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지하철 참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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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5일 (수) 08:19 판

틀:사건사고

지금 지하철인데 거의 사무실에 도착했어. 저녁밥 맛있게 준비해 놓을 테니깐 오늘 빨리 퇴근해요!
— 사고 발생 4분 전 김인옥 씨가 남편 이홍원 씨에게 한 통화기록 중
"여보, 여보! 불이 났는데 문이 안 열려요. 숨을 못 쉬겠어요. 살려줘요... 여보 사랑해요, 애들 보고 싶어!"
— 사고 발생 8분 후 김인옥 씨가 남편 이홍원 씨에게 한 통화기록 중
사고 당시 역사 출구
일명 '통곡의 벽' 너머에 보존되어 있는 공간

참사 희생자 대책위

개요

2003년 2월 18일, 방화범 김대한이 삶을 비관해 방화를 한 사고. 대한민국 철도 사건사고 중 사망자 192명, 부상자 151명의 인명 피해가 난 가장 큰 사고로 기록되었다.

2016년 2월 18일부로 13주기를 맞았다.

사고 전개

2월 18일 오전 9시

뇌병변으로 쓰러져 장애판정을 받은 방화범 김대한은 자살하면서 다른 사람들까지 끌고가기로 결심하고 라이터와 휘발유를 담은 샴푸통을 챙겨 오전 9시 30분 송현역에서 안심방면 1079편에 탑승했다.

오전 9시 53분, 반월당역을 지난 열차가 중앙로역에 열차가 다다를 무렵 라이터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김대한에게 한 승객이 왜 자꾸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냐고 핀잔을 들었고, 이에 김대한은 휘발유에 불을 붙혀 방화를 저지른다. 옷에 불이 옮겨붙은 김대한은 샴푸통을 객실에 내던졌고, 가연성 재질이었던 내장재에 불이 옮겨붙으면서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김대한은 공포를 느끼고 역을 빠져나간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중앙로역에 도착한 후 사태를 파악한 1079편 기관사는 초기 진화를 시도했으나 역부족임을 판단하고 승객들을 역 밖으로 대피시켰다. 여기서 끝났으면 참사로 기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관사는 관제실에 화재를 보고하지 않아서 2차 사고의 씨앗을 만들게 된다. 관제실에서도 중앙로역의 화재 경보가 울렸고 승객과 역무원의 신고도 있었으나 무시되었다.

당시 역내 CCTV 영상을 보면 화재가 발생하자마자 역 안이 유독가스와 연기로 가득찼을 것으로 추측된다.

2월 18일 오전 10시

오전 9시 55분, 화재 소식을 전달받지 못한 대곡방면 1080편이 대구역을 발차해 중앙로역으로 향했다. 관제실에서는 전체 무선으로 "중앙로역 진입 시 조심하여 운전하여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지금 화재가 발생됐습니다."라고 통보했고, 기관사는 개의치 않고 중앙로역에 진입했다.

오전 9시 56분, 1080편은 연기가 가득한 중앙로역에 진입했고, ATO에 의해 자동으로 출입문이 개방되었으나 연기가 밀려들어와 기관사가 수동으로 닫았다. 이어서 단전으로 인해 전동차의 전력이 차단되고, 기관사가 관제실에 조치사항을 요구하나 관제실을 갈피를 못 잡고 우왕자왕한다.

오전 9시 57분, 중앙로역 역무원에 의해 119 신고가 되었다.

오전 9시 58분, 열차에 전력이 공급되었다가 끊기기를 반복하면서 역을 탈출하고자 하는 시도를 수도 없이 했으나 실패. 전력이 완전히 차단이 되질 않아 출발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대피 결정을 하지 못 하고 있었다. 이후로는 열차 무선으로 교신이 안 되어 휴대전화로 지시를 받는다.

오전 10시 2분, 관제실은 기관사에게 승객 대피 명령을 내렸다. 기관사는 출입문 개방을 취급하고 대피를 안내했으나 일부 객차는 출입문 개방이 되지 않았다.

오전 10시 4분, 역 바깥에서는 화재 진압을 위한 소방 인력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오전 10시 10분, 관제실은 기관사에게 전동차의 팬터그래프를 하강하고 대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기관사는 대피 과정에서 승객의 대피를 확인하지 않는 과오를 저질렀고, 여전히 많은 승객이 객차 안에 갖혀 있었다. 당시에는 출입문 비상 취급 요령을 잘 알리지 않았고 알고 있는 승객도 적어 나갈려고 해도 나갈 수가 없었다.

오전 10시 17분, 관제실은 드디어 전 열차의 비상 정리 명령을 내리고 승객을 다른 대중교통으로 유도하도록 한다.

2월 18일 오후 1시

오후 1시 38분, 경상북도의 모든 소방대의 광역지원 끝에 화재가 완전 진압되었다. 최종 인명피해는 사망자 192명, 부상자 151명인 총 343명으로 집계되었다.

사고 여파

사고로 교대역 ~ 동대구역 구간이 폐쇄되어 대곡역 ~ 교대역, 동대구역 ~ 안심역 구간만 운행되었다. 사고 구간은 셔틀버스로 대체되었으나 초기에 운행 차질이 빚어지는 등 혼란이 있었다. 우선적으로 10월 21일 중앙로역의 선로가 복구되어 중앙로역을 미정차하는 형태로 정상운행이 개시되었으며 12월 31일에는 역사도 복구되어 완전 정상화되었다.

화재는 도로에도 후폭풍을 남겨서 역 구조물이 약화된 관계로 2월 25일부터 4월 10일까지 반월당네거리, 중앙네거리의 대형차량 운행이 통제되었다. 그동안 시내버스들은 죄다 우회운행을 했다.

원인

화재가 빠른 속도로 번진 원인에 대해서 전동차의 저품질 내장재가 꼽혔다. 화재에 취약한 재질이라서 순식간에 화재가 번졌고 많은 양의 유독가스가 발생되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운행되고 있는 모든 전동차에 대한 난연성 내장재 교체를 지시했고, 신조되는 편성은 난연성 내장재로 출고되었다.

승객들이 비상시 출입문 취급 요령을 몰라 탈출이 봉쇄된 것도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이후에는 비상 개방 스위치가 출입문 주변의 눈에 띄는 곳으로 이동하고, 취급 요령 안내방송이 수시로 재생되고 있다.

사건 이후

이러고도 사고처리를 제대로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이러고도 완벽한 처리를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 윤석기 당시 실종자가족 대책위원장,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한 유골을 들어보이며

참사 다음날 당국은 복구작업을 이유로 까지 동원해 중앙로역을 물청소했다. 이 직후 쓰레기 더미에서 유골 약 30여점과 유품들이 발견되어 논란이 되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물청소와 복구작업 등으로 현장을 훼손한 것은 수사를 은폐하려는 의도'라며 강하게 항의했다.[1]

방화범 김대한은 2003년 8월 1심과 12월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대법원 상고를 포기했다. 2004년 3월 8일 정신질환 치료를 받기 위해 진주교도소로 이감되었고 그해 8월 31일 뇌졸중·정신질환 후유증으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사망했다.[2]

유족들을 중심으로 추모사업이 추진되었으나 지역민들이 '혐오시설'이라며 반대에 나섰고 대구시도 뜻뜨미지근한 행정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2008년 12월이 되어서야 추모공원은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라는 이름으로 개장했다. 유족들은 대구시가"추모묘역 조성·위령탑 건설을 약속했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묘역·위령탑은 조성되지 않았고 대신 '안전 상징 조형물'이 만들어졌다. 이후 유족들은 2010년 10월 27일 32명의 유골을 조형물 근처에 묻었으나[3] 인근 상인들은 '암매장'이라 주장하며 법적대응까지 나섰다. 대법원 최종판결까지 가서 유족측 관계자들이 무죄를 받았지만 이후에도 유족들이 추모를 하러 올 때마다 상인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힌다고 한다.[4] 추모 공간의 문제는 2015년 말에 "2·18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기억 공간"이 조성되면서 일단락 되었다.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대구비하하는 말로 쓰이는 통구이는 다름아닌 이 사건의 피해자들을 조롱하는 고인드립이다.

참고 문헌

각주

  1. 대구시 사고현장 청소 쓰레기서 유골 유품 발견 유족들 분노[윤영균], MBC, 2003.02.23.
  2. 대구지하철 방화범 김대한 30일 사망, 매일신문, 2004.08.31.
  3. 이들은 지역 원로들과 관계자들이 수목장이라 치고 몰래 묻으면 된다고 조언·협조했다고 주장한다.
  4. 유가족은 그렇게 암매장꾼으로 몰렸다, 한겨레, 2014.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