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카이촌 JCO 임계사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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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1일 6시 3분 임계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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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핵분열이 지속되면서 임계반응이 사라지지만, 침전조 구조가 중성자를 계속 반사하여 임계반응을 촉진했기에 이를 해소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냉각재(물)에 의한 중성자 감속 및 반사 효과를 저감시키기 위해 침전조와 연결된 냉각재 배관을 파괴하여 냉각재 배출을 실시했으며, 결사대 18명(2명 9조)가 조직돼 2시 28분부터 한번에 3분씩 작업을 진행했다.
: 일반적으로 중성자가 흩어지면서 임계반응이 사라지지만, 침전조 구조가 중성자를 계속 반사하여 임계반응을 촉진했기에 이를 해소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냉각재(물)에 의한 중성자 감속 및 반사 효과를 저감시키기 위해 침전조와 연결된 냉각재 배관을 파괴하여 냉각재 배출을 실시했으며, 결사대 18명(2명 9조)가 조직돼 2시 28분부터 한번에 3분씩 작업을 진행했다.
: 9번의 작업 끝에 아침 6시 쯤에 아르곤 가스를 주입해 냉각재를 전량 배출하는 데 성공하면서 중성자가 전량 외부로 방출, 6시 3분 중성자선 감소가 관찰되면서 임계 종료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도면과 달리 침전조가 좀더 외부 쪽에 밀착되어 있던 탓에 예상보다 방사선량이 많이 나와 추가조치가 필요했으며, 방사선량이 감소한 이후 8시 29분에 더 확실한 조치로 중성자를 흡수하는 붕산수를 침전조에 17리터 가량 주입했다.
: 9번의 작업 끝에 아침 6시 쯤에 아르곤 가스를 주입해 냉각재를 전량 배출하는 데 성공하면서 중성자가 전량 외부로 방출, 6시 3분 중성자선 감소가 관찰되면서 임계 종료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도면과 달리 침전조가 좀더 외부 쪽에 밀착되어 있던 탓에 예상보다 방사선량이 많이 나와 추가조치가 필요했으며, 방사선량이 감소한 이후 8시 29분에 더 확실한 조치로 중성자를 흡수하는 붕산수를 침전조에 17리터 가량 주입했다.



2022년 5월 8일 (일) 00:51 판

공장 전경

도카이촌 JCO 임계사고(東海村JCO臨界事故)는 1999년 9월 30일 일본 이바라키현 도카이촌에 위치한 JCO 핵연료 공장에서 근로자의 부주의로 계획하지 않은 임계가 발생하여 다량의 방사능이 누출된 원자력 사고다. 직원 2명이 과피폭으로 사망했으며 INES 4등급이 책정되었다.

JCO는 스이모토 금속의 자회사로, 모회사의 우라늄가공사업을 인수했다. 그러나 이 사고로 핵연료 가공 면허를 박탈당해 저준위 방사능 폐기물 임시보관으로 주 업무를 바꿨다.

경과

9월 30일 10시 35분 임계 발생
당시 연구로 조요에 투입할 고농도(18.8%)의 핵연료를 제조하고 있었다. 원래 복잡한 공정을 통해 임계를 방지해야 했으나, 그런 절차는 싸그리 무시되고 "침전조"라고 부르는 교반탱크에 질산이산화우라늄 용액을 제한치(우라늄 2.4kg에 상당하는 양)를 초과해 주입했다.
이미 전날에 제한치를 초과(약 10kg)하여 주입했으며, 당일에는 우라늄 7kg에 상당하는 양을 추가로 주입했다. 16.6kg이 들어간 순간 체렌코프 현상이 관찰되면서 다량의 감마선과 중성자선이 방출되었고, 임계 경보가 울렸다. 사망자 2명은 이때 8~20시버트에 달하는 피폭을 당했다.
10시 43분 소방대 신고 접수
피폭자를 후송하기 위해 구급대를 요청했다. JCO측의 설명이 미비해 방호장비 없이 투입되면서 구급대가 피폭되었다. 11시 52분에 작업자 3명을 수습하여 인근의 국립병원으로 이송했으며, 15시경 전문국책의료기관인 방사선의학종합연구소로 후송된다.
11시 19분 과학기술청에 사고 통보
사고가 발생한지 45분이 지나서야 주무부처에 보고가 도착했다. 12시 30분에 총리 보고가 들어갔고, 13시에 본청 직원과 원자력연구소(JAERI), 핵연료주기공학연구소(JNC)의 연구원이 현장에 파견되었다.
12시 15분 재해대책본부 설치
12시 15분에 도카이촌 재해대책본부가, 14시 30분에 과학기술청 재해대책본부가 설치되었다. 총리 관저에 사고 소식이 들어간 것은 12시 30분으로 과학기술청의 보고로 들어갔으며, 15시에 범정부 사고대책본부가 설치된다.
15시 반경 350m 이내 주민소개령
사고 2시간이 경과한 12시 30분에 지방정부가 옥내대피를 권고했으나, 방사선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주민소개령으로 격상되었다.
22시 30분 반경 10km 이내 옥내대피 권고
반경 350m 이내 주민소개는 20시경에 완료되었으나, 임계반응이 계속되고 있었기에 대피 범위가 확대되어 인근 나카정까지 범위에 들었다.
10월 1일 6시 3분 임계 종료
일반적으로 중성자가 흩어지면서 임계반응이 사라지지만, 침전조 구조가 중성자를 계속 반사하여 임계반응을 촉진했기에 이를 해소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냉각재(물)에 의한 중성자 감속 및 반사 효과를 저감시키기 위해 침전조와 연결된 냉각재 배관을 파괴하여 냉각재 배출을 실시했으며, 결사대 18명(2명 9조)가 조직돼 2시 28분부터 한번에 3분씩 작업을 진행했다.
9번의 작업 끝에 아침 6시 쯤에 아르곤 가스를 주입해 냉각재를 전량 배출하는 데 성공하면서 중성자가 전량 외부로 방출, 6시 3분 중성자선 감소가 관찰되면서 임계 종료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도면과 달리 침전조가 좀더 외부 쪽에 밀착되어 있던 탓에 예상보다 방사선량이 많이 나와 추가조치가 필요했으며, 방사선량이 감소한 이후 8시 29분에 더 확실한 조치로 중성자를 흡수하는 붕산수를 침전조에 17리터 가량 주입했다.
9시 20분 상황 종료
사고가 발생한지 23시간이 지나서야 상황이 종료되었다. 방사선량 조사 뒤 16시 30분에 옥내대피가 해제되었고, 시설 차폐작업을 한 뒤 이튿날(2일) 18시 30분에 주민소개령이 해제되었다.

원인

  • 규정 무시
    정부에서 허가해준 정상 절차서를 따르지 않고 사내에서 편의 중심의 제2, 제3의 임의 절차서를 만들어 작업하고 있었으며 사고 당시에는 팀원 3명이 모의해 절차서를 아예 무시하고 작업했다. 그래도 임의 절차서는 임계를 고려한 양심이 있었다 직원 교육도 미비하여 임계의 위험성 따위는 평시에 절대 교육된 적이 없었고, 당시 작업중이던 3명 중 아무도 침전조의 규정 농도를 몰랐다.
  • 감독 미비
    사고 시설은 준공검사 이후 1번도 규제 당국의 검사를 받은 적이 없었다. 다른 처부(통상산업성)에서 관리하는 원자력 발전소는 철저하게 규제되고 있었으나 과학기술청 산하의 연구로 등은 그렇지 않았다. 또한 사고가 접수되는 데 1시간 가량이나 걸렸으며, 범정부 사고대책본부가 세워진 것도 접수 후 4시간이나 지나서였다. 그 동안 구급대가 방호없이 투입돼 피폭당하는 등 막을 수 있는 피해가 계속 늘어났다.

후폭풍

  • 조직 개편
    사고 이후 과학기술청은 문부성과 통합해 문부과학성이 되면서 사실상 폐지되고, 원자력 발전소와 비발전 원자력 시설을 감독하는 통합 기관인 원자력안전·보안원이 출범했다. 하지만 매년 원자력과 관련된 부정적 이슈가 반복되면서 시간에 쫓겨 보안원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고,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막지 못한 구멍이 되었다[1].
  • 83일
    최대 20그레이(치사량은 8그레이)의 피폭을 받은 직원은 83일간 생존했다. 구토와 함께 쓰러진 환자는 3일차부터 본격적인 치료를 위해 도쿄의대로 후송되었다. 유전자 손상으로 신규 세포가 생기지 않았고, 림프구, 혈소판 등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점막이 파괴되고 피부가 짓무르는 등의 증상이 나타났다.
    조혈모세포 및 배양피부 이식을 했으나 워낙에 강한 피폭으로 인해 신체 자체가 방사화되어 이식된 조혈모세포가 손상되거나 배양피부가 정착하지 못하는 등 치료가 순조롭지 못했다. 데이터는 고농도의 피폭을 받은 몇 안 되는 “표본”이었기에 학계에서 중요시 여겨졌으며, 안락사 등의 생명윤리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생존기는 NHK 다큐멘터리로 방영되었으며, 이를 책으로 출판한 것이 “83일(ISBN 896462050X)”이다.

같이 보기

각주

  1. 후나바시 요이치 저, 이동주 역, <후쿠시마 원전 대재앙의 진상> 上/下, 기파랑, 2014.3., pp.330-331 ISBN 9788965238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