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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국으로 발돋움하면서 문화적으로도 황금기에 접어든다.
무역국으로 발돋움하면서 문화적으로도 황금기에 접어든다.


[[1588년]]에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이 성립되자 정치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네덜란드는 해외 진출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당시에는 총독이 통치했다). 17세기에는 [[주식회사]]인 [[연합 동인도 회사]](VOC)를 설립하여 세계 제일의 [[무역]]국으로 발돋움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주주들의 투자를 받아서 설립된 주식회사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남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등지에 [[인도네시아]] 등의 방대한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북미]] 대륙에도 뉴암스테르담(지금의 [[뉴욕]])을 건설하기까지 하였다. [[오세아니아]]에도 간 상인들은 [[뉴질랜드]]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에도 진출하였는데, [[일본]]에서는 [[나가사키 현|나가사키]]에 활동 공간을 마련해주었으며, '난학'(蘭學)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 문화를 배워가기도 했다. 이는 [[막부]]시대 [[일본]]에서 금지한 [[종교]]인 [[기독교]]의 선교를 하지 않고 무역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기에 문화적으로도 황금기를 맞이하여, [[렘브란트 판 레인]]과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등의 화가와 [[에라스무스]], [[스피노자]]와 같은 철학자도 배출하였다. 특히 에라스무스는 그 자신은 [[로마 가톨릭]] [[사제]]였지만, 《우신예찬》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종교 개혁자였으며,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인 [[루터]], [[츠빙글리]]의 사상형성과 [[성공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된 잉글랜드 종교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네덜란드는 [[미국]]의 [[뉴욕 주]], [[뉴저지 주]] 등을 식민지로 삼고 [[인도네시아]]를 식민화하였다.
[[1588년]]에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이 성립되자 정치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네덜란드는 해외 진출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당시에는 총독이 통치했다). 17세기에는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연합 동인도 회사]](VOC)를 설립하여 세계 제일의 [[무역]]국으로 발돋움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주주들의 투자를 받아서 설립된 주식회사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남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등지에 [[인도네시아]] 등의 방대한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북미]] 대륙에도 뉴암스테르담(지금의 [[뉴욕]])을 건설하기까지 하였다. [[오세아니아]]에도 간 상인들은 [[뉴질랜드]]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에도 진출하였는데, [[일본]]에서는 [[나가사키 현|나가사키]]에 활동 공간을 마련해주었으며, '난학'(蘭學)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 문화를 배워가기도 했다. 이는 [[막부]]시대 [[일본]]에서 금지한 [[종교]]인 [[기독교]]의 선교를 하지 않고 무역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기에 문화적으로도 황금기를 맞이하여, [[렘브란트 판 레인]]과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등의 화가와 [[에라스무스]], [[스피노자]]와 같은 철학자도 배출하였다. 특히 에라스무스는 그 자신은 [[로마 가톨릭]] [[사제]]였지만, 《우신예찬》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종교 개혁자였으며,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인 [[루터]], [[츠빙글리]]의 사상형성과 [[성공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된 잉글랜드 종교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네덜란드는 [[미국]]의 [[뉴욕주]], [[뉴저지주]] 등을 식민지로 삼고 [[인도네시아]]를 식민화하였다.


=== 쇠퇴기 ===
=== 쇠퇴기 ===

2020년 9월 3일 (목) 17:24 판

개요

네덜란드서유럽카리브 제도에 걸쳐 있는 네덜란드 왕국의 구성국으로, 네덜란드 왕국(Koninkrijk der Nederlanden)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네덜란드 왕국서유럽에 위치한 네덜란드 본토, 왕국 직할령인 네덜란드령 카리브, 해외 영토인 아루바, 퀴라소신트마르턴을 포함하는 주권국이자 입헌군주국이다.

엄밀히 말해 네덜란드란 서유럽에 위치한 네덜란드 본토만을 부르는 명칭으로, 네덜란드 왕국의 일부에 해당한다. 이 문서에서는 주로 네덜란드 본토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수도는 암스테르담이나, 정부 및 각종 행정기관이 밀집한 도시는 헤이그이다. 홀란트(Holland) 지방에서 딴 이름인 홀란트라고 부르기도 하며 이를 한문으로 음차한 화란(和蘭)으로도 알려져 있다.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로 국토의 25%가 해수면보다 낮은 지역이다. 네덜란드라는 이름 자체도 '낮은 땅'이란 뜻이다. (네덜란드어 Nederland (네덜란), 영어 Netherlands (네델랜즈[1])) 한국에서 표준명칭은 네덜란드이나, 간혹 영어의 영향으로 네델란드, 네델랜드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제방(둑), 풍차, 나막신, 튤립, 치즈, 청어, 마약[2] 정도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이미지이다.

지리

남서쪽으로 벨기에, 동쪽에 독일을 두고 서북서 방면 바다 건너에 영국과 마주한다. 룩셈부르크와는 직접적으로 마주하지 않으나, 그럼에도 두 나라는 중간에 끼인 벨기에 보다도 나름 비슷한 점이 많다.

총 면적은 4만 1000㎢이다. 북해에 면해 있는 국토는 라인 강(네덜란드어로는 레인 강(Rijn)), 마스 강(Maas), 스헬더 강(Schelde) 등이 만드는 삼각주를 중심으로 저지대가 펼쳐져 있다. 남서쪽은 구릉지대로 되어 있으나 림뷔르흐 주에 있는 이 나라 최고 지점조차도 321m에 지나지 않는, 전체적으로 평탄한 국토를 가지고 있다.

현재 소유하고 있는 카리브 해의 해외 영토인 아루바 섬퀴라소, 신트마르턴, 보네르 섬, 사바 섬, 신트외스타티위스 섬도 포함한다. 과거에는 '네덜란드령 기아나'라는 이름을 가진 수리남은 물론 본국의 100여 배도 넘는 땅인 인도네시아도 '네덜란드령 동인도'라는 이름으로 식민지에 포함되었었다.

행정구역

네덜란드 행정구역

네덜란드는 12개의 주(provincie)로 나뉜다.

프리슬란트 주의 프리지아인은 프리지아어를 사용하여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다.

기후

네덜란드는 위도가 높은 곳에 있지만, 북부 지역은 북해의 난류편서풍의 영향을 받는 해양성 기후로 1년 내내 온화한 편이다.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는 작지만, 날씨는 변하기 쉽다. 그러나 남동부 지역은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기후가 거칠고 기온차도 심하다.

역사

고대와 중세

켈트와 게르만인이 자리잡고 살던 네덜란드에 로마인이 들어와 외국 지배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BC 50년 경이다. 남부의 마스트리흐트에 로마 시대의 요새 유적이 남아 있다. 로마 지배의 말기에는 프랑크와 색슨-프리스인들이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했고 이 무렵 네덜란드에 기독교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슬람을 막은 카롤루스 대제교황 레오 3세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았다.(800년) 그가 사망(816년)한 이후, 유럽은 베르됭 조약(843년)으로 서틀:.cw틀:.cw동 프랑크로 나뉘게 되는데, 이 때 저지대 국가스헬데 강을 중심으로 서쪽(현재의 벨기에)은 서프랑크 왕국에, 동쪽은 동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된다. [3] 10~13세기에는 상업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하였으며, 홀란트 백작이 북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강화하였다.

독립 전쟁

14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부르고뉴(부르군트) 공작 지배하에 들어가고, 15세기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와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때에는 근대 자본주의에 눈을 뜨게 된 시민들이 우상파괴 폭동사건[4]과 네덜란드 종교개혁 등의 끈질긴 저항으로 에스파냐 세력을 몰아내고, 1588년 공화국(국호는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으로 독립을 쟁취하기에 이른다. 공화국은 1815년에 폐지되고 네덜란드는 입헌군주제[5]로 바뀐다.

황금시대

무역국으로 발돋움하면서 문화적으로도 황금기에 접어든다.

1588년에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이 성립되자 정치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네덜란드는 해외 진출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당시에는 총독이 통치했다). 17세기에는 주식회사연합 동인도 회사(VOC)를 설립하여 세계 제일의 무역국으로 발돋움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주주들의 투자를 받아서 설립된 주식회사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남아프리카동남아시아 등지에 인도네시아 등의 방대한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북미 대륙에도 뉴암스테르담(지금의 뉴욕)을 건설하기까지 하였다. 오세아니아에도 간 상인들은 뉴질랜드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에도 진출하였는데, 일본에서는 나가사키에 활동 공간을 마련해주었으며, '난학'(蘭學)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 문화를 배워가기도 했다. 이는 막부시대 일본에서 금지한 종교기독교의 선교를 하지 않고 무역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기에 문화적으로도 황금기를 맞이하여, 렘브란트 판 레인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등의 화가와 에라스무스, 스피노자와 같은 철학자도 배출하였다. 특히 에라스무스는 그 자신은 로마 가톨릭 사제였지만, 《우신예찬》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종교 개혁자였으며,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인 루터, 츠빙글리의 사상형성과 성공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된 잉글랜드 종교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네덜란드는 미국뉴욕주, 뉴저지주 등을 식민지로 삼고 인도네시아를 식민화하였다.

쇠퇴기

그러나 네덜란드를 견제하려는 영국과의 계속되는 전쟁에서 밀려나 세계의 상권을 영국에 빼앗기게 되었으며, 1793년 2월 1일, 프랑스는 네덜란드에 선전 포고하였다. [6]1810년에는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프랑스 영토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15년 빈 회의의 결과 네덜란드 왕국이 새로이 탄생하였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국가인 벨기에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가 합병된 왕국이었기 때문에, 1831년 벨기에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여 벨기에 왕국을 건국했다.

현대사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나치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도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기의 인물 중 하나이다. 전후 네덜란드는 안정된 정치와 높은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식민지 인도네시아가 종전과 동시에 독립을 선언하자, 네덜란드군이 이를 탄압하여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으로 이어졌으며, 많은 비난 끝에 유엔의 중재로 독립을 승인하였다. 현재는 카리브 해네덜란드령 안틸레스아루바만이 식민지의 잔재로 남아 있다. 1971년에는 맥도날드 햄버거집이 네덜란드 잔담에 상륙하였다.

정치

네덜란드는 입헌군주제 국가로서 현재의 군주는 빌럼알렉산더르 국왕이다. 의원내각제를 기반으로 하는 대의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네덜란드 의회는 상원과 하원이 있는 양원제로 임기는 각각 4년이다. 행정부 장관은 총리에 의해 지명되며 14개의 행정부서가 있다. 현재의 총리는 마르크 뤼터이다. 최고법원과 5개의 고등법원에 각 지방법원과 간이법원이 속해해 사법권을 행사한다. 법관은 최고법원과 법무장관의 추천으로 국왕이 임명한다. 헌법재판소는 없으며 법률의 합헌 여부는 특별 법정에서 가린다.

경제

20세기에 네덜란드는 경제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던 식민지들을 잃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오늘날까지도 세계로 진출하여 활약하는 상업 국가로서 그 위상을 지키고 있다. 또한 최첨단 기계와 영농 기술 도입으로 농업 부문에서도 높은 생산성을 보인다. 그 밖에 네덜란드의 중소 기업과 세계 굴지의 대기업들은 담뱃대에서 강철에 이르기까지 품질 좋은 물건을 생산한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네덜란드는 국민 복지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네덜란드는 경제 선진국으로, 1인당 국내 총생산이 유럽 연합 회원국의 평균보다 높다. 상업과 교통의 발달로 네덜란드는 이미 17세기에 부유한 나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업과 교통은 네덜란드 경제를 주도하는 핵심 부문이다. 예전에 세계를 누비던 거상들의 자리를 이제는 전 세계를 무대로 교역하고 있는 경영자가 대신하고 있다. 오늘날 네덜란드의 관문이자 유럽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은 수도 암스테르담이 아니라 항구 도시 로테르담이다. 19세기에 북해와 라인 강을 직접 연결하는 수로가 완공된 이후, 로테르담 항구는 독일의 루르 공업 지대와 수로로 연결되어 크게 성장했다. 오늘날 로테르담 항구에는 하루 평균 100만 톤의 물자가 이동하고 있다. 한편 암스테르담의 다이아몬드 가공 기술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네덜란드는 교역뿐만 아니라 제조업 분야도 발달했다. 석유, 에너지 회사인 쉘은 로테르담에 본사를 두고 있다. 또 마가린에서 세탁비누에 이르기까지 다향한 제품을 생산하는 유니레버의 본사도 로테르담에 있다. 필립스는 에인트호벤에서 유럽 최대의 전자 회사로 성장했다. 그리고 항공기 제작사인 아크조 노벨과 유럽 굴지의 맥주 제조업체 하이네켄도 네덜란드에 본사를 두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중공업 분야는 무역업과 제조업에 비해 다소 늦게 발달했다. 북해와 암스테르담을 연결해 주는 북해 운하의 입구에는 에이모이덴이 있는데, 이곳에는 코크스 제조 공장과 네덜란드 최대의 제철, 제강 공장이 들어서 있다.

네덜란드는 천연자원이 풍족하지 않은 편이다. 림뷔르흐 주의 탄전은 1970년대에 이미 문을 닫았으나 북해 연안의 그로닝겐 지역에서 대규모 가스전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의 생당 부분은 수출된다. 석유도 생산되지만 천연가스에 비해 양이 적어 네덜란드 경제에 큰 기여는 하지 못한다. 헹겔로와 델프제일 근처에는 엄청난 양의 암염이 매장되어 있는데, 일부는 산업용으로 국내에서 사용하고 나머지는 수출된다.

네덜란드의 농업은 최첨단 기술과 높은 생산성을 자랑하고 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농업 인구는 감소하고 있으나, 경영 규모가 커져서 생산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국토의 4분의 1정도가 농지로 이용되는데, 이중 약 30%가 목초지이다. 네덜란드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약 3분의 2는 세계 각국으로 수출된다. 또한 겨울철 날씨가 온화하고 토양이 기름진 네덜란드는 원예 농업이 발달했다. 수천 개의 온실에서는 토마토, 오이, 피망 같은 채소가 첨단 시설로 재배되고 있다. 헤이그와 뫼즈 강 하구 사이, 델프트 주변과 로테르담 북부에는 유리 온실이 줄지어 있다. 축산업도 네덜란드 경제에 큰 역할을 한다. 자동화된 대규모 농장에서 돼지와 닭, 오리 등을 대량 사육하고 있고 유제품 관련 산업도 잘 발달했다. 하우다, 에담, 레르담과 같은 도시는 치즈 생산지로 유명하며, 이 지역에서 생산된 치즈는 도시의 이름을 따서 불린다. 4월에서 9월까지 알크마르에서는 금요일 아침마다 전통 치즈 시장이 열린다. 전통 치즈 시장에서는 커다란 치즈 경매가 진행되고 광광객들은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알크마르를 찾는다.

2009년 5월 10일 유로스타트는 네덜란드가 유럽에서 근로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라고 발표했다.[7]

사회, 문화

문화

회화로는 17세기 황금시대와 19세기에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뛰어난 화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17세기 초에는 유화 기법의 선구자 프란스 할스가 활약하였고, 중엽에는 유화 기법의 완성자로 일컬어지는 렘브란트 판 레인이 나타났다. 중산 계급이나 농민의 생활을 주로 그린 얀 스테인, 풍경화가 로이스달 등도 활약했다. 실내화에서는 우아한 광선을 살린 그림으로 유명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를 들 수 있으며, 19세기에는 강렬한 개성을 가진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등장한다.

네덜란드의 공예품으로는 델프트(Delft) 도자기와 붉은 색의 아름다운 마쿰(Makkum) 도자기를 들 수 있다. 도자기는 16세기 말에 이탈리아의 기술을 받아들임으로써 시작하였고, 17세기부터 중국 등의 영향을 받아 18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스포츠

세계적인 축구강국으로 명성이 높다. FIFA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3번 달성한 축구강국이지만 아직 우승한 적은 없으며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는 1988년 우승하였다. 그러나 단 한번 FIFA 랭킹 1등에 랭크된 적은 있다.

또한 스케이팅 강국으로서, 운하가 얼어붙는 해에는 전국 11개 도시를 완주하는 엘프스테덴토흐트 대회가 열린다.

동성 결혼 합법화

네덜란드는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국가로 알려져 있다.[8] 대표적인 경우로 네덜란드는 유럽 국가 최초로 1993년 동성 결혼을 합법으로 인정하였으며[9] 2001년 4월 1일을 기해 동성 커플의 결혼이혼을 허용하는 법이 시행되었다.

마약 합법화 논쟁

네덜란드의 마약 정책은 마약 사범을 처벌하는 처벌 위주 정책이 아닌 중독성이 낮다고 판단되는 마약을 합법적으로 관리하는 정책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1976년, 상대적으로 중독성이 낮으며 인체에 피해가 적은 대마, 환각 버섯 등을 연성 마약(Soft Drug)으로 규정하여 5g 이하의 대마를 피우거나 소지하는 것을 허용하였으며 커피숍이라는 곳에서 대마를 피는 것을 허용하되 500g 이하만 판매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이는 연성마약을 허용함으로써 헤로인코카인 등 이른바 중독성 마약을 가까이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이지만, 이로 인한 폐해도 있다. 바로 대마중독자 문제이다. 2008년, 네덜란드에서는 마약중독자가 줄어든 대신 대마가 주는 편안함 때문에 복용을 끊지 못하는 대마중독자가 늘어나고 있다.

종교

네덜란드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갖고 있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국가였기 때문에, 메노나이트교회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망명하기도 하였다. 20세기 초까지는 개신교 비율이 인구대비 60%에 달하기도 했지만[10] 2차대전 이후 급격한 세속화 현상으로 인해 종교적 영향력은 희박해졌으며 현대에는 인구의 과반수인 49.2%가 무종교인이다. 2014년 통계 기준으로 개신교 신자는 5.7%에 불과하나 바이블벨트[11]가 존재하여 이곳에서 전통적인 네덜란드 개혁교회[12] 신앙이 보존되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개혁교회가 많지 않은 남부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다.[13] 이외에 힌두교, 유대교(나치독일유대인 박해로 교세가 감소함), 이슬람교도들도 있다.

기독교 정당으로 CDA와 ChristenUnie, SGP가 있다.

트리비아로, 네덜란드의 옛 국교회[14] 명칭이 무려 NHK였다. 정확히는 Nederlandse Hervormde Kerk이고 2004년에는 이름이 PKN으로 바뀌어서[15] 옛날 이야기가 되었지만, 어감이 좀 거시기한 건 사실이다. 국교회 외에는 '기독개혁교회'[16] '화란 해방파 개혁교회' 등이 있다.

대외 관계

한국

네덜란드는 조선 시대에 벨테브레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들어온 일, 헨드릭 하멜도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도착한 일 등으로 한국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 유럽 국가이다. 네덜란드는 1949년 7월 25일, 한국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였으며[17], 한국 전쟁 때에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한국을 지원하였다. (보병 1개 대대, 군함 1척) 헤이그에 한국 대사관(주 헤이그 국제기구 대표부 겸임)이 개설되어 있다. 서울에 주한 대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한국의 대(對)네덜란드 수출은 46억2698만USD, 네덜란드의 대(對)한국 수출은 44억2550만USD(각 2011년)에 달하여, 네덜란드는 한국에 있어서 제27위의 수출국이자 제25위의 수입국이다.[18] 모두 1,771 명(재외국민 1,663명, 시민권자 108 명)의 한민족들이 네덜란드에 거주(2010년 12월 기준)하고 있다. [19] 한국과 네덜란드는 KLM대한항공의 노선으로 운항하고 있다. 중등 교육의 경우 한국에서는 네덜란드어가, 네덜란드에서는 한국어가 개설되지 않았다.

영국

당시 네덜란드가 에스파냐 왕국의 지배를 받고 있을 무렵,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해서 지원을 받고자 잉글랜드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해군력을 강력히 키워나가 잉글랜드 왕국과 연합하여 마침내 에스파냐 왕국의 군대를 몰아내어 독립을 쟁취하는 데 성공한다. 여기까지는 영국과의 사이가 굉장히 좋았으나, 올리버 크롬웰이 기존의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설립한 때부터 사이가 급격히 나빠졌다. 올리버 크롬웰은 식민지를 더 많이 차지하고 국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 트집을 잡아 네덜란드와의 동맹을 해제하였고 네덜란드와의 무역을 방해하였다. 네덜란드는 결국 잉글랜드 공화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마침내 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국의 군대가 더욱 우세했고, 끝내 네덜란드는 잉글랜드 왕국으로부터 많은 식민지를 빼앗기게 된다. 이후 영국과의 관계는 매우 험악해졌지만, 프랑스 왕국이 강대해지기 시작하자 위협을 느낀 잉글랜드 왕국은 다시 네덜란드와 동맹을 요청했고, 네덜란드가 요청을 받아들여 다시 양국간의 관계는 좋아진다.

프랑스

네덜란드가 잉글랜드 왕국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고 식민지마저 대부분 빼앗기자, 이를 노리고 있었던 프랑스 왕국은 네덜란드를 멸망시키고자 대대로 침입을 자행하였다. 결국 네덜란드는 국력이 매우 쇠약해져 있었던 탓에 한동안 프랑스 왕국으로부터 지배를 받았다. 더구나 11월 유럽의 현존하는 정부들을 전복하려는 모든 국민들에게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하였고 1793년 1월에 드디어 루이 16세를 처형하였다. 1793년 2월 1일, 프랑스 왕국은 네덜란드 공화국에 선전 포고하였다. [20]네덜란드 공화국은 잉글랜드 왕국과 오스트리아 왕국 등과 함께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고 대항하였다. 1795년에, 하천의 결빙으로 네덜란드의 요새의 방어력이 떨어지는 겨울철을 노려 피슈그류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네덜란드에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네덜란드는 프랑스 혁명에 동참하고 협력하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프랑스 왕국이 네덜란드를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마침내 하천이 결빙되어 프랑스군이 네덜란드를 침공하자, 도시는 차례로 함락되어 네덜란드 총독 빌렘 5세가 잉글랜드 왕국으로 도망가고, 네덜란드 함대는 접수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스 왕국의 주도로 네덜란드에 바타비아 공화국이 세워졌고(1795년 1월 19일), 브라반트 공국마스트리히트가 프랑스 왕국에 할양되었다. 브뤼메르 18일 쿠데타(1799)로 권력을 잡고 천황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자신의 동생 루이를 네덜란드 국왕(로데베이크 1세)에 즉위시켰다.(1806) 1810년에는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프랑스 왕국의 영토가 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프랑스와의 관계는 좋지 못한 실정이다.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출신의 막시마 소레기에타가 네덜란드로 이민와 국후가 된다. 이 때문에 양국간 우호가 상당히 돈독해졌다. 또한 양쪽 모두 세계적인 축구강국으로 명성이 자자하며 관련 분야의 교류가 활발하다.

일본

식민지를 개척하고 다녔던 시절의 네덜란드는, 중국을 통해서 일본을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가진 개신교 국가였지만 장사가 중요하지 선교활동은 관심이 없었으며[21], 일본은 가톨릭을 탄압하고 있었다. 따라서 네덜란드는 서양나라 중에서 유일하게 일본과의 교역 상대가 될 수 있었으며, 일본 국왕도 서양 제국들 중에서 유일하게 교역을 허용할 정도로 돈독해졌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네덜란드의 식민지를 무차별 공격하였고, 끝내 네덜란드가 미국과 영국과 중국과 연합하여 일본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전쟁에 돌입하고 말았다. 마침내 일본이 완벽히 패배하였고, 한동안 일본과의 관계는 잠잠해졌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반일 세력이 일본 국왕인 히로히토가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히로히토에게 총격을 가하고 쓰레기까지 내던지는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미국의 중재로 네덜란드와 일본의 관계는 다시 좋아졌다.

각주

각주

  1. 영어 표기시에는 필리핀처럼 복수형(-s)으로 끝난다. 정확한 -ther 발음은 '덜'도 아니고 '델'도 아닌 어중간한 발음이다.
  2. 나쁜 뜻이 아니라 '정부 주도의 마약 합법화'라는 비상식적인(?) 발상을 가장 먼저 해냈다는 의의에서. 그러나 여전히 담배 대신 히로뽕 피는 나라라는 이미지도 있다.
  3. 이병헌, 〈16~17세기 네델란드의 대항해 시대 연구 : '칼빈주의 네데란드'의 역사발전과 일본진출을 중심으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2010.2.) 8쪽. “이슬람을 막은 칼대제(샤를르마뉴)가 800년 교황 레오3세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는다. 그가 816년 사망한 이후, 유럽은 서, 중, 동 프랑크로 나뉘게 된다. 네덜란드 즉 저지대 지역만 생각해보면, 셀데강을 중심으로 서쪽은18) 프랑스에, 동쪽은 독일에 속하게 된다. ...18) 현재 벨기에 땅이다.”
  4. 네덜란드 개신교도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에 침입하여, 성상을 파괴한 폭동
  5. 왕이 있는나라
  6. 김용구. 《세계외교사》, 1995(上틀:.cw下 合本), 서울대학교 출판부, 3~4쪽. ISBN 89-7096-413-4 “프랑스는 11월 유럽의 현존하는 정부들을 전복하려는 모든 인민들에게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하였고 1793년 1월에 드디어 루이 16세를 처형하였다. 이때부터 프랑스는 대외팽창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사보이(Savoy), 니스(Nice) 그리고 벨지움을 합방하고 영국, 네덜란드 그리고 스페인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하였다.”
  7. 네덜란드, 유럽서 근로시간 가장 짧아
  8. 먼나라 이웃나라》-네덜란드 편/이원복 글·그림/김영사
  9. 《현대문명 진단》2권-엄마 엄마, 아빠 아빠:가족의 개념에 대한 반란/이원복 글·그림/조선일보사 출판국 p.179
  10. 그래서 과거에는 한국처럼 기독교라고 하면 개신교부터 떠올리는 경향이 강했다.
  11. 신학교로 유명한 캄펀과 풍차 관광지로 유명한 킨데르데이크도 이쪽으로 분류된다.
  12. 신학적으로는 스코틀랜드, 한국의 장로교와 동일하나 자체적인 신앙고백서를 사용하고 있다. 예배 형태도 한국에서 생각하는 장로교 예배와는 좀 다르다.
  13. 명목상 신자 수로는 개신교를 역전한 것처럼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냉담자가 훨씬 더 많다.
  14. 엄밀히 말하면 성공회나 루터교 같은 국교회 개념과는 좀 다르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교단인데다가 왕족들이 믿고 있는지라 사실상 국교회처럼 취급된다.
  15. 정확히 말하면 옛 국교회와 화란개혁교단 총회파라 불리우는 교단이 1998년에 합쳐서 'Samen-op-Weg'라는 이름의 교단이 되었다가 2004년에 현 명칭인 Protestantse Kerk로 바꾸었다..
  16. 이 교단은 1816년 빌럼 1세가 행했던 종교 정책을 국왕의 교단 사유화로 보고 반발한 목사들끼리 모여서 1864년에 만든 개신교 교단이다.
  17. 현재는 북한과도 수교한 상태이기 때문에 의미가 상실되었다.
  18. 국가별 수출입. 한국무역협회.
  19. 국가별 재외동포현황(2011).xls (엑셀).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20. 김용구. 《세계외교사》, 1995(上틀:.cw下 合本), 서울대학교 출판부, 3~4쪽. ISBN 89-7096-413-4 “프랑스는 11월 유럽의 현존하는 정부들을 전복하려는 모든 인민들에게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하였고 1793년 1월에 드디어 루이 16세를 처형하였다. 이 때부터 프랑스는 대외팽창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사보이(Savoy), 니스(Nice) 그리고 벨지움을 합방하고 영국, 네덜란드 그리고 스페인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하였다.”
  21. 먼나라 이웃나라》:일본의 역사/이원복 글, 그림/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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