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벽

김원벽.jpg

金元璧. 호는 효성(曉星).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4년 6월 24일 황해도 은율군 이도면 생팔리 별기동에서 김태석(金泰錫)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머니 이 모니카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부친 김태석 역시 가톨릭 신자였다가 개신교로 개종해 서우학회와 서북학회 회원으로서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또한 그는 교동교회에서 북장로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와도 교분이 두터웠다.

김원벽은 1901년 4월부터 1908년까지 향리인 은율군 이도면에 있던 미션스쿨인 숭실학교에 재학했다. 이어 1908년 4월 재령군 재령읍에 있던 명신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한 뒤 1911년 4월 서울의 경신학교로 전학했다. 이듬해인 1912년 3월 경신학교를 제7회로 졸업했다. 이때 함께 졸업한 학생은 모두 7명이었는데, 그 중 한 명인 이병주(李秉周)는 이후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에 김원벽과 함께 3.1 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김원벽은 경신학교 졸업 후 동문회의 조직과 같은 지역 출신 학생들의 친목회 결성에 주력했다. 그 결과 1913년 3월 사립경신학교 졸업동문회가 조직되었다. 그는 이 단체에서 평의원을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또한 1916년 5월에는 서북학생친목회의 지회 성격 조직인 안악학생친목회의 설립을 주도하고 부회장을 맡았다. 이때 회장을 맡은 이는 그와 동향이자 보성전문학교 출신인 이병조(李秉祚)였다. 이병조는 김원벽이 신생활사에서 사회활동을 전개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이후 숭실대학에서 1년 정도 수학한 그는 1915년 9월 조선기독교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다 1917년 4월 7일 조선기독교대학이 연희전문학교로 변경되었고, 김원벽은 연희전문학교 상과 2학년으로 무시험 입학했다. 그는 학생 생활과 함께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회관에서 지근거리에 위치한 승동교회(勝洞敎會)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승동교회 목사 박희도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연희전문학교와 중앙 YMCA, 그리고 승동교회에서 전개된 김원벽의 활동은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 “소년시대부터 웅변가의 칭을 듣고 또는 재질이 풍부하다"던 그의 웅변 실력은 주변 청년 지식인들의 주목 대상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김원벽은 기독교 학생들의 중심인물로 자연스럽게 부상하였다. 정석해는 후에 김원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김원벽은 키가 후리후리하게 큰데다 허스키 보이스였으며 타고난웅변가였다. 한번 연단에 서서 열정을 쏟아 웅변을 토할 때에는 모든청년들이 귀를 기울이고 감탄사를 연발케 하는 웅변가였다.

- 한은경, '연세혈맥: 김원벽, 그 생애', <연세춘추> 1975년 11월 10일

1919년 1월 말 김원벽은 YMCA에서 같이 활동했던 박희도의 주선으로 경성 시내 각 전문학교의 학생 대표들을 관수동의 중국요리점 대관원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박희도와 주익은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는 이 시기가 독립을 선언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고 제안했다. 이후 김원벽은 2월 3, 4일경에 보성전문학교 학생대표 강기덕과 경성의학전문학교 대표 김형기를 만난 뒤 독립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2월 12일과 14일 음악회를 빙자해서 남대문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구내의 이갑성의 집에서 김원벽, 김형기, 윤자영, 김문진, 배동석, 한위건 등 각 전문학교의 대표자들이 다시 모였다. 이 자리에서 해외 독립운동 정세를 논하고 서로 독립사상을 북돋웠다. 이후 김원벽은 학생대표로서 강기덕과 만나서 학생 조직의 필요성을 협의했다.

그 결과 2월 20일에 승동교회에서 제1회 학생간부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모인 각 학교 대표자는 경성전수학교 전성득과 윤자영, 경성의학전문학교 김형기와 한위건,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김문진과 이용설, 경성공업전문학교 김대우,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강기덕과 한창환,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등이었다. 이후 김원벽은 박희도와 긴밀히 연락하면서 시위를 준비했다. 그는 강기덕, 한위건과 함께 각 중등학교의 학생 대표자를 뽑아 학생들을 결속시켰다. 김원벽은 경신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담당했고, 강기덕은 서북친목회와 중앙학교, [린상업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의 학생을 만나서 독립의식을 불어넣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결정되고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었다. 전날인 2월 28일 정오, 김원벽은 연희전문학교에서 기도회를 이용해 학생들에게 만세시위 일정과 장소를 공지하고 비밀 엄수를 당부했다. 이후 3월 1일 정오가 되자, 각 전문학교와 중등학교 학생을 비롯한 수만의 군중이 탑골공원에 모였다. 손병희민족대표 33인은 급히 장소를 변경하여 인근의 태화관에서 모임을 가졌다. 민족대표를 기다리던 학생들은 결국 2시 반쯤에 탑골공원에서 독자적으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에 나섰다. 경성 전역에서 벌어진 만세시위는 결국 일본 경찰과 헌병의 탄압으로 해산되었지만 학생을 중심으로 2번째 시위가 준비되었다.

김원벽2.PNG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에서 2번째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때 김원벽과 강기덕은 인력거를 타고 시위를 이끌었다. 강기덕은 바로 체포되었고, 김원벽은 남대문 안으로 들어가다가 일본 경찰의 폭력으로 쇄골이 부러졌다. 이후 그는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미결구류 360일 산입)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1] 1921년 11월 4일에 만기 출옥했다. 그는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옥중에서 고초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만기되어 출옥하니까 그것도 당연한 일이라.

1921년 12월 4일 김원벽은 안악읍 예수교회에서 '생존적 요구는 종교상 가치'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이튿날인 5일에도 안악기독여자청년회 주최의 강연회에서 수백 명의 청중을 앞에 두고 '시대 변천과 여자 활동'이라는 제목으로 2시간에 걸쳐 열변을 토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동창포교회 강습회에서 '인류 생존의 요구', 안악여자청년회에서 '시대의 변천과 여자 활동' 등의 강연을 했다.

1922년 1월 9일 경성으로 귀환한 김원벽은 1월 15일 경성 해동관에서 열린 신생활사 창립총회에 참석해 이사장으로 박희도, 전무이사로 이병조를 추대하고 자신은 강매, 김명식, 이경호, 이승준, 민관식과 함께 이사로 참여했다. 이후 2월 11일에 열린 이사회에서는 아서 L. 베커(Arthur L. Becker, 한국명: 백아덕),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이강윤 등 3명의 이사를 증원했다. 당시 조선인이 잡지를 발행하면 원고와 납본 단계에서 2번 검열을 받았는데, 일본인이나 외국인을 발행인으로 세우면 납본 검열 1번으로 족했기에 그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김원벽은 <신생활>의 보급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1922년 7월 6일부터 1달간 신생활사의 지사 설치와 기사 모집을 위해 펑티엔, 창춘, 하얼빈, 다롄으로 출장갔다. 잡지 신생활 창간호는 1922년 3월 11일에 발행할 예정이었다. 신생활사는 3월 8일 창간호를 납본했는데 조선 총독부는 치안방해를 이유로 창간호의 발매를 금지하였다. 신생활사는 어쩔 수 없이 문제된 기사를 삭제해서 임시호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신생활은 수난을 겪어야 했다. 4월 11일에 발매될 예정이었던 제4호는 압수되었고, 6월 1일에 발매될 예정이었던 제6호도 발매 금지되어서 임시호로 나왔다.

특히 러시아 혁명기념 특집호로 발행한 제11호와 제12호가 크게 문제로 되었다. 12월 22일 검사국은 발매금지와 함께 사장 박희도, 주필 김명식, 기자 신일용과 유진희를 신문지법과 제령 제7호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 위반으로 기소하였다. 결국 신생활은 1923년 1월 8일자로 발행금지, 곧 폐간 처분을 받았다. 1월 16일에 열린 공판에서는 박희도에게 징역 2년 6개월, 주필 김명식에게 징역 2년, 기자 신일용과 유진희에게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했다.

김원벽은 이때 체포되진 않았지만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일본 경찰은 그를 “배일사상이 치열하며 사회주의 숭배로 기우는 경향이 있는 자”로 기록했다. 하지만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사회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그는 기독교의 주요한 직책도 역임했다. 1922년 3월 30일 승동교회에서 열린 예수교청년회연합회 제2회 정기총회에서는 사교부 간사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5월 21일에는 승동교회의 면려청년회 창립총회에서 회장에 해당하는 통령(統領)을 맡았다.

신생활이 폐간된 후, 김원벽은 한동안 적적하게 살다가 1923년 10월 시대일보 창립위원을 맡았다. 그는 서북 지방으로 출장해 창립금을 모집하려 했다. 그 결과 시대일보는 1924년 3월 31일에 창간했다. 사장엔 최남선, 편집국장엔 진학문, 논설반엔 안재홍, 주종건, 정치부장에 안재홍, 경제부장에 김철수, 사회부장에 염상섭 등이 맡았고, 김원벽은 서무국의 경리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자금이 부족하자, 최남선은 창간 2달만에 신문 발행권을 보천교에 넘기는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반발이 거세졌고, 보천교가 7월 9일에 총독부에 발행인 명의변경을 신청하자 보천교를 성토하는 여론이 들끓고 보천교성토위원회가 조직되기까지 했다. 이후 9월 3일부터 신문이 속간되었지만 보천교의 경영은 인정되지 않았다. 김원벽은 이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신문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장티푸스에 걸려 심한 고생을 했고, 3.1 운동 때 형사에게 폭행당하면서 생긴 쇄골 부상이 악화되면서 오른팔을 자유롭게 쓰지 못했다. 그나마 황해도 해주시 출신의 신여성 강고명(姜高明)과 결혼한 것이 그에게 위안을 줬다.

이후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에 정착한 그는 1923년 12월에 열린 황해도민대회처럼 경성에서 활동할 때도 고향의 현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927년에 봉산청년회 혁신과 사리원차지인조합(借地人組合)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928년 4월 2일 발진티푸스로 치료를 받다 4월 9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1928년 4월 12일 <중외일보>는 그의 사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선운동우회(鮮運同友會)의 상무이사 김원벽(35세) 씨는 지난 2일 이래 사리원 자택에서 발진티푸스로 치료중이더니 9일 오후 6시에 불행히 별세하였는데 김원벽씨는 기미운동 당시 47인 중 1인으로 활동을 하다가 그 후 출옥 이후에도 교육계 기타 조고계(操觚界)에 비상히 헌신적으로 분주하다가 최근 이삼년은 조선 운수업계에 몸을 바쳐 작년 이래 다사다난한 문제를 일으키는 일역일점주의에 맹렬한 반대운동의 투사로 그간 조선 운송사업에 없지 못할 한 페이지를 차지한 청년지사였는데 씨의 장의는 선운동우회 회장(會葬)으로 11일 발인하리라더라.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김원벽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73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