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이덕혜
李德惠
덕혜옹주;황족화보;국립고궁박물관.jpg
12살 이전의 사진[출처 1]
인물 정보
다른이름 봉호: 덕혜옹주(德惠翁主)
출생 1912년 5월 25일
서울 덕수궁 복녕전
사망 1989년 4월 21일 11시 40분 (향년 77세)
서울 창경궁 수강재
국적 대한민국
학력 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 전학
여자학습원 본과 졸업
배우자 전남편 소 다케유키[宗武志]
가족 아버지 | 고종 이형(李㷗)
적모 | 명성황후 민자영(閔玆暎)
생모 | 복녕당 양춘기(梁春基)
이복오빠 | 순종 이척(李坧), 의친왕 이강(李堈), 영친왕 이은(李垠)
외동딸 | 소 마사에[宗正惠]
조선 왕가
전주 이씨

소개[편집 | 원본 편집]

이덕혜는 조선의 26대 왕 고종 이형과 후궁 복녕당 양춘기의 딸로 조선의 왕족이다. 조선의 27대 왕 순종의 배다른 누이가 된다. 10명의 오누이가 있었지만 대부분이 일찍 죽었고, 순종·의친왕 이강·영친왕 이은을 배다른 오라버니로 두었다. 이덕혜가 태어난 때는 이미 나라가 망한 상황으로, 공인된 신분은 옹주나 황족도, 조선인도 아닌 일본 왕공족이나, 역사상으로는 조선 왕가의 계보에 속하므로 이하로는 널리 불리는 이름인 덕혜옹주(옹주)로 호칭을 통일한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어린시절[편집 | 원본 편집]

덕혜옹주;돌;국립고궁박물관.png

돌 무렵의 사진[출처 2]

1912년 5월 25일에 덕수궁에서 태어났다. 7명의 형제와 3명의 자매가 있었지만 자매 셋은 일찍 죽고 형제 또한 몇 살 되지 않아 사망하고 이척·이강·이은의 셋만 남아, 왕가의 유일한 여식이었다. 어머니인 귀인 양춘기는 덕혜옹주를 낳은 후 고종으로부터 당호 ‘복녕’을 하사받는다.

당시 조선 왕실은 사직과 왕위를 잃고 일본 왕공족 이왕가로 격하된 상태였다. 왕실의 감독을 위해 ‘이왕직’이라는 감독기구가 설치되었으며, 고종은 덕수궁에 부속된 덕수궁찬시실의 감독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궐밖으로 나갈 수도, 원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없었다. 강제로 선양한 뒤 실권을 잃은 채 말년을 보내던 고종에게, 환갑을 맞아 보게 된 고명딸은 마지막 즐거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은 복녕당에 자주 들러 옹주와 복녕당을 보았고, 옹주의 나이가 2개월이 되자 함녕전으로 데려와 침소 옆에 거처를 마련하고 아예 같이 살았다.

옹주가 4살이 되기 2달 전인 1916년 4월 1일에는 덕수궁 준명당[1]에 옹주가 다닐 수 있게 유치원을 만들었다. 옹주만을 위한 유치원은 아니었으나, 유치원을 만들기 3달 전에는 8남 이육(李堉)[2]이 죽고 다시 3달 후 7월에는 9남 이우(李堣)[3]도 죽어, 고종의 상심이 매우 컸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종은 암살을 걱정하여 새벽 3시에야 잠드는 등 압박이 심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늦둥이 딸 하나만 남게 되었으니 더욱 각별해졌을 것임을 쉽게 미룰 수 있다. 원생으로는 옹주와 비슷한 또래의 양반가 딸들을 선발했는데, 제일 어린 옹주에게 원생들이 모두 존대를 했고, 옹주의 시중을 들 궁녀들이 늘 대기하는 등, 옹주가 유치원의 중심이었다. 교육을 위해 교구치 사다코[京口貞子]와 장옥식(張玉植)을 보모로 촉탁했고, 당연하겠지만 일본어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다만 교구치와 장옥식의 경우 이미 경성유치원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실제가 어떠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딸을 경성유치원에 보내지 않고 굳이 궐내에 유치원을 조그맣게 만든 것은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했거니와, 경성유치원에는 친일파들의 자식이 다녔기 때문(…)인 것으로 미루어볼 수 있다. 권력에 집착했던 고종답게, 옹주를 바로 앞에 있는 준명당으로 보내는데도 사인교에 태워 보냈다고 한다. 유치원에서는 달래를 캐거나 공작을 하거나 했다고 하며, 옹주가 만들어온 공작품을 보거나 노는 것을 보거나 하는 일이 고종의 마지막 낙이었던 듯하다. 옹주와 함께 수학했던 이들은 5명 정도였다고 하며, 한상룡과 민영찬 등의 여식으로 전해진다.


덕혜옹주;1919년;석조전;국립고궁박물관.png

1918년으로 추정되는 사진[출처 3]


고종은 나름대로 말년에 얻은 딸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1917년에는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꾀어내 옹주를 호적에 올려 왕공족으로 만들었고, 1919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밀사를 보낼 것을 측근인 찬시 김황진과 논의하며 덕혜옹주 또한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시키려 들었지만, 이를 들켜 김황진은 경무총감부로 끌려가고 고종은 그 해 사망한다.

고종이 죽은 후로 옹주는 준명당에서 자리를 옮겨 순종이 있는 창덕궁에서 교육을 받다가, 9살이 되던 해인 1921년에 경성공립일출심상소학교(히노데소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다.


덕혜옹주;일출소학교 입학;1921년;동아일보.png

1921년 4월 1일 아침 등교하는 모습[출처 4]


그 전까지는 ‘복녕당 아기씨’라고만 불리며 이름이 없었지만, 소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이름이 있어야 했기에, 이지용·윤덕영 등 친일파들이 모여 ‘덕혜’라고 이름짓고 순종의 결재를 받아 일본 궁내부에 상신했다. 이 때부터 이름은 이덕혜가 된다.

경성공립일출심상소학교는 현 서울일신초등학교로, 일본인 학교였고 유치원 시절처럼 일본어로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궁인들과 함께 마차로 등하교했는데, 이 당시만 해도 꽤 발랄했다고 한다. 남은 사진첩으로 볼 때에도 왕공족으로서 특별대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비행기를 소재로 곡을 짓고 노래회도 열었다는 구술이 전해진다. 옹주가 직접 불렀다는 점을 보면 작문과 가창에 나름대로 소질이 있었던 모양. 하지만 13살이 되던 1925년에 이왕직으로부터 일본 유학이 통지된다. 말이 유학이지 (이복오라버니 영친왕처럼) 사실상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는 것이므로, 순종은 소학교 과정까지는 마쳐야 한다며 반발했으나 이왕직은 불허했다.

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 재학 무렵의 사진[출처 5]

일본으로 건너간 덕혜옹주는, 일본의 왕족과 화족[4]들이 다니는 학교인 학습원에 편입되었다. 영친왕저에 잠깐 머물러 회포를 풀었으나 곧 학습원 기숙사로 옮기게 된다. 영친왕과 아내 이방자는 옹주를 자신들의 집에 두고 돌보길 원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본인이 볼모로 잡힌 것으로 모자라 어린 옹주까지 끌려온 것에 못마땅해하던 영친왕은 이에 굉장히 불쾌해했다고 한다. 옹주는 자신도 아버지처럼 독살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학교에 물병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학습원에서의 대우는 일출소학교에서의 대우와 달랐으므로, 의지할 곳 없는 상태의 사춘기 소녀에게는 심한 스트레스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1926년 순종이 위중해지면서 옹주는 조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순종이 4월에 서거하고, 옹주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공부를 계속하게 된다.

3년 후인 1929년, 옹주의 생모인 양 귀인이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당시 17살이던 덕혜옹주는 고아가 된 셈이었다. 일제는 후궁인 양 귀인의 신분(평민)을 구실삼아 옹주가 제대로 상복도 입지 못하게 했으며, 장례가 끝나자마자 옹주를 급히 일본으로 도로 데려왔다. 옹주는 서서히 신경쇠약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병세가 심각해져 정신과 진료를 받은 결과 조발성치매(조현병)로 진단돼 치료를 받는다.

결혼과 자녀[편집 | 원본 편집]

1931년, 일본은 덕혜옹주에게 대마도 번주의 아들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하라고 명한다. 영친왕이방자를 결혼시킨 사다코 대비(데이메이왕후)의 뜻이었다. 영친왕 내외는 “옹주는 학교 공부를 더 해야 하므로 결혼을 늦춰야 한다”고 하였지만, 일본은 이를 듣지 않고 결혼을 서두른다.[5] 당사자인 옹주 역시 이 결혼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거부할 방법이 없었다.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8일에 결혼하고 나카타쵸에 신접살림을 꾸리게 되면서, 본격적인 백작부인이 된다.

1932년 8월에 옹주는 외동딸 마사에[正惠]를 낳았지만, 조현병이 더욱 악화되었다.

정신병원 입원과 이혼[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방계 왕족들과 화족들은 평민으로 강등되었고(신적강하), 소 다케유키 일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케유키는 신분과 함께 재산도 잃어 빈궁해졌고, 1946년 도쿄도립 마츠자와[松澤] 정신병원에 입원한 덕혜옹주의 병원비는 영친왕 내외가 대주었다. 그러다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 이혼했다. 옹주의 정신이 온전치 못했기 때문에, 영친왕·이방자 내외와 상의하여 1955년 이혼에 합의했다. 그리고 가츠무라 요시에[勝村良江]와 재혼하여 장남 타츠히토[立人], 차녀 와키[和木], 차남 나카마사[中正]를 낳았다.

외동딸의 실종[편집 | 원본 편집]

한편 여자가쿠슈인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마사에도, 아버지가 재혼할 즈음에 결혼을 했다. 신랑 스즈키 노보루[鈴木昇]는 마사에와 같은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중학교 교사이자 시인이었다. 결혼 이후 노보루는 처가의 성씨를 따라 ‘소 노보루’가 되었는데, 이는 장인 다케유키의 요구였다. 1956년, 갓 결혼한 새댁이었던 마사에는 의문의 유서만을 남기고 실종되었고 그 후로 어디에서도 목격되지 않았다. 다케유키는 1985년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도 마사에의 실종신고를 하지 않았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마사에의 이복동생들이 실종신고를 했다.

하지만 옹주는 자신이 이혼당한 줄도 모르고, 하나뿐인 딸이 실종된 줄도 모르고, 정신병원에 갇힌 채로 잊혀갔다.

귀국과 사망[편집 | 원본 편집]

1950년 김을한[6]이 그녀를 찾으면서 그녀의 행방이 알려지게 된다. 1961년 덕혜옹주는 한국으로 귀국했으나, 끝내 건강과 맑은 정신을 되찾지 못한 채 투병하다가 1989년 사망했다.

묘소는 고종과 순종이 묻힌 경기도 안산시 금곡동 홍유릉의 부속림이다.

다른 이야기거리[편집 | 원본 편집]

덕혜옹주에 대해 다룬 저작으로는 『세월이여 왕조여』—이방자著, 『덕혜옹주 -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혼마 야스코著,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권비영著, 『한국사傳 - 역사를 뒤흔든 ‘개인’들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KBS 한국사傳 제작팀著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경우 혼마 야스코의 저서를 표절했다는 논란이 있다.

참고문헌[편집 | 원본 편집]

국립고궁도서관 덕혜옹주 소장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진흥사업성과포털 조선왕조실록사전
《삼천리》 11권 4호 〈德壽宮時節의 德惠翁主, 그립든 二十年前의 옛 일이여〉
《세월이여 왕조여》 연재분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장서각국가전적자료센터 『덕수궁찬시실일기德壽宮贊侍室日記』
서울일신초등학교 연혁
『오마이뉴스』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매일신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조선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디지털장서각 『열성어휘列聖御諱』
디지털장서각 《덕혜옹주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사진첩》

각주

  1. 《덕수궁찬시실일기》에는 즉조당으로 기록되어 있다
  2. 1914년 7월 3일-1916년 1월 22일. 생모는 광화당(光華堂) 귀인(貴人) 이완덕(李完德).
  3. 1915년 8월 20일-1916년 7월 25일. 생모는 보현당 귀인 정씨(寶賢堂貴人鄭氏).
  4. 일본의 귀족이다.
  5. 덕혜옹주를 일본인과 결혼시켜서 한국인들의 구심력을 빼앗으려고 한 점과, 조선왕실의 지참금 일본의 돈에 양도할 목적이었다.
  6. 덕혜옹주와 결혼할 뻔했던 김장한의 형으로, 신문기자이다.
  1. 황족화보 제224호 수록, 국립고궁박물관
  2. 국립고궁박물관
  3. 국립고궁박물관
  4. 동아일보, 1921년 4월 2일
  5. 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사진첩, 디지털장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