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주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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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滿州鐵道株式會社

South Manchuria Railways Corporation

1906년 11월, 일본 제국이 남만주 일대에서 획득한 철도부설권을 활용하기 위해 설립한 제국주의 식민지 철도 회사. 약칭은 만철(滿鐵)이다.

설립

만철 설립의 기원은 러일전쟁과 이를 마무리짓는 포츠머스 조약으로 올라간다.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이 얻은 이권 중에는 동청철도의 남쪽 절반 지역에 대한 권리와 이권을 넘기는 것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일본은 요동반도 끝의 다롄에서 창춘에 이르는 구간의 철도에 대한 이권을 획득했다. 이후 일본은 청나라와 일청만주선후조약을 체결, 러시아에게 양도받은 이권을 청에게도 인정받았다.

이후 일본 정부는 1억 엔을 현물출자했고, 주식모집과 런던에서 회사채를 발행하여 얻은 자금 총 2억 엔을 자본금으로 하여 1906년 11월 창립하고 12월에 법인등기를 마쳤으며, 1907년 3월 정식적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초대 총재로는 일본의 대표적 의학자이자 유능한 위생검역 관료였고, 타이완 총독부 민정장관을 역임한 고토 신페이(後藤新平)가 추대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창립자는 러일전쟁 당시 만주군 총참모장이었던 고다마 겐타로로 남만주철도의 창립위원장으로서 타이완 총독을 지내며 고토 신페이를 중용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고다마는 타이완에 있던 고토를 만주로 불러들이려 했으나 고토는 타이완에서 할 일이 남아있다며 사양했는데 며칠 뒤인 1906년 7월 23일, 고다마가 급사한다. 고다마의 급사 소식을 들은 고토는 고다마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함께 이를 일종의 천명이라 여기고 만철 총재의 직을 수락한 것이다.

운영

초창기

사실 만철의 초창기는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애시당초 일본은 러일전쟁을 통해 겨우 조선과 남만주에서의 우위를 인정받은 것이고, 1910년대까지는 조선 식민지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남만주 철도에 대해선 아무래도 관심이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고, 만주로 진출할 여력도 충분치 않았다.

이에 고토는 일종의 사업다각화를 통해 경영의 안정을 도모했다. 최우선적으로 푸순 탄광을 개발, 영업하는데 초점을 두었고, 뤼순과 다롄의 일본 조차지에 호텔을 건설하였으며 다롄의 항구 설비를 재정비하여 항구와 철도의 연계를 높여 물류흐름을 원활히 하는 등 만철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특유의 러시아 표준궤를 사용했던 철도노선을 모두 재정비하여 일본 본토 철도규격인 1,067mm 케이프 궤간으로 재부설했다.

2대 총재인 나카무라 요시코토(中村是公) 시기에는 조선과의 철도연결을 위해 일본 본토 규격에서 국제표준궤인 1,435mm로 재부설했고, 남만주 철도와 연계되는 여러 지선들을 건설하며 철도 효율을 극대화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노선이 지린과 창춘을 연결하는 지창선.

성장 및 정체기

제1차 세계대전 중엽 이후의 호황기에서 만철은 눈부신 성장을 보여준다. 호황으로 인해 만철이 운영하는 탄광에서의 석탄 판매도 급증했고, 만주의 철이나 잡곡류가 일본이나 조선, 그리고 전쟁중인 유럽으로 수출되는 것도 만철의 철도를 통해 이용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화물운임도 폭풍처럼 증가했다. 이러한 기류를 타 제철업까지 진출, 안산제철소를 건설하여 만주의 철과 석탄을 토대로 자체적인 철강업까지 시작했다.철도회사라며?

그러나 1차대전이 끝나면서 유럽으로의 수출수요가 거의 사라지고, 적백내전과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북만주와 연해주가 개판이 되면서 다시 차가운 바람이 쌩쌩 불어오게 된다.

한편, 이 시기 조선총독부와의 협의를 통해 1917년 7월 31일부로 조선철도에 대한 위탁운영권을 맡게 되었으나 수익이 안나오고 또 총독부 역시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철도를 총독부가 직접 관할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1925년에 위탁운영권을 반납하게 된다.

만철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경공업이나 기계공업, 식품가공업, 제유업 등 온갖 별의 별 사업을 다 하게 된다.

철도집중기

30년대가 되면서 만철은 관동군이 일으킨 만주사변에 협력하고 만주 전역으로 철도운영을 확대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일제는 본격적으로 만주를 개발하고자 했는데, 1906년 만철 설립때와 달리 이제 일본의 여력이 만주까지 확고히 지배할 수 있기에 만철을 통한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을 선택하게 된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닛산이다. 일본 정부와 관동군은 당시 새로이 떠오르던 닛산에게 만주로 가서 사업할 것을 권유했고, 이에 닛산은 1937년 본사를 만주로 이전, 일본 기업이 아닌 만주국 기업이 된다!일본 기업이랑 만주국 기업이랑 대체 뭔 차이인지 모르겠지만 넘어가자 그리고 만철은 철도 사업 외의 모든 중공업 분야(단, 안산제철소 제외)를 닛산에게 매각하고, 닛산은 사명을 만주 중공업 개발 주식회사, 약칭 만업으로 개칭한다.

이후 만철은 철저하게 철도경영에만 집중하여 만주 각지의 화물을 운송하는데 전념했다. 만업 분리 이전인 1934년, 일본은 소련으로부터 동청철도의 장춘 이북 지역에 대한 권리와 자산을 매입하였고 이를 만철에게 맡겼다. 이로서 만철은 남만주만이 아니라 북만주의 철도망까지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망했어요

오늘 영국미국에 대한 천황폐하의 선전 조서를 받들어 한 마디 훈시를 한다. 지나사변이 발발한 이후, 영미 양국은 이번 성전의 목적 완수를 방해하고, 제국의 은인자중으응?을 빌미로 급기야 황국의 존립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제국은 자존자위와 동아의 영원한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국운을 걸고 영미를 응징할 중대 결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건국 이래 2,600년동안 일찍이 없었던 난국이라 하겠다.

생각건데 제국의 선구로서 국책에 목숨을 바치는 것은 우리 회사의 빛나는 전통이다. 사원 각자는 마땅히 시국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나라에 목숨을 바칠 각오를 새로이 하고 합심 협동하고 침착하게 업무를 수행하여 회사의 영광된 역사를 굳게 지킬 수 있도록 해주기 바란다. - 1941년 12월 8일, 15대 총재 오무라 다쿠이치(大村卓一)[1]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로 만철도 본격적으로 전시체제에 돌입했으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만철은 본국으로 식량과 석탄, 철강 등을 보내면서 동시에 남방 점령지로부터 원활하게 자원을 수급받아 이를 만주의 중공업단지에 보내줘야 했는데, 일본군의 리즈시절이라는 1942년에도 선박 부족과 우선순위에서 밀려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거기다 물자난은 만철의 핵심기능인 열차운행에도 지장을 주기 시작, 핵심부품 및 인력의 부족으로 인해 철도와 차량의 정비가 늦어지고 이로 인해 물류기능에도 지장이 생기는 악순환 속에 일본 본국에선 숙련기술자가 없다고 만철의 인력을 오히려 빼가고 있는 실정이었으니 철도가 제대로 운행이 될리 만무했다. 1944년에는 B-29가 만주폭격에 나서면서 자랑하던 안산제철소의 기능마저 급격하게 저하되었다.[2] 결국 패전 직전이 되면 본국의 요구는 커녕, 관동군이 요청하는 물자수송조차 벅찬 지경이었다.

1945년 8월 8일, 만주 작전이 시작되고 소련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면서 만철도 최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8월 13일 최후의 피난열차를 다롄으로 보낸 걸 마지막으로 만철은 추가적인 수송이나 피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관동군은 만철이건 뭐건 신경안쓰고 열심히 도망갔고(...) 만철의 마지막 총재 야마자키 모토키(山崎元幹)도 피난을 떠나지 못해 8월 20일 창춘에 입성한 소련군을 맞이한다. 소련군은 그를 체포 및 압송하지는 않았지만 소련군에 절대 협력할 것을 지시했고, 9월 22일 만철의 법인자격 상실 및 모든 중역을 해임하고, 관리자들에게 소련군의 지시에 따를 것을 요구했다.

뒤이어 9월 30일, 도쿄의 GHQ는 만철의 폐쇄를 결정하고 이를 통보했다. 그리고 만철은 말 그대로 망했다.(...)

조사부 및 연구기관

만철 조사부는 초대 총재 고토 신페이의 뜻에 따라 회사 설립 그 직후에 바로 발족하였다. 그밖에도 중앙시험소나 지질조사소가 비슷한 시기에 설립되어 각지에서 스카웃한 인재들이 만주 각지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간행물로 출간하기도 했다. 1차대전 후에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제국대학 출신들이 만철에 입사하여 조사부 활동을 주도했다. 30년대에는 관동군의 요청으로 경제조사회가 발족하여 만주국의 경제체계에 대한 계획과 기반을 담당했다.

군부가 폭주하여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했던 일본 제국에서, 만철 조사부 및 다른 연구기관들은 일본제국 최고의 싱크탱크라고 후대에 평가받기도 한다. 다만, 만철 조사부가 엄청 특출났다기보다는 일본의 다른 조직들이 다 이뭐병이어서...대본영보단 똑똑할거같긴 하다

각주

  1. 고바야시 히데오, 만철, 일본제국의 싱크탱크.208p
  2. 폭격으로 파괴된 시설은 별로 없었으나 폭격에 겁먹은 노동자들이 다 도망갔다. 당연한게, 노동자들은 대부분 중국인이어서 폭격의 위협 속에 목숨걸고 일본을 위해 일할 충성심따위 없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