던 노예들이었다. 주인과 직접적으로 혈연관계가 없지만 한 익, 혹은 한 가문 내에서 세습의 대상으로 여겨진 이들이었다. 이들은 보통 노예들보다 높은 지위를 누려 주인을 도와 전쟁에서, 혹은 평시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일이 많았다. '집의 아이들'이라는 명칭은 이들의 이 같은 지위를 명확히 보여준다. 칭기스 칸 가의 보골들은 정복전에서도, 국가 경영에서도 주도적인 위치에서 활동했다.[14]

케식의 1만 병력을 채운 것은 천호장, 백호장, 십호장들의 아들들이었다. 새로 임명된 천호장, 백호장, 십호장들은 아들을 "투르칵(turqaq, 인질)"로 보내고, 아들의 수행원(종자 從子)를 보낼 것을 요구받았다. 각 수령은 자신의 지위에 따라 3~10명의 종자를 같이 보냈기에, 케식의 실제 병력은 1만보다 훨씬 컸을 것이라고 한다. 케식은 4개 반으로 나뉘어 3일 단위로 교대해여 칭기스 칸을 호위했다. 각 반의 수장은 보오르추, 무칼리, 보로쿨, 칠라운이 맡았으며 그들의 사후에는 그들의 자손들이 맡도록 하였다.[15] 케식은 호위병이었을 뿐 아니라 요리, 양떼 감독, 통역, 문서 작성 등 여러 직책으로 나뉘어 칭기스 칸의 일상적 업무를 보조했다.

케식은 "은총", 혹은 "당번"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이는 케식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명칭이다. 케식의 탄생은 칭기스 칸의 은총을 직접적으로 받으며 그와 강력한 유대감을 형성한, 칭기스 칸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대규모 전사 집단의 탄생이었다. 그들은 제국 전체를 다스려 나가는 데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엘리트 전사, 정치 집단이었던 것이다.[16]

또한 칭기스 칸은 "자삭 (Jasaq)"혹은 "야사 (yasa)"라고 불리는 법을 공포했다. 이로서 칭기스 칸이 주도하는 초원의 질서는 좀 더 체계적인 형태를 갖추어 안정화되었다. 자삭은 칭기스 칸 사후 우구데이 대에 책자 형태로 정리되어 예케 자삭, 즉 대자삭으로 불리게 된다. 현재에는 자삭의 일부만 전하나, 사회법, 군율 등을 포괄한 법이었음은 분명하다.

분봉

몽골리아 통일 이후 칭기스 칸은 자신의 동생들과 아들들에게 분봉을 실시한다. 천호를 분배하여 아들들과 동생들이 각자 맡은 영역을 나눈 것이다. 우익, 즉 서쪽에는 아들 4명의 울루스를, 몽골리아 본토에는 자신이 직접 장관하는 중앙 울루스(ghol-un-ulus)를, 동쪽에는 4명의 동생과 어머니의 울루스를 두었다. 후에 어머니가 사망한 후 테무게가 어머니의 울루스를 같이 맡게 되면서 4제자(諸子) 울루스와 중앙 울루스, 4제제(諸弟) 울루스로 이루어진 체제가 성립되었다. 몽골 제국은 여러 울루스의 연합체라는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된다.[17] 이로서 몽골 제국은 유목 제국으로서 완비된 체제를 지니게 되었으며, 밖으로 뻗어나갈 준비를 마쳤다.

정벌과 회유

이후 칭기스 칸 휘하의 몽골 울루스는 밖으로 그 칼날을 돌리기 시작한다. 1207년 키르기즈, 오이라트 등 삼림민(森林民, 수렵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을 복속시켰으며, 1208년, 카라키타이로 도망친 나이만의 잔당을 토벌하였다.[18] 1209년에는 탕구트를 시작으로 정벌의 길에 오른다. 3 세대에 걸쳐 이루어질 정복전의 시작이었다. 아직 몽골 울루스의 깃발 아래 몽골리아가 통일된지 채 5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왜 몽골인들은 그렇게 급히 바깥으로 뻗어나가야만 했던 것일까?

그 답은 유목 경제의 낮은 생산성에 있다. 통일된 유목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화가 소모된다. 전사 집단을 유지하고 군주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는 적절한 포상과 의례가 필수적이다. 게다가 유목민은 서로를 약탈하며 필요한 물자를 취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상호 약탈이 금지된 새로운 체제가 탄생한 이상,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외부 물자를 끌어와야 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칭기스 칸 대의 전쟁의 목적은 상대를 굴복시켜 공물을 바치게 하는 것에 가까웠다. 정주민 지대를 직접 지배한다는 개념은 아직은 미약했다. 수 세기에 걸친 상호 전쟁으로 단련된 몽골리아의 유목민들은 칭기스 칸의 지휘 하에 그 저력을 세계에 드러내기 시작한다.

몽골 주변 국가들의 판도

칭기스 칸은 정복자, 전쟁 군주로 유명하지만, 스스로 복속해오는 상대에게는 매우 너그러웠다. 1209년천산위구르가, 1211년에는 카를루크가 스스로 복속을 청하자 칭기스 칸은 크게 기뻐하며 그들의 군주에게 딸을 시집보내 우대하였다. 이후 위구르인들은 몽골 정권의 두뇌 집단으로 활약하며 제국에 반드시 필요했던 정치적 지식을 전수했다. 위구르 문자가 몽골 문자로 채택된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또한 뛰어난 장사 수완을 발휘하여 몽골 시대 동안 이란인들과 쌍벽을 이루는 상인 집단으로 성장했다.[19] 한편 카를루크 인들의 언어는 후에 차가타이 울루스의 공용어가 되어 차가타이어로 불리게 된다. 몽골인들은 스스로 복속해오는 집단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고,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칭기스 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배신 행위를 하는 집단은 가차없이 짓밟았다. 이는 약탈에 익숙한 유목민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었으나 주변국에 몽골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 자발적인 복속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1209년 서하 (탕구트 정권) 정벌은 위구르와 카를루크가 스스로 복속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렇게 몽골리아 서방의 세력들을 정리한 후, 칭기스 칸의 눈길은 동방을 향했다. 몽골의 오래된 원수, 금나라에 대한 정벌이 시작된 것이었다.

금 정벌

금은 몽골인들의 원수였다. 특히 암바가이 칸의 처형은 몽골인들에게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칭기스 칸은 금나라 원정 이전, 하늘에게 제사를 올리며 다음과 같은 맹세를 했다고 한다.

오래된 신이시여! 알탄 칸(금나라 황제)이 먼저 분란을 일으키고 우리에게 증오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 타타르 종족들이 오킨 바르칵과 암바가이 칸을 붙잡아 그에게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저의 조부와 부친의 형들이었는데, [알탄 칸은] 무고한 그들을 죽였습니다. 나는 그들이 흘린 피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께서 저의 이러한 생각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위로부터 저에게 힘과 도움을 내려주시고, 사람과 요정과 정령들에게 저를 돕고 지원하라고 명령을 내려주십시오.[20]

비장한 연설이었다. 몽골인들이 에게 가지는 심정을 잘 보여주는 말이었다.

하지만 을 침공한 데에는 이런 이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몽골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정주민 지대에서 얻을 수 있는 대량의 재화였다. 그리고 금이 차지하고 있는 화북 지역은 매력적인 목표지점이었던 것이다. 1211년 3월, 칭기스 칸은 쿠릴타이를 열어 금 정벌을 결정하고 전군을 동원하여 금 정벌을 시작했다. 그는 몽골에 복속한 거란인 야율아해와 야율독화 형제를 적극 활용했다. 그들의 안내로 칭기스 칸은 내몽골에서 생활하던 거란 전사들을 몽골군 안에 편입시키고, 그들이 사육하던 방대한 양의 전투마를 접수했다.[21]

금의 천도

거란과 연합한 몽골군은 매섭게 화북에 몰아쳤다. 화북 전역이 약탈되었으며, 의 수도였던 중도(베이징)는 곧 포위된다. 그러나 금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중도를 포위해도 금 조정은 계속 버텨냈다. 몽골군은 공성전에서는 고전을 거듭했다. 결국 1214년 3월, 양 쪽은 전쟁을 멈추기로 합의한다. 몽골에 금의 공주(기국공주)가 시집가고, 매년 은, 금과 같은 귀금속과 비단을 공물로 바치는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된다. 칭기스 3칸은 곧 군대를 거두어 몽골리아로 돌아간다. 새로 몽골 울루스에 편입된 거란 군단을 맞아들여 몽골 울루스의 천호는 95개에서 129개로 늘어난다.[22]

하지만 1214년 5월, 금 선종은 황태자에게 중도를 방어하게 한 후 황하 이남의 개봉(카이펑)으로 천도한다. 황하에 기대어 몽골군을 막아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칭기스 칸은 이를 몽골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즉각 대응했다. 거란 군단을 주축으로 하는 군대가 파견되었고, 중도는 곧 폐허가 된다. 1217년에는 좌익 만호장 무칼리가 금나라 전선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몽골이 거세게 몰아붙이는 가운데에서도 금 정부는 끈질긴 저항을 계속한다. 금나라 정벌 도중, 몽골의 칼 끝을 다른 곳으로 끌어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오트라르 사건과 호라즘 정벌의 시작이었다.

호라즘 정벌

호라즘 샤조의 세력 판도

호라즘 샤조는 당시 막 전성기를 구가하던, 명실상부한 동방 이슬람 세계의 최강자였다. 당시 이란, 서부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에까지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칭기스 칸은 통상을 위한 사절단을 호라즘에 파견했으나, 동방 국경 수비대장 이날추크가 통상단을 몽골의 스파이로 몰아 처형하고 물자를 몰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칭기스 칸은 책임자 인도와 물품에 대한 배상을 요구했지만 호라즘 샤조는 몽골의 요구를 묵살한다.[23] 결국 칭기스 칸은 쿠릴타이를 열어 1219년, 호라즘 정벌을 결정한다. 무칼리가 이끄는 소수 병력만 금나라 전선에 남기고, 칭기스 칸은 사실상 전군인 15만 병력[24]을 이끌고 호라즘으로 출발한다.

첫 금 정벌 당시만 해도 공성전에서 고전했던 몽골군이었으나, 호라즘 정벌에서는 새로운 면모를 드러낸다. 금을 정벌하면서 중국적인 전쟁의 방식을 습득하고 적극적으로 적용한 것이었다. 전통적인 기마 군단에 지원 병종들이 추가되었으며, 몽골군의 갑옷에도 비단 등이 사용되어 방어 효과를 높였다.[25] 특히 공성전에서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칭기스 칸은 중국 기술자들을 직접 종군하게 하여 화약 무기들, 공성추, 공성용 활 등 효과적인 공성 무기들을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이로서 몽골군은 평지전에서 뿐 아니라 공성전에서도 위협적인 상대가 되었다.

칭기스 칸의 군대는 매우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이를 두고 칭기스 칸은 처음부터 호라즘 샤조와의 갈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칭기스 칸은 군대를 네 갈래로 나누어 진격시켰다. 주치가 이끄는 우익은 시르다리아 강 하류의 잔드(페로프스크)를 향해 진격하고, 좌익은 강 상류에 위치한 호젠트를 공격했다. 동방 국경 방어의 핵심이었던 오트라르는 차가타이우구데이가 맡았으며, 톨루이는 중군을 이끌고 키질쿰 사막을 횡단하여 수도 사마르칸드와 핵심 도시 부하라로 직접 진격했다.[26]

호라즘의 군대는 총 40만에 달했다. 그러나 호라즘 샤 알라 앗 딘 무함마드는 그 병력을 주요 도시에 나누어 배치하여 몽골군에게 각개격파당할 여지를 남겼다. 이는 호라즘 군대의 핵심인 캉글리족을 무함마드가 직접 장악하지 못한 탓이었다. 캉글리족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무함마드의 어머니 투르칸 카둔이었는데, 당시 무함마드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호라즘의 도시들은 하나둘씩 몽골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다. 부하라, 사마르칸드, 오트라르, 우르겐치 등 핵심적인 도시들은 1221년 경 대부분 이미 몽골에게 점령되어 철저히 유린되었다. 특히 끝까지 저항했던 우르겐치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우르겐치에서의 학살은 전근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호라즘 정벌은 이후 치뤄질 몽골 정복전의 전형이었다. 몽골은 군대를 몇 갈래로 나누어 상대를 각개격파하는 한편, 그 국가의 수도와 군주를 향해 직접 진군하는 부대를 편성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저항하는 곳은 철저하게 파괴하고 살육하여 본보기를 보였다.

1221년부터 1225년까지는 지루한 추격전이 이어졌다. 제베가 이끄는 2만의 추격군은 호라산 방면으로 도망간 군주 무하마드를 추격했다. 1223년, 무함마드는 결국 병사하고 만다. 그러나 몽골군은 이를 알지 못한 채 계속 서진하여 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칭기스 칸은 무함마드의 아들 잘랄 웃 딘을 추격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진격한다. 결국 잘랄 웃 딘은 인도로 피신한다. 1225년, 번영의 길을 달리던 호라즘 샤조를 철저히 파괴해버린[27] 몽골군은 몽골리아 본지로 귀환한다. 그러나 그들의 칼은 멈출 줄 몰랐다.

서하 정벌과 칭기스 칸의 죽음

1226년, 칭기스 칸은 서하 정벌을 시작한다. 호라즘 정벌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것에 대한 응징이었다. 정벌 사이 2년 가량의 휴식기를 두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이 경우에는 호라즘 정벌 종료 후 1년이 채 안 되어 바로 정벌을 계속한 것이었다. 칭기스 칸은 서하 정벌군을 스스로 이끌 정도로 의욕적으로 서하 정벌에 임했다. 몽골군은 서하의 각 도시들을 순식간에 점령하고 수도 흥경(興慶)에 이르렀다. 그러나 1227년 8월 18일, 흥경 함락을 눈앞에 둔 채로 칭기스 칸은 생을 마감했다. 8월 21일 흥경이 점령되었을 때, 몽골인들은 죽은 칸의 복수라도 하듯 엄청난 규모의 학살과 약탈을 자행한다.

칭기스 칸은 몽골리아 본지의 어느 나무 아래 묻혔다고 전해진다. 이는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우구데이 카안의 치세

갈등 속의 즉위

우구데이의 초상

칭기스 칸의 후손들(후에 황금 씨족이라고 불리게 된다) 사이의 갈등은 칭기스 칸 생전에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첫째 아들 주치와 둘째 아들 차가타이 간의 갈등이 극심했다. 유목민의 관습에 따라 아버지의 재산은 막내아들에게, 아버지의 왕위는 맏아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차가타이는 주치가 칭기스 칸의 아들이 맞는지 의심스럽다며 자신이 왕위를 잇겠다는 의중을 드러냈던 것이다. 둘의 갈등은 호라즘 정벌 동안 폭발하여 주먹다짐으로까지 번진다. 결국 칭기스 칸은 다른 형제들과 큰 갈등을 빚지 않은 셋째 아들 우구데이를 후계자로 지목하게 된다.

칭기스 칸 사후 갈등 양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막내 아들 톨루이의 입장이었다. 유목 사회의 관습에 따라 톨루이는 아버지와 행동을 함께 하며 몽골리아 본지에 가장 가까운 영지를 받았으며, 막내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는다는 전통에 따라 가장 많은 천호와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상태였다. 실제로 칭기스 칸 사후 2년 동안 국정을 대행한 것도 톨루이였다. 실력으로만 볼 때 톨루이는 칸 자리를 물려받기에 최적의 입장에 서 있었다.[28] 그러나 결국 1229년 쿠릴타이에서 선출된 칸은 셋째 아들 우구데이였다. 그는 차가타이칭기스 칸의 막내 동생 테무게 옷치긴의 지지를 받아 칸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는 신생 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한 '합의'의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구데이에게 칸 자리를 물려주라는 칭기스 칸의 유언 역시 우구데이에게 정당성을 부여했다.

통치 기구의 정비

톨루이가 금 정벌 도중에 사망한 이후, 우구데이의 몽골 제국은 세명의 유력자 위주로 운영되었다.(톨루이의 죽음의 정황은 후술하기로 한다.) 좌익의 테무게 옷치긴, 중앙의 우구데이, 우익의 차가타이였다. 옷치긴은 동방 3왕가를 장악하고 거란 및 한인 병력을 총괄하며 제국 동방의 실력자로 군림했다. 차가타이는 우구데이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로서 정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차가타이 울루스는 천산산맥부터 그 서부를 모두 다스리는 거대 울루스로 발돋움했다. 이들을 양쪽 날개로 하여 우구데이는 거리낌 없이 제국의 운영에 관한 새로운 정책들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먼저 우구데이는 몽골 고원의 중심부에 새로운 수도, 카라코룸을 건설했다. 이 곳은 흉노 이래 수많은 유목 제국들의 중심지로 작용했던 교통의 요지였다. 우구데이는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하여 제국 전반으로 뻗어나가는 역참을 설치했으며, 그곳을 제국의 정치 중심지로 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카라코룸 안에는 몽골 제국의 운영에 필요한 재무, 행정 기구들이 자리했다. 이곳이 바로 몽골 제국의 서기국이었다. 서기국은 재무청을 겸했다. 위구르인, 호라즘인, 거란인 등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집행부는 카안의 명령을 문서화하고 제국 전역으로 전달하는 한편, 제국의 재무 업무를 담당했다. 몽골에서 활약한 거란인으로 널리 알려진 야율초재도 이 서기국에 근무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권력의 중추는 여전히 몽골인들에게 있었지만, 이들은 몽골 제국의 실제 운용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실무 담당자들이었다.

중앙과 함께 지방 통치 체제도 정비되었다. 우선 화북, 중앙아시아, 이란을 3대 속령으로 하여 총독부를 설치했다. 총독부의 구조는 중앙정부와 유사하여, 몽골 중앙에서 파견된 몽골인 군 사령부와 비몽골인들로 구성된 실무기관이 소속되어 있었다. 위구르인들과 거란인들이 실무관청의 수뇌부를 맡ㄷ았으며, 그 아래에 이란인 등으로 구성된 실무 관료들이 자리했다. 이를 통해 몽골 제국은 초보적인 지방 행정 및 조세 체계를 갖출 수 있었으며, 좀 더 항구적인 영역 지배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새로운 정복지였던 화북에 대한 분봉이 실시되었다.

정복, 또 정복

우구데이 카안의 치세는 몽골의 전쟁 수행 목적에 있어 중대한 변화의 시작점이었다. 기존의 징벌적 정벌에서 벗어나 정복 및 통치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으로 서서히 전환되었던 것이다. 우구데이는 "카안(Ka'an)"이라는 칭호를 취했다. 이는 기존의 군주 칭호와는 다른 것이었다. 기존의 칸들은 본명+칸 (카불 칸) 혹은 수식어+칸 (칭기스 칸) 과 같은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우구데이는 단순히 "카안"으로 지칭되었다. "카안"이라는 칭호는, 몽골의 군주는 "칸"이 아닌 그 위에 서 있는, 유일성을 지닌 최고 군주라는 의미였다고 추측된다. 칭기스 칸은 끝까지 초원 유목민 세계의 군주로 남았으나, "카안"이라는 새로운 칭호는 몽골의 군주가 스스로를 유목민과 정주민 모두를 포괄하는 세계의 최고 군주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29] "칸"은 유목세계 내에서도 여럿이 존재할 수 있는 명칭이지만, '카안'은 몽골 군주만이 지상에서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명칭이었던 것이다.

1229년에서 1231년 사이, 우구데이는 아버지가 정벌한 지역 전반에 대해 몽골의 지배권을 재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불가르 등 서방 유목 집단들을 복속시키는 한편, [30] 잘랄 웃딘의 호라즘 부흥 시도를 좌절시키고 페르시아 전역을 장악한다. 그리고 1231년, 우구데이는 드디어 제국의 역량을 집중시킨 정벌 사업을 시작한다.

금 정벌의 완수

금나라 사자를 영접하는 칭기스 칸.

우구데이 카안은 즉위 직후부터 매우 의욕적으로 전쟁 사업을 실시하였다. 그의 목표는 칭기스 칸이 끝내 정벌을 완수하지 못한 상대, 금나라였다. 칭기스 칸 대의 금 정벌은 금의 존망을 위협했지만, 1223년 무칼리의 죽음 이후 금나라와의 전쟁은 소강 상태였다. 금나라 정벌이 몽골인들에게 가지는 의미는 매우 컸다. 게다가 이 정벌은 새로운 카안의 첫 주요 정벌 사업이었다. 그런 만큼 몽골 제국 내의 최고 유력자 4명이 참여하여 정벌을 이끌었다. 제국의 서쪽을 대표하던 차가타이는 몽골리아 본토 수비를 담당하였으며, 우구데이는 스스로 중군을 이끌었고, 몽골리아 본지에 세력을 가졌던 톨루이는 우익군, 동방의 유력자였던 테무게 옷치긴은 좌익군을 지휘했다.[31] 초원 지대 전반에 대한 지배권이 재확립된 1231년부터 몽골인들은 본격적으로 금나라 정벌에 돌입한다.

우선 톨루이가 이끄는 우익군은 가장 먼저 남하하여 산서성의 경조(장안, 현재의 시안)을 함락시킨 후 우회, 송의 영토를 거쳐 개봉 남부에 다시 나타나 금의 허를 찌르기로 했다. 그 동안 테무게가 이끄는 좌익군은 중도에서 황하를 향해 서서히 남하했다. 황하 이북의 주민들은 공포에 질려 황하를 넘어 수도 개봉으로 피신했다. 이 난민들로 인해 개봉은 식량 부족, 사회 불안 등 심각한 인구 문제에 시달리게 된다.[32] 1232년 1월, 개봉 서남쪽 삼봉산(三峰山)에서 톨루이의 우익군과 금의 주력부대가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몽골군은 15만에 달하는 금나라 군대를 궤멸시켰다. 이로서 금의 운명은 사실상 결정되었다. 우구데이가 톨루이를 지원하기 위해 황하를 넘어 왔으나, 개봉이 무너지리라는 것은 이미 너무나도 확실했기에 우구데이톨루이는 귀환 길에 올랐다. 금 정벌군의 지휘권은 수부타이가 이어받았다. 1232년 4월, 몽골군은 개봉을 완전히 포위했다. 결국 개봉은 1233년에 함락되었다.

1232년 말 개봉에서 도주한 금 황실은 하남 안양으로 근거지를 옮겨 항전을 계속했다. 1233년에는 불화살 등을 이용한 기습으로 안양 북방까지 진출한 몽골군을 격퇴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양은 좁은 도시였고, 오랜 방어전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하남의 핵심 도시 채주 역시 군대도, 물자도, 방어 준비도 부족한 상태였다. 금 애종은 송나라에게 도움을 청한다. 금이 멸망하면 송이 그 다음 목표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은 오히려 몽골과 동맹을 맺어 금나라를 공격한다. 결국 1234년 1월, 금 황실은 채주(蔡州)에서 남송-몽골 연합군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다. 이로서 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화북 지방이 몽골의 지배권 하에 완전히 편입되었다.

한편 1232년 우구데이와 함께 몽골리아 본지로의 귀환 길에 올랐던 톨루이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몽골비사』에는 톨루이가 우구데이를 살리기 위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희생했다고 전한다. 귀환 중에 우구데이가 갑자기 병이 났는데, 무당들은 우구데이의 병이 중국의 물과 땅의 신의 저주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국인들을 살육하고, 그 땅을 짓밟은 데에 분노하여 대칸에게 저주를 내렸다는 것이었다. 무당들은 신에게 땅, 백성, 가축 등을 바치겠다고 했으나 우구데이의 병세는 오히려 점점 심해질 뿐이었다. 결국 가족 한 명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우구데이의 병세가 호전되었다. 톨루이는 스스로 형 대신 죽겠다고 나섰고, 결국 저주받은 술을 들이키고 중국의 신에게 우구데이 대신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베이니Ata-Malik Juvayni(1226~1283)가 쓴 『세계정복자의 역사』Trkh-i jahn-gush에는 톨루이가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어느 쪽이든 쉽사리 납득되지 않는 죽음이다. 이에 대해 톨루이의 죽음이 몽골 제국의 다른 유력자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우구데이가 군주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가는 과정 중에 톨루이의 존재는 우구데이를 비롯한 그의 지지자들에게 매우 거추장스러웠을 것이라는 것이다.[33] 어찌 되었든 톨루이의 죽음은 우구데이의 입지를 더욱 강화해주었으며, 우구데이는 더욱 적극적으로 정벌 및 체제 정비 사업을 시행할 수 있었다. 카안 칭호를 취한 것도 이 시기였다.

남송 원정의 실패

1234년 금 정벌이 완료된 후, 몽골인들은 다시금 동쪽으로 진군한다. 남송에 대한 정벌이 시작된 것이었다. 1236년의 일이었다. 우구데이의 셋째 아들 쿠추가 남송 원정군을 이끌었다. 그러나 1236년 3월 쿠추가 급사하면서 몽골군의 지휘 체계가 무너졌고, 첫 남송 원정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남송은 숨을 돌릴 기간을 벌 수 있었다. 몽골인들의 눈은 다시금 서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 장악과 코카서스 정벌

1231년부터 우구데이의 명령으로 잘랄 웃딘을 추적하고 호라즘 샤조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기 위한 군사작전이 실시되고 있었다. 1231년 잘랄 웃딘이 사망한 후 몽골군은 페르시아 전역을 장악해나갔다. 페르시아 남쪽의 파르스와 케르만은 자발적으로 몽골에 복속했으며, 초르마간이 이끄는 몽골군이 페르시아 중, 북부 지역을 정복했다. 페르시아 정복이 완료되자 몽골군의 관심은 코카서스 지방으로 옮겨갔다. 당시 코카서스,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지방을 지배하던 세력은 그루지야 왕국이었다.

1236년, 초르마간 휘하의 몽골군은 그루지야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그루지야의 변경 수비를 담당하던 영주들은 대부분 몽골에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하거나 도주했다. 결국 그루지야 왕실은 그루지야 서부의 쿠타이시로 도주하였고, 동부에 남은 지도자들은 몽골에게 공물을 바치고 복속하기로 결정한다. 동부 그루지야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세력이 몽골에 복속한 것은 1238년의 일이었다. 몽골군은 산악 지형인 그루지야 서부까지 침공하지 않았다. 쿠타이시의 그루지야 왕실은 교황청의 도움을 얻고자 하였으나 교황청에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아 좌절된다. 1243년 이후 그루지야는 공식적으로 몽골의 속방임을 천명하고 카안을 군주로 섬기게 된다. 1237년부터 몽골군은 그루지야 왕국의 영지를 넘어 코카서스 북부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코카서스 정벌은 1243년 무렵 마무리된다.

유럽 원정

서방 원정은 주치 울루스의 영지로 예정되어있던 킵차크 초원을 정복하는 것을 1차적인 목표로 하고 진행되었다. 총사령관은 주치의 둘째 아들 바투가 맡았으며, 수부타이가 그를 보좌했다. 칭기스 일족의 각 가문에서도 유력한 왕자들이 원정에 동참했다. 주치 가문에서는 바투 외에도 베르케가 참여했으며, 우구데이 가문에서는 뭉케, 구육 등이, 차가타이 가문에서는 차가타이의 둘째 아들 바이다르 등이 참여했다.

몽골 원정대는 먼저 킵차크 집단들을 복속시켜 군세를 크게 불렸다. 그 다음 목표는 볼가 강 유역의 불가르였다. 볼가 강 유역에 도달한 몽골의 병력은 2만 5천에서 3만 5천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1232년 무렵 이미 볼가 불가리아 남부를 장악했던 몽골군은 이번에는 불가르 영역의 북부를 향해 진군했다. 1236년, 바투가 이끄는 몽골군은 볼가 불가리아의 주요 도시들을 대부분 장악했으며, 대규모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1237년까지 몽골은 불가르, 킵차크, 쿠만 (킵차크 초원의 유목 세력), 알란 등의 저항을 철저히 짓밟았다.

수즈달을 공격하는 바투 칸.

불가르에 이어 남러시아 초원의 여러 루시 공국들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동유럽인들의 입장에서는 악몽의 시작이었다. 1237년, 바투는 블라디미르 왕공 유리 2세에게 몽골에 스스로 복속하라고 명령하는 서신을 보낸다. 유리 2세가 한 달 간 답신을 보내지 않자 몽골인들은 군사 행동에 돌입한다. 오카 강 유역의 도시 랴잔을 공격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랴잔은 파괴된다. 놀란 유리 2세는 군대를 파견해 몽골군을 막으려 하였으나, 크게 패배하고 만다. 이후 몽골군은 콜롬나와 모스크바를 차례로 점령하여 불태웠다. 결국 1238년 2월 8일에는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수도 블라디미르마저 점령되어 파괴된다. 왕공은 도주에 성공해 볼가강 이북에서 다시 군대를 일으켰으나, 1238년 3월 4일 다시 몽골군에게 격파당한다. 이로서 러시아 평원에서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세력은 완전히 꺾였으며, 몽골군은 타 루시 공국들을 하나하나 격파해나간다. 1240년, 키예프를 점령하면서 루시 정벌이 막을 내린다.

그리고 몽골군은 동유럽으로 들이닥쳤다. 몽골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주력은 헝가리로 진군했으며, 일부는 폴란드로 향했다. 1241년 4월 9일, 차가타이가의 바이다르 등이 이끄는 폴란드 방면 몽골군은 현재의 발슈타트에서 독일기사단과 폴란드군의 연합군을 격파했다.[34] 이어서 1241년 4월 11일, 바투가 직접 이끄는 몽골 주력군은 사요 강변에서 헝가리 국왕 벨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방어선이 무너진 헝가리는 몽골군에게 유린되었다. 폴란드와 헝가리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서유럽으로 향했다. 이들 동유럽 난민은 독일 등 서유럽 국가 주민들에게 몽골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었다. 서유럽은 몽골의 칼끝 앞에 무력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그런데 몽골군은 서유럽에 들이닥치기 직전, 진군을 멈춘다. 1242년 3월, 우구데이 카안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철군 명령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우구데이 휘하에서 안정적으로 팽창을 거듭하던 몽골 제국은 다시금 혼란의 세월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주치 울루스의 탄생과 구육의 즉위

뭉케 카안의 치세

뭉케의 즉위

동방 정벌

서방 정벌

쿠빌라이의 즉위

후계자 다툼

중앙아시아의 소용돌이

제국의 '분열'

팍스 몽골리카

배경

"대여행의 시대"가 열리다

상업의 발전

국제 관계의 변화

각 울루스의 변천

카안 울루스

계보도

편의상 칭기츠 칸부터 시작되는 몽골제국의 계보도도 함께 서술한다.

대수 재위기간 이름 연호/시호 비고
1206~1227 칭기즈 칸 태조
1229~1241 오고타이 칸 태종
1246~1248 구유크 칸 정종
1251~1259 몽케 칸 헌종 여기까지가 분열 이전의 몽골제국에 해당한다.
1 1260~1294 쿠빌라이 칸 세조 여기부터는 원나라로 불리운다.
2 1294~1307 티무르 성종
3 1307~1311 하이샨 하이샨
4 1311~1320 아유르바리바드라 인종
5 1320~1323 시디발라 영종
6 1323~1328 예순 테무진 태정제
7 1328~1328 아수기바 천순제
8 1328~1329 쿠샬라 명종
9 1329~1332 투크 테무르 문종
10 1332~1332 이린지발 영종
11 1333~1368 토곤 테무르 순제

주치 울루스

훌라구 울루스

차가타이 울루스

몽골의 시대가 저물다

몽골 부흥의 꿈

영향

각주

  1. 김호동,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돌베개, 2010, p. 79, ISBN 978-89-7199-404-7
  2. 북두위신전장(北頭位伸展葬)
  3. 김호동, op. cit., pp. 80~82.
  4. 고마츠 히사오 외, 이평래 저, 『중앙 유라시아의 역사』, 소나무, 2005, p.192, ISBN 89-7139-325-4
  5. 김호동, op. cit., p. 87.
  6. 몽골비사
  7. 몽골비사, 무당 쿠쿠추가 보르테를 변호하며.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c7U5&articleno=970 에서 인용.
  8. yasun, '뼈'라는 뜻이다.
  9. 몽골비사
  10. 김호동, op. cit., p. 99.
  11. 몽골비사. 실제로 2만이나 되는 병력을 주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12. 딴 산 블로그 참고.
  13. 김호동, op. cit., p. 104.
  14. 김호동, op. cit., p. 99.
  15. 고마츠 히사오 외, op. cit., p.198.
  16. 김호동, op. cit., p. 109.
  17. 김호동, op. cit., pp 111~113.
  18. 고마츠 히사오 외, op. cit., p. 199
  19. 고마츠 히사오 외, op. cit., pp 162~163.
  20. 김호동, op. cit., pp. 117~118. 표기의 일관성을 위하여 일부 수정했음.
  21. 고마츠 히사오 외, op. cit., p. 200.
  22. loc. cit.
  23. 고마츠 히사오 외, op. cit., p.201.
  24. 정확한 병력의 규모는 확실하지 않다. 추정치는 9만에서 25만 사이이다.
  25. http://historyofislam.com/contents/the-post-mongol-period/genghiz-khan/
  26. 고마츠 히사오 외, op. cit., p. 202.
  27. 호라즘 샤조가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니었으나, 다시는 그 위세를 회복하지 못한다.
  28. 고마츠 히사오 외, op. cit., p. 204.
  29. 김호동, op. cit., pp.122 ~ 123.
  30. Saunders. History of the Mongol conquests, ISBN 978-0812217667, p.81.
  31. 고마츠 히사오 외, op. cit., p. 204
  32. 고마츠 히사오 외, op. cit., p. 205
  33. 고마츠 히사오 외, op. cit., p. 205.
  34. 다만 이 전투가 실존했는지 여부를 놓고 약간의 논란이 있다. 동시대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 전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