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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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200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차 지명을 받으며 입단했다. 김회성이 1차 지명을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는 아니었고, 고졸이 아닌 대졸 선수라 군 문제가 걸려 있었지만 당시 한화의 연고지인 충청도 팜에서 뚜렷히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가 없었던 데다가<ref>북일고에 [[고원준]]이 있긴 했지만 전학생이라 1차 지명이 불가능했다.</ref> 주전 3루수 이범호가 1년 뒤 FA로 해외진출할 것이 유력시되었기에 한화는 김회성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200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차 지명을 받으며 입단했다. 김회성이 1차 지명을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는 아니었고, 고졸이 아닌 대졸 선수라 군 문제가 걸려 있었지만 당시 한화의 연고지인 충청도 팜에서 뚜렷히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가 없었던 데다가<ref>북일고에 [[고원준]]이 있긴 했지만 전학생이라 1차 지명이 불가능했다.</ref> 주전 3루수 이범호가 1년 뒤 FA로 해외진출할 것이 유력시되었기에 한화는 김회성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회성은 프로의 벽을 체감하기도 전에 온갖 부상에 시달린다. 합류 직후 연습경기에서 손가락 뼈 골절상을 입었고, 해가 바뀐 후 스프링캠프에서는 손목을 맞으며 제대로 훈련을 소화하지 못했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잔부상들을 많이 입어 몸 상태가 성치 않았는데 이범호가 09시즌 초반 부상을 입으면서 1군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부상의 여파인지 28타수 4안타(0.143)에 3루를 한화 내야의 구멍으로 만들어버리는 최악의 수비력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2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김회성은 프로의 벽을 체감하기도 전에 온갖 부상에 시달린다. 합류 직후 연습경기에서 손가락 뼈 골절상을 입었고, 해가 바뀐 후 스프링캠프에서는 손목을 맞으며 제대로 훈련을 소화하지 못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잔부상들을 많이 입어 몸 상태가 성치 않았는데 이범호가 09시즌 초반 부상을 입으면서 1군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부상의 여파인지 28타수 4안타(0.143)에 3루를 한화 내야의 구멍으로 만들어버리는 최악의 수비력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2군으로 내려갔다.


2010시즌에는 아예 스프링캠프에 합류조차 하지 못했고 이범호가 떠난 3루 자리를 [[송광민]]이 차지하면서 1군에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그러다 송광민의 시즌 중 입대라는 파동 속에 급히 1군에 콜업되었으나 '''17타수 무안타'''(0.000)에다가 전년보다 더 나빠진 수비력으로 팬들의 원성만 사야 했다. 잔부상이 있긴 했다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안 좋은 경기력이었다.
2010시즌에는 아예 스프링캠프에 합류조차 하지 못했고 이범호가 떠난 3루 자리를 [[송광민]]이 차지하면서 1군에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그러다 송광민의 시즌 중 입대라는 파동 속에 급히 1군에 콜업되었으나 '''17타수 무안타'''(0.000)에다가 전년보다 더 나빠진 수비력으로 팬들의 원성만 사야 했다. 잔부상이 있긴 했다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안 좋은 경기력이었다.

2015년 7월 20일 (월) 21:57 판

한화 이글스의 선수. 포지션은 3루수. 이범호를 대신할 3루 거포자원으로 영입하여 군 제대 후 서서히 그 빛을 보고 있는 선수이다.

아마~2011시즌

속초상고를 다니다 청주 세광고로 전학했으나 고교 졸업 직후에는 주목받지 못했고 이후 경성대학교로 진학한다. 경성대 3학년 시기 본격적으로 거포 본능을 보여주는데 2007년 대학리그 홈런 부분에서 11개를 기록한 나지완을 이어 7개로 2위를 기록했고, 대통령기에서는 3연타석 홈런을 몰아치며 스카우터들을 놀라게 했다. 그만큼 파워는 확실했으나 문제는 컨택과 선구안으로 2할 초반대 타율을 보여주어 반신반의하게 만들었고, 4학년(2008년)때는 홈런도 크게 감소했다.

그럼에도 200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차 지명을 받으며 입단했다. 김회성이 1차 지명을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는 아니었고, 고졸이 아닌 대졸 선수라 군 문제가 걸려 있었지만 당시 한화의 연고지인 충청도 팜에서 뚜렷히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가 없었던 데다가[1] 주전 3루수 이범호가 1년 뒤 FA로 해외진출할 것이 유력시되었기에 한화는 김회성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회성은 프로의 벽을 체감하기도 전에 온갖 부상에 시달린다. 합류 직후 연습경기에서 손가락 뼈 골절상을 입었고, 해가 바뀐 후 스프링캠프에서는 손목을 맞으며 제대로 훈련을 소화하지 못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잔부상들을 많이 입어 몸 상태가 성치 않았는데 이범호가 09시즌 초반 부상을 입으면서 1군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부상의 여파인지 28타수 4안타(0.143)에 3루를 한화 내야의 구멍으로 만들어버리는 최악의 수비력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2군으로 내려갔다.

2010시즌에는 아예 스프링캠프에 합류조차 하지 못했고 이범호가 떠난 3루 자리를 송광민이 차지하면서 1군에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그러다 송광민의 시즌 중 입대라는 파동 속에 급히 1군에 콜업되었으나 17타수 무안타(0.000)에다가 전년보다 더 나빠진 수비력으로 팬들의 원성만 사야 했다. 잔부상이 있긴 했다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안 좋은 경기력이었다.

2011시즌에는 어깨 부상으로 2년 연속 스프링캠프에 참가하지 못하여 몸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고 시즌 중반까지 이여상오선진이 3루를 두고 경쟁하면서 1군에서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오선진이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3루 백업을 위해 1군에 콜업되었으나 수비면에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던 이여상보다 더 좁은 수비력, 부상으로 인한 소녀어깨에 기인하는 송구력, 타구판단능력 부족 등이 결합되면서 여전히 최악의 수비능력을 보여주었다. 가끔 3루 외에 1루수로 출장하기도 했는데 수비판단 안되는 건 마찬가지여서 6월 7일 LG 트윈스전에서 평범한 내야땅볼을 잡고 송구를 안하는 본 헤드 플레이로 팀 패배에 일조했다.

그래도 09, 10시즌에 비해 11시즌은 김회성이 기회를 많이 부여받은 해로 8월 3일 두산 베어스전에서 프로데뷔 첫 홈런을 쏘아 올렸다. 49타수 5안타(0.143)를 기록했는데 7개의 안타 중 홈런 2개, 2루타 3개로 배트에 공이 맞기만 하면 장타로 연결되었다. 문제는 배트에 공을 맞추지 못한다는 점(...)인데 워낙 선구안이 안 좋다 보니 컨택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군 복무 및 제대 이후

이후 군 문제 해결을 위해 경찰로 입대, 경찰 야구단으로 활동하며 2군을 초토화시킨후 2014시즌에 팀에 복귀했다. 경찰 시절 대활약으로 거포 포텐이 터지는 것 아니냐는 기대를 많이 받았고 실제 시즌 중반까지는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번엔 허리 부상으로 6월에 1군에서 말소(...)되었다. 59경기 출장해서 140타수 33안타(0.236)로 컨택면에서 매우 일취월장1할 초반에서 2할 초반으로 1할 가까이 올렸으니 일취월장이다. 아 현기증....했고 홈런 6개 2루타 8개 3루타 1개로 높은 장타력도 유지했다. 수비면에서도 주전 3루수로 쓰기엔 부족하지만 입대 전보단 확실히 나아졌다고 모두들 인정하는 부분.

14시즌 종료 후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면서 마무리캠프 및 스프링캠프에 동행했다. 그리고 김성근으로부터 신나게 펑고를 받으며 구르고 또 굴렀다.(...) 그만큼 김성근 감독은 김회성에게 큰 기대를 걸었고 때문에 주전 3루수 경쟁에서 보다 유리하던 송광민을 외야수로 컨버전시키면서까지 김회성을 주전 3루수로 키우고자 했다.

덕분에 2015시즌 초반 상당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작년과 비슷한 수준의 타율과 장타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수비면에서는 타구판단이나 강습타구 캐치 등에선 뛰어나지만 상황에 따른 유연한 대처법이 부족하다. 예를 들어 1사 1, 3루서 3루수 땅볼을 잡은 후 홈승부를 선택, 아웃시켰다. 경기 후반도 아니고 초반이어서 1점 내주고 병살을 잡는 게 더 나을 법 한데 홈승부로 3루 주자만을 아웃시켰고, 이후 투수는 다음 타자들에게 신나게 두들겨맞는다거나... 타격 부분에서는 2할 초반대의 타율을 기록하곤 있지만 문제는 득점권 타율로 득타율이 1할 초반이며 홈런도 대부분 솔로 홈런이다.정현석이 아프니 김회성이 득병을 대신한다.

  1. 북일고에 고원준이 있긴 했지만 전학생이라 1차 지명이 불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