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납치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은 1973년 8월 8일, 당시 일본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정부 투쟁을 벌이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납치하여 암살을 시도한 사건이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1971년 치뤄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후보 김대중박정희와의 대결에서 94만여 표 차이로 패배하였다. 선거 과정에서 1971년 1월에는 김대중 자택 마당에서 사제 폭발물이 발견되는 소동이 있었고, 이 사건은 김대중의 조카인 당시 15세의 김홍준이 장난을 친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후 경찰의 겁박에 못이긴 허위자백이라는 진술이 나오면서 사건의 진상은 미궁에 빠졌고, 재수사 결과 검찰은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김홍준을 석방하면서 사건이 흐지부지되었다.

대선이 끝난 이후 치뤄지는 제8대 총선(1971년 5월25일) 앞두고 지방 지원유세를 가던 김대중의 승용차와 14톤 대형 화물차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 사고로 김대중은 고관절 부위에 큰 부상을 당했다.[1] 또한 이 사고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한 김대중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교통사고 후유증 및 지병 치료를 위해 이후 일본을 자주 왕래하기 시작하였다.

전개[편집 | 원본 편집]

1972년부터 신병치료를 목적으로 일본에 체류중이던 김대중은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유신헌법을 공표하자 이에 반발하여 귀국을 미루고 해외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실상을 알리면서 반정부 투쟁을 벌였다.

1973년 7월에는 재미교포 위주로 구성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를 조직하는 등 적극적인 반정부 투쟁을 전개하였고, 이어 일본에도 한민통 지부를 설립하기 위하여 준비차 일본에 체류중이었다. 지부 설립 이전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열릴 예정인 반정부 집회 참가를 앞두고 도쿄 시내 그랜드팰리스 호텔 2212호에 투숙하였다.

1973년 8월 8일,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던 양일동 민주통일당 대표의 초청으로 회담을 마친 후 호텔방을 나서자마자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해 옆방인 2210호실에 감금당했다. 김대중의 증언에 따르면 괴한들은 마취약을 바른 손수건으로 김대중의 입과 코를 막았고, 약효로 인해 몽롱한 상태(의식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고 한다.)로 자동차에 실려 어디론가 납치되었으며, 도착한 곳은 바닷가였다고 한다. 정황상 오사카고베에 위치한 안가에서 김대중의 옷을 작업복으로 갈아입히고 김대중을 단단히 결박한 괴한들은 바닷가로 이동하여 모터보트를 타고 바다 한 가운데로 나아가 대기중이던 공작선 용금호에 김대중을 옮겼다.

용금호에서 괴한들은 김대중을 배밑 선실로 끌고가 다시 몸을 결박하였다. 손발을 꼼짝 못하게 단단히 결박하고 눈에는 테이프를 여러 겹 두른 다음 그 위에 붕대를 감아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였다. 그리고 손목과 발목에 각각 수십 킬로그램은 될법한 무거운 돌덩이를 매달았다. 그리고 판자를 등뒤에 대고 몸을 결박시켰다. 일행은 바다에 상어가 많더라, 던질 때 풀어지지 않게 단단히 묶어라, 솜이불을 둘러야 시체가 안 떠오른다등의 내용으로 대화를 나눴으며 정황상 결박한 김대중을 바다에 던져버릴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장될 위기에 처한 그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선박 내부가 술렁이기 시작했고, 어디선가 환한 불빛과 비행기 소리 등이 들리며 상황이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괴한들은 당황하며 뛰쳐나가 전속력으로 배를 몰기 시작했고, 비행기의 추격 및 굉음이 이어지면서 30분 가량 흘렀다.

이 소동이 끝나고 김대중은 어느 항구에 도착하여(정황상 부산항) 앰뷸런스에 옮겨지고 수면제를 맞아 잠들었다. 시간이 흘러 잠에서 깬 김대중은 어딘지 모를 2층 집에 갇혀 있었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승용차에 태워져 이동하였다. 이후 김대중은 자신의 집이 있는 동교동 뒷골목에 내려졌고, 납치된 지 129시간이 흐른 8월 13일 오후 10시 30분 경 동교동 자택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2]

한일관계 악화[편집 | 원본 편집]

납치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면서 의심의 눈초리를 받은 박정희 정권은 끝까지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며 발뺌하였다. 그러나 김대중을 납치하였던 일당들은 훈련된 요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설픈 나머지 당시 일본 경시청은 납치 현장에서 범인들의 지문을 채취하였는데 그 중에는 주일 대사관 1등 서기관이었던 김동운의 지문도 포함되어 한일 양국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특히 일본의 영토에서 불법적으로 행해진 대한민국 정부요원들의 납치행위는 엄연한 주권침해라면서 일본 의회도 크게 반발하였다. 더우기 납치를 실행한 요원들은 "가만히 있지 않으면 죽여버린다"와 같은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했고, 현장에 다량의 유류품을 남기는 등 빼도박도 못할 많은 증거를 남겼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의 핑계는 더 이상 먹히지도 않았다. 일본측은 지문 등 증거를 근거로 사건 관련자들을 일본측 수사기관에 출두시키라는 요구를 하였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묵살하였다.

결국 일본 내부에서는 국권침해에 대한 비난여론이 높아졌고, 한일정기각료회의 연기, 대륙붕 석유탐사를 위한 한일교섭 취소, 경제협력 중단 등 박정희 집권 후 오랜 시간 온건한 분위기를 유지해오던 한일관계가 급속하게 냉각되었다.

당시 냉전 시기에 중국과 소련을 견제하려는 미국 입장에서는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여 한일관계의 파국을 막았으며, 절충안으로 주범으로 지목된 김동운 서기관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언행에 대한 면책, 김종필 총리의 진사방일[3] 등의 조건으로 합의하였고, 사건 발생 86일만에 이 사건은 한일 양국의 정치적 합의로 종결되었다.

사건의 내막[편집 | 원본 편집]

시간이 흘러 1998년 공개된 당시 중앙정보부의 김대중 납치 계획 문건인 일명 KT공작 계획에 따르면 김대중에 대한 납치가 목적이었지, 그를 암살한다는 계획은 포함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문건에 따르면 김대중 납치의 목적은 해외에서 지속적으로 반정부 투쟁을 하는 김대중을 좌시할 수 없어서 그를 강제로 납치해서라도 국내로 끌고와 동교동 자택에 가둬버리는 것이 당시 중앙정보부의 계획이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납치이후 구체적인 행동방안으로 암살 계획이 포함되었는지 여부에 관해 초기 공작계획 수립 당시 일본 현지 야쿠자를 포섭하여 암살하는 방식이나 납치 후 외교행낭으로 밀반입[4]하려는 계획이 논의된 적이 있다는 관련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공작 목표가 암살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한다.

실질적으로 당시 납치 후 호텔 방에서 살해하여 시체를 토막낼 수도 있었고, 공작선이 발각되지 않았다면 바다에 던져서 영원히 수장시킬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다만 호텔 방 암살은 주변에 목격자가 많았고, 유류품이나 지문을 남겨놓을 정도로 서두른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에 실행되기 어려웠다.[5] 공작선 수장 계획 또한 발각[6]되면서 실행되지 못해 차선책으로 납치 후 자택연금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사건 이후 미국 정부와 의회가 인정한 《프레이저 보고서》[7]에 따르면 김대중 납치 사건 관련자는 다음과 같다.[8]

  • 납치 계획 지휘자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중앙정보부차장: 김치열
    중앙정보부차장보: 이철희
    주일 한국대사관 공사: 김기완
  • 실행 그룹
    단장: 윤진원[9]
    주일 한국대사관 참사관: 윤영로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
    주일 요코하마 영사관 영사: 유영복
    주일 한국대사관 참사관: 홍성채
    공작원: 윤춘국
    주일 한국대사관 서기관: 백철현

사건 직후부터 박정희의 정적 제거 음모라는 썰이 난무했으나, 박정희는 극구 이 사건과 연관성을 부인했고 중앙정보부의 단독 소행이라는 입장을 피력했다. 오히려 사건이 발생하자 선조치 후보고를 하러 들어온 이후락을 향해 불같이 화를 내면서 재떨이를 던졌다는 일화도 존재한다.[10] 이 사건 이전 윤필용 사건으로 박정희에게 단단히 찍힌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박정희의 신임을 얻기 위해 독단적으로 계획한 무리수였다는 세간의 평가도 존재한다.

김대중이 국내로 복귀한 이후 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가 시작되었지만, 질질 끌던 조사는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로 내사종결되어 덮어버렸다. 또한 사건의 책임자로 지목된 김동운은 해임조치를 당하게 되었지만[11] 따로 법적인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사건 이후[편집 | 원본 편집]

김대중은 납치에서 풀려난 이후 동교동 자택에 사실상 감금되었고, 그의 집 주변은 수많은 경찰들이 배치되어 삼엄한 출입통제를 실시하였다. 가택연금은 끝없이 이어졌고,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삼일절 57주년 기념 미사에 참석하여 윤보선, 문익환, 정일현, 함석현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이른바 3.1 민족구국선언에 참석한 일에 연루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대법원으로부터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을 일반적인 교도소에 넣지 않고 서울대학교병원 병실에 감금했는데 이는 교도소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집필, 운동, 서신 교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신병치료를 명목삼아 사실상 숨쉬는 것만 허락하는 수준으로 탄압을 가한 것이다. 보다못한 부인 이희호가 법무부장관 및 서울구치소장 등에게 탄원서를 내고, 김대중 자신도 이감신청을 하였지만 정권의 탄압은 더욱 심해져 아예 낡은 병실로 이동시키고 입구에 감시구역을 설치하여 사람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식으로 응수했다. 이런 상황속에 박정희는 1978년 12월 27일에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그 다음날 김대중은 형집행정지로 풀려날 수 있었다. 물론 병실 감금에서 풀려났을 뿐 여전히 동교동 자택에 연금상태는 지속되었고, 이 상태는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암살당하는 10·26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야 가택연금이 해제되었다.

각주

  1.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김대중은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했다.
  2. 쇳덩이 매단 바다 위의 김대중 “이렇게 죽는구나” 떨고 있는데…, 한겨레, 2015년 9월 13일
  3. 陳謝訪日, 사죄의 성격을 띈 방일이라는 의미로 당시 김종필 총리는 일본 수상에게 박정희의 친서를 전달하는 등 저자세 외교를 해야만 했다.
  4. 관례상 외교행낭에 대한 보안검색은 이뤄지지 않는 것이 통례다.
  5.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던 경호원이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자 위로 올라가 납치당했음을 파악하고 곧바로 경시청에 납치신고를 하였고, 김대중이 납치되던 순간 괴한들은 회담을 마치고 배웅하던 양일동 등 목격자를 방안으로 거칠게 밀어부쳤으며, 남겨진 유류품 중에는 커다란 베낭 2개와 운반 도구 등이 포함되어 있어서 토막낸 시체를 담아서 옮기려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
  6. 납치 신고를 받은 경시청이 전역에 비상을 걸었고, NHK 등 일본 방송들도 앞다퉈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납치 후 3시간도 안되어서 사건 자체가 탄로나게 되었다.
  7. 당시 미국에 망명한 전직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청문회 증언에 따라 작성된 보고서
  8. 중정의 김대중 납치살해 시도, 오마이뉴스, 2019년 4월 7일
  9. 해병 대령, 중앙정보부 파견요원
  10. 김대중 납치사건 보고 이후락에 박정희 “집어치워” 재떨이 던져, 경북매일, 2015년 8월 18일
  11. 해임 조치도 일본측과 정치적 협상에 따른 제스쳐로 볼 수 있고, 징계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