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구사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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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Non bene pro toto libertas venditur auro''"(라틴어)<br>"''Sloboda se ne prodaje za sve zlato svijeta''"(크로아티아어)<br>"''La libertà non si vende nemmeno per tutto l'oro del mondo''"(이탈리아어)<br>"''이 세상의 모든 금을 준다고 하더라도 자유와는 바꾸지 않으리!''"
|표어="''Non bene pro toto libertas venditur auro''"(라틴어)<br>"''Sloboda se ne prodaje za sve zlato svijeta''"(크로아티아어)<br>"''La libertà non si vende nemmeno per tutto l'oro del mondo''"(이탈리아어)<br>"''이 세상의 모든 금을 준다고 하더라도 자유와는 바꾸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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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설명=1808년 당시 라구사 공화국의 영토
|크기=1,500 km²([[18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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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어=라틴어(~1492)<br>이탈리아어(1492~)<br>이 외에도 크로아티아어 및 달마티아어도 쓰임
|공용어=라틴어(~1492)<br>이탈리아어(1492~)<br>이 외에도 크로아티아어 및 달마티아어도 쓰임

2016년 7월 26일 (화) 16:20 판

틀:옛 나라 정보

이 세상의 모든 금을 준다고 하더라도 자유와는 바꾸지 않으리!
Non bene pro toto libertas venditur auro
— 라구사 공화국의 건국 이념

라구사 공화국 또는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은 현 크로아티아 최남단에 위치한 해양 공화국으로 1308년부터 1858년까지 존속해있었다. 15, 16세기에 경제적으로 전성기를 누렸으며, 1858년에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에 의해 정복당했다. 나라 안에는 3만명, 도시 내에는 5000명이 살고 있었다.

어원

라구사 공화국의 초기 이름은 Communitas Ragusina인데 이는 라틴어로 라구사 지방정부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14세기 들어와서 Respublica Ragusina(라구사 공화국)로 변경되었다. 이탈리아어로는 Repubblica di Ragusa, 크로아티아어로는 Dubrovačka Republika라고 한다.

크로아티아어 이름인 두브로브니크는 오크 숲을 의미하는 dubrava에서 따왔다. '좋은 베니스'를 의미하는 터키어 Dobro-Venedik에서 따왔다는 민간 어원도 존재한다.

라틴어, 이탈리아어, 달마티아어 이름인 라구사는 그리스어로 절벽을 의미하는 Lausa에서 따왔으며, 후에 Rausium, Rhagusium, Ragusium, Rausia, Lavusa, Labusa, Raugia, Rachusa라고 불렀다가 마지막엔 Ragusa라고 불리게 된다. 도시의 정식 이름이 라구사에서 두브로브니크로 변하게 된 것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 지역의 주인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바뀌였을 때로 추측된다.

영토

파일:라구사 지도.png
1808년 당시 라구사 공화국의 영토

라구사 공화국의 영토는 현재 달마티아[1] 남쪽의 조그만 영역에 그쳤으며 그 경계는 1426년에 완전히 형성된다. 주요 영토는 네움에서 프레블라카 반도에 이르었고, 이 외에도 펠레샤치 반도, 라스토보 섬, 믈렛 섬, 콜로솁 섬, 로푸드 섬, 시판 섬 등을 영토로 소유하고 있었다.

15세기에는 콜트술라, 브라치, 흐바르 8년간 영토로 두고 있었으나,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원을 받은 지역의 소귀족들이 저항 때문에 영토를 포기해야만 했다.

16세기 때에 행정적으로 영향을 받는 영토는 라구사 시와 몇몇 카운티들(코나블레, 주파 두브로브니크, 슬라노, 스톤, 라스토보 섬, 믈렛 섬, 시판-콜로솁-로푸드 섬), 중앙 정부에서 임명한 치안판사가 다스리는 선장령(領)(Captaincy)(차브바트, 오레빅, 야니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라스토보 섬과 믈렛 섬은 준자치지역으로 자기만의 정부를 두고 있었다.

역사

기원

파일:라구사 대지진 이전.jpg
1667년 대지진 이전의 라구사 공화국

라구사라는 도시는 대략 614년 경 슬라브 족과 아바르 족들에 의해 에피다우룸[2]이라는 로마인 도시가 파괴된 후 건설되었다. 이 침략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일부가 북쪽으로 25Km 정도를 올라가 해안 근처의 섬에 정착하였고, 그 도시는 곧 라우사가 되었다. 에피다우룸은 40여년 뒤에 슬라브 족의 2차 침공으로 완전히 파괴된다.

에피다우룸에서 온 난민들은 작은 섬[3]에서 해안에서 떨어진 곳에 도시를 지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두브로브니크라고 좁은 해협 건너편 해안에 도시를 지었다. 초창기에 이 두 정착지의 주민들은 서로를 회의적으로 보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 정착지는 점차 더 가까워 졌으며, 12세기에는 두 도시들이 합쳐지게 된다. 이 두 정착지 사이에 있는 해협은 매워져서 오늘날 스트라둔이라고 불리며 도시의 중심지 역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두브로브니크라는 이름은 이 합쳐진 도시의 크로아티아어 이름이 된다.

한편 새로운 고고학 유물에 기조로 하여 만들어진 또다른 이론도 존재한다. 발굴된 성벽과 소예배당의 건설년도가 5세기로 밝혀짐과 동시에 과거에 있던 이론을 부셔버린 것이다. 그 예배당의 크기로 보아서 그 시기에도 충분히 큰 정착지임이 밝혀진 것이다.

이 새로운 이론은 에피다우룸의 파괴를 그리스 시기로 추측하고 있다. 두브로브니크 항구의 유적 개발에서 대규모의 그리스식 건축물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Antun Ničetić은 그의 책 Povijest dubrovačke luke(두브로브니크 항구사)에서 라구사가 그리스인 항해자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주징하였다. 당시 그리스 선원들은 낮이 되면 83km~93km 가량을 항해하고, 밤이 되면 물을 보충하고 쉬기 위해 선박들을 해안가에 정박해 주었는데, 두 그리스인 정착지인 코르쿨라와 부드비에는 대략 176km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즉 중간에 기착지가 필요하였는데, 라구사는 이 두 도시 중간에 있으므로 이상적인 기착지라는 것이다.

초기

866년에는 사라센 해적들이 와서 15개월 동안 공성전을 벌였다. 비잔티움 제국이 약해지자 베네치아 공화국은 라구사 공화국을 적이자 자기네들 영토로 편입되어야 할 곳으로 보아 948년 도시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라구사의 시민들은 이 승리를 도시의 수호성인이었던 성 블라시우스에게 바쳤다.

이 시기의 라구사는 아직 섬이었으며 주민들은 달마티아계 언어[4]를 사용하는 로마화된 일리리아인들로 구성되었다.

1050년 크로아티아의 왕 스테판 1세는 라구사의 국경을 북쪽으로 16km 확장시켜주었고, 덕분에 공화국은 옴블라 강의 수원을 획보하여 막대한 량의 민물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스테판 1세는 그루츠 만을 영토로 주었는데, 이는 오늘닐 두브로브니크 시의 상업항 역활을 하고 있다.

12세기에 두브로브니크는 아랍 권의 유명한 지리학자 무하마드 알 이드리시의 저서에 크로아티아의 최남단 도시로써 언급되었다.

1191년, 라구사의 상인들은 이사키오스 2세에 의해 비잔틴 제국 내에서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1186년에는 세르비아, 1189년에는 보스니아 내에서 그러한 권리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반 쿨린의 문서는 보스니아 내에서 라구사 시민들이 갖는 권리를 정의한 문서로 라구사 시가 두로브니크로 언급된 최초의 공문서이다.

베네치아 통치기

1205년이 되자 베네치아 공화국은 제 3차 십자군을 이끌고 엄연한 카톨릭을 믿는 지역이었던 달마티아 지방을 공격하였고, 라구사는 베네치아의 속국이 되어 밀랍, 가죽, 은 등을 바치게 되었다. 베네치아는 이 도시를 아드리아해 남부의 해군 중심지로 활용하였다. 자다르[5]와 달리 라구사는 동방 무역에서 베네치아와 큰 갈등을 겪지 않았고, 그 결과 독립국으로는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베네치아가 라구사에게 요구하는 공물의 량은 점차적으로 증가하였고, 이에 시민들의 분노 또한 증가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영토 또한 늘어나게 되는데 13세기 중반에는 라스트보 섬을 영토로 편입하였고, 1333년에는 세르비아로부터 펠리샷스 반도를, 1345년에는 믈렛 섬을 구매하였다. 1348년 1월에는 흑사병이 도시를 강타하였다.

베니스로부터의 독립과 공화국의 설립

1358년 자다르 조약으로 인해 베네치아는 달마티아에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게 되었고, 라구사는 헝가리라요슈 1세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1358년 7월 27일 헝가리의 비셰가르드에서 대주교 이반 사라카와 라요슈 1세 사이의 타협 결과로 라구사는 헝가리의 영토로 취급되나 헝가리의 왕의 간섭을 받지 않게 되었다. 헝가리의 해군력은 미약한 수준이었고, 그 이해관계 또한 크게 겹치지 않았기 때문에 라구사는 큰 이득을 볼 수 있었다.

1399년 라구사는 라구사 시와 펠레샤치 반도 사이의 프리모레라는 지역과 슬라노를 얻었다. 이후 이 지역을 두고 1403년 크로아티아랑 전쟁이 일어나게 되나, 크로아티아 군이 후퇴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1419년에서 1426년까지 주파 두브로브니크 지역을 통치하였다.

15세기 초반에는 교회 개혁자이자 작가였던 라구사의 이반이 활동하였다.

오스만 제국 통치기

1458년 라구사 공화국은 오스만 튀르크 제국에게 공물을 바친다는 조약을 체결하였고, 또한 복종의 의미로 매년 11월 1일 이스탄불로 대사를 보내 공물을 바쳐야만 했다.

1481년이 되자 라구사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공물 역시 12500두카트까지 상승하였다. 그러니 라구사 공화국은 실질적으로 독립국이었다. 라구사는 오스만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정도에서 외국과 관계를 맺거나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고, 또한 공화국의 배는 공화국의 국기를 달고 항해할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됨으로써 상인들은 제국 내부에까지 무역을 확장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을 대신해 아드리아해 교역을 담당했으며, 상인들은 제국 내에서 세금을 덜 받는 등의 권리를 얻었으며, 이 외에도 주요 도시에 치외법권이 보장되는 거류지를 설치할 수 있었다.

라구사 공화국의 배는 비 오스만 제국 선박이라먼 들어갈 수 없는 흑해에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다. 관세 또한 다른 외국 상인보다 적게 냈으며, 베네치아 상인들과 외교적 분쟁이 있었을 때에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 또한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도 라구사를 매우 중요한 항구 중 하나로 여겼다. 피렌체를 출발해서 부르사[6]로 가는 화물 대부분이 라구사를 거쳐서 갔기 때문이었다. 피렌체에서 출발한 화물은 페사로, 파노, 안코나같이 아드리아해 서안의 항구에서 선박에 실린 뒤 라구사에 도착했으며, 거기서부터는 육상 루트를 따라 사라예보[7], 스코페[8]를 거친 뒤 에디르네[9]로 보내졌다.

영국, 스페인, 제노바와 함께 15세기 동지중해 무역에서 베네치아의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였다. 가르가노의 풍부한 목재 덕분에 선박을 베네치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대규모의 조선이 가능하였다.

쇠퇴기

포루투갈의 신항로 무역으로 인해 더 이상 향신료는 더 이상 지중해를 통해 들어오지 않았다. 게디가 신대륙의 발견은 지중해 무역에 커다란 위기를 불러오게 되고, 이는 라구사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이 두 상인 공화국의 쇠퇴를 불러오게 된다.

1497년 샤를 8세는 라구사의 상인들에게 프랑스 내에서 무역할 권리를 부여하였고, 1502년 루이 7세는 이 권리를 확인해주었다. 1600~1610년에는 서로의 도시에 대사를 파견하였으며, 몇몇 귀족들은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가기도 하였다.

라구사의 운명은 오스만 제국과 크게 연결되어 있었다. 라구사랑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이집트-켈리컷-구자라트로 이어지는 동맹에 기술적인 면에서 지원해 주었으나 이들은 1509년 디우에서 포루투칼에게 크게 깨지고 만다.

1667년 4월 6일에는 라구사에서 지진이 일어나 5000명이 넘는 시민이 죽었고, 사망자 중에는 도시의 행정장관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도시에 있던 공공 건물 중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스폰차 궁전과 행정장관의 궁전의 앞부분 뿐이었고, 이전의 고딕 양식의 건물과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은 모조리 파괴되었다. 점차적으로 도시는 바로크 양식의 건물로 복구되어갔다.

1677년에는 마린 카보가와 니콜라 부키츠 두 사람이 이스탄불에 도착해 라구사에 닥친 위협을 해결하고자 했다. 오스만 제국이 라구사 공화국을 합병하려 한 것이다. 마린은 외교관으로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하얐으나 당시 오스만 제국의 재상이던 카라 무스타파는 되려 그를 몇 년간 가두어 두었디. 1683년 카라 무스타파는 빈을 공격하던 중 죽었고, 이내 마린은 풀려나게 된다.

1684년 공화국은 1358년 비세가르드에서 맺었던 조약을 부활시킴에 따라 매년 500두캇을 바치는 것으로 헝가리, 즉 당시 헝가리의 왕을 겸임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군주정의 속국이 되었다. 동시에 라구사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기도 하였으므로, 한 나라가 상호 간에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두 나라의 속국이(...) 된 것이다. 이후로 라구사는 달마티아 전역의 항구에 기항할 수 있게 되었다.

1683년에는 라구사인 프란체스코 지오반니 곤돌라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육군은 빈 외곽의 카흘렌베르크에서 오스만 튀르크 군을 무찔렀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트란실바니아[10], 슬로바니아[11], 달마티아, 포돌리아를 승전국 합스부르크, 베네치아, 폴란드에게 할양해 주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더 이상 기독교 유럽 국가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베네치아는 라구사 국경에 인접한 내륙지방을 야금야금 집어먹더니 결국 국경을 완전히 포위하여 라구사 내륙 무역 루트를 완전히 끊어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오스만 제국은 해당 지역을 수복하였다. 카를로비츠 조약의 결과로 라구사의 가장 북쪽과 남쪽의 도시인 네움과 수토르니아[12]가 오스만 제국에게 할양되는데, 덕분에 베네치아는 라구사를 더 이상 육로를 통해 공격할 수 없게 된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1–48)과 7년 전쟁(1756–63)때에 라구사는 엄정중립을 유지하였다.

1783년[13] 라구사 원로원은 파리의 대사로부터 온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미국과의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 였는데, 미국은 라구사의 선박이 자기네 항구에 무료로 입항하는 것을 허용해 주었다.

나폴레옹 전쟁의 처음 1년간은 라구사가 가장 번창한 시기였다. 공화국은 중립을 유지하였고, 덕분에 지중해 무역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대륙대봉쇄는 라구사로써 돈을 벌 절호의 기회를 주었다. 대륙대봉쇄로 인해 영국의 무역선은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에 항구를 통해 수출할 수 없게 되자 지중해의 살로니카[14]와 라구사를 통해서 수출한 것이다. 그러나 라구사 공화국은 극한으로 몰린 유럽의 상황에서 홀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자비로운 프랑스의 공화주의자는 다른 공화국에게 공격을 가하지 않았고, 자기 머리에 왕관을 씌운 나폴레옹 또한 이 작은 공화국을 경멸하지는 않았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후, 오스트리아가 가지고 있었던 달마티아는 프랑스에게 할양되었고, 이는 라구사 공화국을 새로운 딜레마에 빠지게 만들었다. 현재의 몬테네그로의 해안 지방에 코톨이라는 도시가 있는데, 이 도시는 당시 베네치아인이 소유하고 있던 도시였다. 이 곳을 점령하려고 한 프랑스는 아우스터리츠에서 군대 일부를 이 곳으로 전진시켰다. 프랑스를 견제하고자 했던 러시아는 전열함 11척과 6000명의 군사를 보냈고, 몬테네그로 공작 역시 16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전진해 왔다. 한편 프랑스군 원수 가브리엘 장 조세프 몰리토가 이끄는 프랑스군 5000명은 달마티아의 요새들을 큰 싸움없이 평화롭게 점령해갔다. 러시아는 이 들의 진격을 막기 위해 라구사가 달마티아의 요새를 공격하는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프랑스는 코톨로 가기 위해선 라구사를 들려야만 했고, 국경을 열어줄 것을 요청했다. 라구사에서는 중립을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긴 회의가 열렸다.

진퇴양난이었다. 원로원은 될 되로 되라는 식의 해결책 조차도 내놓지 못했다. 대다수는 러시아 군의 지원을 요청하자고 하였다. 하지만 아우스트러츠에서의 참패로 보아선 (최소한 라구사에겐) 러시아 군은 영 미덥지 못한 존재였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은 당시 군사력과 야망 모두가 정점에 있던 나폴레옹의 분노를 일으킬 수 있는 행동이었다. 결국 프랑스군을 불어들였으나, 이젠 러시아군과 몬테네그로군이 라구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성전은 마치 훈족과 아바르족의 재림을 보는 듯 하였다. 몬테네그로 군의 장군과 장교들은 라구사의 배반에 분노하고 있었다. 몬테네그로군과 러시아군은 적 도시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부유한 빌라들을 보았고, 라구사 공성전은 이러한 빌라들을 태우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라구사에 진입한 프랑스의 몰리토 장군은 오직 수백명의 군사만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의 책략을 통해 수적 열세를 줄여나갈 수 있었다. 그는 먼저 라구사에 편지를 보내 계속해서 버틸 것을 명령하였고, 동시에 수가 많은 것처럼 꾸며서 진격하였다. 이에 속은 러시아군과 몬테네그로군은 자기네 본거지로 후퇴하였다.

멸망

파일:마르몽 원수.jpg
라구사의 공작이 된 마르몽 원수의 초상화

1800년이 되자 라구사 공화국은 8개 이상의 도시와 항구에 영사관을 짓는 등 꽤나 조직화된 영사 네트워크를 지니게 된다. 1806년에는 프랑스 제1제국에게 항복하였고, 이에 러시아군과 몬테네그로군이 공격하여 1달간의 공성전을 치루게 된다.[15]그 뒤 프랑스군이 등장해 러시아군과 몬테네그로군을 쫓아냈다. 같은 해에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육군이 라구사에 진입하였다. 1808년 마르몽 원수는 라구사 공화국을 폐지하였고, 동시에 이탈리아 왕국[16]에 편입함과 동시에 자기자신을 라구사 공작으로 선언했다. 1810년에는 리구사를 포함한 달마티아 전역이 프랑스 제국의 일리리아 주로 편입되었다. 1814년 파리 전투에서 마르몽 원수는 니폴레옹을 배신하였고, 그에게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졸지에 그의 작위 중 하나였던 라구사 공작에서 따온 ragusaderaguser는 프랑스어로 각각 배반을 선언하다, 사기꾼을 의미하게 된다.졸지에 반란자가 되어버린 라구사인들 지못미

라구사 귀족들 또한 그들의 이념이나 정치적 견해에 차이를 두고 서로 대립하였다. 1811년 칙령 44장에서 과거 상속법에 있었던 신탁 유증제도[17]를 폐지하였는데, 이로써 젊은 귀족들이 가족의 상속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1821년 두브로브니크 구에는 교회와 코뮤네[18]를 포함하여 451명의 토지 소유자가 있었으며, 대부분의 영토는 귀족들의 소유였다.

도시 내의 사건과는 상관없이 토도르 밀루티노비치가 이끄는 구 오스트리아 군이 영국 해군의 도움을 받아 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814년 1월 말에는 영국 해군의 제독 윌리엄 호스테 경이 HMS 버캔티와 HMS 사라센을 이끌고 공성전에 동참하였다. 2일 간의 포격 끝에, 도시 내의 프랑스군 500명은 명예로운 대우를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실제로 오스트리아 군과 영국군, 그리고 몬테네그로군은 그들이 완전히 후퇴하기 전까지는 도시에 진입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1814년 1월 18일에는 과거 라구사 대의회의 의원 44명이 모여 공화국을 다시 세울 것을 결정하였고, 빈 회의에 대표로 미호 보나를 보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반대로 그는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1월 27일 프랑스는 그루츠에서 조건부 항복에 동의하였다. 이에 블라호 카보가는 오스트리아의 편으로 돌아섰고, 한편 지보 나탈리가 이끄는 반란군은 플로체 문 밖에서 진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8년간 라구사를 지배하던 프랑스군은 라구사를 빠져나왔고, 28일 오후에 영국군과 오스트리아군은 블라호 카보가의 지원 하에 라구사로 진입하였고, 반란군의 진입은 거절되었고, 밀루티보니치 장군은 그를 오스트리아의 장군으로 만들어준 그루츠 조약에 동의하였다.

성 블라시우스의 깃발은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깃발 옆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그러나 2일 뒤, 1월 30일에 밀루티보니치 장군은 라구사의 깃발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고, 도시의 마지막 원수이자 친불파였던 사보 조르지는 "jer da ga je pripeo puk"(이 깃발은 시민의 깃발이기 때문에)라면서 거절하였다. 차후의 사건들은 오스트리아군이 베네치아에서 코톨에 이르는 아드리아해 동안 전체를 침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훌륭히 증명해주었다. 빈 회의에서 동맹군은 라구사 공화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릴 것을 결의하였다. 위에서도 말한 바 있던 라구사 공화국의 마지막 대의회 회의에서 대표로 선출된 미호 보나는 회의에 참가할 수 없었고, 동시에 밀루티보니치는 도시의 지배를 확고히 하는데 성공하였다.

두브로브니크 함락(Pad Dubrovnika)에 따르면 이 책의 저자 루호 보이노비치는 라구사 독립을 위해 라구사 내 각 사회계층이 독립을 위해 뭉쳤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꽤나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노력은 무위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라구사의 귀족, 부르주아, 농민층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았고, 되려 미래를 위한 기초적인 토대를 쌓을 기회마저 날려버리고 만 것이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이유로 프랑스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그래서 라구사가 프랑스의 지배로 벗어났을 때의 기쁨조차도 이들을 하나로 규합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빈 회의로 인해 라구사 공화국의 영토는 합스부르크 가의 오스트리아 왕이 왕으로 있는 달마티아 욍국의 왕실 소유지가 되었다가 1816년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영토가 되고, 1918년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 이후 유고슬라비이가 붕괴되었을 때 크로아티아의 영토가 된다.

정부

라구사의 정체는 귀족정체제 였다. 라구사의 계층은 귀족, 시민, 평민으로 나뉘었으며, 평민의 대부분은 장인과 농민(농노, 콜로누스[19], 자유민)이었다. 대부분의 권력은 귀족 계층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시민은 오직 소의회까지만 진출할 수 있었다. 한편 평민들은 정치에 그 어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다.

파일:두브로브니크 광장.jpg
원수가 직무를 보는 원수 관저의 모습

정부의 모델은 베네치아 모델을 기반으로 하였다. 행정 조직은 대의회(Consilium maius, Maggior Consiglio), 소의회(Consilium minus, Minor Consiglio), 원로원(Consilium rogatorum, Consiglio dei Pregadi)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가의 수장은 원수(Rector)[20]불렸다. 원수는 의회에서 한 달 간격으로 선출하였다.

대의회는 귀족으로만 이루어져 있었으며, 18세가 되면 귀족 남성들은 의원직을 자동으로 휙득하였다. 1332년부터는 대의회의 폐쇄(세라타)로 라구사의 귀족 남성만이 의원이 될 수 있었다. 1358년부터 다른 의회의 의원과 행정관, 그리고 원수를 선출하였다

소의회는 대의회에 의해 선출되었다. 임기는 1년이었다. 원수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이고 행정상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초기에는 11명의 의원을 선출하였으며, 1667년부터 7명씩 선출되었다.

원로원은 국가의 실질적인 권력을 지닌 주체로 40세가 넘는 귀족 남성 45명으로 구성되었다. 1년 마다 대의회에서 선출하였다. 설립 초기에는 오직 자문만 할 수 있었으나, 16세기부터 공화국의 실질적인 행정기관 중 하나가 되었다. 18세기가 되면 원로원은 공화국의 실질적인 최고기관이 되었고 원로원의 의원들은 귀족들 중의 귀족이라고 불렸다.

베네치아 지배기인 1204년부터 1358년까지 공화국의 수장인 콘테(Conte)[21]는 베네치아 인이었지만 독립 이후 원수는 라구사인으로 선출되었고, 대의회에서 선출되었다. 원수의 임기는 오직 1개월 이었고, 최대 2년까지 재선이 가능하였다. 원수는 원수 관저(Rector's Palace)에서 거주하며 그곳에서 일을 처리하였다

이처럼 라구사 인들은 피렌체 공화국의 메디치 가문처럼 한 가문이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르고 가문이 가장 강력한 영향력(특히 18세기)을 행사하였다고 한다.

15세기까지 사법권은 소의회에서 가지고 있었고, 이후에는 민사 법정(Curia consulum causarum civilium)형사 법정(Sex iudices de criminali)에서 관할하게 되며 상고 시에 원로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관들은 모두 귀족이었으며 대의회에서 선출하였다. 임기는 1년이었다.

행정관은 프로베디토리(Provveditori)라고도 불렸으며 법원과 의회, 그리고 다른 행정관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들은 소의회에서 결의된 내용을 기각하고 원로원에게 맡기도록 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대의회가 50세가 넘는 귀족 들 중에서 선출하였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

주요 법령으로는 Liber statutorum civitatis Ragusii(1272년 제정, 1358년 개정), Liber omnium reformationum(1335-1410), Liber viridis(1358-1460), Liber croceus(1460-1808)가 있었으며, 이 외에도 Liber statutorum doane Ragusii(구 관습법) (1277), Capitolare della doana grande(신 관습법) (1413), Ordo super assecuratoribus(해상보험령) (1568), Regolamenti della Repubblica di Ragusa per la navigazione nazionale(국가 해상규제령) (1745) 등이 있다.

라구사 공화국의 정부는 자유주의적이었고, 또한 공정성과 인도주의적인 면모 역시 보였으나, 또한 보수적인 사회 체제와 정치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라구사 공화국의 국기 뒷 편에는 LIBERTAS(자유)라는 글씨를 새기고 있었고, 라구사 시 바로 바깥에 있는 성 라우렌시오 요새의 입구에는 Non bene pro toto libertas venditur auro(전 세계의 모든 금을 주더라도 자유와는 맞바꾸지 않으리!)라는 라구사 공화국의 건국이념이 새겨져 있었다. 노예 무역은 1416년에 금지되었다. 라구사 공화국은 정교회의 적대자였고, 그렇기에 오직 카톨릭을 믿는 사람만이 공화국의 시민권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귀족 가문

라구사 공화국은 귀족들에 의해 통치를 받았다. 계층 간의 통혼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라구사 공화국의 수장인 원수는 베네치아 통치기 때에는 압도적인 영향력을 지녔지만 독립 이후에는 세 의회(대의회, 소의회, 원로원)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지니게 된다.

라구사 공화국의 1440년 9월부터 1808년 1월까지의 원수 목록을 모은 Speculum Maioris Consilii Rectores에 따르면 총 63%의 원수가 "구 귀족" 가문인 고체, 보나, 카보가, 케르바, 게탈디, 조르지, 그라디, 포차, 사라카, 소르고, 자나냐 가문 출신이었다.

  • 17세기에는 공화국의 원수와 원로원의 총 50%가 보나, 곤돌라, 고체, 멘체, 소르고에서 나왔고
  • 18세기에는 원로원 의원 중 총 56%가 소르고, 고체, 자나냐, 카보가, 조르지에서 나왔으며
  • 19세기에는 원수 중 총 50%가 소르고, 고체, 그라디, 보나, 라그니나 가문에서 나왔다.

라구사 귀족가의 가장 큰 문제는 수가 적다는 것과 주변에 귀족 가문들이 적었다는 것이었다. 공화국 중기 부터 라구사의 주변은 오스만 튀르크 제국에 의해 둘러쌓이게 되었으며, 결국 공화국의 귀족들은 서로서로 결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적은 수랑 겹치게 되면서 후에는 삼촌 내지 사촌 사이의 결혼 역시 드문 일이 아니게 된다. 그 결과 1802년에는 소의회 의원 8명 중 6명이, 대의회 의원 20명 중 15명이 11개의 같은 가문 출신이었을 정도로 인재 풀 역시 줄어들게 되었다.

라구사의 귀족들은 12세기 경에 생겨난 것으로 보이며 1332년 헌법에 의해 28가문으로 최종적으로 확립되었다. 1667년 대지진이 덮치고 난 이후로 10개의 가문이 새로 들어오게 된다.

귀족들 간의 관계

귀족들은 국제 분쟁으로 인해 두 개의 파로 갈렸다. 1808년 마르몽 원수가 라구사로 왔을 때에는, 소르본파와 살라망카파 두 개로 나뉘었다. 이러한 이름은 250년 전에 일어났던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와 프랑스의 프랑시스 1세 사이에 일어났던 분쟁에서 유래되었다. 1667년 대지진 당시 대다수의 귀족이 죽었고, 그 결과 일부 자유민들이 귀족 계층으로 편입되게 된다. 친 스페인파인 살라망카파는 이들을 동등하게 대해주지 않았지만, 친 프랑스파인 소르본파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들을 받아들이자는 파였다.[22] 어찌됬건, 이 두 파벌은 대지진 이전의 세력을 회복하였고, 의회도 서로 반반씩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간에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았다. 거리에서 만나도 인사조차 하지 않았으며 두 파벌간의 통혼은 계급 간의 통혼과 동일시 취급하였을 정도로 이 두 파벌간의 반목은 심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귀족은 공화국에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는데, 라구사 공화국은 주변의 대제국인 헝가리, 베네치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위협을 받아왔으며, 이는 소수의 귀족 집단으로 겨우 해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인구

인구 조사에 따르면 1500년 대에는 9000명의 인구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나 1700년부터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다. 16세기 초에는 50000명 이상의 인국가, 16세기 후반에는 50000에서 60000사이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1630년대에는 인구 수가 4만까지 떨어졌고 1647년에는 15세기 후반에는 터키의 침공을 피해서 보스니아와 헤르치고비나에서 대규모의 피난민이 몰려들었고, 이후 17세기에는 1645~1669년의 칸디아 전쟁[23], 1667년의 대지진 등으로 인해 인구수가 급감하였고, 이후 멸망할 때까지 당시 인구수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언어

1472년까지 공식 언어는 라틴어였다. 이후 원로원은 공식 언어를 달마티아어의 라구사 방언으로 지정하였고, 원로원 회의에서 크로아티아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1492년까지는 라틴어가 공식 언어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14세기 말이 되면 대부분의 국민들이 크로아티아어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달마티아어 역시 사용되었다. 1492년 이후 공식 언어로 지정된 이탈리아어는 베네토 방언과 토스카나 방언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베네치아의 영향력으로 이탈리아어는 기존 달마티아어를 사용하던 상위 상인 계층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라구사 공화국이 멸망하고 나폴레옹의 괴뢰국인 이탈리아 왕국으로 편입된 1808년에서 1810년 사이에도 공식 언어는 이탈리아어로 유지 되었다.

민족 분포

라구사 공화국의 국민들은 카톨릭을 믿었고, 쉬토카비아어[24]의 변형에 해당되는 언어를 사용하였다. 남슬라브계 국가 중 라구사 공화국은 크로아티아계 민족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라구사의 민족 분포에 관한 논쟁은 변형된 개념이며, 라구사 공화국 멸망 이후에 생긴 낭만적 민족주의를 기초로 하고 있다. 이 전에 라구사 공화국은 민족이나 언어같이 하나의 통일된 개념이 아니라 가문, 도시, 종교 등으로 묶어 있었다고 보아야한다.

한편 중세 시대 이슬람의 지도학자인 무함마드 알 이드리시는 라구사를 크로아티아의 일부로 취급하여 이를 크로아티아 최남단 도시라고 그의 저서 전 세계를 여행하고 싶은 자들을 위한 책에서 언급하였다.

같이 보기

각주

  1. 아드리아해의 동쪽 연안
  2. 오늘날의 카브바트
  3. 반도라는 의견도 있다.
  4. 로망스어 중 하나
  5. 달마티아의 도시, 제 3차 십자군 이후 베네치아의 영토가 되었다.
  6. 아나톨리아 북서쪽에 위치한 항구 중 하나
  7.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8. 마케도니아의 수도
  9. 이스탄불 북쪽에 위치한 터키의 도시
  10. 현 헝가리 북부 지역
  11. 크로아티아 북동쪽 내륙지방
  12. 이후 이 두 도시들은 크로아티아의 땅이 아닌, 각각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몬테네그로의 영토가 된다.
  13. 같은 해 미국이 독립하였다.
  14. 그리스의 항구도시
  15. 약 3000개가 넘는 대포알이 도시에 떨어졌다고...
  16. 이탈리아에 세워진 나폴레옹의 괴뢰국
  17. 신탁의 형태로 피상속인이 아닌 이에게 상속을 하는 것
  18. 지역의 공동 자치체
  19. 로마 말기의 계층으로, 토지에 딸려 있던 존재였다.
  20. 공작(Duke)이라고도 했으며, 이탈리아어로는 Il Principe 라고 하였다.
  21. 코메스(Comes)라고도 불렸다.
  22. 당시 소르본파 소속 귀족들은 대지진으로 인해 수가 크게 줄어들었고, 신규 귀족들을 빨리 자기 편으로 만들어 권력이나 부를 되찾고 싶어 했던 것이었다.
  23. 베네치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크레타 섬을 두고 일어난 전쟁이다.
  24. 오늘날의 세르비아어, 몬테네그로어, 보스니아어, 크로아티아어의 원전이 되는 방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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