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

만주족(滿洲族)은 주로 만주에 거주하던 북방 퉁구스계 반농 반수렵 민족이다. 현재는 중국소수민족으로 남아있다.

개요[편집 | 원본 편집]

말갈여진의 후신이라 할 수 있으나 엄밀히 말해서는 완전히 같지는 않다. 이들이 살던 지역은 한반도와 달리 사방이 트인 개방적인 지형이라 다른 유목민들과 한족의 침략을 받아 끊임없이 혈통이 섞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주족은 정체성을 주로 여진에서 찾았다. 중국을 정복한 후 각 지역에 팔기군을 설치하고 지속되는 전쟁[1]에 대한 인력 보충을 위하여 한족을 수용해서 인구도 많고 중화권 전역에 고루 분포하고 있다.

이들은 농경민과 수렵채집민들이 혼합된 민족이었다. 따라서 를 중시하여 개를 먹지 않았다. 또 한민족(韓民族)이나 한족(漢族)이 죄다 비슷하게 보던 것에 비하면 서로에 대해 민족의식도 별로 없어서 만주족의 주요한 축이었던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극심한 민족 갈등을 겪었으며 야인여진은 아예 두 부족만 팔기군에 편입되었고 나머지는 학살과 노예화를 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만주족이라는 민족 역시 내부 민족들의 갈등을 피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건주와 해서 등의 정체성이 만주로 변할수록 만주족 내부의 민족 갈등은 감소했다. 이들은 형식적으로 만한일가(滿漢一家)와 만한병용(滿漢竝用) 등 평등 정책을 표방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만주족에 가까운 팔기군에 대한 특혜[2], 한인에 대한 만주화 정책 등 일종의 민족 차별 혹은 흡수 정책을 청나라 말기까지 유지하는 기만 정책을 펼쳤다.

현황[편집 | 원본 편집]

청나라가 멸망한 후에 만주족 대다수는 한족화를 선택하였다. 조상이 본래 만주족에 귀화한 한족은 다시 조상식으로 돌아갔으며 만주화된 조선인은 한족과 유사한 조선식 성씨[3]를 쓰기도 했다. 중원에 입관한 후 수명성[4]을 한 만주족은 그것을 이용하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서는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에 의해 만주족의 정체성을 보전하고자 하는 사람들[5]이 애신각라, 과이가, 부찰 같은 만주 성씨를 다시 쓰기도 한다.

현대 중국에서 만주족으로 인정받는 기준은 과거 팔기군에 속했는지 여부이며 한족 역시 팔기군이면 만주족을 선택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보오이는 만주족이 아닌 정복된 한족으로 알려져 한국의 민중사학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만주족이 다수인 것으로 알려져서 만주 평민인 보오이 출신들은 만주족 선택이 좀 꼬이게 되었다. 이들은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조금 재미있는 점이 있었는데, 이들의 후손은 자신이 만주족[6]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상당했다. 물론 아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당당히 자신이 만주족임을 입증하거나 확신을 가지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적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들도 한민족이나 한족처럼 높았던 가문, 즉 왕족의 성씨[7]가 많다. 당연히 여전히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청나라 왕족 집안은 이들을 같은 집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주

  1. 한족만이 아니라 소수민족들도 수시로 반란을 일으켰다.
  2. 이것만으로 부자가 되긴 힘들었으나 무상 복지가 있었다.
  3. 중화권의 영향을 받으며 이름이 중국화되어 중국어 변형이 쉬웠다.
  4. 만주식 성명을 한족식 성명으로 변형하는 것.
  5. 이게 돈벌이가 되기 때문에 의외로 한족도 많다.
  6. 이는 만주 귀족들의 횡포도 원인일 수도 있다. 학자들이 처음에 괜히 정복당한 한족으로 생각한 게 아니다.
  7. 물론 대다수는 거짓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