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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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Justify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6월 11일 (금) 06:10 판

전개

냉전의 시작은 사실 의견이 분분하다. 왜냐면 냉전의 시작을 어떤 사건으로 잡느냐에 따라 냉전의 책임이 확연하게 갈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구권의 공산화를 냉전의 시작으로 본다면 당연히 소련이 냉전을 유발한 것이고, 반대로 마샬플랜이 냉전의 시작이라면 미국에게 냉전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얄타회담의 결과 연합국(미·영·소)는 점령지역의 국가들을 민족자결주의 원칙 하에서 독립시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동구권에서 소련은 선거조작과 정치개입을 통해서 공산화시켜버린다. 이는 당연히 미국을 위시한 자유주의 진영들의 불만을 키웠다. 이 과정에서 윈스턴 처칠철의 장막 발언을 통해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했다. 그래도 루스벨트가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루스벨트가 죽고, 미 대사관 참사관이던 조지 케넌이 긴 전보(1946)를 보내면서 미국의 태도는 급격히 변화된다. 트루먼 독트린은 이런 미국의 변화의 가장 상징적인 것이다. 트루먼 독트린 선포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은 대 소련 압박정책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미국과 소련의 충돌로 이어졌고, 첫 번째 충돌은 1947년 베를린 봉쇄이다. 이 베를린 봉쇄에 미국은 단호하게 대처한다. 먼저 핵무기를 전면으로 런던에 배치하고 이를 뉴욕타임스와 런던타임스에 정보를 흘려 대서특필하게 만들었다. 이는 당시 핵무기를 독점하고 있던 미국이 핵을 통해 러시아를 위협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미국은 대규모 수송기를 동원하여 서베를린에 물자를 공급한다. 약 8개월에 걸친 봉쇄는 결국 소련이 물러나면서 끝이 났다. 미국의 대량 수송기 작전에 포기한 것이었다. 역시 독일이 하면 안 되지만 미국이 하면 된다니께. 이렇게 첫 번째 대립은 조용히 무마되었다.

두 번째 대립은 한국전쟁이다. 1950년 한국전쟁은 냉전이 가장 격화되었던 시점이고, 이를 계기로 각각의 진영 내부의 결속을 다지게 되었다. 한국전쟁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다만 미국이 빠르게 참전한 이유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의 남한 침공이 소련의 팽창정책으로 보였고, 이는 미국의 의지를 시험한 것으로 판단했다. 만약 여기서 미국이 남한을 포기하면 다른 분단 국가에서도 동일한 정책을 할 것으로 생각했고, 이에 미국은 즉각적인 참전과 파병을 결의한 것이다.

이 두 사건을 기점으로 냉전의 구도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이후 국제정세는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분단되어 서로 경쟁했다. 그 경쟁은 경제, 문화, 군사, 과학기술 전반에 걸친 것이었다.

격화

1953년에 이오시프 스탈린이 급사하고 이후 후임을 맡게 된 니티카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 정책을 폈다. 스탈린그라드 도시는 볼고그라드 도시로 재명명됐으며, 스탈린 동상들은 허물어졌고 굴라그 수용소에 감금된 수감자들은 해방됐다. 동독일, 헝가리, 폴란드 등의 동유럽 국가들은 이러한 개혁을 틈타 민주화 운동을 시도했으나 소련군에 의해 유혈진압 당한다.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은 서로 간첩들을 보내 서로를 감시하기 시작했고, 한편에서는 우주 경쟁을 벌였다. 두 국가들은 서로 원자 폭탄에서 수소 폭탄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상호 확증 파괴 이론은 갈수록 현실화되었다.

1955년에 서독일이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하자 소비에트 연방에서 이에 대항해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창설하고는 동독일 등의 위성국가들을 참가시켰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예산을 국방에 집중하자 위성국인 동독일 국민들의 삶은 궁핍해졌다. 동독일 영토인 동베를린 시민들은 이에 서독일 영토인 서베를린으로 넘어가기 시작했고, 소비에트 연방은 동독일의 경제가 악화될 것을 우려해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원래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간 협정으로 미국 외교관은 동베를린으로 왕래할 수 있었으나, 언제부턴가 동독일 병사들이 이를 거부하기 시작했고, 이 사건을 두고 1961년에 미군 탱크와 소련군 탱크가 베를린 국경검문소를 두고 몇 시간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었다.

서유럽 식민제국 국가들은 붕괴된 경제 때문에 더 이상 식민지배를 유지하기 어려워졌고, 이에 따라 1950년대부터 탈식민지화가 진행되어 아프리카 17개국이 독립한 1960년에 그 정점을 찍는다. 이러한 신생국들은 1955년에 인도네시아에서 반둥 회의를 열어 반식민주의, 중립을 내세웠고 제3 세계가 형성된다.

1959년에 중남미 공산주의자들은 카스피 해의 쿠바를 공산혁명으로 차지하고는 소비에트 연방과 군사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한다. 1962년 미국은 뒤늦게 쿠바에 심각한 양의 핵 미사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발한다.

완화

1954년에 베트남은 독립했으나 이념으로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결국 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남베트남은 10년 넘게 이어진 전쟁에서 열세를 굽히지 못하고 있었고, 미국은 남베트남이 적화통일 될 경우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 인도 순으로 공산주의가 확대될 것을 우려해 결국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미국은 이후로 8년 동안 베트남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나, 미군의 교착 상태, 전쟁범죄, 반전여론 등으로 결국 철군하고 만다. 남베트남이 2년 뒤 패망하고 우려했던대로 인도차이나는 공산화되나, 베트남이 얼마 안 되어 캄보디아와 중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내분이 일어나게 된다.

미국은 닉슨 행정부의 등장으로 새로운 장을 맞는다. 일명 데탕트의 시대이다.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중심이 되어 미국은 1971년에 중화민국을 UN 상임이사국에서 퇴출시키고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손을 잡고(핑퐁 외교), 이후 소련과 회담을 하면서 우호를 증진시켜간다. 당시에는 이 데탕트의 시기를 지나 냉전이 끝날 것이라 기대하였다. 닉슨의 뒤를 이은 포드 행정부와 카터 행정부 또한 이 기조를 유지하며 소련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 간 관계가 개선되면서 냉전은 점차 대리전의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신생국들은 비록 독립했으나 식민 통치 시기의 부족/지역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 내전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은 영향력 확대를 위해 이러한 내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한편에 미국은 칠레의 사민주의 정권을 군부 쿠테타를 지원함으로서 전복시켰고, 이후로도 남미의 콘도르 작전을 지원하였다.

1979년 6월 18일 미국과 소련은 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을 오스트리아 빈에서 조인하며 냉전을 끝내는 듯 했다.[1]

신냉전

그러나 그 해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며 다시 새로운 냉전으로 들어가는데 이를 신냉전이라고 한다.

종식

1985년에 소련에서 고르바초프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냉전의 완화기를 맞이하지만 소련은 예상치 못하게 급격히 붕괴하면서 냉전은 끝이 났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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