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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배경==
[[제1차 국공합작]]이 파탄나고, 이를 계기로 [[제1차 국공내전]]이 발발한다. 이후 공산당은 난창봉기의 실패 등으로 패배 등을 맛보다가 1931년 11월에 [[장시성]]에서 중화 소비에트 임시정부를 성립하며 기반을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공산당은 후난 성 등 주변지역에도 근거지를 마련, 각 방면군별로 소비에트를 구성하였다.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공산당 세력이 커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있지 않았다. 1933년경을 기해 국민당군은 총공세를 개시했고, 1934년이 되면 나머지 지역의 소비에트는 모두 붕괴, 패주를 거듭했고 오직 마오쩌둥이 이끄는 장시성 소비에트의 1방면군만이 남아있었다. 이후 장제스군은 장시 소비에트에 대한 철통같은 포위와 압박을 개시했고, 1934년 4월 광창전역의 패배로 병력 5천여 명을 잃고 광창지구를 잃는 패배를 당한다. 위기감을 느낀 마오쩌둥을 위시한 소비에트 지도부는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채 근거지를 포기하는 피난길'''에 나서게 된다. 10월 16일의 일이었다.


==과정==
==과정==
=== 포위망 탈출과 서진 ===
마오쩌둥이 중심이 된 1방면군은 자신들을 향한 포위망 중 그나마 약하다고 생각된 서쪽 지역을 강행 돌파한 뒤, [[양쯔 강]] 남을 따라 [[구이저우 성]]으로 향했다. 탈출에 나선 병력은 86,000여 명에 달하였는데 이들을 향해 국민당군의 맹렬한 추격이 이어졌다. 이쪽 방면의 국민당군은 중앙군이 아닌 군벌군이었기에 전력도 약한 편에다가 홍군과의 전투에 열성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1934년 말엽 홍군은 괴멸적인 패배 두 차례를 당한다. 11월 27일, 광서성<ref>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ref> 상강에서 강의 도하를 준비 중이던 홍군은 매복하고 있던 국민당군과 추격군의 협공을 받아 5일간의 전투 끝에 사상자 2만여 명, 포로 6천여 명이라는 처참한 참패를 당했다. 그 외에 도주자도 2만여 명으로 장정 시작 단 1달여만에 병력의 절반 이상이 날아간 것이다.(...)
비슷한 시기 장시성에서도 출발이 늦었던 팡지민(方志敏)의 홍10군도 국민당군의 매복을 당해 '''부대가 전멸당하고 사령관인 팡지민 본인도 포로'''가 되는 끔직한 패배가 전해진다. 이 두 전투는 현재도 [[인민해방군]] 역사상 대표적인 최악의 패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마오쩌둥은 상강 전투 후 규모가 크게 줄고 사기가 떨어진 잔여병력을 수습한 뒤, 국민당군의 추격을 피해 해발고도 2천여 미터의 산악지대를 강행돌파하여 구이저우 성에 도달한다. 이후 국민당군 군복을 조달해서 국민당군 흉내를 내며 지방 군벌들을 속인 뒤 1935년 1월 8일 쭌이를 무혈 점령한다.
=== 쭌이 회의와 마오쩌둥 체제 ===
도망치느냐 기진맥진한 홍군은 1주일간 쭌이에서 푹 쉰 다음,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한다. 당 대표 보구(博古)와 소련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고문 오토 브라운은 남중국에서의 거점확대전략 및 상강전투의 패배에 대해 필사적으로 변호했으나, 이러한 군사적 패배 외에도 소련식 공산혁명 전술인 도시노동자 중심 전략이 중국의 사정에 맞지 않음에도 이를 강행한 책임까지 지면서 물러났다.
그리고 농민 중심의 전략을 주장하는 홍8군의 수장 마오쩌둥이 당 권력을 장악하고 [[저우언라이]], [[펑더화이]]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로서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영향에서 어느정도 벗어나 자체적인 전략을 수립하기 시작했고, 추가적인 논의를 통해 새로운 근거지로 산시 성의 옌안을 삼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에 반발하여 홍4군의 장궈타오가 떨어져나가 쓰촨 소비에트를 성립하여 떨어져나간다. 장궈타오는 옌안이 중원과 너무 동떨어져 있고 경제력도 낙후하여 공산당의 기반이 될 수 없다 주장했고, 마오쩌둥은 쓰촨 성도 중원에서 멀긴 똑같은데 국민당쪽 군벌 세력이 많아 순식간에 밀려날 수 있고, 반면 산시 성엔 국민당측 세력이 적으며 중국 북쪽이라 소련의 지원을 받기 쉽다고 주장했다. 결국 둘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아서 서로 병력을 분리, 장궈타오는 쓰촨 성에서 소비에트 정권을 성립시키고, 마오쩌둥은 이후 장강을 도하, 바로 북상하려 했으나 이를 예상한 국민당군의 저항으로 장강 도하에 실패하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윈난 성]]을 거쳐 쓰촨 성까지 이동한다.
참고로 장궈타오의 쓰촨 소비에트는 1년만에 멸망(...)하면서 마오쩌둥의 말이 옳다는 것만 입증해주었다.
=== 대도하 도강과 옌안 도착 ===
쓰촨 성 북부까지 우여곡절 끝에 1935년 5월 29일, 홍군은 대도하(大渡河)를 건너는 루딩교에 도착한다. 루딩교는 일종의 쇠사슬 다리였는데 쇠사슬 위에 널판지를 국민당군이 모두 없앤 후여서 도하가 불가능했고, 강 북안에는 국민당군이 수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홍군은 결사대 22명을 뽑아 포화를 뚫고 쇠사슬에 매달린 채로 전진하며 널판지를 차례대로 놓아, 국민당군을 격퇴하고 본대의 도하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개소리(...)라<del>어밴져스 22명정도면 가능할거 같긴 하다.</del> 중국 외 국가들에선 반신반의하고 있다. 일단 현재 중국 집권세력이 공산당이보다니 중국 공식역사에서는 사실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
여튼, 성공적으로 대도하를 건넌 홍군은 이후 큰 장애 없이 10월에 산시성 옌안에 도착하고 새로은 근거지를 마련하기에 이른다. 이때의 병력은 8천여 명으로 출발시의 약 10분의 1.(...) 루딩교 도하 이후 장애가 적었던 데에는 [[일본]]이 화북지방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면서 국민당군이 홍군 토벌에 집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과==
==결과==

2015년 12월 31일 (목) 22:53 판

개요

국공내전 당시 중국 화남지방의 루이진을 중심으로 근거지를 두었던 중국 공산당1934년 국민당의 공세를 만나 시작된 대이동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는 장정, 혹은 대서천이라고 하기도 하며, 이 당시 중국 공산당은 약 1만2천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한 끝에 1936년 화북지방의 산시성에 정착하게 된다.

단일 목적의 군사기동으로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긴 거리의 군사 기동으로 보기도 한다.

워낙에 험한 여정인데다 국민당의 잦은 공격으로 출발 당시 30만에 달했던 병력은 도착시 3만명 정도로 줄어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이 대장정 도중에 열린 회의에서 이 대장정의 원인이 된 국민당과의 전투에서 패배의 책임을 물어 공산당의 수뇌부가 교체되고, 대장정을 나름 성공리에 이끈 마오쩌둥의 지도권이 확립되는 계기가 된다.

여담으로 이 대장정 당시 야간에 장려한 스포츠가 바로 탁구였다고 한다. 도망다니는 관계상 시간과 공간상의 문제로 낮에 대규모로 체육행사 같은 것을 할 수 있을리가. 결국 민가의 실내나 토굴 같은 곳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을 찾다 보니 탁구가 나왔고,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서 현재 중국의 탁구가 세계 최강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지만...

배경

제1차 국공합작이 파탄나고, 이를 계기로 제1차 국공내전이 발발한다. 이후 공산당은 난창봉기의 실패 등으로 패배 등을 맛보다가 1931년 11월에 장시성에서 중화 소비에트 임시정부를 성립하며 기반을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공산당은 후난 성 등 주변지역에도 근거지를 마련, 각 방면군별로 소비에트를 구성하였다.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공산당 세력이 커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있지 않았다. 1933년경을 기해 국민당군은 총공세를 개시했고, 1934년이 되면 나머지 지역의 소비에트는 모두 붕괴, 패주를 거듭했고 오직 마오쩌둥이 이끄는 장시성 소비에트의 1방면군만이 남아있었다. 이후 장제스군은 장시 소비에트에 대한 철통같은 포위와 압박을 개시했고, 1934년 4월 광창전역의 패배로 병력 5천여 명을 잃고 광창지구를 잃는 패배를 당한다. 위기감을 느낀 마오쩌둥을 위시한 소비에트 지도부는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채 근거지를 포기하는 피난길에 나서게 된다. 10월 16일의 일이었다.

과정

포위망 탈출과 서진

마오쩌둥이 중심이 된 1방면군은 자신들을 향한 포위망 중 그나마 약하다고 생각된 서쪽 지역을 강행 돌파한 뒤, 양쯔 강 남을 따라 구이저우 성으로 향했다. 탈출에 나선 병력은 86,000여 명에 달하였는데 이들을 향해 국민당군의 맹렬한 추격이 이어졌다. 이쪽 방면의 국민당군은 중앙군이 아닌 군벌군이었기에 전력도 약한 편에다가 홍군과의 전투에 열성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1934년 말엽 홍군은 괴멸적인 패배 두 차례를 당한다. 11월 27일, 광서성[1] 상강에서 강의 도하를 준비 중이던 홍군은 매복하고 있던 국민당군과 추격군의 협공을 받아 5일간의 전투 끝에 사상자 2만여 명, 포로 6천여 명이라는 처참한 참패를 당했다. 그 외에 도주자도 2만여 명으로 장정 시작 단 1달여만에 병력의 절반 이상이 날아간 것이다.(...)

비슷한 시기 장시성에서도 출발이 늦었던 팡지민(方志敏)의 홍10군도 국민당군의 매복을 당해 부대가 전멸당하고 사령관인 팡지민 본인도 포로가 되는 끔직한 패배가 전해진다. 이 두 전투는 현재도 인민해방군 역사상 대표적인 최악의 패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마오쩌둥은 상강 전투 후 규모가 크게 줄고 사기가 떨어진 잔여병력을 수습한 뒤, 국민당군의 추격을 피해 해발고도 2천여 미터의 산악지대를 강행돌파하여 구이저우 성에 도달한다. 이후 국민당군 군복을 조달해서 국민당군 흉내를 내며 지방 군벌들을 속인 뒤 1935년 1월 8일 쭌이를 무혈 점령한다.

쭌이 회의와 마오쩌둥 체제

도망치느냐 기진맥진한 홍군은 1주일간 쭌이에서 푹 쉰 다음,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한다. 당 대표 보구(博古)와 소련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고문 오토 브라운은 남중국에서의 거점확대전략 및 상강전투의 패배에 대해 필사적으로 변호했으나, 이러한 군사적 패배 외에도 소련식 공산혁명 전술인 도시노동자 중심 전략이 중국의 사정에 맞지 않음에도 이를 강행한 책임까지 지면서 물러났다.

그리고 농민 중심의 전략을 주장하는 홍8군의 수장 마오쩌둥이 당 권력을 장악하고 저우언라이, 펑더화이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로서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영향에서 어느정도 벗어나 자체적인 전략을 수립하기 시작했고, 추가적인 논의를 통해 새로운 근거지로 산시 성의 옌안을 삼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에 반발하여 홍4군의 장궈타오가 떨어져나가 쓰촨 소비에트를 성립하여 떨어져나간다. 장궈타오는 옌안이 중원과 너무 동떨어져 있고 경제력도 낙후하여 공산당의 기반이 될 수 없다 주장했고, 마오쩌둥은 쓰촨 성도 중원에서 멀긴 똑같은데 국민당쪽 군벌 세력이 많아 순식간에 밀려날 수 있고, 반면 산시 성엔 국민당측 세력이 적으며 중국 북쪽이라 소련의 지원을 받기 쉽다고 주장했다. 결국 둘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아서 서로 병력을 분리, 장궈타오는 쓰촨 성에서 소비에트 정권을 성립시키고, 마오쩌둥은 이후 장강을 도하, 바로 북상하려 했으나 이를 예상한 국민당군의 저항으로 장강 도하에 실패하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윈난 성을 거쳐 쓰촨 성까지 이동한다.

참고로 장궈타오의 쓰촨 소비에트는 1년만에 멸망(...)하면서 마오쩌둥의 말이 옳다는 것만 입증해주었다.

대도하 도강과 옌안 도착

쓰촨 성 북부까지 우여곡절 끝에 1935년 5월 29일, 홍군은 대도하(大渡河)를 건너는 루딩교에 도착한다. 루딩교는 일종의 쇠사슬 다리였는데 쇠사슬 위에 널판지를 국민당군이 모두 없앤 후여서 도하가 불가능했고, 강 북안에는 국민당군이 수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홍군은 결사대 22명을 뽑아 포화를 뚫고 쇠사슬에 매달린 채로 전진하며 널판지를 차례대로 놓아, 국민당군을 격퇴하고 본대의 도하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개소리(...)라어밴져스 22명정도면 가능할거 같긴 하다. 중국 외 국가들에선 반신반의하고 있다. 일단 현재 중국 집권세력이 공산당이보다니 중국 공식역사에서는 사실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

여튼, 성공적으로 대도하를 건넌 홍군은 이후 큰 장애 없이 10월에 산시성 옌안에 도착하고 새로은 근거지를 마련하기에 이른다. 이때의 병력은 8천여 명으로 출발시의 약 10분의 1.(...) 루딩교 도하 이후 장애가 적었던 데에는 일본이 화북지방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면서 국민당군이 홍군 토벌에 집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과

객관적으로 보면 패주나 다름없는 이동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이 되는 홍군의 군기가 확립되고, 농촌지역에 공산당의 영향력이 스며들게 되는 효과를 보이게 된다. 특히나 이 대장정 과정에서 보여준 국민당군의 각종 병크로 인해 국민당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그것이 더욱 가속화시킨 것은 덤. 이러한 과정에서 홍군이 결과적으로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 이기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다른 경우

워낙에 일도 많고 드라마틱한 여정이었던지라 한자문화권에서는 단체로 긴 거리를 이동하는 경우, 이 대장정을 일반명사화 하여서 붙여넣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국토대장정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