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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런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기 위하여 항공모함 전단을 동해상에 진출시켜 영변의 핵시설을 공습하려는 작전을 입안하면서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았다. 미국의 북한 공습계획을 알아차린 김영삼 정부는 부랴부랴 외교채널을 통해 강경한 반대입장을 전달하면서 미국의 공습을 저지하였고, 일촉즉발의 위기는 미국의 전 대통령인 [[지미 카터]]가 특사자격으로 평양을 방문, 김일성과 담판에서 북한의 핵동결에 합의함으로써 봉합되었다. 지미 카터 방북시, 김일성은 미국측에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지미 카터 방북 이후, 전쟁의 문턱까지 갔었던 북미관계는 180도 상황이 반전되어 평화국면으로 전환되었고, [[1994년]] [[6월 18일]], 북측은 전격적으로 김영삼 정부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였으며, 김영삼이 이를 수락하면서 남북관계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모습이었다. 북한의 갑작스러운 정상회담 제의에 김영삼 정부는 굉장히 당황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미국이 주도하는 해빙국면을 거스를 수 없었기에 생각보다 쉽게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어 김영삼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주인공이 되려던 순간이었다. 7월 2일에는 정상회담에 대비한 실무협의도 마무리되어 남은 것은 김영삼과 김일성이 대면하는 일 뿐이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딤을 코앞에 둔 7월 9일,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김일성이 사망하자, 김영삼은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며 혹시 모를 북한의 도발에 대비하였다. 김영삼은 김일성에게 조문단을 보내지 않았고, 군사적 긴장감을 높이는 모습을 보이며 남북관계는 손바닥 뒤집듯 또 다시 전운이 감도는 대치국면으로 돌변하였다. 김영삼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김일성 사망에 대하여 어떠한 조문단이나 공식적인 방북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나, [[전남대학교]]에서는 김일성의 분향소가 설치되었고 약 250여명의 학생들이 조문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안보불안을 문제삼으면서 재기하려는 군사정권의 움직임을 견제하고자 분향소를 설치하는데 관여한 주동자들을 처벌하는 등 신속하게 국론분열을 차단하였다. 살얼음판을 걷는 극한의 긴장감 속에서도 대북 인도지원은 진행되었는데, [[1995년]] [[6월 25일]] 북측에 대한 식량 지원 명목으로 쌀 15만톤 규모를 제공했다. [[1996년]]에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 의한 대북 경수로 지원사업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도적인 지원을 비웃기라도 하듯 [[1996년]] [[9월 18일]], [[강원도]] [[강릉시]] 연안에서 북한 공작원을 태우고 침투하던 [[상어급 잠수함]] 1척이 좌초하면서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발하였다. 무장공비 진압작전 과정에서 아군측 전사자와 부상자가 다수 발생하는 등 남북관계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에 직면하였다. [[1997년]] [[2월 12일]], 북한을 벗어난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이 중국에서 대한민국에 망명을 요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4월 20일]] 황장엽은 대한민국에 입국하였고, 북한의 최고위급 인사가 망명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자리에서 황장엽은 북한의 전쟁준비 실태에 대하여 인터뷰를 하는 등 북한의 실상을 증언하였다. 황장엽이 중국에서 망명의사를 타진하던 비슷한 시기에 [[김정일]]의 처조카이자 비밀리에 망명후 이름을 바꿔 생활하고 있던 [[이한영]]이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자신의 아파트 입구에서 북한측 공작원의 소행으로 보이는 총격을 받고 사망한 [[이한영 암살사건]]도 발생하였다. ===한미 관계===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김영삼을 ''자유민주주의의 투사''로 치켜세우며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취임 후 첫 방문지로 대한민국을 선택할 정도로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1993년]] 방한시 김영삼과 나란히 청와대 경내를 [[조깅]]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친근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1993년, 갑작스러운 북한의 NPT 탈퇴 및 1994년 6월 [[제1차 북핵 위기]]가 불거지면서 일대 전환점을 맞이한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북한의 독자적인 핵개발 움직임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북한과 어떠한 협상도 없다면서 강경 일변도의 자세를 견지했다. 참다못한 미국이 독자적으로 항공모함을 동원한 영변 핵시설 공습을 준비하였고, 한반도 전쟁위기가 현실화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공식적으로 미국의 공습을 반대하면서 급한 불을 껐지만, 이후 미국은 한국을 제쳐두고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북한에 특사로 보내면서 북미간 핵협상이 일단락 되었다. 중간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린 것. 거기에 김일성은 지미 카터에게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해 줄 것을 제안하였고, 미국은 갑작스럽게 김영삼에게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압력을 행사하였다. 김영삼 정부는 겉으로는 이러한 갑작스러운 평화적인 분위기를 깰 수 없었지만 내부적으로는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여론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게다가 [[1994년]], 북미간 [[제네바 합의]]에서 북한이 합의를 위반하지 않으면 경수로 지원사업을 보장하겠다는 빌 클린턴의 친서를 보냈지만, 이 사실을 한국측에 통보하지 않았고, 뒤늦게 이 사실을 파악하게된 김영삼은 불편함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을 둘러싼 북미간 일방적인 협상 등으로 [[2017년]] 정치권에서 회자되는 이른바 [[코리아 패싱]]은 실상 김영삼 정부 시기에 현실로 나타났었다. 이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과정에서도 당시 미해군 정보국 분석관으로 근무하던 로버트 김(김채곤)은 주미 한국 대사관의 무관에게 군사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기소되어 9년형을 선고받고 미국 연방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남북 관계 만큼이나 한미 관계 역시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 일변도의 냉랭한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한일 관계=== {{인용문|이번 기회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김영삼, 1995년 장쩌민 주석과 정상회담 이후 기자회견 자리에서}} 김영삼 정부의 한일 관계는 그 유명한 '''버르장머리''' 발언 한마디로 요약이 가능하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전격적으로 해체하는 등 강경한 대일 기조를 유지했다. 일본은 이러한 강경한 김영삼 정부의 모습에 당혹감을 느꼈으며, [[1995년]] 들어서 일본의 총무청 장관인 [[에토 다카미]]는 "일본은 식민지 통치하에서도 조선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라는 망언을 했다. [[1996년]]에는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마저 "[[독도]]는 일본의 영토"라는 극단적인 망언을 하면서 한일 관계는 경색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행태를 참다못한 김영삼 정부는 대양해군을 천명하면서 [[이지스 구축함]]을 도입하는 사업을 진행함과 동시에 한국형 항공모함 도입 계획도 수립하는 등 강경 모드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러한 해군력 증강 사업 등 강경한 대일 기조는 김영삼 정부 말기 불거진 IMF 경제위기로 인해 추진력을 잃게 되었고, 급기야 일본측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경색되었던 한일 관계 탓에 이렇다할 지원을 이끌어 내지는 못하였다. ===한중 관계=== 노태우 정부 시절 중국과 정식으로 수교가 이뤄진 이후, 중국과의 경제 교류는 김영삼 정부 들어서 더욱 확대되었다. 상대적으로 소원해진 한미 관계와는 다르게 한중 관계는 이렇다할 갈등이 표출되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교류가 활성화되었다. [[1994년]] [[3월]]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먼저 중국을 방문하였고, 그 해 10월에는 중국의 리펑 총리가 답방하면서 양국의 정상외교는 무르익었다. 마침내 [[1995년]] [[10월]], 중국의 국가주석으로는 최초로 [[장쩌민]] 주석이 국빈으로 초청되어 방한하면서 역사적인 한중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 ===한러 관계=== {{빈 문단}} ===기타=== {{빈 문단}}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