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히토

나루히토
德仁
인물 정보
다른이름 히로노미야 나루히토(왕세자 책봉 전)
레이와(연호)
출생 1960년 2월 23일 (64세)
일본 도쿄도 치요다구 궁내청병원
국적 일본
학력 가쿠슈인 유치원
가쿠슈인 초등과
가쿠슈인 중등과
가쿠슈인 고등과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사학과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대학원
가쿠슈인대학 대학원
직업 왕족(일왕)
종교 신토
신체 165cm
배우자 마사코 왕비
가족 할아버지 쇼와(히로히토) 일왕, 할머니 고준왕후(나가코)
아버지 아키히토 상왕, 어머니 미치코 상왕비
형제: 남동생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 여동생 구로다 사야코
6촌 여동생: 아키코 공주, 요코 공주, 쓰구코 공주, 센게 노리코, 모리야 아야코
자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
조카: 코무로 마코, 카코 공주, 히사히토 왕자
활동기간 1991년 왕세자 책봉
2019년 일왕 즉위
역대 일본 국왕
125대 아키히토 일왕 126대 나루히토 일왕 127대
역대 일본국 국왕
2대 아키히토 일왕 3대 나루히토 일왕 4대

소개[편집 | 원본 편집]

일본 국왕. 126대 국왕으로 2019년 즉위했다. 연호는 레이와(令和)이다.

출생과 유아기[편집 | 원본 편집]

1960년 2월 23일, 아키히토 당시 왕세자와 미치코 왕세자비의 장남으로 도쿄 궁내청병원에서 태어났다. 왕세자 부부가 결혼한 지 10개월 만에 태어난 첫 아이이자, 히로히토 일왕의 첫 친손자[1]이자 장손이며 장차 왕위를 물려받을 사내아이의 탄생에, 일본은 무척 열광했다.

미치코 왕세자비는 ‘첫 평민[2] 출신 비(妃)’로서 세간에서는 많은 인기를 누렸지만 왕실에서는 호된 시집살이를 당하고 있었는데, 시집오자마자 건강한 아들을 출산한 이때도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혔다. 궁내청병원에서 퇴원하여 자동차를 타고 왕세자궁으로 돌아가던 중, 미치코 왕세자비는 몰려드는 기자들을 배려하여 잠깐 창문을 열고 아기를 보여주었다. 이를 두고 시어머니 나가코 왕비 및 왕족들과 화족(귀족)들이 “귀한 왕자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랬느냐”며 한바탕 난리를 쳤던 것이다.

태어난 지 7일 만에 할아버지 히로히토 일왕으로부터 ‘히로노미야(浩宮)’라는 어칭호와 ‘나루히토(德仁)’라는 이름을 받았다. 오시루시는 개오동이다.

평민 출신인 미치코 왕세자비는 여러 면에서 파격적인 면모를 보였는데, 출산육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왕궁 내의 산전(産殿) 대신 궁내청병원에서 출산했다. 또한 왕족ㆍ화족 가문의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서 분리된 거처에서 전담 시종들에 의해 양육되는 것이 전통이었지만, 미치코 왕세자비는 아이들을 떼어놓지 않고 (일반 가정처럼) 자신의 곁에 두고서 키웠다. 그녀는 벤저민 스포크 박사의 저서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를 영어 원서로 읽으며 육아에 대해 공부했고, 이렇게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나름의 육아지침을 세웠는데, 첫째 나루히토 왕자의 이름을 따서 ‘나루 짱 겐뽀(ナルちゃん憲法)’라고 불렀다.

1965년 11월 30일에는 남동생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왕자가, 1969년 4월 18일에는 여동생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가 태어났다. 3남매 모두 부모의 곁에서 자랐으나, 나루히토 왕자는 두 동생보다 더욱 엄격하게 교육되었다. 맏이이고, 장남이며, 무엇보다 장차 왕위를 계승할 아이였기 때문이다.

학업[편집 | 원본 편집]

전통적 왕실학교인 가쿠슈인에서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모두 졸업했다. ‘왕족이 다니는 학교는 가쿠슈인’이라는 법은 패전 이후로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관례대로 왕족들은 모두 가쿠슈인에서 공부했다. 나루히토 왕자도 가쿠슈인 유치원, 초등과, 중등과(남중), 고등과(남고)를 거쳐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했다.

학부를 졸업한 후로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유학했다. 어느 곳에 가더라도 모두 나루히토 왕자를 알아보고 깍듯이 왕족으로 받들었던 일본에서와 달리, 영국에서는 평범한 학생처럼 생활할 수 있었다. 나루히토 왕자는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며 손수 방을 청소하고, 스스로 필요한 물건을 구입했고, 자유로이 외출도 했다.[3] 해외유학을 통해 나루히토 왕자는 한층 더 성장했고, 그의 시야는 더욱 넓어졌다. 귀국해서는 가쿠슈인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했다.

왕세자 책봉과 결혼 상대 물색[편집 | 원본 편집]

1989년, 할아버지 히로히토 일왕이 죽고 아버지 아키히토 왕세자가 새 일왕으로 즉위했다. 어머니 미치코 왕세자비왕비가 되었다. 2년 후인 1991년 2월 23일, 31세 생일을 맞은 나루히토 왕자는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그와 나란히 왕세자비로 책봉된 여인은 없었다. 당시 일본인들의 평균적인 결혼 연령이 20대 중반이었음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결혼이 늦은 셈이다. 특히 나루히토 왕세자는 장래 일왕이 될 인물이기에, 그의 옆에서 왕세자비와 왕비의 역할을 수행할 아내도, 장차 대를 이을 아들도, 반드시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좀처럼 나루히토 왕세자와 결혼하겠다는 여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신붓감 후보로 거론된 여성들은, 다들 서둘러 다른 남성과 결혼해버리거나 외국으로 떠나버리기 바빴다. 시대가 바뀌고 문화도 바뀌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왕족과의 결혼을 선망하지 않게 되었다. 새장 안의 새처럼 언제나 모든 사람들로부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생활, (미치코 왕비의 사례를 통해 더욱 잘 알려진) 왕실의 독한 시집살이,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만 한다는 압박감 등등 때문이었다. 특히 장래 왕비가 될 왕세자비의 자리는 왕실의 종부(宗婦)로, 차남 이하 왕자비나 방계 왕자비보다 더욱 많은 주목을 받으며 부담스러운 위치였다.

나루히토 왕세자의 남동생인 후미히토 왕자는 이미 25살이 되던 해인 1990년에 가쿠슈인대학 1년 후배인 가와시마 키코와 결혼, 이듬해에는 첫째 마코 공주까지 낳았다. 본래 형이 먼저 결혼하는 것이 순서이며 법도이고, 그래서 대학 2학년이던 1985년부터 키코와 사귀고 있었던 후미히토 왕자도 형이 먼저 결혼하길 기다렸지만, 좀처럼 형수를 맞이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결국 관례를 깨뜨려버린 것이다. 후미히토 왕자도 그것을 의식한 듯, 기자회견에서 “형은 아직도 아내가 없다”는 발언을 했다.

결혼하면서 분가(分家)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려 가장(家長)이 된 후미히토 왕자는 ‘아키시노노미야’라는 궁호를 새로 받아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가 되었고, 후미히토 왕자와 그의 처자식은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로 불리게 되었다.

오와다 마사코와의 만남과 청혼[편집 | 원본 편집]

사실 나루히토 왕세자에게도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외교관 오와다 마사코였다. 1963년 12월 9일 도쿄에서 태어난 마사코는 외교관 오와다 히사시(小和田恒)의 3녀 중 장녀로,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소련스위스미국 등에서 성장했다. 이후 일본으로 귀국하여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고등학교 1학년 때 다시 미국으로 떠났고, 벨몬트(Belmont) 고등학교를 거쳐 하버드대학교에 진학, 경제학을 전공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미국에서도 좋은 기회가 많았지만, 어려서부터 외국에서 오래 생활했던[4] 마사코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어서 다시 일본으로 귀국하여 도쿄대학 법학부에 편입했다. 도쿄대에서 공부하던 그녀는 ‘아버지처럼 외교관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고, 열심히 공부하여 1986년 외무고시에 합격했다. 당시 여성 외교관이란 희귀한 존재였고, ‘부녀(父女) 외교관’은 더욱 희귀했기에, 많은 언론들이 마사코에게 주목했다.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23세의 마사코는 당차게 대답했다.

일본에서도 남녀가 차별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본을 남녀차별이 없는 나라로 만들고 싶습니다.

또한 “일과 가정을 어떻게 병행할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마사코는 “일하면서 가정도 꾸리고 싶지만, 2가지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면 일을 택하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마사코가 외교관이 된 1986년, 스페인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의 장녀인 엘레나 공주가 일본을 방문했다. 신입 외교관이자 엘레나 공주와 동갑내기인 마사코도, 아버지 히사시와 함께 환영 만찬회에 초대되었다. 이 자리에는 히로히토 당시 일왕의 장손인 나루히토 왕자도 참석했고, 그는 마사코에게 그야말로 첫눈에 반해버렸다. 이전부터 그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성을 좋아했고, 자신과 함께 왕세자비와 왕비의 역할을 수행할 여성은 공식석상에서 외국인들도 많이 만나게 될 테니 외국어 실력이 뛰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사코는 이러한 조건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나루히토 왕자는 자신의 모든 인맥과 경로를 동원하여 마사코에게 연락하며 구애했다. 하지만 갓 외교관이 된 마사코의 관심사는 오직 외교 업무뿐이었고, 일을 그만두고 왕실로 시집가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었기에, 그의 구애를 거절한다. 그리고 얼마 후 마사코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2년간 공부하고 귀국한다.

그동안 왕실과 궁내청에서는 나루히토 왕자를 결혼시키기 위해 애썼고, 마사코 외의 다른 여성들도 물색하여 소개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나루히토 왕자는 미혼인 상태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마사코를 잊지 못했고, 마사코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기를 반복하며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다가 아키히토 일왕의 사촌동생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의 집에서 열린 모임에서, 나루히토 왕세자는 마사코와 재회하게 된다. 그리고 평소 내성적이던 그답지 않게 “반드시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고 거듭 청혼하며 끈질기게 매달렸다.

하지만 마사코는 여전히 외교관의 길을 계속 걷고 싶었기에 망설였다. 그러자 왕실과 궁내청에서는 “왕세자비가 되어서도 해외순방, 왕실외교, 대외활동 등의 보람찬 일들을 수행하며 나라에 공헌할 수 있다.”라며 그녀를 설득했고, 결국 그녀는 외교관을 그만두고 1993년 왕실에 입성한다. 나루히토 왕세자가 마사코에게 반해 청혼을 시작한 지 무려 7년 만이었다.

고통 받는 아내[편집 | 원본 편집]

일본 왕실궁내청에서는 노총각 나루히토 왕세자를 하루빨리 장가보내기 위해 애썼고, 나루히토 왕세자는 그토록 사모하던 마사코와의 결혼에 성공했지만, 마사코 왕세자비는 보수적인 왕실의 입맛에 맞는 며느리가 아니었다.

마사코 왕세자비가 기자회견에서 나루히토 왕세자보다 고작 19초 더 길게 이야기한 것도,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분명히 이야기한 것도, 일본에서는 비난거리가 되었다. “왕세자가 3마디를 말하면 왕세자비는 1마디만 해야 한다”거나, “이렇게 남편을 깎아내리고 남편보다 설쳐대서는 안 된다”라는 등등의 전근대적이고 남존여비적인 잣대들이 마사코 왕세자비를 검열했다. 특히 그녀는 오랫동안 서양 문화권에서 성장하여 개방적이고 현대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했기에, 이러한 일본 문화와 더욱 많이 부딪히며 혼란스러워했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결혼을 앞둔 소감을 묻는 질문에 “온 힘을 다해 마사코를 지키겠습니다!”라고 선언했지만, 그의 사랑만으로는 아내를 향한 공격들을 완벽하게 막아낼 수 없었다.

결혼 이듬해인 1994년과 그 이듬해인 1995년, 왕세자 부부는 중동의 여러 나라들을 순방했다. 이곳에서 마사코 왕세자비하버드대학교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공부한 경험, 유럽미국에서의 오랜 생활, 다양한 외국어 실력, 전직 외교관 출신다운 외교적 지식과 예법 등의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나루히토 왕세자도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여 가진 기자회견에서 “왕세자비가 이번 순방을 정말로 잘 해냈습니다.”라고 말하며 아내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왕실에서 마사코 왕세자비에게 가장 기대하는 것은 ‘아들 출산’이었다. 그리고 왕실에서는 남편보다 더 돋보이는 아내를 원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남편을 보필하고 내조하며 복종하는 아내’만을 바랐다. 이후로 왕실에서는 임신 준비를 위하여 마사코 왕세자비의 해외순방을 자제시켰다. 그러나 왕세자 부부는 좀처럼 아이를 갖지 못했다. 불임의 원인은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있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었으나, 비난의 화살은 마사코 왕세자비에게만 쏟아졌다. 그러한 비난과 함께 유산을 반복하면서, 마사코 왕세자비의 심신은 병들어갔다.

그러다가 2001년 초반에 마사코 왕세자비는 다시 임신했고, 2001년 12월 1일 궁내청병원에서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낳았다. 왕세자 부부가 결혼 8년 만에 마침내 아이를 낳았지만 공주에게는 왕위 계승권이 없기에, 일본에서는 아이코 공주의 탄생을 축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왕자가 아님을 아쉬워했다. 아키히토 일왕 내외도 마찬가지였다. 손녀를 보아 기뻐하면서도, 오래지 않아 “다시 임신해서 아들을 낳아라”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나루히토 왕세자는 “아이코 공주가 3살이 될 때까지는 기다려 달라”고 청했다. 아내의 심신 회복에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갓 태어난 딸에게 충분한 관심과 애정을 쏟아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씻기고, 놀아주는 등등 손수 육아를 했는데, 이는 일본의 남성 왕족으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행보였다.

마사코 왕세자비는 여전히 왕실에서 힘들어했다. 그러다가 2004년 여름, 나루히토 왕세자는 기자회견에서 충격적인 발언을 한다. 예정 시간보다 30분 늦게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그의 입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왕실에 마사코 왕세자비의 경력과 인격을 부정하는 의견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러한 의견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해 추론했다. 왕실에서 왕세자비의 경력과 인격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란, 일왕 내외밖에 없을 것이 분명했다. 즉 나루히토 왕세자의 발언은 시부모(일왕 내외)와 큰며느리(마사코 왕세자비) 사이의 갈등을 드러내고 인정한 것이며, 또한 왕실의 수장이자 아버지인 아키히토 일왕에게 반발한 것이었다. 이는 위계와 효를 강조하는 동양 문화에 어긋나는 행위이자 하극상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궁내청에서는 즉시 나루히토 왕세자의 발언을 진화하고자 애썼고, 나루히토 왕세자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도 “형님은 그런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부모님과 상의했어야 한다.”라며 비판했다. 후미히토 왕자는 차남이라 의무와 부담감도 덜했고, 이전부터 부모의 비위도 잘 맞추어, 왕세자 부부와 달리 일왕 내외와 원만하게 지내고 있었다.

마사코 왕세자비우울증, 적응장애, 대상포진 등의 각종 병으로 인하여, 2003년 무렵부터 공식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왕세자궁에 칩거하며 요양하기 시작했다. 일본 왕실, 궁내청, 우익들과 여론은 그녀를 ‘세금으로 놀고먹는 세금도둑’이라며 비난했다. 어렵게 얻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에 대해서도 ‘자폐아가 아니냐?!’는 악의적인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에 나루히토 왕세자는 그러한 헛소문을 잠재우고자, 3살배기 아이코 공주가 부모와 활발하게 뛰어노는 장면을 손수 촬영하여 공개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평일 대낮에도 아기와 놀아줄 수 있는 아버지’와 ‘우울증을 이유로 몇 년이고 휴식할 수 있는 어머니’라며 왕세자 부부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던졌다.

한편 2002년에는 나루히토 왕세자와 친했던 5촌 당숙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왕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노리히토 왕자는 경직되고 보수적인 분위기의 일본 왕실에서 드물게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품으로, 2002 한일 월드컵 당시에는 아내 히사코 비와 함께 한국을 방문하여 그때의 견문을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5촌 당숙이라지만 나루히토 왕세자보다 고작 6년 연상(1954년생)이라 어른이라기보다 형님 같았던 노리히토 왕자가 사망함에 따라, 왕세자 일가의 의지처가 하나 더 줄어들었다. 노리히토 왕자의 소생으로는 1986년생인 장녀 쓰구코 공주, 1988년생인 차녀 노리코 공주, 1990년생인 3녀 아야코 공주가 있고, 아들은 없다.

여왕 허용론과 조카 히사히토 왕자의 탄생[편집 | 원본 편집]

불임으로 고생하던 왕세자 부부가 어렵사리 딸을 낳자, 일본에서는 아쉬워하기도 했지만 이내 ‘여왕 허용론’도 등장했다. 왕세자 부부가 다시 아이를 낳을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였고, 그렇다고 방계에 왕자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1965년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가 태어난 이래로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가 태어난 2001년까지, 일본 왕실에서는 줄줄이 공주들만 9명이 태어났다. 후미히토 왕자도 딸만 2명 낳았다. (1991년생인 큰딸 마코 공주와, 1994년생인 작은딸 카코 공주.) 만약 여왕이 허용되면 아이코 공주가 아버지 나루히토 왕세자에 이어 계승서열 2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왕 허용론은 만만치 않은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궁내청 장관 유아사 토시오(湯淺利夫)는 2003년의 기자회견에서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둘째를 어서 빨리 낳길 바랍니다.”라거나, 후미히토 왕자에게 “셋째를 낳았으면 좋겠습니다. 두 공주와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 가능한 한 빨리 셋째를 가져야 합니다.”라고 발언했다. 물론 장관이 왕족들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과 소망을 기자회견에서 마음대로 떠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고 불가능한 일이니, 당연히 아키히토 일왕 부부가 장관의 입을 빌어 자신들의 소망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빨리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둘째’와 ‘셋째’는 당연히 ‘공주’가 아닌 ‘왕자’였다. 그러나 마사코 왕세자비우울증, 적응장애, 대상포진 외에도 아이코 공주를 가지기 전까지 인공수정 시술과 유산을 반복하여 건강이 매우 나빴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아이코 공주가 3살쯤 되면 둘째를 가지고 싶었던 듯하지만, 결국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때문에 ‘여왕을 허용하자’는 의견도 나름대로 논의되었다. 아키히토 일왕의 셋째 숙모인 키쿠코 비는 “여자의 왕위 계승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견해를 공식적으로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녀는 “옛날에도 여왕들이 많았으니 이상할 것이 없다.”는 근거를 들었다. 왕실의 나이 많은 어른이 이렇게 주장하자 제법 권위가 실리는 듯도 했으나, 여왕 허용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키쿠코 비는 ‘(아버지로부터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여자 일왕’을 찬성한 것이지, ‘(어머니로부터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여계(女系) 일왕’을 찬성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석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고수했다. 그리고 키쿠코 비는 2004년 향년 93세로 사망했다.

그러던 2006년 초반에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 내외가 ‘셋째를 임신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9월 6일에 히사히토 왕자가 태어났다. ‘41년 만의 왕자 탄생’에 왕실과 궁내청뿐 아니라 일본 전역이 열광했고, ‘여왕 허용론’은 잠잠해져 버렸으며, 아키시노노미야 일가가 각광을 받으며 왕세자 일가는 찬밥이 되어버렸다. 후미히토 왕자 내외는 ‘효자’요 ‘효부’이자 ‘부지런히 공무에 임하는 모범적인 왕족’으로 칭송을 받았고, 어려서부터 귀여움을 받았던 큰딸 마코 공주와 작은딸 카코 공주는 자라면서 점점 더 예뻐지는 외모 덕분에 인기가 높아졌다. 귀한 남자아이인 히사히토 왕자야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배경에 힘입어, 후미히토 왕자는 히사히토 왕자를 낳은 후부터 더욱 욕심을 부리며 나루히토 왕세자와 대립각을 세웠다. 후미히토 왕자는 ‘일왕 정년제’를 제안하며, 왕위에 오르고 싶다는 야망을 주저하지 않고 드러냈다. 우익 세력과 궁내청도 후미히토 왕자의 편이었다. ‘대를 이을 아들도 없고, 아프다며 요양만 하고 있는 왕세자비가 장래 왕비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니, 나루히토 왕세자는 퇴위하라’며 공격했다. 2013년에는 야마오리 데쓰오(山折哲雄)라는 원로 종교학자가 월간지 <신초(新潮)> 3월호에 ‘왕세자 전하, 나라와 왕실을 위해 퇴위하십시오!!’라는 내용의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글을 쓰기도 했다.

사방으로 공격을 받고 있던 나루히토 왕세자 내외의 유일한 즐거움은, 무남독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기르는 것뿐이었다. 2006년 가쿠슈인 유치원에 입학한 아이코 공주는 2008년 가쿠슈인 초등과로 진학하여 1학년을 무사히 마치는가 싶었지만, 2~3학년 무렵 짓궂은 남자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여 한동안 등교하지도 못하며 힘들어했다. 칩거하고 있던 마사코 왕세자비가 매일같이 손수 아이코 공주를 등하교시키고 수업을 참관하는 등의 노력을 하여 아이코 공주는 점차 좋아졌고,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공부에 재능을 보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반전(反轉)[편집 | 원본 편집]

그러나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 일가의 인기도 영원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점차 오만방자해졌다. 후미히토 왕자의 아내 키코 비가 시종들을 마구 함부로 대한다는 일명 갑질 논란이 불거졌고, 3남매 모두 부정입학 의혹이 있다. 후미히토 왕자가 학창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그의 자녀들도 공부를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다들 명문학교에 거뜬히 합격했기 때문이다. 자녀들뿐 아니라 키코 비의 학력에 대해서도 수상쩍은 구석이 있다. 그녀는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박사논문을 일절 공개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2017년부터 시작된 장녀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도,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이미지를 크게 하락시켰다. 2017년 마코 공주는 약혼 발표 기자회견을 했는데, 상대 남성은 국제기독교대학에서 캠퍼스커플로 만난 동갑내기 코무로 케이(小室圭)였다. 세간은 마코 공주와 케이를 축복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와 코무로 일가에 대한 온갖 좋지 못한 사정들이 폭로되었다. 그럼에도 마코 공주는 케이와의 결혼을 고집했고, 그녀에 대한 대중의 시선은 차가워졌다. 그녀뿐 아니라 큰딸을 말리지 못하는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비, 그리고 언니를 두둔하고 나서는 카코 공주, 아직 어려서 큰누나의 결혼 문제에 개입하지는 못하지만 자라면서 점점 ‘누나들처럼 부정입학을 했고, 학업성적도 인성도 좋지 못하다’는 소문이 도는 히사히토 왕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코 공주는 결국 케이와 결혼하여 왕족 신분을 잃고 평민 코무로 마코가 되었지만, 결혼 이후의 생활에 대해서도 여전히 특혜 의혹과 잡음들이 많다.

한편 가쿠슈인 여자중등과에 이어 가쿠슈인 여자고등과로 진학한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는, 건강 문제를 이유로 결석은 잦았지만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여 호평을 받았다. 도쿄대학 합격도 가능할 정도라고 알려져, 사람들은 딸을 우등생으로 길러낸 왕세자 부부를 칭송했다.

다만 외부 대학에 진학했다가 문제가 되었던 사촌언니 코무로 마코의 사례와 ‘일왕의 유일한 자녀’라는 상징성 때문에, 아이코 공주는 외부 대학 대신에 가쿠슈인대학으로 진학했다. 2024년 3월 대학을 졸업한 후로는, 어머니 마사코 왕비가 명예총재로 재임하고 있는 일본적십자사에서 비상근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왕족으로서의 공무도 수행하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의 생전퇴위와 나루히토 왕세자의 즉위[편집 | 원본 편집]

그러던 중, 아키히토 일왕은 “생전에 국왕 직분을 그만두고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양위하겠다.”고 발표했다. 본래 일왕은 종신직이고, 일왕이 사망한 후에야 왕세자가 계승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으나, 아키히토 일왕은 오랜 전통을 깨뜨리고 나루히토 왕세자를 다음 일왕에 앉힌 것이다. 그가 공식적으로 밝힌 생전퇴위의 이유는 ‘고령으로 인해 몸이 쇠약해졌고, 국왕이 사망한 후에 장례식과 왕세자의 즉위를 동시에 거행하려면 이것저것 번거롭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라, 차남을 견제하고 장남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의도도 있어 보인다.

2019년 아키히토 일왕이 퇴임하고 나루히토 왕세자가 새 국왕으로 즉위했다. 나루히토 일왕에게는 아들이 없기 때문에 남동생인 후미히토 왕자가 계승서열 1위인 ‘왕세제’로 책봉되었고, 후미히토 왕자의 아들인 히사히토 왕자는 계승서열 2위가 되었다. ‘왕위는 남계남자(男系男子)[5]가 계승한다’는 법이 여전히 그대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 하지만 후미히토 왕자 일가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고, 반면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는 점점 인심을 얻고 있기 때문에, 훗날 나루히토 일왕의 뒤를 이을 인물이 누구일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각주

  1. 첫 손주는 1945년 3월에 태어난 외손자 히가시쿠니 노부히코(東久邇信彦)로, 장녀 히가시쿠니 시게코의 장남이다. 노부히코는 2019년 사망했다.
  2. 말이 평민이지, 친가인 쇼다(正田) 가문은 어마어마한 재벌가이며 외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옛 화족(백작) 가문이다.
  3. 물론 경호원들이 눈에 띄지 않게 따라다니며 경호했지만.
  4. 이러한 사람을 일본에서는 ‘귀국자녀(歸國子女)’라고 부른다. 외국에서 태어나거나 어린 시절 외국으로 떠나, 외국에서 성장한 사람을 가리킨다.
  5. 아버지로부터 왕족의 혈통을 물려받은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