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성서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Pectus Solentis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9월 13일 (일) 22:02 판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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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당시 아이들을 찾기 위해 만들어진 포스터
사건 정보

개요

1991년 3월 26일,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서의 와룡산 근처에 살던 5명의 초등학생이 도롱뇽 알을 줍기 위해 와룡산에 올라갔다가 실종된 후 11년 뒤 유골로 발견된 사건이다.

5명이 한꺼번에 실종된 사건이었기에 당시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지게 한 사건이었다.

사건의 전개

1991년 3월 26일, 대구 성서초등학교에 재학중이던 김종식 군(9)과[1] 박찬인 군(10), 김영규 군(11), 조호연 군(12)과 우철원 군(13)은 당시 도롱뇽 알을 주우러 집 근처 야산인 와룡산으로 올라가려던 참이었다. 마침 그 날은 지방선거로 인한 임시공휴일이었고, 아이들이 집에서 놀려니 집에서 세들어 살던 청년이 시끄럽다고 핀잔을 주자, 밖으로 나가서 도롱뇽 알을 주우며 놀기로 한 것이다.[2]

아이들이 와룡산으로 올라가려 할 때, 유일하게 당시 실종되지 않았던 김태룡 군(10)은 사실 아이들과 같이 도룡뇽 알을 주우러 갈려고 했는데, 아침밥을 먹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왔고, 식사를 한 뒤 급히 아이들을 뒤쫓아 갔지만, 위험하니 너무 멀리 가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떠올려 포기하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왔다. 만약 김태룡 군까지 아이들을 따라 나섰다면, 희생자가 1명 더 늘었을 수도 있다.

사실 아이들이 실종되기 전까지는 아이들을 본 사람이 꽤나 있었다. 조호연 군의 형 조무연 군은 와룡산 입구 인근에서 아이들을 만났고,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는 아이들의 말에 별 의심 없이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으며, 와룡산 인근에 살던 한 주민이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또한 우철원 군의 친구이자 같은 반 급우였던 김경열 군과 이태석 군이 아이들이 실종되기 직전 우철원 군과 잠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아이들의 실종에 중요한 증언을 남긴 아이도 있었는데, 당시 동네의 다른 형들과 함께 마찬가지로 도룡뇽 알을 주우러 가던 함승훈(11, 4학년)군은 중간에 형들과 헤어져 혼자서 와룡산에 있는 공동묘지 근처까지 올라가게 되었는데, 그 때 자신이 서 있던 산의 위쪽에서 10초 간격으로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두 차례 들었다고 한다. 이 때 당시의 시각은 오전 11시 30분경.

아이들이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아이들의 부모님은 아이들이 와룡산에 갔다가 오후 6시가 되도록 돌아오지를 않자, 아이들을 찾아 와룡산 근처를 찾아다니게 된다. 그러나 어디에도 아이들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고, 결국 오후 7시 50분경, 부모님은 경찰에 아이들의 실종신고를 하게 된다.

사건의 수사

부모님의 실종 신고를 받은 경찰은, 아이들의 목적지가 와룡산이었다는 점에서, 우선 와룡산 인근부터 샅샅이 뒤지며 수색하기 시작한다. 이 수색은 27일 오전 3시까지 진행이 되었으나, 아이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1주일 후인 4월 2일, 경찰은 5명의 아이들이 동시에 사라졌다는 점에서 별다른 근거도 없이 집단 가출로 사건을 종결시키려 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부모님이 그럴 리 없다고 강하게 반발하게 되는데, 당시 5명 아이들 모두 가정의 분위기가 화목했기 때문에 가출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며, 무엇보다 5명의 아이들이 이유 없이 한꺼번에 가출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노력으로 이 사건은 크게 보도되면서 TV 광고는 물론 전화카드, 심지어 과자 포장지에도 아이들의 사진과 함께 개구리 소년을 찾아달라는 문구가 붙게 되었다.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노태우는 사건의 소식을 전해듣고 특별 지시를 내려 경찰과 군인을 총동원하여 실종 장소를 중심으로 수색을 하게 했다. 아이들이 와룡산을 넘어 더 먼 곳까지 갔을 가능성도 제기되면서 수사는 사실상 전국 수사로 확대되었고, 특별 지시를 받은 경찰과 군인들이 거의 전국을 파헤치면서 아이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아이들을 찾겠다는 이러한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이들은 발견되지 못하였으며,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은 결국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많은 세월이 흘러가고 많은 일들이 생기면서 이 사건은 국민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듯 했다. 그러나...

11년만에 발견된 유골

국민들의 기억에서 이 사건이 거의 잊혀질 시기였던 2002년 9월 26일, 도토리를 줍기 위해 와룡산에 올라갔던 오우근 씨가 산 중턱 쯤에서 도토리를 줍던 중, 무언가 이상한 물체를 발견하고 경악하며 경찰에 신고한다. 잠시 후 경찰이 도착하여 수사를 시작하였고, 그 물체는 유골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경찰의 수색 결과 5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한 장소에서 무려 5명의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국민들은 누구의 유골인지 뜨거운 관심과 반응을 보였다. 와룡산에서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점, 그리고 5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벌써부터 일부 국민들은 이 유골이 1991년 실종되었던 개구리 소년의 것이 아니냐고 했다.

일부 국민들의 예상대로 이 유골들은 개구리 소년들의 것임이 밝혀졌다. 물론 DNA 검사를 하기는 했지만, 거치기도 전부터 아이들의 착의 상태, 신발 등 거의 모든 것이 일치하였으며, 실종 당시 4명의 아이들은 운동화를, 1명은 비닐구두를 신고 있었다고 했는데, 수색 결과 당시 아이들이 각각 신었던 신발과 유골 발견 현장에서 발견된 신발이 정확히 일치하였다. 또한 각자 아이들의 물품이 여럿 발견되었으며, 특히나 조호연 군의 경우, 실종 당시 입에 끼고 있던 보철이 현장에서 발견되면서 결국 정확한 DNA 검사를 거치기도 전에 이 유골들은 개구리 소년들의 것임이 확실해졌다. 아이들은 실종 이후 무려 11년 6개월, 일수로 따지면 무려 4,203일만에 유골로 발견된 것이다.

유골의 상태

  • 우철원 군(13): 두개골의 좌측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주위에도 무언가에 찍힌 듯한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 있었으며, 무려 25개의 손상된 흔적들이 두개골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무언가 예리한 것을 머리에 강하게 충격받은 것으로 추정이 된다.
  • 조호연 군(12): 조호연 군의 경우 두개골에 손상이 없고, 완전히 부식된 박찬인 군과 달리 부식이 그리 진행되지 않아 상태가 가장 양호했다. 이런 점에서 조호연 군도 목을 졸려 살해당하였다는 추측이 나오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정확한 사인이 발표되지 않은 상태이다.
  • 김영규 군(11): 두개골에 주먹이나 둔기로 강하게 구타당한 듯한 함몰된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두개골의 우측에 두 곳의 골절이 발견되었다. 또한 김영규 군이 입고 있던 옷깃과 단추가 찢어지고, 매듭이 강하게 묶여져 있었는데, 이는 외부의 강한 압력으로 인한 것으로 추정되며, 아이가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범인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 박찬인 군(10): 박찬인 군의 두개골은 백골화가 심각하게 진행된 터라 정확하게 사인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아마 오랜 시간 지상으로 노출되어 있다보니 부식이 많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호연 군과 마찬가지로 두개골에 상처가 별다르게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경찰은 목을 졸려 살해당하였다고 추측하고 있다.
  • 김종식 군(9): 김종식 군의 경우 두개골의 우측 눈 위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부근이 10cm 정도 골절되었다는 점, 그리고 두개골의 뒷 편에서 작은 손상들이 다수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우철원 군, 김영규 군과 마찬가지로 둔기에 구타 당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또한 특이하게도 두개골에 이끼가 끼어 있었는데, 이 이끼로 인해 또 많은 설이 나오게 된다.

아이들의 사인?

처음에 아이들의 유골과 함께 탄피가 발견되었으며, 실종 당시 그 곳 인근에 육군 50사단의 사격장이 존재하였다고 한다.[3] 이에 오발탄에 맞아서 아이들이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제기되었으나, 당시는 임시공휴일이었고, 50사단에서 그 날은 사격 훈련이 없었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오발탄으로 인한 사망 가능성은 배제되었다.

경찰은 아이들이 조난을 당해 자연사했다.라는 추측을 내놓기 시작하는데, 지역 주민들이 이에 강하게 반발한다. 와룡산은 등산로도 잘 마련되어 있고 높이가 300m도 채 되지 않는 299.7m지만 어쨌든 300m미만이다 동네 야산이었으며, 무엇보다 근처에 마을에서 나오는 가로등 불빛으로 인해 항상 주변이 환한데 아이들이 그 곳에서 조난을 당할 확률은 없다는 것이다. 가로등 불빛만 잘 따라가면 최소한 형성된 마을은 발견될 정도였고, 심지어 유골이 발견된 지역은 아이들이 길을 잃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지역이었다고. 실제로 2002년에 모 프로그램에서 같은 연령대의 남학생들을 모아 밤 시간대에 와룡산에서 마을로 내려오게 하는 실험을 했었는데, 아니나다를까 남학생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하산에 성공하였다. 게다가 당시 실종된 아이들은 대구 성서 지역을 잘 알고 있었고, 도롱뇽 알을 줍기 위해서 와룡산을 자주 왔다갔다했던 아이들이기에 조난을 당하여 자연사했을 확률은 사실상 제로였다.

이렇게 와룡산이 조난을 당할 만한 산이 아니라는 것을 거의 확증하였음에도, 경찰은 이번엔 현장에서 발견된 김영규 군의 옷의 단단하게 묶인 매듭을 들어 아이들이 저체온증으로 무언가라도 할려다 결국 사망했다.라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한다.저체온증인데 왜 두개골이 깨지냐 그러나 그 매듭은 칼로 찢지 않는 이상 풀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게 묶여 있었고, 당시 아이들이 묶었다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의 강도였다. 이 매듭이 이렇게 단단하게 묶였다는 것은, 누가 봐도 아이들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소행으로 볼 수 있으며, 때문에 자연사가 아니라는 것이 거의 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경찰은 아이들이 저체온증으로 무엇이라도 하려다 보면 이렇게 될 수도 있다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아이들의 부모를 두 번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게 되었다.

사건 이후

부모님과 경찰의 끝없는 수색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싸늘한 유골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국민들이 안타까움을 사게 되었다. 경찰은 범인을 잡기 위해 지금까지 발견된 자료를 토대로 수사를 멈추지 않았으나, 결국 사건의 열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사건 발생 15년 후인 2006년 3월 26일,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3대 영구 미제 사건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으며 2024년 04월 19일 현재까지도 이 사건은 범인이 잡히지 않아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공소시효는 종료되었지만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국민들의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으며, 많은 국민들이 사건의 범인은 우리의 이웃일 수도 있다.라는 말과 함께 우리는 이 사건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담

  • 국내에서는 이 사건을 토대로 많은 음악, 애니, 영화 등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으로 1992년 개봉한 영화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과 2011년 개봉한 영화 '아이들'. MC Sniper도 2집 앨범 수록곡으로 "개구리 소년"을 작곡한 일이 있다.
  • 사건 발생 5년 후, 한 범죄심리학 교수가 김종식 군의 아버지 김철규 씨가 아이들을 죽인 뒤 자신의 집 어딘가에 암매장했다고 주장하였고, '아이들은 산에 가지 않았다'라는 책까지 쓰며 계속해서 김철규 범인설을 주장하였다. 경찰은 이 소리에 넘어가 1996년 1월 12일, 김철규 씨의 집을 마구 부수고 파헤치며 있지도 않는 시신을 수색한다. 당연히 결과는 망해버렸고, 김철규 씨는 아들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지도 않은 채 이런 억울한 누명까지 쓰게 되자, 사람을 두번 죽이는 데에도 분수가 있지 않느냐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후 무려 2번이나 가슴에 못을 박힌 김철규 씨는 아들이 없어진 슬픔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며 버티다 2001년 10월 22일, 간암으로 사망하게 되면서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자신의 아들의 흔적조차도 보지 못하고 결국 그는 아들의 곁으로 떠나버린 것. 이후 2013년에 방영된 채널 A의 '그때 그 사람'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당시 해당 설을 정확한 근거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지껄였던 심리학자의 근황을 공개하였는데, 심리학자는 당연히 받아야 할 법적처벌을 받은 것을 억울하다는 것처럼 호소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 일이 진절머리가 난다며 짜증을 냈다. 물론 당시 유족들에게 사죄를 하고 오판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김종식 군 유족들의 가슴에 박힌 상처는 영영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 당시 현상금에 눈이 멀어 허위 제보나 장난전화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 아이들의 부모님의 가슴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아마 현상금이 두둑하게 주어지던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제발 아무리 현상금이 많더라도, 또는 아무리 관심을 받고 싶더라도 실종 사건처럼 큰 사건에 허위 제보는 하지 말자.
  • 당시 아이들이 놀던 조 군의 집에 세들어 살던 청년이 '내가 괜히 시끄럽다고 나가 놀라는 바람에 아이들이 변을 당했다.'라며 죄책감을 표했다.

같이 보기

  • 엠빅뉴스에서도 이 사건을 다루었는데, 故 김종식 군의 음성과 그의 아버지 故 김철규 씨의 모습이 나온다. 특히나 영상 초반에 나오는 김종식 군의 생전 목소리와 유족들이 슬퍼하는 모습, 김철규 씨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힘들어하는 모습과 아들의 이름을 외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영상을 보는 시청자들의 가슴을 더욱더 아프게 했다.


링크

  • 1992년 11월 28일,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이 개봉하였다. '조금환' 감독의 작품으로, 당시 아역배우의 아이콘이었던 김선우, 장덕수 등 많은 배우들이 출연하였으며, 현재 영화감독으로 성장한 변성현도 이 영화에 아역 배우로 출연하였다.[4]

틀:대한민국의 살인 사건

각주

  1. 1983년생이었지만 빠른 생일로 인해 당시 박찬인 군과 함께 국민학교 3학년이었다.
  2. 개구리 소년으로 불리는 이유는 언론에서 어찌어찌하다가 도룡뇽이 개구리로 잘못 보도된 것이 원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3. 때문에 이 곳에 탄피를 주우러 오는 사람도 꽤 있었다.
  4. 변성현 감독은 어릴 시절에는 아역 영화배우였다. 실제로 연기력이 매우 뛰어나 1990년대의 방송이나 영화 등에 꽤나 많이 등장하였으며, 이 영화에서도 '김종식 군' 역할을 맡아 출연하였다. 현재는 배우로써는 활동하지 않고 영화감독으로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