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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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佐鎭.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 이명은 김사진(金砂鎭).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가계와 초년기[편집 | 원본 편집]

1889년 11월 24일 충청도 홍주목 고남하도면 행촌리(현재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신기마을)에서 부친 안동 김씨 김형규(金衡圭)와 모친 한산 이씨 이상희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1대조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문충공 김상용(金尙容)이고, 10대조는 수북공파의 시조인 김광현(金光炫)이다. 김광현은 인조반정 이후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소현세자의 장례를 치를 때 "의관이 치료를 잘못하여 세자가 죽었으니 벌 줘야 한다"라고 주장했다가 인조로부터 세자빈 강씨의 집안 사람이자 김광현의 사위인 강문명(姜文明)의 사주를 받고 그런다며 질책받고 순천부사로 좌천되었다. 그후 김광현은 홍주에 내려와 거주하면서 세거하였고, 후손들은 그의 호를 따서 안동김씨 수북공파라 하였다.

김좌진의 고조부인 김장순(金章淳)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도정(都正: 종실, 왕친, 외척에 관한 사무를 맡은 정3품 당상관)을 지냈고, 4대조 김낙행은 형조정랑, 5대조 김리진(金履稹)은 장성부사를 지냈다. 김좌진의 집안은 3대조 김윤근(金潤根) 이래로 벼슬 살이를 하지 못했지만, 대대로 관료 집안과 혼인관계를 지냈다. 부친 김형규의 장인은 도사(都事: 중앙과 지방 관청에서 사무를 담당한 관직)를 역임했으며, 처증조부는 대사간(大司諫: 조선시대 간쟁, 논박을 맡았던 사간원의 으뜸벼슬)이었다. 또한 조부 김윤근의 장인도 참봉이었고, 처조부는 군수였다. 이는 김좌진의 집안이 김상용의 후예로서 명망이 높았고, 홍주에서 많은 토지와 재산, 노비를 소유한 부호였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동 김씨 수북공파로서 김좌진처럼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로 의병장 김복한(金福漢, 1860~1924), 김덕진이 있었으며,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도 이 가문 출신으로, 김좌진과는 생가로 11촌, 양가로 19촌이었다. 김좌진은 3살 때 부친상을 당하여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고, 13살 되던 해에 형 김경진(金景鎭)이 한성부에 거주하는 15촌 지간의 족숙(族叔) 김덕규(金德圭)의 양자가 되어 한성부로 가면서, 그가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집안 살림을 떠맡았다. 친동생으로 김동진(金東鎭, 1891~1938)이 있었는데, 훗날 형과 함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김좌진은 유년시절 글공부보다는 활쏘기, 말타기, 병정놀이를 즐겨했는데, 동네 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할 때는 항상 대장노릇을 했으며, 대장기에 '억강부약(抑强扶弱: 강자를 억누르고 약자를 돕는다)'이라고 적었다고 한다. 또한 동아일보 1930년 2월 15일자 기사 <경술정변에 불평품고 광복단 박상진(朴尙鎭)과 관계>에 따르면, 그는 서당에서 통감(通鑑)을 배우던 중 항우가 "글은 자기 이름을 쓰는 것으로 족하다"라고 말한 구절을 보고 무협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중외일보> 1930년 2월 15일자 기사 '15세에 집안의 종들을 자유 해방, 장서(長逝)한 김좌진 일생'에 따르면, 김좌진은 어릴적에 통감, 소학을 보자마자 삼국지, 수호지, 손오병서 등 어디까지나 무예 닦기에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의협심도 강해서 밥나눠먹기, 헐벗은 사람 옷 나눠주기를 일수로 하였다고 한다. 중외일보는 1930년 2월 17일자 '창검을 비켜들고 광야에 나서보니'에서 김좌진의 용력에 관한 일화를 소개했다.

그가 처음 경관에게 포박될 때에 경관 십여 명이 달려들어 포승으로 꼼짝할 수 없게 묶어놓았는데, 그는 포악한 경관대에 대항하여 혼연한 태도로 웃음을 던지고 "나는 이렇게 묵지 않아도 달아날 바 없다"고 하면서 한 번 기운을 쓰매 묶었던 포승이 낱낱이 끊어져서 경관대들도 하는 수 없이 그대로 호송하였다. (중략) 어느 날 감옥에서 쌀 가마니를 운반하는데 한 손에 쌀 한 섬씩을 삽시간에 옮기는 것을 곁에서 감독하면서 보았던 간수가 그것에 감복하여 감옥에서 나온 후 그의 부하가 되었다.

홍성군에서 발간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장군 전기>에 따르면, 김좌진은 또래 아이들보다 몸집이 컸고 괴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동전 3개를 포개놓고 한 손으로 구부릴 정도로 압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또한 어려운 친구나 걸인을 만나면 가진 것을 내어줬고, 가노의 자식들과 격의없이 지내서 문중 어른들에게 야단맞자 "종과 양반의 씨가 따로 있느냐"라고 항변해 문중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고 한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일단 시작하면 포기하는 일이 없었고, 어떤 꾀를 내어서라도 꼭 이루고야 마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는 상당한 개구쟁이었던 모양이다. 전기에 따르면, 매번 무기를 발명해서 사용했고, 그것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행인에게 부상을 입히는가 하면, 그 파편이 산으로 날아가 온 산에 불을 낸 적도 있다고 한다. 검술 연마를 한다며 소작인들의 농작물에 칼침을 내기도 하고, 전춘(餞春) 놀이를 갔다가 인근 절에 소장된 나한상이 자기를 노려보는 것 같다며 몰래 갖고 나와 집어 던진 것이 하필 벌집에 떨어져 벌에 쐬어 기절하기도 하고, 그 때문에 수개월간 요양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렇듯 놀기만 좋아하고 공부를 게을리했으나, 모친과 조모는 집안에 단명한 사람이 많아서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좌진은 서당 훈장 송노암(宋老岩)이 실질보다 형식을 강조하고, 현학적이며, 매우 권위적인 태도로 학생들을 대하고, 글을 읽다 막히면 송시열이 자기 조상임을 내세우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학도들을 선동하여 수업 거부 운동을 전개했고, 결국 송노암은 훈장을 그만뒀다. 그러다 김좌진이 9살일 때, 김광호(金光浩)가 새 훈장이 되었다. 김광호는 광천 출신으로 학식과 덕망이 높았고, 보학(譜學)과 사마천의 <사기>에 밝았으며, 국사(國史)를 보는 눈과 시국에 대한 안목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김좌진에게 부친과 문중에서 회자되던 김옥균에 대한 질문을 던진 뒤, 김옥균의 인물됨과 행적, 개혁사상의 사회정치적 가치 등을 설명하며 세도정치의 폐해를 지적했다. 또한 인조반정 때 순절한 12대조 김상용의 행적을 거론하고, 국난기에 갖춰야 할 자세, 의리, 기개 등을 가르쳤고, 사기에 수록된 영웅호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사내다움과 호협의 참된 면모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했다고 한다.

김좌진은 이러한 스승의 가르침에 감화되어 학업에 재미를 붙였다. <통감절요>를 3개월 만에 독파했으며, 누구보다 먼저 서당에 가서 가장 늦게 나왔으며, 병정놀이를 관두고 서당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김광호의 조카 김석범(金錫範)이 서당을 찾아왔다. 그는 고향인 홍성군 갈산면을 떠나 여러 해 동안 한성부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계몽의식을 소유했다. 김좌진은 단발머리, 양복, 구두를 갖춘 김석범의 모습에 큰 호기심을 가졌다. 김광호와 김석범은 이양선의 출몰, 각종 불평등 조약의 체결, 세도정치, 김옥균과 갑신정변, 동학 농민 혁명, 을미사변, 청일전쟁, 삼국간섭, 을미사변, 아관파천, 독립협회, 일본의 근대화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흐름에 관해 논했다. 김좌진은 그들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으며 세상 공부를 했다. 김석범은 김좌진의 사내다움과 호협정신을 지극히 사랑하여 수시로 시국의 동향과 세계 정세 및 인접국의 동향에 대해 들려주곤 했다.

12~13세 되던 시기, 김광호가 개인적인 일로 훈장을 그만뒀다. 이에 김좌진은 갈산면 부춘리에 있는 김동익(金東益)의 부춘서당(富春書堂)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김동익은 유교의 교학과 예법에 밝았으며, 학생들에게 성균관의 진사들의 예법에 따라 서로 응대하도록 지도했다. 김좌진은 이때 유교의 예의범절을 익혔을 것이다. 그는 이 서당에서 <중용>, <논어>, <맹자>, <대학> 등을 1년만에 독파하고 <시전>까지 읽었다고 한다. 13세 때인 1902년 10월 2세 연상인 해주 오씨 오숙근과 결혼했다. 이때 장인인 오일영(吳鎰泳)은 김좌진이 악동이란 소문을 듣고 걱정이 많았지만, 직접 대해보니 소문만큼 과장된 것도 없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국내에서의 행적[편집 | 원본 편집]

김좌진은 집안의 노비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인 후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노비들에게 분배했다. 김좌진이 노비해방을 단행한 시기에 대해 동아일보 1930년 2월 14일자 기사에선 15세 때라고 하였고, 조선일보 1930년 2월 13일자 기사에선 16세라 하였으며, <고 김좌진선생 약력>에서는 17세 때라고 하였다. 이후 호명학교(湖明學校)의 설립에 참여하였고, 1907년경 부인 오숙근과 함께 한성부로 올라와 형 김경진의 집에 머물면서 무관학교에 재학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대한제국 무관학교에 재학한 것에 대해 논란이 있다.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이성우 교수는 <백야 김좌진의 국내민족운동>에서 다음 근거를 들어 김좌진이 무관학교에 입학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주장했다.

1. 김좌진의 장례식때 작성된 '고 김좌진선생 약력'에는 육군무관학교에 재학했다는 기록이 없다.


2. 국내신문들은 김좌진이 암살된 직후 그의 모든 이력과 일화들을 상세히 보도했지만, 육군무관학교에 다녔다는 경력은 보도하지 않았다. 단지 동아일보 1930년 2월 13일자 기사에서 ‘김경진씨의 집에 묵으면서 당시의 한국무관학교에 통학하야 열일곱 살 때 그 학교를 졸업하고’ 라고 짤막하게 언급했을 뿐이다.

3. 일제는 김좌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이력과 신체 특징 및 학식 등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겼지만, 육군무관학교 경력은 찾아볼 수 없다.

4.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는 1904년 9월 15일부터 18세부터 입학 가능하도록 규정했다. 김좌진이 무관학교에 입학하려면 18세가 되어야 했으나, 그가 18세가 되는 1907년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단행하면서, 무관학교는 더 이상 신입생을 받지 않았다.

반면 민황기, 손세제 청운대 교수는 <백야 김좌진의 민족의식과 국권회복운동>에서 "사관연성소를 설립하고 군사 경험이 거의 없는 민간인을 모집해 단기간의 속성 훈련을 거쳐 장교와 사병을 양성해서 일본 정규군과 전투를 벌여 승전했다는 것은, 김좌진에게 군사조련 능력과 군대 지휘능력이 있다는 것이니, 이런 능력은 무관학교 외에서는 얻을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서울에서 노백린, 이갑, 유동열, 윤치성 들과 교류하면서 군사학 방면의 지식을 얻었던 것만은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1] 한편, 그는 1907년경 김항규(金恒圭), 김홍진(金弘鎭)과 함께 자진하여 상투를 잘랐고, 1909년 2월과 4월 사이 기호흥학회 홍주지회에 가입하였다.홍주지회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이 시기에 홍성 지역의 학생들이 상경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송상도의 <기려수필>과 조선일보 1930년 2월 16일자 기사를 보면 서울에서의 활동에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좌진은 이밖에도 대한협회에 참여했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활동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며, 서울에서 교류하던 윤치성, 노백린, 유동열, 이갑 등이 신민회 인사였고, 신민회원 안창호 등이 설립한 오성학교에 관여했다는 기록[2]을 볼 때 신민회에도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한일병합이 임박하자, 그는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하기로 마음먹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먼저 서울에서 염직회사를 차리고자 농상공부에 청원을 냈지만 퇴짜를 맞았다. 1910년 7월 서울 관철동 대관원에 이창양행(怡昌洋行)이라는 회사를 차린 후,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준비하고자 전 군수 조종서, 이효직, 변규석, 박봉렵, 이승모 등과 논의했다.

그러나 사업 부진으로 자금 확보가 어려워지자, 1911년부터 안승구(安承龜)ㆍ민병옥(閔丙玉)ㆍ조형원(趙亨元)ㆍ김찬수(金燦洙) 등과 함께 서울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자금을 모금하려 하였고, 당시 서울 돈의동에 사는 김종근(金鍾根)을 찾아가 자금을 요청헀으나, 강도 미수죄로 체포되어 1911년 6월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때 토지 불법매각 사건이 발각되어 투옥된 전협과 서천군 재무주사로 있다 뇌물 수수 혐의로 7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최익환(崔益煥)을 만났다. 두 사람은 훗날 대동단을 결성하여 의친왕의 망명 시도를 지원했다. 동아일보 1930년 2월 13일자 기사에 따르면, 김좌진과 전협은 서대문형무소에서의 인연으로 결의형제를 맺었으며, 최익환과는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함께 활동했다고 한다.

출옥 후, 그는 생활고에 시달렸다. 1913년 11월 6일과 9일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김공유라는 뚜쟁이가 매춘을 하는 비밀 가옥에 김홍진을 불렀는데, 김좌진과 김홍진이 서로 돈 때문에 싸움이 났다고 한다. 이 기사는 11월 9일자 기사에 오보라고 정정되었지만, 훗날 김좌진을 비판하는 논거 중 하나가 되었다. 1915년 7월 9일 <매일신보> 기사 '가면교육가의 말로'에는 김좌진이 종로경찰서에 체포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삼청동 사는 김좌진이란 자는 기호흥학회 무슨 임원으로 일을 봏아 오던 터에 한참동안은 교육계에 이름이 없지 않더니. 그러나 김좌진이 강도죄로 징역까지 하고 나온 뒤로 일정한 직업이 없이 어떤 계집을 다리고 전동산해여관에 가서 거짓말로 주인을 속이고 터무니없이 몇 달을 무작정으로 먹고 있다가, 밥값이 심여 원에 달하였슴으로 먼저 계집은 도망을 시키고....

여기서 김좌진과 함께 거론된 '계집'은 정계월(鄭桂月)이라는 기생이다. 김좌진이 일전에 김종근에게 자금을 받아내려 갔다가 밀고를 당해 경찰의 습격을 받았을 때, 담을 넘어 그녀의 집에 숨었다. 정계월은 김좌진을 며칠간 숨겨줬고, 그 과정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매일신보 1915년 8월 1일자 기사 '대부랑 소부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훈동 사는 김좌진이란 자도 기존에 기호학회에서 무슨 장을 맡아서 지냈는데 역시 부랑에 빠져 남의 집 자제를 그른 지경으로 타락케 함이 한두 번이 아니오, 또 거즛 말로 남을 속여 낭패를 당케 한 것도 무수함으로 이것도 검거되어 구류 20일에 처하여 서대문 감옥으로 보내었다더라.

이에 대해 중외일보 1930년 2월 17일자 기사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의도적으로 김좌진을 '반강도(半强盜)'로 만들려 했다고 비판했다. 김좌진은 당시 대한광복회 임원으로 활동했으나 이러한 매일신보의 공격으로 국내에서 활동할 여지가 줄어들었다. 이에 만주로 일시 이동하여 1915년 12월경 만주 길림소재 광복회 부사령 이진룡의 후임으로 발탁되었다. 1917년 초 다시 국내로 들어와서 최익환, 이기필(李起弼), 감익룡(甘翊龍), 신효범(申孝範), 성규식(成奎植), 강석용(姜錫龍), 성욱환(成郁煥)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지만, 1917년 3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면소 방면되었다.[3]

김좌진은 무죄로 풀려난 뒤 지폐를 위조하는 방법으로 군자금 모집을 시도했다. 그는 1917년 음력 4월중 동지들과 함께 중국 안동현에서 유통되는 중국지폐를 위조하여 정화로 교환한 뒤 자금으로 사용하려 했다. 먼저 이기홍, 윤영상으로부터 570원, 이현삼으로부터 600원을 기계구입비 명목으로 자금을 제공받았다. 음력 6월 초 홍성에서 오영근, 홍상회로부터 600원의 자금 제공을 약속받았지만 결국 제공받지 못했다. 그러던 1918년 1월 박상진 등 광복단 임원들이 친일부호 원두평, 장승원을 살해한 혐의로 대거 체포되자 만주로 피신하였다.

만주에서의 독립운동[편집 | 원본 편집]

김좌진은 만주 길림으로 피신한 직후인 1918년경 대종교에 입교했으며, 1919년 3월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에 39명 중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 또한 서일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에 가담하였고, 대한정의단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되어 임시정부 산하의 대한군정서로 변모했을 때 총사령직을 맡았다. 참모장은 나중소, 연성대장은 이범석, 보병대대장은 김규식, 부관은 김옥현( 金玉玄), 중군장교엔 이민화, 김훈(金勳), 백종렬, 한건원 등이 맡았다. 김좌진은 1920년 2월초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고자 하였으며, 신흥무관학교의 도움으로 교관과 각종 교재를 지급받아 서대파 십리평 산림지대에 병영을 마련하고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사관연성소 총책임은 자신이 맡았고, 교관으로는 이범석, 김규식 등이 훈련을 담당했다.

사관연성소는 역사, 군사학, 병기사용법, 부대지휘법 등을 교육하였는데, 특히 민족정신 함양을 위해 역사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엄격한 군기와 규율 속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그 결과 1920년 9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300여 명의 교성대를 조직했다. 한편, 김좌진은 국내비밀결사인 광복단결사대와 암살단을 지원했다. 광복단결사대는 광복회에서 활동했던 한훈이 임시정부의 지원하에 1920년 4월 모병과 암살을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결사였고, 암살단은 김동순, 김상옥 등이 1920년 경찰서 파괴, 조선인 순사 및 친일조선인 처단, 조선인관리 퇴직강요 등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였다. 두 단체는 미국 의원단이 조선에 방한할 때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및 일제 관리들을 처단하고 폭탄을 이용해 관공서와 경찰서 등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김좌진은 대한군정서에 몸을 담기도 했던 김동순에게 무길를 제공했으며, 한훈 역시 거사에 사용할 무기를 대한군정서의 최우송으로부터 제공받았다.

김좌진은 주비단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주비단은 1920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이들은 만주 독립운동단체와의 연계를 통한 활동도 전개했는데, 그 연결고리는 김좌진이었다. 김좌진과 주비단의 연락은 주비단원으로 활동했던 김동진(김좌진의 친동생), 김성진(金聲鎭. 김좌진의 종질(從姪))․김준한(金畯漢: 김좌진의 9촌), 김시현(金始顯)이 맡았다. 김시현과 김준한은 1919년 9월 중 김좌진을 만나 권총 등을 수령하여 국내로 반입했으며, 주비단은 군정서 도장과 영수증을 근거로 자금을 모집하고 '대한독립군정서'라고 새겨진 인장을 찍은 사령장을 제작하기도 했다. 주비단 부사령이었던 안종운도 단원 모집시에 "길림에는 군정서도 나왔으므로 독립은 된다"고 할 정도로 김좌진과 주비단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던 1920년 6월 7일, 홍범도,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1개 대대와 맞붙었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고 독립군 섬멸에 실패했다. 대한군정서는 일본군이 곧 보복할 것을 예측하고, 이에 대응할 태세를 갖추었다. 1920년 7월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이용과 안정근이 연변에서 독립군 각 부대를 설득했을 때, 김좌진이 이에 호응하여 연합회의에 참석했다. 이후 홍범도 부대는 최진동 부대와 이탈하여 8월부터 명월구를 거쳐 어랑촌으로 이동하였고, 국민회의 안무 부대와 신민단, 한민회, 의민단도 곧 그곳에 도착했다. 대한군정서는 1920년 9월 9일 사관연성소 졸업식이 끝난 뒤 서일 총재를 비롯한 일부 유수부대만 남겨놓고 600여 명의 기본 부대를 2개 대대로 나눠서 9월 18일부터 연길현 삼도만 세린하, 장인강을 거쳐 10월 10일경 청산리 어구인 송월평에 도착했다. 그들은 거기서 홍범도의 의용군단, 국민회, 신민단, 한민회, 의민단 등과 함께 기지를 세워 일본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일본군은 10월 2일 '훈춘 사건'을 계기로 10월 12일 조선 주둔 19사단 37연단장 아즈마 소장이 영솔하는 73연대 3개 대대 기병 27연대의 2개 중대, 기관총 6개, 보병포 2개, 공병 대대 등의 병력을 이끌고 두도구로 침입하였다. 또 10월 13일에는 야마다 대좌가 인솔하는 보병 3개 중대를 주력으로 하는 일본군이 이도구를 거쳐 팔가자까지 진입했다. 대한군정서는 이에 맞서 싸울지 퇴각할지를 놓고 논의하다가 현천묵 등의 주장을 받아들여 후퇴하기로 결의하고, 당초 송월평에 기지를 건설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청산리골을 거쳐 연해주 방면으로 깊숙이 피난하기로 하였다.

1920년 10월 20일, 독립군은 청산리 오지에 위치한 백운평에서 노숙하였다. 다음날인 10월 21일 행군을 재개하였을 때, 일본 야마다지대 3개 중대 주력이 진입하였다. 이들은 백운평에 도착한 뒤 적군이 노숙하고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탐지하였다. 그리하여 야스가와 소좌가 인솔하는 1개 병력을 선두 부대로 추격하여 백운평에서 약 1천 미터 남짓 떨어진 지점에서 김좌진의 부대와 접전하였다. 당시 김좌진은 본부대는 계속 전진하고 적의 추격을 견제할 후속부대를 험준한 벼랑에 배치했다. 야스가와가 인솔하는 1개 중대는 대한군정서 후속부대를 상대로 오전 9시 30분경부터 약 30분간 이어진 총격전을 벌였다.

일본측 정보 기록에 따르면, 야마다 지대는 10월 19일 삼도구를 출발할 때 야마다 대좌가 인솔한 부대를 좌익으로 하여 청산리골로 직행하고, 나카무라 소좌가 인솔한 1개 대대를 우익으로 하여 봉밀구골로 들어가게 했다. 나카무라 소좌의 1개 대대는 봉밀구골에서 마적패와 교전한 뒤 20일 청산리골 안의 증봉리 부근에서 본대와 합류하였다. 이후 야마다 지대는 10월 21일 백운평에서 독립군과 9시 반부터 30분간 교전하였고, 오후 2시반까지 추격하여 연해주까지 갔지만, 독립군이 산림을 이용하여 빠져나가서 위치 확인에 실패하고 철군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는 1921년경 '백운평 전투'에 대해 국무원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제1연대장 홍범도는 기 부하 연대(6중대원)을 인솔하고 완루구 중앙 산록에 점위케 하고, 제2연대장 김좌진은 기 부하 연대(2대대원)을 이도구 좌편 고지에 점위케 하고, 제3연대장 최진동은 기 부하 연대(6중대원)을 인솔하고 이도구 우편 고지에 점위하야 은폐잠복하엿다가 아 후병이 항전하다가 패배를 가장하여 퇴각하면 적은 반드시 교만한 태도로 추격 수단을 취히리닌 기회를 실하지 말고 사격케 하라 하다.

김좌진의 제2연대는 백운평 전투 이후 어랑촌을 경유하여 새로운 탈출로를 모색하려 했다. 이때 천수평에서 숙영중인 일본군 기병부대를 발견하고, 그들이 소수이니 섬멸 후 어랑촌으로 이동하려 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천수평 전투에서 적 기병대를 격퇴하고 10월 22일 어랑촌으로 진입하려 했지만, 그곳에 야마다 지대 본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신속히 인근 고지를 점령하여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후 일본군 보병대가 몰려왔지만,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이를 저지했다. 하지만 일본군 포병부대가 사격을 가하면서 피해가 누적되었고, 일본군 보병대는 김좌진 부대가 위치한 고지의 바로 옆 고지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김좌진 부대는 다른 곳으로 피할 수 없게 되어 한동안 소모전을 벌여야 했다.

한편, 홍범도의 제1연대는 어랑촌 인근의 이도구에 주둔했다가 어랑촌 남단의 산악능선을 이용하여 완로구를 경유, 안도현으로 이동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예상외로 빨리 접근하여 새벽녘에 완로구에 도착하여 수색을 개시하자, 홍범도는 완로구 산야에 매복하였다. 일본군이 접근해오자 기습 공격을 하였지만, 전력 보존을 우선시하였기에 적극적인 공세는 가하지 않고 삼림으로 깊숙이 철수해 일본군의 추격을 뿌리쳤다. 이후 완로구를 경유해서 안도현으로 가는 길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다시 어랑촌을 지나 천보산 또는 청산리 방향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이들이 어랑촌에 이르렀을 때, 김좌진 부대가 일본군과 교전하고 있는 상황이 포착되었다. 홍범도는 곧장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일본군은 이로 인해 전력이 분산되었다. 게다가 어둠이 깔려서 상호간에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 없게 되었고, 김좌진과 홍범도 부대는 그 틈에 철수하기로 했다.

이 10월 22일 어랑촌 전투는 청산리 전투 중 기징 격렬한 전투였고, 양측간에 일정한 손실이 있었다. 그후 김좌진은 청산리를 거쳐 연해주로 후퇴하였고, 서일이 인솔하는 잔류부대는 서대파 부근과 라자구, 노무주구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뒤 본대를 따라갔다. 한편 홍범도 부대는 신속히 천보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이동하여 안도현으로 탈출하려 하였으나, 거기에는 이미 일본군 1개 중대가 길목상에 배치되어 통로를 차단했다. 홍범도는 최대한 전투를 회피한 상태에서 통과하고자 일본군과 접전을 시도했지만, 이미 방어 배치가 되어있는 그들을 돌파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다시 청산리를 경유하여 안도현 방향으로 이동하고자 하였다. 이후 고동하곡 인근까지 이동하면서 야마다 지대 추격대의 공격으로 일부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군의 포위망이 느슨했기 때문에 청산리에서 빠져나와 부대를 재편성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은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의 손실이 전사 60명, 부상 90명이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손실에 대해서는 초기엔 가노 기병대장 이하 950여 명이 사상되었다고 보도했지만, 이후에는 1,200~3,000명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본국에 올린 보고서에는 전사자 11명, 부상자 24명이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임시정부와 독립군이 전과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다는 주장과 일본군이 피해를 축소하였다는 주장이 현재까지 대립하고 있다. 한편 국내에서도 청산리 전투가 전해졌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1920년 10월 28일자 기사에서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에서의 활약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어로촌 이도구와 봉밀구 서북방 약 팔십리되는 후차창구 부근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인 기병연대의 힘을 합하여 22일 이른 아침부터 어로촌 이도구와 봉밀구의 두 사이되는 방면에 충돌하야 오후 일곱 시 경까지 싸움을 계속한 후 드디어 그들을 뒤편되는 밀림지대안으로 격퇴하였다. 그 싸움에 대한 일본군사의 손해는 전사 하사1, 졸 2, 부상졸 11명 기관총 1 소총 11 검 3 탄약 1200 안총(眼銃) 1 노획하였는데, 음모단의 두목은 김좌진이요, 부하 이삼백 명을 거느렸으며, 그 외에 초적단 칠팔백 명이 그에 참가한 듯 한데, 그의 합계는 일천명 내외인바 음모단의 사상은 다대할 모양이나 아직 알 수 없더라.
육군성 발표 두도구 방면에 출동 중인 토벌대는 21일 삼도구 서방지역에서 토비와 충돌되어 격퇴한 바 이 싸움에 아군 전사자가 삼 명이요. 부상자가 사명인데 토비의 사체는 십 명이요 기타 병기 약간을 얻었으며, 또 동 방면에 있는 일부 부대는 22일 밤에 이도구 봉밀구 중간에 서 적단과 전투를 개시하야 아군 전사자는 하사병졸 삼명이요. 부상자가 십일명과 기타 경상자가 있었는데 봉밀구 방면의 적들은 김좌진 일파와 홍범도 일파에 속한 가장 유력한 조선인 음모단이 집중되어 있는 단체이며, 병기는 기관총 기타 최신시기 무기를 가졌고, 병력은 삼천에 나리지 않는다고 하더라.

김좌진은 청산리 전투를 치른 후 1920년 말밀산현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참모장을 맡았다. 이후 연해주로 이동하여 통군서를 조직하여 사령관으로 일하였다.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 세력이 위축되자 1922년경 북만주로 이동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재조직한 뒤 총사령관을 맡아 중소 국경지대인 동녕현을 본거지로 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은 이범윤을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재건을 주장하는 복벽주의자들과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공화주의자들의 연합적인 성격을 띈 단체였다. 일본 측 정보기록인 '불령단 관계잡건' 1923년 9월 3일 <김좌진 행동에 관한 건>에 따르면, 김좌진 부대는 1923년 8월경 대한군정서원 400여 명, 무관학교 생도 60명, 연해주로부터 모집한 후보생 120명 등 합계 580여 명이 있었다고 한다.

1923년 3월, 김좌진은 결사대원 김순갑(金淳甲)· 한경덕(韓敬德) 등을 국내에 잠입시켜 관공서를 파괴하고 고관을 암살하게 하였다. 또한 1925년 5월 조선총독 암살을 계획하고 신민부원에게 무기를 제공해 국내로 파견하기도 했으며, 한창걸 등이 김좌진의 명령에 따라 국내 진공을 시도하다 중국관헌에게 마적으로 오인받아 교전 후 무장해제되기도 했다. 1927년 8월에는 국내로 특수공작대를 파견해 작전지도의 작성, 민중공작, 일군경의 주둔 배치 등을 조사했다. 이 작전은 신민부군 장교 이중삼(李重三) 등 3명이 3개의 노선으로 나누어 평양, 전라도 지리산, 그리고 경성을 경유해 북청까지 이르는 노선을 따라 활동하고 공작을 완수했다. 1928년 3월에는 기모자진이 직접 결사대를 이끌고 국내에 잠입했다는 정보가 들어와 일본 경찰들이 긴장하기도 했다.

김좌진은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1919년 말 김영진(金瑛鎭)을 국내로 파견해 대한건국단을 조직하고 충청도, 전라도 일대를 중심으로 자금을 모집하게 했다. 이보다 앞서, 1919년 음력 6월경 천경수(千景洙)를 국내로 파견해 조병채(趙炳彩)에게 협조를 구하게 했다. 조병채는 1919년 6월 천경수로부터 군자금 모집을 의뢰받은 뒤 1919년 음력 10월 김영진, 김세진(金世鎭)․신현창(申鉉彰) 등과 함께 충남 논산의 윤상기 집에서 회합을 갖고 백남식(白南式), 윤태병(尹太炳) 등과 함께 대한건국단을 조직했다. 대한건국단은 취지서를 충청도, 전라도 일대에 배포하고 배일사상을 고취하면서 자금모집에 착수했다. 1920년 말 단장 윤태병과 일부 단원이 체포되면서 위기를 맞이했지만, 이들이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갖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실체를 발설하지 않은 덕분에 나머지 단원들이 1920년대 말까지 계속해서 자금을 김좌진에게 송부할 수 있었다.

1920년 5월, 김좌진은 김도심(金道深)을 경성으로 파견해 자산가들로부터 자금을 모집하게 하였다. 김도심은 1922년까지 경성에 머물면서 윤치성 등과 접촉해 자금 출자와 모금 협조를 부탁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시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으로부터 독립공채를 수령해 1923년 음력 3월 국내로 잠입해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1923년 음력 5월에는 유정근을 국내로 파견하여 국내 자산가들에게 자금 협조에 대한 문서를 보냈으며, 유정근 본인은 김좌진의 밀사임을 증명하기 위해 김좌진과 함께 직은 사진을 동봉했다. 김좌진은 이 시깅 보천교주 차경석을 만주로 망명시켜 그의 자금력과 종교적 역량을 이용하려 했다. 당시 보천교는 전국적으로 3만에 달하는 교도가 있었고, 차경석은 300만원의 자금을 소유한 인물로 파악되었다. 유정근은 국내에 잠입하자마자 김동진, 김항규에게 협조를 구했고, 이들의 도움으로 보천교와 접촉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김재영 교수의 <일제하 보천교의 민족운동>에 따르면, 김좌진은 1924년 봄 보천교로부터 2만원의 자금을 지원받았다고 한다.

한계에 부딪친 무장독립노선[편집 | 원본 편집]

김좌진은 재만 동포들이 군자금 납부에 응하려 하지 않자 1924년 3월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명의로 부령 제11호를 반포했다.

제1조 각 지역에서 국사에 진력하다가 순직한 씨명을 조사해서 사책에 기입한다.


제2조 국사를 위해서 부상 또는 병환의 자에 대해서는 상당한 구휼을 한다.

제3조 적의 우롱을 받아서 귀순한 자와 생활을 위해서 일시적 수종 동화한 자에 대해서는 정상을 작량해서 벌하는 것을 논의하고, 개정 의사가 확실한 자는 사면한다.

제4조 본 군단의 징모대 또는 모연대를 적 또는 외국 관헌에 고발한 자는 극형에 처한다.

제5조 본 군단에 있어서 징모한 병사로서 병역의 복무를 기피하는 자는 중벌에 처한다.

제6조 본 군단에서 청연한 군자금의 납부를 거절한 자는 중벌에 처한다.

대한민국 5년 3월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김좌진

김좌진은 뒤이어 부령 제12호를 반포했다.

일금 5천 원정


위 금액은 본년 음력 4월 말까지 본 사령부 경리부에 직접 납입해야 한다. 만약 기일을 어길 경우에는 부령 제11호 제6호에 의거하여 처벌한다.

대한민국 5년 음력 4월 20일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김좌진

아울러 주민들에게 군자금을 요청하는 글을 보내면서, 대한국민으로서, 배달민족으로서 자각해서 그 의무를 다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군자금 모집 활동은 주민들의 원성을 샀고, 중국 지방관헌이 대한독립군단 간부들을 체포하려 햇다. 이렇듯 재만동포들의 민족의식 저하 등 주변 요건이 좋지 않게 돌아가자, 이를 타파하기 위해 독립운동 통합조직을 세우기로 했다. 1925년 1월 길림성 목릉현에서 개최된 부여족통일회의에 참석하여 통일방안을 논의하였고, 그해 3월 10일 북간도 영안현 영안성내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했다.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는 김혁이 추대되었고, 김좌진은 위원을 맡았다.

신민부는 동포들의 자치기구로서의 역할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무장투쟁을 추진하기 위한 단체였다. 이를 위해 징병제와 군구제 실시, 사관학교 설립 등을 주장했다. 김좌진은 효과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자신이 군사부위원장, 총사령관을 맡고 무장투쟁을 진두지휘했으며, 휘하에 보안대, 제1대대, 제2대대, 제3대대, 제4대대, 제5대대, 별동대 등을 두었다. 그는 국내로 진공하여 독립을 쟁취하는 걸 사명으로 삼고, 이를 이루기 위해 신민부 관할 하에 있는 전 지역을 군구제로 편성했다. 즉 관할구역 내의 만 17세 이상, 만 40세 이하의 남자를 군적에 기록하여, 이를 바탕으로 대오를 편성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시에 독립군을 수용할 만한 막사가 없었고, 군량도 부족했다. 그래서 평소에는 농업에 종사하다가 농한기에 훈련을 받도록 하고, 유사시에 정규군에 편입시키려 했다. 그러나 하얼빈의 일본 영사관이 방해를 심하게 해서 군구제 실시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김좌진은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위해 지휘관을 양성하려 했다. 북간도 목릉현(穆棱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우고 김혁을 교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부교장을 맡았다. 아울러 둔전지역으로 밀산을 택하고 1926년 5월에 조사관들을 파견했지만, 밀산의 상황이 과거와는 달리 독립운동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아서 계획을 밀어붙이지 못했다. 김좌진은 여론을 끌여들이기 위해 1926년경 대종교 민족주의 정신으로 '종족, 정신, 산업'의 삼위일체인 '귀일당'을 건립하고 신민부를 지도하게 했으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신민부 조직은 형식상으로는 3권분립의 자치제 정체를 모방하였으나, 실제로는 대한군정서 성원의 주축인 중앙부에서 지방총관을 명령식으로 임명하거나, 거기서 파견되어온 자들이 몇 명의 무장대에 호위되어 민중에게서 각종 의무금을 징수하는 통치식 단체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북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동만주나 남만주에서 살 길이 없어서 북만주로 유랑해온 빈궁한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한족 지주의 토지를 소작맡거나 조차하여 농사를 짓지만, 지주에게 소작료나 토지조차로를 납부해야 했고, 지방정부로부터 각종 잡세를 지불해야 했다. 이러고나면 남는 것이 얼마 없어서 겨울을 지내기도 어려웠다. 어떤 지방에서는 마적들에게 의무금을 납부하여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아야 했다. 그러나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는 이러한 사정을 봐주지 않고, 매 호당 수전 소상에 합대양 2원, 대상에는 3원, 한전 소상에 1원, 대상에 2원 50전, 상인들은 재산의 20분의 1을 모연금으로 내야 했다. 1925년 10월 총회에서는 매 호당 대양 6원씩 납부하도록 개정되었고, 기한 내에 납부하지 못하면 '의단분자', '반동분자'로 취급되어 처벌받거나 심지어 처단당하기도 했다. 이에 한인들의 불만은 갈수록 심화되었고, 북만청년동맹 등 공산주의 단체들의 조직적인 반대공작도 심해졌다.

이렇듯 국내로 진공하여 조국을 독립시키겠다는 김좌진의 꿈은 원대했으나 현실이 따라주지 않았다. 북만주의 한인 동포들은 자기 살림 챙기기도 힘겨운데 군자금 납부를 독촉하는 신민부에게 반감을 드러냈고, 만주 군벌과 일본 당국의 압박도 심해졌다. 그러던 1928년 1월 일본 경찰과 중국군 1개 중대의 습격으로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김혁 등이 체포되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한 대책회의에서 김좌진은 보다 적극적은 무장투쟁을 주장했다. 그러자 민사부위원장 최호(崔灝)는 한인들의 어려운 실태를 근거로 교육과 산업을 우선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신민부는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군정파와 최호를 중심으로 한 민정파로 각각 분열되어 나름대로의 조직을 갖추고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신민부라고 주장했다. 김좌진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28년 5월 중국국민당과 연합하여 일제와 대항하려 했지만, 만주 군벌 장쭤린의 훼방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급기야 1928년 10월 20일,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사의 비극 중 하나인 빈주 사건이 벌어졌다. 이날 이백호(李白虎)를 비롯한 보안대원 수 명이 빈주(賓縣)에서 의무금을 징수했다. 이때 지역 주민 40~50명이 의무금 납부를 기피하고 자위책을 강구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이백호 등 보안대원들은 현장을 습격하여 주민들을 살상했다. 이백호는 군정파의 중심 인물로 김좌진의 총애를 받았기에 파장은 실로 심각했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 1928년 11월 18일자 기사에 보도되었다.

북만 빈주현에서는 지난달 그믐날 저녁 여섯시경에 신민부원이 그곳 주민 5,6명을 살상한 사건이 발생하얏는데 그 원인은 빈주현은 본래 신민부 구역으로 오래전부터 OO운동비로 주민들로부터 돈을 거두어갓는데 근자에 이르러 주민 일동은 주민대회를 열고 신민부로부터 탈퇴하기를 결의하고 이 소식을 신민부에 통지하얏더니, 그 말을 들은 신민부원들은 무장대 5, 6명을 보내어 주민과 충돌되어 그와 가튼 참극이 생긴 것이라는바, 연동(유연동) 김봉진, 황혁 세 사람은 즉사하고 윤필한, 김유문, 장문숙 3사람은 중상하야 목하 생명이 위태하며 그밧게도 경상다자 만흔 모양이라더라.

이후 신민부내 각지에서 민심이 폭발하여, 더 이상 신민부를 따르지 않겠다는 통보가 잇달았다. 최호를 위시로 한 민정파도 들고 일어나 김좌진을 "동족 학살의 괴수", "혁명전선의 교란자", "매족적 주구", "혁명의 사기한인 장본인"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신민부는 얼마 못가 해체되었고, 통일민족전선은 실패로 돌아갔다. 김좌진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고자 정신 등과 함께 공산주의자들의 침투에 맞서기 위한 대항이념을 강구하던 중 김종진, 유림으로부터 무정부주의를 소개받았고 이를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1929년 7월 21일 신민부 간부 16명과 함께 석두하자에서 북만인민대표대회를 개최하고, 한족총연합회의 조직 결성을 결의했다.

한족총연합회는 1929년 8월 선언, 강령, 사업정강 등을 발표하였다. 선언문에서 "과거에 연출된 만악의 원인과 복잡한 제 현상을 청산 배제하고, 우리 민중의 생활 향상과 혁명전선의 진전을 도모하는 자주자치적 생활조직을 기초로 해서 전 민중적으로 연합조직을 완성해야 한다"고 하여 권력의 중앙집중을 부정하고 자주적 조직의 연합체를 지향하는 아나키즘 사회를 추구했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강령과 사업정강을 제시했다.

강령


1. 본회는 국가의 완전한 독립과 민족의 철저한 해방을 도모한다.

1. 본회는 민족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고 동시에 혁명적 훈련의 철저를 기한다.

1. 본회는 혁명 민중조직완성의 실현을 기한다.

사업정강


(혁명)

1. 파괴, 암살, 폭동 등 일체 폭력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한다.

2. 일반 민중을 혁명화하고, 혁명은 군사화할 것.

3. 내외를 불문하고 합법운동과 기회주의자를 박멸할 것.

4. 반민중적 정치운동이론을 철저하게 배척할 것.

5. 파벌을 청산하고 운동력을 완전히 통일할 것.

6. 운동력 전구면에 우선단체와의 친선을 도모할 것.

7. 세계사조와 보조를 동일히 할 것.

8. 세계혁명자와 친선적 연락을 계획하고 상호운동의 정세를 선전할 것.

(산업)

1. 주민의 유랑생활 방지

2. 토지공동경작 장려

3. 공농제의 적극적 실시

4. 산업에 대한 기능 보급

5. 부업 적극 장려

(행정)

1. 지방자치제 확립

2. 각 지방자치체와 상호연락

3. 민중의 노예적 습성 개선

(교육)

1. 실생활에 적합한 교육정책 실시

2. 교육 자격 선택

3. 교과서와 학제 통일

4. 중등교육기관 적극 설치

5. 여성과 청년운동의 지도 장려

6. 비현대적 인습 타파

(경제)

1. 공동판매, 공동소비조합 설치의 적극 장려

2. 농촌식산금융조합 설립

3. 농민창고 설립

김좌진은 상호부조와 자유연합이라는 무정부주의 사회의 조직 원리를 기반으로 한족총연합회를 구성하고자 하였고, 공산주의를 "강권적 노예적이며 사대주의적 독재사상"으로 보고 강력히 반대했다. 그렇지만 김좌진이 모든 공산주의 세력과 대결 양상을 보인 건 아니었다. 1925년 초 서울 청년회 계열과 합작하여 공산주의자 연맹을 결성하였고, 1925년 11월 북만노력청년총동맹의 결성에도 협력하고, 조선 국내의 청년회파와 연계했다. 또한 1927년에는 김좌진의 부관이자 보안사령관인 박두희가 최창익과 접촉하면서 소련과 연계하여 매년 20~30명의 좌우 청년들을 소련사관학교에 보내어 양성하려고 계획하고 그해 하반기에 직접 소련으로 들어갔다. 또한 1928년경 김좌진 본인이 공산주의 계열 NL파와 그 외곽단체인 남만농민동맹과 연계를 맺었다.

김좌진이 타파하고자 한 공산주의 세력은 그와 직접 이해관계가 있는 화요회파 만주총국이었다. 그는 이들이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부추겨 민족분열을 조장하게 하는 것에 깊은 분노와 적의를 품었다. 그는 농촌자치조직 및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한 후, 재만동포들에 대한 군사훈련과 단기 군사훈련반을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와 공산주의자들의 퇴치에 노력했다. 이로 인해 화요회파 공산주의자들과 김좌진의 충돌은 반복적으로 일어났고, 공산주의자들은 그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만주에서 자기들의 뜻을 이루지 못하겠다고 판단하기에 이른다.

암살[편집 | 원본 편집]

1930년 1월 24일(음력 1929년 12월 24일), 김좌진은 흑룡강성 해림현 산시진 도남촌 자택에서 200m 거리에 있는 정미소에서 고려공산당천년회원 박상실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 사건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파다하다. 첫째는 김좌진이 사생활 문제로 정적에게 암살당했다는 것, 둘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분쟁으로 인해 암살당했다는 것, 셋째는 일제에게 매수된 김봉환이란 자가 조선공산당 회요회에 잠입해 음모를 꾸며 암살했다는 것, 넷째는 김좌진이 일제 형사와 접촉하여 공산주의자들을 밀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공산당원이 암살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정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김좌진이 암살당한 후, 한족총연합회와 고려공산당과의 알력이 노골화되어 서로가 암살대를 조직하여 공격하였으며, 중국관헌을 이용하여 반대파의 체포에 노력했고, 격문을 패보해 반대파의 죄악을 선전했다. 그 과정에서 김좌진이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었으며, 장례 때 일본관헌이나 친일파들이 조의를 표하였다는 설이 파다했다. 김좌진이 일제에 귀순했다는 설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는 1924년 8월 22일 기사에서 김좌진이 귀순하려 한다고 보도했다.

북방에 있는 당파들은 정치적으로 진화하고 남방에 있는 당파는 사회적으로 악화하여 가는 상태에 있는 모양인 바, 그런 주에도 남방파 김좌진 일파는 목하와 같은 상태로는 공연히 곤란한 지경에 빠질 뿐임으로 자진하여 일본에 보호하에 귀순하여 양민화한 생활을 하는 것이 양책이라 주장한다고 하더라.

즉, 북방에 있는 당파는 소련의 영향을 받아 정치적으로 진화하는 반면, 남쪽에 있는 남방파는 사회적으로 악화하여 곤란한 지경에 있고, 이에 김좌진의 남방파들이 일본에 귀순하려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그저 '설'일 뿐이며, 실제로 김좌진이 귀순하려 했음을 입증할 근거는 전혀 없다. 일본 정보기록에서는 김좌진을 '불령선인의 괴수'로 시종일관 보았으며, 이강훈은 김좌진의 장례를 직접 주관하였지만 일본 관헌이나 친일파가 조의를 표한 적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에서 특파원을 파견해 조의를 표했지만, 두 신문은 민족주의 성향을 보전하고 있었기에 이들을 친일파로 매도할 수는 없다. 김좌진 암살 이후 한족총연합회에 가담했던 구성원 다수가 변절하여 친일 인사로 활동하였지만, 그것까지 김좌진의 책임으로 몰아가는 건 무리한 주장이다.

김좌진의 유해는 해림현에 안장되었다가 3년 후 아내 오숙근이 수습하여 고향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임시로 매장했다. 8.15 광복 후 아들 김두한이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로 이장했다. 현재 이 묘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되어 충청도청의 관리를 받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김좌진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국가기록원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 민황기, 손세제, <백야 김좌진의 민족의식과 국권회복운동>,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6.[1]
  • 박환, <김좌진 장군의 항일독립운동 성격과 역할 - 투쟁노선과 정치이념을 중심으로>,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2.[2]
  • 박창욱, <인물연구 김좌진 장군의 신화를 깬다>, 역사비평사, 1994.[3]
  • 이성우, <백야 김좌진의 국내민족운동>, 호서사학회, 2006.[4]
  • 김인호, <김좌진의 항일 인맥과 민족 이미지의 형성과 전개 - 반도의용정신대와 대한민청을 중심으로 ->, 숭실사학회, 2015.[5]
  • 신효승, <청산리 전역의 전개 배경과 독립군의 작전>,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6.[6]
  • 국가보훈처, <2005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각주

  1. 조선일보 1930년 2월 17일자 기사, 동아일보 1930년 2월 14일자 기사 등에 이 이야기가 실려 있다.
  2.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1930년 2월 13일자 기사에 해당 내용이 있으며, 일제의 '불령단관계잡건'에 김좌진이 경성 모사립학교 명예교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볼 때 신빙성이 있다.
  3. 독립운동관련 판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