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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출: 전임 행정관들로 구성. 감찰관이 원로원 의원으로 들어갈 자를 고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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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초대 왕 로물루스 때부터 있던 조직으로 로마 왕정 초기엔 100명이었다가 중기엔 200명, 공화정 시기엔 300명이 되었다. 로마의 유력자들로 구성. 법률 상으론 아무런 역할도 없으나 행정관들의 국가 정책에 조언하는 역할이었다. 실제적으로 집정관과 더불어 로마 공화정 정치를 좌지우지 했던 실세들이다.
로마 초대 왕 로물루스 때부터 있던 조직으로 로마 왕정 초기엔 100명이었다가 중기엔 200명, 공화정 시기엔 300명이 되었다. 그리고 [[술라]]가 집권 후 정원을 600명으로 늘렸었고, 후에 카이사르는 정원을 무려 900명으로 늘렸다. 로마의 유력자들로 구성. 법률 상으론 아무런 역할도 없으나 행정관들의 국가 정책에 조언하는 역할이었다. 실제적으로 집정관과 더불어 로마 공화정 정치를 좌지우지 했던 실세들이다.


원수정, 제정 시기를 거치며 점차 권력을 잃어갔으나 명예직으로서는 [[비잔티움 제국]]시기에서도 존재했다.
원수정, 제정 시기를 거치며 점차 권력을 잃어갔으나 명예직으로서는 [[비잔티움 제국]]시기에서도 존재했다.

2016년 1월 8일 (금) 17:26 판

로마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UM,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ων Ῥωμαίων)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출발하여 지중해패권을 장악했던 국가이다.

역사

고대 로마: B.C. 753 ~ A.D. 476

로마의 건국

신화는 존재하지만 사료로는 알기 어렵다. 후대 역사가 중 Vergilius(베르길리우스, B.C. 70-19)의 <아이네이스>[1]에서 로마 건국의 역사가 나온다.


로마 인근 알바 롱가(Alba Longe) 공주 일리아[2]가 있었다. 작은 아버지 아물리우스가 알바 롱가의 왕이 죽고 난 후 왕위를 찬탈하고 일리아를 무녀로 만들어버린다. 어느 날 일리아는 강가에서 잠자고 있었는데 전쟁의 신 아레스(마르스)가 일리아의 모습에 반한다. 그리고 일리아와 아레스는 육체적 사랑을 나눈다. 이 둘 사이에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들이 바로 훗날 로마 건국의 주역인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 작은 아버지 아물리우스는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나중에 크면 자기 왕위를 찬탈할까 걱정이 되어 로마의 테베레 강에 쌍둥이를 실어 보낸다. 암늑대 하나가 강물에 떠내려오는 쌍둥이를 구해내 젖을 먹이고 키운다. 그 후 지나가는 목동이 이 아이들을 발견하고 데려가 키운다.

성인이 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아물리우스를 살해하고 알바 롱가 인근에 ‘로마’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를 세운다. ‘로마’는 로물루스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왕권을 놓고 대립한 로물루스와 레무스. 결국 이 둘은 로마를 분할 통치하기로 한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누스 언덕을, 레무스는 아벤티누스 언덕을 통치. 동생 레무스가 경계를 넘어오게 되자 형 로물루스가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아벤티누스 언덕까지 통합시킨다. 이후 로물루스는 로마의 초대 왕으로 등극한다. 이 때가 B.C. 753.

왕정 로마: B.C.753 ~ B.C. 509

제 1대 왕 로물루스(재위 기간: B.C. 753 ~ B.C. 715)

이웃에 있는 사비니 왕국의 여성들을 로마의 축제에 초대했다. 하지만 사비니 여성들이 그 축제에서 로마 남성들에게 강탈당하고 로마 남성들과 결혼을 하게 되자 이 소식을 들은 사비니 왕국의 왕이 로마와 전쟁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미 로마인의 아내가 된 사비니 여성들이 전쟁 중단을 요청하여 로마와 사비니 사이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사비니 족의 상당수가 로마로 이주해 오고 로마는 사비니 자유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다.

로마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군사 병력도 증대되었다. 로물루스 통치 시기에 ‘백인대’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내는데 이름 그대로 100명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로마 군편제의 최소 단위이다. 로마의 유력 가문 원로들을 모아 원로원도 창설했는데 이 당시에는 100명으로 구성되었다.

제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재위 기간: B.C. 715 ~ B.C. 673)

누마 폼필리우스는 사비니인인데 로마 시민권을 가지지 않았으며 로마로 이주해온 인물도 아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원로원이 누마 폼필리우스를 왕으로 추대했고 쿠리아회[3]에선 이를 승인해주었다.

1년을 12개월 355일로 하는 달력 태양력이 만들어졌고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기에 누마 달력에서 1년을 10일 더 늘리게 되어 현재 세계에서 사용하는 태양력 달력의 기원이 된다.

일종의 사제 조직을 만들었다. 사제 조직은 종교 업무를 담당하는 국가공무원으로 그렇다고 성직자는 아니었다. 사제 조직 최고 수장은 폰티펙스 막시무스였다.

제 3대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재위 기간: B.C. 673 ~ B.C. 642)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는 라틴계 로마인으로 인근에 있던 알바 롱가를 정복했다. 알바 롱가의 주민들을 로마로 강제 이주시키고 알바 롱가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유력 가문은 로마 귀족이 되었고 원로원 의석도 제공되었다. 이 시기에 알바 롱가 주민의 유입으로 인원이 늘어나 로마의 군사 병력이 또 증대되었다.

제 4대 왕 안쿠스 마르키우스(재위 기간: B.C. 642 ~ B.C. 617)

안쿠스 마르키우스는 사비니계 로마인으로 제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외손자이다. 군사적 요충지인 자니콜로 언덕과 7개의 언덕(팔라티누스, 아벤티누스 등) 사이의 테베레 강에 이 두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를 건설한다. 평화시에는 로마 시 본거지인 7개의 언덕에 거주하다 유사시 자니콜로 언덕으로 대피하기 위해 건설한 다리이다.

로마에서 약 20km 떨어진 티레니아 해에 인접한 항구 도시 오스티아를 정복해 로마가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했다. 당시엔 소금이 화폐로도 이용되었기 때문에 바다에서 소금을 얻을 수 있는 오스티아를 정복했다는 건 경제적,군사적 거점을 확보했다는 뜻이 된다.

제 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재위 기간: B.C. 616 ~ B.C. 579)

제 5대 왕은 에트루리아계 로마인으로 에트루리아인들은 자발적으로 로마에 들어와 살았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로마인들에게 알파벳을 전파[4]했고 건축과 토목 기술을 전파해주었다.

로마인들은 주로 언덕 쪽에 거주하고 언덕 아래 쪽엔 습기가 많아 사람이 거주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로마인들과 에트루리아인들은 지하 수로를 건설해 지면에 있는 물을 다 빼내 테베레 강으로 흘러보내서 언덕 아래 지역들을 평지로 만들고 돌로 포장해 넓은 광장을 만들어냈다. 광장(포럼)은 이후 정치 경제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대규모의 토목 건축 사업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경제를 활성화시켰으며 로마인들의 생활 수준을 높였다. 이 때 원로원 의원이 200명으로 늘어났다. 로마의 인구 수가 많아졌으므로 원로원 의원 수도 늘어나는 게 당연지사. 이후 왕정 말기 공화정 초기엔 원로원 의원 수는 300명이 된다.

제 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재위 기간: B.C. 578 ~ B.C. 535)

제 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사위이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가 이 인물을 데려다 키웠다. 이 인물은 원로원의 결의만으로 왕이 된 특수 사례로 민회의 승인이 없었다. 세르비우스 성벽을 구축하고 장인의 토목 건축 사업을 이어받아 마르스 광장을 신설한다. 마르스 광장은 군사 집결지이자 민회의 투표 장소가 되었다.

이 시기에 군제 개편이 이루어졌다. 제 6대 왕 이전에는 백인대(100명)가 군 편제의 최소 단위였다. 로마는 왕정 초기 때 3부족이 있었고 한 부족당 10개의 쿠리아를 가지고 있었다. '쿠리아'란 로마의 행정구역 단위이다. 각 쿠리아마다 백인대를 하나씩 만들었었다. 보병 기준으로 보면 1개의 쿠리아당 백인대 하나이므로 한 부족(=10개 쿠리아) 당 백인대 10개이므로 병력 1000명, 로마엔 세 부족이 있었다고 했으므로 로마의 총 보병 병력은 3000명이었다.

기병은 1개의 쿠리아 당 10명씩, 한 부족(=10개 쿠리아)이면 병력 100명, 로마의 총 기병 병력은 300명이었다. 보병과 기병을 합한 로마의 총 병력은 3300명. 제 6대 왕 이전까지 로마의 병력 구조는 이러하였다.

군제 개편을 위해 모든 로마 시민권자들을 재산 상태에 따라 6계급으로 구분한다. 제1계급이 재산이 가장 많은 자들이고 최하위 계급인 제6계급이 재산이 없는 자들이다. 제6계급에서 제1계급으로 갈수록 시민이 부유해진다. 다음 표는 보병 기준이다.

계급 선출해야 할 백인대 수 병력
제 1계급 80 8000명
제 2계급 20 2000명
제 3계급 20 2000명
제 4계급 20 2000명
제 5계급 30 3000명
제 6계급 5 500명

제1계급에서 제6계급까지의 보병을 합하면 총 175백인대(=17500명)가 된다.
제1계급에서 백인대를 가장 많이 창출하도록 지시한 이유는 지킬 게(재산) 있어야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고 두번째로 제5계급에서 백인대를 많이 창출하도록 지시한 이유는 모든 계급 중에서 제5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제6계급은 흔히 프로레타리우스(proletarius)라고 불렸으며 그 뜻은 가진 게 자식밖에 없는 자라는 뜻이다.[5] 제6계급은 비전투부대로 갑옷이나 무기를 제작하거나 전투 개시 때 나팔을 부는 역할을 맡았다. 비전투부대인 이유는 제6계급은 지킬 게 없는 데 필사적으로 싸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병은 모든 계급들 중 제1계급만 18백인대를 창출하도록 했고 다른 계급에선 기병을 제공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로써 기병까지 합하면 로마의 총 병력은 175백인대(=17500명) + 18백인대(=1800명) = 193백인대(= 19300명)가 되었다. 유심히 보면 로마의 총 193백인대 중에 제1계급만 기병, 보병을 합해 총 98백인대이다. 이는 과반수인데 로마 국정 운영의 주도권이 제1계급에 있었다는 걸 나타내며 재산을 많이 가진 자가 병역의 의무도 가장 많지만 그에 걸맞게 권리도 가장 많은 것이었다.

이 시기에 백인회가 창설되면서 쿠리아회는 없어졌고 쿠리아회의 기존 기능인 전쟁 승인, 왕 선출 등의 권리를 백인회가 이어받았다.

제 7대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재위 기간: B.C. 534 ~ B.C. 509)

이 이름에서 ‘수페르부스’는 ‘건방진,거만한’이라는 의미이다. 즉, 후대에 거만한 타르퀴니우스라고 불린 인물이다. 제 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손자이자 제 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사위이다. 제 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딸 툴리아와 혼인했다. 그리고 툴리우스에게 자객을 보낸다. 툴리아는 자객의 공격을 받고 아직 숨이 붙어있는 아버지를 마차로 짓밟는다. 수페르부스는 무력으로 원로원과 민회를 무시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독재를 하였다. 유피테르 신전을 건설하는 등의 업적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민중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인물. 이 인물에겐 3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 셋째 아들 섹스 투스라는 아들은 자신의 친척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를 사랑했다. 콜라티누스가 전쟁터를 나간 틈을 타서 루크레티아를 겁탈하고 루크레티아는 자살한다.

로마인들은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의 가족을 로마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한다. 툴리아는 도주했고 섹스 투스도 도주하려다가 시민들에게 붙잡혀 최후를 맞이했다.

공화정 로마: B.C. 509 ~ B.C. 31

에트루리아 출신 왕을 축출하게 되자 로마 내에 있던 에트루리아인들도 떠나갔다. 이로써 에트루리아와의 관계 악화, 뛰어난 토목 기술로 로마 경제를 활성화시켰던 주역들이 떠나갔으므로 로마의 인구수는 감소하고 기술과 경제력이 약화된다. 국력이 약화되자 로마와 우호적 관계를 맺어온 라티움 인근 지역도 로마에 등을 돌리고 그렇게 라틴 동맹은 와해되는 듯하다가,,, B.C. 494년 동맹은 다시 재건된다.

B.C. 405년 Veii(베이)[6]를 공격하고 B.C. 396년 함락한다.

B.C. 390년 ‘켈트족(갈리아족, Gual족)’이 에트루리아의 여러 도시를 거쳐 로마까지도 굴복시켰다. 이는 공화정 로마 최초의 군사적 패배로 기록되었다. 켈트족은 7개월간 로마를 점령하고 살인,약탈,방화를 자행했다. 갈리아족의 남하 목적은 약탈이었던 것. 로마가 협상책으로 금덩어리 300kg을 제공하자 갈리아인들은 철수한다. 갈리아족이 로마에 남긴 피해는 컸고 다시 라틴 동맹 세력들이 로마에 등을 돌린다.

이후 로마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재기하게 된다. 로마는 라티움 동맹들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B.C. 4C 초 여세를 몰아서 동남쪽 캄파니아까지 세력을 확장한다.

B.C. 326년 라티움 동쪽에 있는 산니움 정복에 나섰다. 산니움과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에트루리아와 움브리아가 로마를 공격하면서 전쟁은 3대 1의 양상으로 흘러간다. 로마는 B.C. 290년까지 에트루리아, 움브리아, 산니움 세 지역을 모두 정복한다. 이를 산니움 혹은 삼니움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탈리아 북부와 중남부를 수중에 넣게 된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의 중심 도시 타렌툼과의 전쟁을 B.C. 282년 개시한다. 타렌툼은 스파르타인들이 건설한 식민도시로 타렌툼은 로마의 공격을 받게 되자 그리스 도시 국가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피로스는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반도에 진출하고 싶어했으므로 피로스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온다. 그는 로마와 싸워 첫 번째 전투에선 승리하나 계속되는 전투에 B.C. 275년 자기 병력이 줄어드니 철수하여 피로스 전쟁은 종결된다.[7]

B.C. 273년 로마는 타렌툼을 정복한다. 이로써 이탈리아 남부까지 다 손에 넣은 로마. 이후 로마는 지중해로 진출하고 싶어하고 시칠리아 섬을 놓고 카르타고와 격돌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포에니 전쟁의 시작이다.

공화정 로마의 정치 구조
행정부

행정관들은 전원 무보수로 일했다. 월급이란 없었다.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위키 관리자 오프라인 국가 버전

  • 집정관(consul)

설립 연도: 기원전 509년
임기: 1년
연령: 40세 이상부터 입후보 가능

선출: 백인회(민회)에서 집정관 선출

기원전 509년 공화정이 시작될 때부터 생긴 관직으로 로마 공화정의 최고 권력직이다. 집정관은 2명으로 구성되는데 이는 독재 방지를 위해서이다. 집정관은 집정관끼리 서로 거부권 행사가 가능하며 집정관 두 사람 뜻이 일치해야 행정 효력 발휘가 가능하다. 행정부 수반이자 백인회(민회) 소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군 통수권자이다. 전쟁터에 직접 출정하는데 보통 전쟁이 일어나면 1명이 군 통수권자로써 출정하고 다른 1명이 로마 내정을 담당한다. 비상 상황이 되면 로마 집정관 2명 모두 전쟁터에 출정하기도 한다. 로마를 멸망 위기까지 내몰았었던 제2차 포에니 전쟁인 한니발 전쟁에서, 로마 집정관 두 명 모두 출정해 두 명 다 한니발 부대의 손에 목숨을 잃은 적이 있다.


  • 전직 집정관(proconsul)

집정관이 전쟁하러 먼 거리로 출정나가는 경우, 전쟁은 끝나지 않았는데 전쟁터에 나간 집정관의 임기가 끝났다고 도중에 로마까지 돌아와 집정관을 교체할 수 없는 노릇. 전쟁터에 나간 집정관의 임기가 끝난 때에는 로마에선 따로 집정관을 새로 선출하고 전쟁터의 집정관은 전직 집정관이 되어 계속 군대를 통솔한다. 속주 총독 역할을 맡기도 했다.

  • 법무관

설립 연도: 기원전 366년
임기: 1년
연령: 40세 이상부터 입후보 가능

선출: 백인회(민회)에서 법무관 선출

초기에는 1명이었지만 로마의 영토가 확대되어 인구가 늘어나자 인원 확충이 불가피해져 이 직책이 16명까지 증대한다. 집정관의 부재 시, 집정관의 역할을 대신 했으며 때로는 군 지휘관으로 출전하기도 했다. 속주 총독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 회계 감사관

임기: 1년
연령: 30세 이상부터 입후보 가능

선출: 초기 - 집정관이 회계 감사관 임명 ⇨ 기원전 421년 이후 - 백인회에서 회계 감사관 선출

초기엔 이 직책이 2명이었지만 공화정 말기에는 40명으로 증대했다. 국가의 재정 집행에 대해 감사하는 역할.


  • 감찰관

설립 연도: 기원전 443년
임기: 1년 반 이상[8]
연령: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선출: 초기 - 5년마다 백인회에서 감찰관 두 명 선출.[9] ⇨후기 - 모른다.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1. 호구 조사를 통해 재정 상태 감찰하고 신분을 그에 걸맞게 분류.
  2. 재정 상태를 제대로 신고하지 않은 시민들을 고발하고 시민권을 박탈했다. 시민권 박탈 결정권 보유 직책이다.
  3. 원로원 의원 결정권: 종신직인 원로원. 원로원 의원이 죽으면 공석에 보통 로마의 전직 행정부원들이 들어가는데 그 때에 누가 로마 원로원으로 들어가게 될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
  4. 풍기 문란 감찰 역할.
  5. 국가 재정 전반 관할.


  • 안찰관: 귀족 2명, 평민 2명으로 구성된 직책.

설립 연도: 불분명
임기: 1년
연령: 30세 이상부터 입후보 가능

선출: 백인회에서 안찰관 선출
  1. 축제와 경기 개최 담당
  2. 치안 담당
  3. 도로 보수
  4. 교통 정리
  5. 상하수도 관리 담당
  6. 위법 행위에 대한 벌금 부과
  7. 식량 공급 관리


  • 독재관(dictator[10])

설립 연도: 기원전 501년
임기: 6개월
연령: 상관 없다. 대체로 경력이 있거나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는 인물이 독재관으로 추대되었다.

선출: 집정관이 독재관 임명. 하지만 임명 후엔 집정관도 독재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임시직으로 특별한 경우에 만들어지는 직책이며 비상 시엔 집정관을 제치고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국가 비상 사태시 국가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권력을 독재관 한 명에게 몰아준다. 사공이 많아서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함이다. 나무위키 운영진 IRC 친목질 사태에서 admin001 생각하면 된다. 임기가 끝나거나 위기가 종식되면 직책이 해제된다. 2차 포에니 전쟁 때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독재관을 선출한 적이 있다.


  • 호민관

설립 연도: 기원전 494년
임기: 1년

선출: 평민회에서 호민관 선출

초기엔 2명이었으나 이후 10명으로 증대한다. 평민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보호하는 직책. 평민에게만 호민관 자격이 주어지며[11] 집정관 결정에 거부권 행사가 가능하다. 그러나 전시 상태에선 집정관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 면책 특권이 있다. 어떤 발언을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신체불가침 특권이 있다. 호민관의 몸에 상해를 가하면 형벌에 처한다. 그러나 공화정 말기 때 이 특권은 지켜지지 않는다. 호민관이 맞아죽는 일이 생기는데... 그 맞아죽는 호민관이 공화정 말기 로마 개혁을 주도했던 그라쿠스 형제이다.

원로원

임기: 종신직
연령: 30세 이상

선출: 전임 행정관들로 구성. 감찰관이 원로원 의원으로 들어갈 자를 고른다.

로마 초대 왕 로물루스 때부터 있던 조직으로 로마 왕정 초기엔 100명이었다가 중기엔 200명, 공화정 시기엔 300명이 되었다. 그리고 술라가 집권 후 정원을 600명으로 늘렸었고, 후에 카이사르는 정원을 무려 900명으로 늘렸다. 로마의 유력자들로 구성. 법률 상으론 아무런 역할도 없으나 행정관들의 국가 정책에 조언하는 역할이었다. 실제적으로 집정관과 더불어 로마 공화정 정치를 좌지우지 했던 실세들이다.

원수정, 제정 시기를 거치며 점차 권력을 잃어갔으나 명예직으로서는 비잔티움 제국시기에서도 존재했다.

민회
  • 쿠리아회
  • 백인회

독재관과 호민관을 제외한 모든 행정관을 선출. 평민회가 창립되기 이전엔 행정부에서 상정한 법률을 심의해서 승인하거나 거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 평민회

기원전 471년에 창설. 평민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호민관 선출을 담당했다. 행정부에서 상정한 법률을 승인하거나 거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지중해의 패권국으로 자리잡은 로마는 시민과 원로원계급의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되고 민중파의 일원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승리하여 갈리아를 복속시켜 시민들의 지지를 얻게 된다.

이를 견제하고자 한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반역자로 규정하였고, 이에 반발한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도하하여 카이사르의 내전을 발발시킨다. 카이사르는 내전에서는 승리하였으나 공화파에 의해 곧 암살당한다. 그러나 뒤이어 벌어진 내전에서 승리한 아우구스투스가 초대 황제가 되어 실현한 원수정 체제 아래에서 팍스 로마나를 일구었다.

군인 황제 시대

그러나 원수정 체제에 모순은 정세의 불안정을 낳았고, 3세기에 접어들어 세베루스 왕조의 알렉산데르 황제가 암살당한 뒤 군인이 추대하는 군인 황제들이 등장하여 정세의 불안정은 더 심해진다. 그 시기에 게르만족,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침략이 심해지고 국방 경비가 약화되면서 경제도 흔들리는 등 제국은 3세기의 위기를 겪는다.

제국의 분열, 서로마의 멸망

후에 등장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국정 개편을 통하여 제국의 생명을 어느 정도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러나 원수정 체제에 내제한 모순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은퇴 후 다시 내전을 벌어지게 하였으며, 이 내전에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을 하나로 통합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이룩했던 행정 개편을 더 확고히 하였고, 군제를 개혁하였으며,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고 기독교를 공인하는 등 사회 체계도 개조하였다. 이 황제들의 개혁을 통해 나라의 정세가 3세기에 비해 안정되었으나, 제국은 하나의 황제가 다스리기에는 국경선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었고, 이에 정제, 부제가 동방, 서방을 통치하는 방식으로 안보의 향상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를 이어받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치세가 끝나고 그의 두 아들인 호노리우스아르카디우스가 각각 제국 서방과 동방을 맡게 되면서 제국은 두 개로 분리되었다.

공식적으로 제국 서부와 동부는 하나의 로마 제국이었으나 발렌티니아누스 왕조가 절멸하고 각각 다른 혈통의 황제가 즉위하면서 두 제국은 사실상 두 개의 제국으로 분열하였다.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침략이 심했고 또한 경제력 역시 동로마에 비해 떨어졌다. 서로마는 60년간 스틸리코아에티우스 등 유능한 사령관들의 활약 덕분에 버텼으나 그 이후는 이름뿐인 유명무실한 황제가 차례차례로 등극하면서 몰락해갔고, 476년 게르만족인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중세 로마(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A.D. 330~1453

비잔티움 제국 = 동로마 제국 = 중세 로마 제국

사실상 다 같은 말이다. 다만 서유럽 역사가들이 중세 로마를 이전이라 비교하려고 만든 말이지만 사실상 당시에는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이었다. 공식 명칭또한 'Imperium Romanum'.

동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의 고토회복전쟁을 통해 과거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의 영토를 잠시 되찾았으나 전염병이 돌고 재정난이 심해지면서 얼마 가지 못했다. 그 후 이슬람 세력이 떠오르면서 한때 위축되기도 하였으나,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마케도니아 왕조, 콤니노스 왕조가 부흥을 이루었다. 그러나 제4차 십자군 전쟁의 여파로 일시기 문을 닫게 된다.

1261년 십자군 국가인 라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제위를 회복하나, 풍파를 겪은 제국은 더 이상 과거의 제국이 아니었다. 제국은 소아시아의 영토를 잃어버렸고 그 땅에서 일어난 투르크인들의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4세기에는 오스만의 속국이나 다를 바 없는 신세로 전락했으며 1453년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전사하면서 멸망당하고 말았다. 이후 모레아와 트레비존드의 최후의 잔존 세력이 남아 저항했으나 모두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제국은 당대에는 로마 제국 그 자체로 여겨졌으나, 근대에 들어 서구권 역사가들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로마 제국과 분리된 역사로 여겨져왔다.

평가

기원전 753년이라는 건국 연도를 일단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이 제국은 약 2200년간 이어져왔다. 사실, 굳이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고 해도 가장 보편화된 위대하고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대제국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신성 로마 제국은 중세 서유럽에서 종교적 이유로 로마 황제위를 되살린 것이다. 일종의 설정놀음으로, 사실 로마 제국의 진정한 의의를 계승했던 것은 동로마 제국이 더 가깝다.

여담

러시아 제국은 로마제국, 비잔틴제국을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비잔티움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여조카라 러시아의 황제가 결혼을 해, 러시아 황제는 비잔틴제국의 황위를 계승했다고 선언했다. 심지어는 로마, 제2로마 콘스탄티노플을 이어 제3로마가 바로 모스크바라고 선언까지 했다. 또한 러시아 제국의 문양을 비잔틴 제국의 쌍두독수리로 교체하였다.

뭐 아무튼 그래서 모 러시아 학자는 로마제국은 기원전 753년부터 러시아 제국이 망한 1917년까지로 잡는다. 그럼 2670년이 된다.

  1. 후대 역사가들이 저술한 고대 로마 연구 저서 중 대표작
  2. ‘레아’나 ‘실비아’라고도 부른다.
  3. 당시 일종의 민회이다. 귀족과 평민으로 구성되어있고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의견 기구.
  4. 알파벳은 페니키아에서 최초로 사용되어 이후 그리스, 남부 이탈리아 지역, 에트루리아 순으로 전파되었다.
  5. 재산이 거의 없다는 의미이다.
  6. 에트루리아 핵심 도시
  7. '피로스의 승리'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른 승리라는 걸 뜻한다.
  8. 호구 조사하는데 1년 이상이 걸리기 때문이다.
  9. 5년마다 선출한 이유는 호구 조사를 5년에 한 번씩 시행했기 때문이다.
  10. 라틴어로 '디타토르'라고 읽는다.
  11. 그러나 이게 항상 지켜지는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