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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은 [[단원제]] 국회를 통해 이루어지며, 매 5년마다 총선거가 치뤄진다. 132명의 국회의원이 있으며, 이 가운데 4 명을 제외하며 모두 {{ㅊ|당연하게}} 라오인민혁명당 소속이다.
입법은 [[단원제]] 국회를 통해 이루어지며, 매 5년마다 총선거가 치뤄진다. 132명의 국회의원이 있으며, 이 가운데 4 명을 제외하며 모두 {{ㅊ|당연하게}} 라오인민혁명당 소속이다.


라오스는 17개의 도가 있으며 수도인 비엔티안은 어느 도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도시이다.
라오스는 17개의 도가 있으며 수도인 비엔티안은 어느 도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도시이다. <ref>[https://www.cia.gov/library/publications/the-world-factbook/geos/la.html CIA 월드 팩트북]</ref>


==문화==
==문화==

2015년 11월 8일 (일) 01:04 판

라오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위치한 국가이다. 동남아시아의 유일한 내륙국이다. 인구는 2013년 기준으로 약 68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지리

라오스는 대부분이 산악,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태국과의 서쪽 국경에 메콩강이 흐른다.

역사

고대

란상 왕국 (1354~1707)

전기

1354년 라오계 귀족이었던 파 응움(Fa Ngum; ຝ້າງູ່ມ)이 크메르 제국에서 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라오스 지방을 차례차례 정복한 뒤 란상 왕국(Lan Xang; ລ້ານຊ້າງ)[1]를 세웠다. 그는 20년 동안 란상 왕국을 다스리며 꾸준히 영토를 넓히고 불교를 전파했으나, 계속된 전쟁에 지친 궁정 관료들이 그를 내쫓고 대신 그의 맏아들이었던 삼센타이가 왕위에 올랐다. 삼센타이는 타이-라오족과 크메르족 사이의 대립을 완화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고, 명나라로부터 란상 왕국을 인정받았다.

1416년 삼센타이가 43년 동안 왕으로 다스리다 사망하다 그를 이어 란캄댕이 왕위를 이었다. 1421년 명나라가 다스리던 안남 지방에서 베트남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람선 반란), 란캄댕은 베트남인들을 도와주기로 하고 군대를 보낸다. 그러나 란상 왕국의 군대는 무슨 이유에선지 베트남인들을 돕는 대신 명나라 군대와 한 편이 되어 반란군과 맞서 싸운다. 그러나 람선 반란이 반란군의 승리로 끝나고 다이비엣 왕국(Đại Việt)이 세워지자 란상과 다이비엣 사이의 관계는 매우 험악해진다.

란캄댕이 1428년에 사망하자 란상 왕국에는 한바탕 혼란이 몰아닥친다. 1428년부터 1438년까지 여덟 명이 서로 왕위를 가지고 싸웠고, 이런 와중에 마하데비라는 정체 불명의 여성 섭정이 란상 왕국을 통치한다. 이후 1438년부터는 왕위가 아예 공석(!!!)이 되고 승려들과 고위 왕족들이 임시로 왕국을 다스린다. 이 혼란기는 1456년 차까팟이 왕위에 오르면서 일단 끝난다.

흰 코끼리 전쟁(1478)

그러나 겨우 찾아온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다이비엣은 그 동안 란상에 대한 복수심을 꾸준히 닦고 있었고 1478년이 되자 대규모 침공에 필요한 준비를 마쳤다. 마침 란상에서 흰 코끼리가 발견되었는데, 당시나 지금이나 흰 코끼리는 왕을 뜻하는 상징이었다. 이를 알게 된 다이비엣에서는 란상 왕국에게 그 코끼리의 털을 선물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이를 왕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 란상에서는 그 코끼리의 털 대신 똥(...)을 선물 상자에 듬뿍 담아 보냈다. 이를 받은 다이비엣에서는 당연히 빡쳤고, 이를 빌미 삼아 전쟁을 개시한다. 똥을 가져온 사자의 머리도 댕겅~

다이비엣의 군대는 빠르게 국경을 돌파해 란상 왕국의 수도였던 루앙쁘라방까지 순식간에 다다랐다. 차까팟 왕과 신하들은 남쪽의 비엔티안으로 달아났고 곧 루앙쁘라방은 다이비엣이 점령했다. 이때 다이비엣군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데, 군대를 둘로 나눠 하나는 차까팟 왕이 있던 비엔티안으로, 나머지는 서쪽으로 더 가서 란나 국경에서 무력시위를 하기로 한 것이다. 다이비엣군이 란나 국경까지 도착하자, 이를 본 란나의 왕 띨록은 선제공격(...)을 가해 다이비엣군을 궤멸시키고 란상의 군대와 합세하여 다이비엣을 몰아낸다.

이후 다이비엣는 약 200년 간 란상 왕국에 전쟁을 걸지 않았고, 란나와 란상은 동맹을 형성하여 매우 친하게 지냈다.

중기•후기

란상 왕국은 전쟁이 끝나자 전쟁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데 온 힘을 쏟았고 이 덕분에 라오 문화는 매우 융성해졌다. 음악, 시, 의약 분야가 체계화되고 불교가 더 왕성하게 퍼졌다.

1520년 재위한 포띠사랏은 불교를 국교로 지정하고 란나에서 삼장을 전달받은 뒤 1527년 민간 신앙을 금지하는 등 매우 신실한 불교 신자였다. 또한 그는 동맹국이었던 란나를 버마아유타야에 맞서 지원하는 등 외교도 매우 능란하게 했다. 그 덕에 포띠사랏의 아들 세타티랏은 1546년 란나의 귀족들에게 란나의 왕위를 양도받게 되었다.

1548년 버마가 아유타야에 전쟁을 선포하자 인도차이나의 정세는 혼란에 휩싸인다. 그러나 버마가 동맹 관계를 제안했을 때 이를 내키지 않아했던 포띠사랏은 이를 거절하고 전쟁을 관망한다. 이후 1550년 포띠사랏이 사고[2]로 사망한 뒤 그의 아들 세타티랏이 란상의 왕이 된다. 세타티랏은 급격히 세가 커지던 버마를 견제하기 위해 1560년 수도를 루앙쁘라방에서 비엔티안으로 옮기고 아유타야에게 접근한다. 비록 아유타야는 제2차 버마-아유타야 전쟁에서 패배하고 완전히 몰락하나 세타티랏은 지형지리를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버마군을 물리친다.

1572년 세타티랏이 크메르 원정에서 돌아오던 중 실종되자 기회를 노리던 타웅우(버마)의 버인나웅이 란상을 공격한다. 란상은 결국 예속국이 되나, 곧 타웅우 제국이 내분으로 분열되자 다시 독립을 쟁취한다.

1637년 수리냐봉사(Sourigna Vongsa; ສຸຣິຍະວົງສາທັມມິກຣາດ)가 란상의 왕위에 오르면서 란상은 최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문화적으로 매우 풍요로웠으며 수리냐봉사의 장기집권은 란상을 안정화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그러나 그가 1694년 후계자 없이[3] 사망하자 란상은 분열하기 시작한다.

루앙쁘라방, 비엔티안, 참빠삭 왕국 (1707~1779)

수리냐봉사가 사망하자 곧 후계자가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한 분쟁이 일어났다. 이때 수리냐봉사의 조카 사이옹흐가 베트남의 지원을 받고 다른 경쟁자들을 쫓아낸 뒤 란상의 왕이 된다. 그러나 그는 수리냐봉사의 손자였던 낑낏사랏의 도전을 받게 된다. 1705년 낑낏사랏은 자신이 은거하던 라오스 북쪽에서 군대를 이끌고 비엔티안 북쪽의 루앙쁘라방을 점령한다. 이에 사이옹흐는 아유타야에 도움을 요청하나 아유타야는 사이옹흐를 지원하는 대신 란상 왕국을 둘로(...) 쪼개버렸다. 결국 1707년 란상 북부는 루앙쁘라방 왕국, 중부와 남부는 비엔티안 왕국으로 나뉜다.

이후 비엔티안 왕국은 또다른 경쟁자의 반란으로 인해 1713년 다시 둘로 나뉜다. 최종적으로 란상 왕국은 북쪽의 루앙쁘라방 왕국, 가운데의 비엔티안 왕국, 그리고 남쪽의 참빠삭 왕국으로 나뉜 채 동네북이 된다.

1760년대와 1770년대에는 아유타야와 버마의 대립으로 인해 이 세 왕국이 편가르기를 하게 된다. 특히 루앙쁘라방과 비엔티안 왕국은 서로 반대되는 쪽에 붙어 상호견제를 하였다.

시암의 속국화 (1779~1893)

이 분열기는 얼마 안가 끝나게 된다. 아유타야가 무너진 뒤 톤부리 왕조를 연 탁신 장군은 그의 무력과 재능을 바탕으로 비엔티안과 참빠삭을 점령하고 루앙쁘라방을 속국화한다.[4] 톤부리 왕조를 이은 차끄리 왕조는 속국화 뿐만 아니라 중앙집권화도 추구하며 라오계 왕국들을 점점 수세에 몬다.

결국 1826년 때를 엿보던 루앙쁘라방의 왕 차오아누가 반란을 일으키나 실패하고 라오스는 완전히 태국의 땅이 되버린다. 곧 라오인들은 태국에 의해 심한 착취와 차별이 이루어졌으며, 이들의 반란을 통제하기 위해 강제로 이주시키기도 했다. 이주당한 라오인들은 대부분 이산 지방(태국 북동부)에 정착하였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1893~1953)

때마침 베트남을 기점으로 동남아에 진출하던 프랑스는 라오스를 중국으로 진출할 전진 기지로 보고 슬그머니 라오스의 토착 지배자들에게 다가갔다. 또한 시암이 벌어던 가혹 행위를 제지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시암과 마찰을 빚게 되자 프랑스는 무력 시위를 통해 태국을 압박하였다.

결국 프랑스가 직설적으로 메콩강 동쪽의 영토를 할양하라고 요구하자 태국은 이를 거부하였고, 1893년 프랑스-시암 전쟁이 일어난다. 프랑스는 방콕 인근의 해안을 봉쇄하였고, 프랑스의 원수인 영국도 태국을 도와주지 않자 태국은 끝내 항복하고 라오스를 할양하기로 한다.

프랑스는 일단 라오스보단 베트남, 특히 베트남 남부의 사이공 지방에 관심이 많았고 이 때문에 통치는 태국보다는 약간 더 느슨했다. 몰론 일반 평민들에겐 별로 나아진 게 없었기에 산발적인 반란이 있었다.

1920년대부터 프랑스는 라오스에 투자를 하기 시작하여 라오스의 근대화를 추구하였다. 물론 이는 1929년 일어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주춤한다. 또한 이때부터 라오스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며 라오 민족주의가 일어난다.

라오 민족주의는 1938년 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극우 민족주의 정권이 세워지자 이를 경계한 지식인들과 프랑스에 의해 빠르게 퍼진다. 그러나 프랑스가 독일에게 순식간에 무너지자 이를 틈타 태국이 라오스를 침공하고 프랑스는 이를 인정한다. 이렇게 되자 라오인들은 태국도 프랑스도 불신하면서 독자 정신을 세워 간다.

1945년 라오스는 일본의 압박으로 독립하게 되면서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일본도, 프랑스도 없는 상황에서 이제 라오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세워진 라오 이사라 정권은 잽싸게 라오스의 독립을 선포하며 프랑스의 재귀를 저지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라오 이사라를 추방하면서 라오 민족주의자들을 달래기 위해 라오스에 입헌군주제(라오스 왕국)을 도입한다. 프랑스는 차츰 라오스 왕국에 더 많은 권리를 부여했고, 끝내 1953년 라오스 왕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독립과 내전 (1953~1975)

그러나 독립 이후에도 라오스는 순탄치 않았다. 일단 왕의 맏아들 수바나 푸마를 수반으로 하는 중도 성향의 내각을 세워졌으나 지지 세력이 미약하였고, 옆에서는 북베트남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를 몰아내며 공산주의자 세력(파텟 라오)을 지원했다.

1962년 제네바 협약에서 라오스는 독립과 중립성을 확인받았으나 이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고 라오스에는 다시 혼란이 닥친다. 라오스 동부는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전쟁; 1954~1975)의 영향으로 인해 북베트남의 잦은 침공을 받았고 이를 저지하려는 미국의 폭격도 받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폭격당한 지역이 되었다.

곧 미국이 베트남 전쟁이 GG치고 남베트남에서 철수하자, 공산주의자 세력과 친서방 세력은 협상을 하여 새로운 정부를 만든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침공을 계속 하였으며, 결국 공산주의자 세력이 친서방 세력을 몰아내며 라오스의 공산화를 이룬다.

공산화 이후 (1975~현재)

공산화 이후 라오스는 사실상 베트남의 괴뢰국으로 전락했으며, 소련에게 많은 지원을 받았다. 또한 지식인들과 소수 민족들(특히 몽족)들은 "재교육"시켰으며 계획경제를 기반으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몰락과 개방의 물결이 닥치자 라오스 또한 베트남처럼 제한적인 개방을 실시하면서 계획경제를 버렸다.

정치

라오스는 공산주의 정당인 라오인민혁명당이 이끄는 일당 독재 체제이며, 국가 수반은 춤말리 사이냐손, 정부 수반은 통싱 탐마봉이다.

입법은 단원제 국회를 통해 이루어지며, 매 5년마다 총선거가 치뤄진다. 132명의 국회의원이 있으며, 이 가운데 4 명을 제외하며 모두 당연하게 라오인민혁명당 소속이다.

라오스는 17개의 도가 있으며 수도인 비엔티안은 어느 도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도시이다. [5]

문화

경제

다른 나라와의 관계

대한민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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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흔히 란쌍 왕국으로도 불리나, 일단 라오어와 친척 관계에 있는 타이어 표기법을 참고하여 "쌍"이 아닌 "상"으로 표기하였다.
  2. 외교관들 앞에서 란상의 위세를 보여주려 자신이 직접 참여했다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코끼리가 넘어지면서 그 밑에 깔려(...) 죽었다.
  3. 본래 두 아들이 있었으나 첫째는 불륜으로 사형당하고, 둘째는 여동생과 동거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자 외국으로 튀었다.
  4. 이때 탁신이 그 유명한 에메랄드 부처를 비엔티안의 절에서 가져간다.
  5. CIA 월드 팩트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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