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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20일 (월) 06:5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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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사진. 참고로 이 사진은 노무현재단에서 제공했다.

盧武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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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제6대 해양수산부 장관(2000. 8 ~ 2001. 3)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2003. 2 ~ 2008. 2)

최초로 팬클럽이 있었던 대통령

경상남도 김해 출신이다. 노무현 정권의 별칭으로는 참여정부가 있다.

2002년 기적같은 노풍의 힘에 입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집권이후 부침에 시달리며 다사다난한 재임 기간을 보냈다. 이때 있었던 굵직한 사건만 하더라도 헌정 사상 최초 대통령 탄핵 소추, 국군 이라크 파병, 미군기지 이전 사업 추진, 한미 FTA 체결, 대북 송금 특검 실시, 행정수도 이전 계획 추진, 남북 정상 회담 등이 있다.

당선과정

2002년 초 도입된 국민경선제도에 노무현은 최대 수혜자였지만 사실 그는 반대자였다. 참모들이 국민경선제도를 긍정적으로 타진하자 노무현은 "등산화와 돈을 이길 수 있겠느냐? 정치를 잘 몰라서 하는 얘기"라 말하면서 반대하였다. 그러나 주변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의견을 바꾸었다.

이후 새천년민주당 국민경선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한겨레, 경향신문 등 메이저 신문들의 1면은 노무현 아니면 민주당 경선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노무현과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간의 신경전은 첨예했다.

특히 4월 4일 터진 과거 노무현의 언론 국유화 발언은 그야말로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 조선, 중앙, 동아는 이 사건을 중점적으로 보도하였다.동아일보 관련보도동아일보 시론오마이뉴스 그러나 노무현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보다는 긍정적인 여론이 우세했다. 특히 4월 10일 한국경영자총협회 조남홍 부회장이 노무현 후보를 매력적인 정치인이라 칭했을 정도였다.[4] 당연히 조선, 중앙, 동아는 경악했고 한겨례, 경향은 기뻐했다.

결국 4월 27일 노무현은 1만 7568표로 72.2%의 지지를 받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었다.[5]

이후 월드컵시즌이였기에 정치적인 이슈는 묻혔다.[1]

다시 대선정국으로 돌아간 것은 월드컵이 끝나고 8월에 접어들어서였다. 9월 11일 노무현 후보가 영남대 강의 도중 한 발언을 했다. "미국에 안 갔다고 반미주의자냐? 또 반미주의자면 어떠냐? 말을 하고 보니 반미주의자는 좀 그렇다"라 발언한 것이었다. 당연히 이는 큰 논란을 일으켰다. 한겨레와 경향은 지키기에 바뻤고, 조선 중앙 동아는 공격하기 바뻤다.[6][7][8]

이후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한 노무현은 이회창 지지율을 바짝 쫓고 있었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이회창과 노무현 사이의 격차는 10%차이였다. 한나라당에서도 상당히 낙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후보단일화로 인해서 여론조사 격차가 좁혀지고 있었고, 거기에 이회창 아들 병역문제가 터지면서 한때는 노무현이 역전하기도 했다.

대선 직전인 12월 18일 서울 종로 제일은행 본점에서 노무현과 정몽준이 공동선거유세를 마쳤을 쯤 한 시민이 "다음 대통령은 정몽준"이라는 푯말을 들고 있었다. 이에 노무현은 "국민통합21에서 나온 분 같은데 속도위반하지 말라. 정동영 고문도 추미애 최고위원[2]도 있다"라는 발언을 했다. 당연히 이에 정몽준 후보측은 분노하였고,[9][10] 12월 19일 새벽 노무현 지지선언을 철회했다.[11] 이에 노무현은 12월 19일 대선 선거날 새벽 0시 5분 정몽준 평창동 저택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않겠다"라는 전언을 듣고 집으로 돌아갔다.[12]

이 일로 인해서 대선날 분위기는 한나라당이 이길것이라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구조사 발표 1시간 전까지 대부분의 방송사들은 이회창 후보 집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정몽준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노무현은 질 것이라 보았다. 설마 이길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13] 그런데 그것이 일어났습니다.

방송사 출구조사가 노무현 48.4.% 이회창 46.9%로 발표되었다. 문제는 이것이 오차범위 내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개표 내 긴장을 유발했다. 자세한 것은 아래의 동영상을 참조하기 바란다.괜히 드라마라는 칭호를 받는게 아니다.

개인적인 평가[3]

취임식

집권기

현역 대통령 중 최다 TV 출연

역대 대통령 중에서 최다 TV토론 출연, 최다 백분토론 출연자이다. 집권 2달이 조금 넘었는데 백분토론에 출연하였다.

화질은 좋지 않다.


2004년에는 KBS를 통해 도올 김용옥과 특별대담을 했다.


3년 5개월만에 백분토론에 출연했다. TV토론를 너무 좋아한다.


심지어 일본국민들과의 대화도 했다. 이쯤되면 토론 중독자라 봐도 되지요?[4]

TV토론을 통해 자신의 행정부에 대한 정책과 방안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명확히 밝혔다. 하지만 토론의 특성상 상대패널의 수위를 조절하기가 어려웠기에 당연히 대통령의 권위가 실추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는 "전국 검사들의 대화"이다.

대통령 권력 약화

군사독재세력과 권력을 분점한 이전 민주화 이후 정부들과 달리 개혁세력으로 단독 집권했으며 이에 힘입어 민주개혁을 이루어냈다. 참여정부 이후로 대한민국도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처럼 청와대와 집권당 대표가 분리되어 운영되기 시작했다.

진상규명 작업

또한 군사독재 시절에 벌어진 탄압과 사법살인 조작간첩 사건 등과 친일청산을 최초로 시도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이 진상규명위원회 작업으로 명예를 회복한 사람들이 상당수이다.

퇴임 이후

임기가 끝난 후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로 내려가 지냈다.

2009년, 노무현 본인과 가족들이 뇌물수수 혐의가 있다며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검찰무죄추정의 원칙 등을 어기며 아직 확인되지 않은 추측을 공표했고 언론은 추측기사를 받아쓰며 망신주기 수사를 진행했다. 같은 해 5월 23일 결국 봉하마을 뒷산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뤄졌고 검찰수사는 수사대상자가 사망하면서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가 종결됐다.

선거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동) 통일민주당 53,075 (50.6%) 당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동) 민주당 30,397 (32.2%) 낙선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부산광역시장) 민주당 647,297 (36.7%) 낙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통합민주당 17,330 (17.4%) 낙선
1998 1998년 7월 재보궐선거 (15대 국회 서울 종로)[5] 새정치 국민회의 26,251 (54.4%) 당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북/강서 을) 새천년민주당 27,136 (35.3%) 낙선
2002 제16대 대통령 선거 새천년민주당 12,014,277 (48.9%) 당선

각주

  1. 6월 13일 오전 10시 45분 발생한 효순이 미순이 사건도 월드컵의 열풍 속에 조용히 사라졌고, 6월 29일 제2차 연평해전도 묻혔다. 당연히 대선관련 뉴스도 묻혔다. 슬픈 것은 연평해전 소식이 6월 30일자 신문 1면에 보도되었지만[1][2] 사람들의 시선은 월드컵에 있었고 결국 아무도 보지 않았다. 물론 효순이 미순이 사건도 말이다.[3]
  2. 그런데 추다르크추미애는 탄핵 정국을 주도하여 역풍을 맞아 한동안 정치권에서 떨어져있어야 했다.
  3. 개인적으로 노무현 당선에 조선, 중앙, 동아일보가 한 몫했다고 생각한다.츤데레?! 일명 조중동(비하의미없음)의 일명 '노무현 때리기'는 노무현의 서민적 이미지를 보강시켜주었다. 특히 2002년 3월 신동아에서 연대 사회학 송복교수가 "대통령은 대졸자가 해야한다"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는 노무현을 고졸의 비루한 인물이라는 이미지보다는 일반 대중과 비슷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40~50대 중에 대졸자는 적었다. 당연히 1950년대생, 베이비붐머 세대들에게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 이후 조중동의 노무현 비판은 왠지 힘있는 사람이 힘없고 서민들을 괴롭히는 모양새로 비춰졌다. 거기에 경선과정에서 이인제가 노무현 장인의 좌익활동을 비난하자, 노무현이 "그럼 조강지처를 버리란 말이냐!!"라고 응수하면서 지지율을 올렸다. 이렇게 노무현에 대한 언론사의 공격은 노무현의 서민이미지 형성에 도움이 되었고, 거기에 정몽준 후보의 지지철회 선언은 그야말로 최고조를 찍었다. 특히 새벽에 노무현이 정몽준의 평창동 저택에 찾아갔으나 문전박대 당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겼다. 이러한 서민적인 이미지, 약자의 이미지는 탄핵정국에서 노무현이 살아남을 수 있는 요인이었다. 즉, 노무현 반대자들의 노무현 공격은 노무현의 가치를 올려주었고, 그래서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12년 대선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되었다. 박근혜 당선 최대공신 이정희 마지막으로 이건 개인적인 의견이다. Junius001 (토론) 2015년 7월 2일 (목) 20:42:24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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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전임자 이명박 1998년 의원직 사퇴로 보궐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