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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조직= [[자유한국당]]<br>[[새로운보수당]]<br>[[미래를향한전진4.0]]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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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1_직명 = 비상대책위원장
|지도자1_직명 = 대표 권한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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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19일 (월) 19:10 판

{{{정당이름}}}
Logo of People Power Party of Korea.svg
정당 정보
이념 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반공주의,
민족보수주의,
우익 대중주의 (2017년부터)
웹사이트 http://www.peoplepowerparty.kr

국민의힘대한민국보수주의 정당이다. 21대 총선에서 도입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우회하기 위한 비례대표 위성정당으로 미래한국당을 두었다가 총선 이후 흡수합당하였다.

성향

과거 박근혜 탄핵 이후 새누리당이 거의 궤멸 직전까지 갔을 적에 강경한 집토끼들에 기대어 겨우 살아났기 때문에, 미래통합당에 이르기까지 발언들도 거세고 행보도 우익 대중주의를 내세운 행보를 보였다. 황교안 시기에는 아예 태극기부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극우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비록 총선 참패 이후 김종인이 비대위를 통해 당권을 잡으면서 상대적으로 온건해지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지만, 그 과정이 십중팔구 김종인의 원맨쇼라서 그가 물러난 뒤에 이러한 행보가 유지될지는 미지수다.

지역기반은 전통적인 보수진영의 텃밭인 TK, PK, 강원도이며, 서울의 강남 3구 및 충청도 일부와 대전광역시 일부를 포함한다. 민주당이 TK나 PK 지역구에 꾸준하게 후보들을 공천하는 것과 다르게 미래통합당은 호남 지역에 후보를 거의 공천하지 못하고 있다.

친박 의원들 자체는 이른바 텃밭이라 불리는 경상도권을 제외하면 거진 다 쓸려나간 상태지만, 수구 이미지를 여전히 벗지 못하는 탓에 민주당에 실망한 유권자들도 대부분 무당층으로 돌아서고 있다.

역사

광복 당시에는 미군정 및 소련군정이 들어섰는데,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때라 진보좌파는 남한에서 살아있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이 당시 만들어진 정당들은 남로당 등의 예외를 제외하면 거의 다 보수우파 정당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는 민주당도 마찬가지였다.

한국민주당(한민당) 시기

지주, 친일파, 우익 성향 독립운동가들이 반공의 기치 아래에서 뭉친 정당이다. 이승만을 도와주어서 그가 미군정 아래에서 영향력을 넓히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미군정의 비호 아래에서 덩치를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한민당의 도움을 받았지 딱히 소속된 적은 없었다. 이승만은 여전히 무소속이었으며, 내각은 여러 당의 인사들을 등용한 탕평(...) 인사였다. 한민당 소속 인사는 2명밖에 없었을 정도. 이에 불만을 가진 한민당은 점차 반 이승만으로 돌아선다. 미군정 부역세력인 한민당은 민주국민당으로 당 이름을 바꾸면서 분위기 쇄신에 나섰다.

자유당 시기

1951년에 이승만이 지지세력들을 모아서 창당한 정당이다. 이 정당이 명목상 국민의힘의, 더 나아가 보수정당들의 스타트 지점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말 그대로 온 국민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4.19혁명으로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탓에 국민의힘에서는 아예 선을 긋고 있다. 자유당이라는 이름이 흑역사가 된 것은 물론이다.

또한 민주국민당은 1955년에 민주당이라 이름을 바꾸면서 자유당 탈당파들을 모아 확대개편하는데, 어찌되었든간에 이승만 정부 시기 유일한 야당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민주당은 4.19 이후 내부분열로 공멸한다. 참고로 더불어민주당이 이 1955년 민주당을 시초로 삼고 있는데, 보았다시피 반 이승만 빼고는 내세울 것도 없는 한민당의 후예다. 김대중도 55년민주당을 거쳐서 신민당을 만들었기 때문에, 민주당도 본래는 보수정당이었다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

민주공화당 시기

1963년에 박정희가 지지세력들을 모아서 창당한 정당이다. 여기에는 자유당 및 민주당에서 정치활동을 했던 기존 인사들도 우르르 들어갔다. 민주공화당은 박정희가 암살당한 이후 와해되었는데, 대부분의 인사들은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으로 옮겨가고 일부 인사들은 관제야당 및 신민당으로 가기도 했다.

민주정의당 시기

1981년 전두환 및 신군부가 지지세력들을 모아서 창당한 정당이다. 6월 민주항쟁 이후 노태우를 겨우 대통령으로 배출하며 명맥을 잇다가, 삼당합당을 통해 민자당으로 탈바꿈한다.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시기

1990년 삼당합당을 통해 만들어진 정당으로, 지금과 같은 보수정당의 체제가 완성된 시기다. 이 정당이 실질적인 국민의힘의 스타트 지점이라 볼 수 있다. 합당에 참여한 세 정당은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 그리고 통일민주당이다. 민주정의당은 전두환 및 노태우 중심의 군정 후예였으며, 신민주공화당은 박정희 시대 2인자인 김종필 중심의 박정희 후예 세력이었고, 통일민주당은 김영삼 중심의 민주화 운동 세력이었다. 처음에는 당내 다수인 민정 계열이 우세했지만, 김영삼이 차세대 대권을 등에 업고 민정 및 공화계를 짓누르는데 성공한다. 이후에는 김영삼 주도로 운동권에서 전향한 자유주의 인사들을 받아들이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김문수, 이재오, 김성식, 박형준 등이 있다.

김영삼 집권 이후 YS와 JP가 사사건건 부딪치자 JP는 공화계를 이끌고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만들고, 민주자유당은 전두환/노태우 구속 이후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러나 민주계에서 민 후계자 이회창이 대선에서 지는 등 타격을 입자, 신한국당은 평민당의 후예로 껍데기만 남아있던 민주당과 합당하며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한나라당 / 새누리당 시기

김영삼은 IMF로 인해 엄청난 타격을 입은 채 지리절멸해갔고, 이회창이 당 총재에까지 오르면서 당을 주무른다. 하지만 이회창 총재의 리더십은 차떼기를 계기로 엄청난 타격을 입고, 이후 한나라당은 천막당사까지 차리는 등 초라한 시절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일개 얼굴마담이었던 박근혜가 노무현 탄핵 시도 직후 이뤄진 총선에서, 정동영의 노인비하 발언 등에 힘입어 엄청난 선방을 거둔다. 이때부터 박근혜는 선거의 여왕으로 떠오르며, 그때까지 남아있던 민정 및 일부 공화계가 뭉치는 중심 인물로 떠오른다.

노무현 정부가 레임덕에 빠지면서 열우당이 침체에 빠지자, 한나라당은 정권심판론을 내세우며 다시금 지지를 모았고, 때마침 서울시장을 하면서 주가를 높인 이명박이 민주계의 지지를 받으면서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이에 이명박과 박근혜가 서로 경쟁하던 그 당시 한나라당 17대 대선 경선은 사실상 대선이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정권심판론 및 경제대통령 이미지에 힘입어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한나라당은 10년만에 다시 여당이 된다. 하지만 한미FTA 당시 미국산 소고기 수입으로 인한 광우병 논란 때문에 이명박은 엄청난 타격을 입고, 그 이후 2008 세계금융위기에서 선방을 하는 등의 업적을 세우기도 하지만 본인 및 측근들의 비리가 끊임없이 나오는 탓에 이명박 정부 말기엔 어김없이 레임덕에 빠졌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다름아닌 박근혜(...)였다. 친이는 그 옛날 친노가 그랬듯이 폐족이 되었으며, 비박에 섞인 채로 명맥을 유지한다.

박근혜는 비대위를 통해 당권을 먹은 이후 한나라당의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며 어김없이 쇄신 행보에 들어갔다. 이렇게 이명박과 적극적으로 선을 그은 행보 덕택에 18대 대선에서 당선된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최순실에게 휘둘리는 행보를 보인 탓에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음은 물론, 박정희의 후광 덕분에 팬덤도 많아 콘크리트도 어느 정도 있었기에 새누리당에서도 진박공천(...)이 나오는 우스운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새민련이 더민주와 국민의당으로 분열된 20대 총선에서도 참패하면서 박근혜 정부에도 어김없이 레임덕이 찾아왔고, 새누리당도 위태로워졌다. 최순실에 의한 국정농단이 발각된 이후에는 새누리당은 말 그대로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갔다. 탄핵 시국에서 새누리당은 말 그대로 소멸 직전까지 굴러떨어졌으며, 유승민김무성 등의 비박 주류 세력들은 아예 바른정당으로 분당하기까지 한다.

자유한국당 시기

새누리당은 쇄신 차원에서 당명을 자유한국당으로 바꾼다. 도토리 키재기 수준의 대선 경선을 거치고 홍준표가 19대 대선 대선후보로 오른다. 홍준표는 대놓고 색깔론을 내세우면서 어떻게든 집토끼를 모으려고 애썼지만, 탄핵 이후의 대부분의 보수층은 자유한국당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선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안희정에 모였으며, 문재인이 경선에서 이기자 국민의당의 안철수에게 결집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철수가 토론에서 아마추어같은 모습을 보이자제가 갑철숩니꽈 안철숩니꽈 그 그만 좀 개롭히십시오, 보수표들은 결국 홍준표로 많이 모이기 시작한다. 대선 결과 홍준표가 안철수를 살짝 제치고 2위를 차지하면서, 향후 보수 진영의 주도권은 자유한국당이 가져오게 된다.바른정당은 반기문이 대선 도전에 GG치자 급격히 무너져간지 오래

대선 이후에는 대선에서 선방한 홍준표가 당권을 잡는다. 이 시기에 자유한국당은 집토끼를 모아서 겨우 살아난 탓인지 문재인 정부 때리기에 격렬히 나서는 등 강경한 대여 공세를 취한다. 하지만 그 당시엔 문재인 정부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하던 때일 뿐더러, 자유한국당은 여전히 박근혜 부역세력이라는 이미지를 떨쳐내지 못한 탓에 지선에서 참패한다. 이후에는 당내 다수세력인 친박을 중심으로 하여 황교안이 당권을 잡는데, 황교안은 아예 태극기집회에 연이어 나가는 등 계속해서 집토끼 끌어모으기에 바빴다. 때마침 조국 사태가 터지며 문재인 및 민주당의 철옹성 같은 지지율에도 균열이 난 터라, 이 전략은 성공적으로 보였다.

미래통합당 시기 및 현재

황교안은 21대 총선을 앞두고 보수표 대결집을 위해 바른정당의 후예인 새로운보수당을 포함한 보수대통합을 노렸고, 이를 통해 자유한국당은 미래통합당으로 탈바꿈한다. 대여공세를 통해 총선에서 다시금 이기려 했지만, 결과는 역대급 참패.민주당이 싫지만 미통당이 더 싫어 이후 미래통합당은 중심축으로 작용할 거물이 없는 무주공산 상태에 빠졌다. 현재는 김종인에 의해 국민의힘으로 당명이 바뀌는 등 대대적인 수술이 이루어지는 중이다.

21대 총선

최종적으로 미래통합당의 지역구는 82석을 얻는데 그쳤으며 비례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의 19석을 합쳐도, 선거 이전보다 무려 30여석 가까이 의석 숫자가 줄어들게 되었다. 강남을 제외한 수도권이 돌아서면서 참패를 겪었다. TK 전석을 석권하고 PK에서 2석을 탈환했으나 수도권/충청 지역의 압도적 패배에 빛이 바랬다.결국 총선은 참패하였고 겨우겨우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지역기반인 TK와 PK를 제외하면 사실상 지지기반이 사라진 형국이며 황교안 대표는 개표가 다 끝나기도 전인 4월 15일 오후 11시 40분경 드디어 사퇴하였다.

21대 총선의 패인으로는 크게 다음의 사항들이 지적된다.

  • 황교안 대표의 리더십 부재
    황교안 대표는 서울 출마를 선언했으나,[1] 출마 지역구를 일찌감치 정하지 못하고 늦게 결정했다. 여권 내 유력 차기 대권주자인 이낙연과의 대결을 피해 미룬 것. 그래서 이낙연과의 대결 프레임을 만드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종로 출마 이후 미래통합당은 당력을 종로에 집중하였다. 종로에서의 선전을 바탕으로 서울 선거 분위기를 끌어올리려는 전략. 황교안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낙연과의 지지율을 격차를 좁히는데에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당내 사건사고에서 통합의 리더쉽을 보여주지 못햇다. 비례정당 미래한국당의 반란을 진압하여 리더쉽을 보여주었다. 한선교 의원이 당을 사당화 하고 독자노선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미래통합당 영입인사를 후순위로 밀었다. 이를 진압하고 비례 공천을 원복시킨 것. [2] 그러나 정작 김형오 공관위원장이 갈릴 때 수수방관했다. 이른바 '문빠공천'으로 김형오가 강성지지층에게 비토받을때 자신의 계파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교체를 방치했다. 김형오가 설계한 개혁공천의 이미지를 퇴색되었다. 공천 주요 설계자가 내쫒겨 선거전략을 수립하는데 상당한 지장을 겪었다. 또한 박근혜의 옥중서신에 대해서도 반색을 표하면서 여전히 자신에게 친박의 색체가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고,
  • 일부 후보들의 막말 논란
    총선을 미래통합당의 패배로 이끈 결정적 요인 중 하나. 당의 중도 확장성을 차단하고 진보진영의 총결집을 불러왔다. 부천시 차명진 후보가 선거기간 토론회에서 뜬금없이 세월호 유족들이 문란한 행위를 했다는 막말을 내뱉았다. 물론 차후보는 이전부터 꾸준히 세월호 유족들에 대한 반감을 대놓고 표출하던 인물이었지만 선거 과정에서 국민 여론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서 선거기간 후반부에 터진 최악의 언사로 평가받고 있다. 당 내부에서도 차후보의 발언을 개탄하는 비판이 속출했고, 김종인 선대위장은 당장 차후보를 제명해야 한다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러나 당 지도부는 원칙대로 윤리위에 회부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황교안 대표가 차후보를 당의 후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이미 말을 주워담는데에는 한계를 보였다. 또한 선거 중 세월호 사건에 대해 반감이 극심한 지지층 일각에서 차명진을 비호하기도 했다.
    관악구 김대호 후보도 3040세대 비하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 특히 중도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3040세대를 대놓고 저격하는 발언으로 그렇지않아도 중도층의 지지가 아쉬운 당의 선거전략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김대호 후보와 차명진 후보 모두 윤리위에 회부되었지만, 김후보는 제명된 반면 차후보는 탈당권고라는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지면서 이중잣대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제명이 반복되었다는 점에서 중도층에 자중지란으로 비추어졌다.
  • 공천파동
    김형오 공천위원장의 공천과정에서 강남을 김미균 후보의 과거 문재인 대통령 옹호 발언이 문제가 되었다. [3] 현 대통령에 강한 반발을 가진 지지자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결국 후보 공천이 취소되고, 김형오 공관위원장이 물러나야 했다.
    김형오가 물러 나면서 황교안이 인천 연수을 지역구에 압력을 행사했다. 공천에서 탈락한 민경욱을 복귀시킨 것. [4] 다만 민경욱이 지역구 경쟁력은 더 괜찮았다. 사천이 당에 도움이 된 특수 케이스이다. 여조에서도 앞서고 있었고, 차명진 막말이 없었으면 당선되었을 것이다.

2021 재보궐선거

대표적으로 서울특별시부산광역시의 선거전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그동안 불리하게 작용한 악재를 조금은 막아주는 완충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서울의 경우 前 서울시장 박원순 시장의 사망으로 인한 공석, 부산의 경우 오거돈 시장의 성추행으로 인한 공석이 생기면서 보궐선거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선거구의 의원이 사퇴나 사망 등으로 공석이 생기면서 2021년 4월 7일 수요일 재보궐선거를 치루게 되었다. 국민의힘에서는 이 투표가 차후 대선 등 선거에서 지대한 영향을 알아볼 수 있는 척도로 사용 될 수 있었기에 특별히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자칫 투표자들이 국민의힘으로 몰리지 않고 국민의 당으로도 몰린다면 민주당에게 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후보의 단일화는 꼭 필요했다. 그리하여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여럿 이해 충돌을 거친 끝에 안철수 후보가 출마 사퇴를 선언하고 오세훈 후보와 단일화를 적극 보여주면서 안철수의 표도 오세훈에게 몰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안철수가 오세훈의 유세 활동마다 같이 참여하고 오세훈 역시 이를 치켜세우면서 안철수를 지지하는 표심을 붙들어 놓으려 한 모습도 보였다.

개표의 30% 정도 부분부터 오세훈이 치고 나가더니 50%부터는 확실하게 차이가 나면서 결국 박영선 후보를 낙선시키고 서울 시장에 당선되었다. 또한 언론에서는 잘 거론되지 않았으나 국민의힘 부산시장 후보인 박형준도 약 2배의 표차를 내면서 당선되었다.

또 선거구 6곳을 제외한 재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이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서 제일 의미가 있는 부분이라면 전통적인 국민의당 지지 연령층인 60대 이상보다 20대 남성층이 70% 이상의 표를 오세훈에게 던졌다는 점이다.[5] 이를 단적으로 20대~30대 남성이 보수로 돌아섰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페미니즘 정책으로[6] 인해 분노한 남성들이 민주당을 몰아내기 위해 국민의힘으로 투표를 했다고 볼 수 있는 맥락인데다 여당의 지속적인 정책 실패를 끊기 위한 투표 행사로도 볼 수 있는 등 해석점이 많아 복합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

반면 20대 여성의 박영선 지지율은 국민의힘보다 높았다.

하지만 마냥 낙관적인 입장은 또 아닌데 만약 민주당이 이악물고 20-30대 남성을 위한 정책을 페미니즘이 찢어 발겨지도록 내는 경우에는 세가 흐트러질 가능성은 있다는 점이다. 남성층이 반페미니즘 위치에 이익에 따라 표를 던지는 위치에 있는 만큼 정책과 실무적으로 페미니즘을 제거하고 20-30대 남성층을 우대하거나 남녀가 진정 평등한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데 성공하면 표를 끊을 수 있다고 볼 수는 있다. 하지만 민주당 내부에서 노선의 문제로 의견 대립이 심화되는 양상이라 당장 다가오는 선거에서 해낼 수 있을지 의견이 분분한 상황. 물론 해낸다고 해서 표가 또 몰리라는 법도 없다.

또 민주당을 제외하더라도 국민의힘은 과거 극우세력, 극우유튜버, 태극기 집회, 전광훈 목사의 사랑제일교회, 친일행위 등으로 여러 번 청년층에게 배척당한 이력이 있는 만큼 주의 할 필요성이 있다.

각주

  1. 종로 출마 망설이는 황교안, 오늘도 다른 사람들에겐 "총선 승리 위해 헌신해야" 홍준표 “황교안, 강북 험지 출마선언으로 모범 보여라”
  2. 미래한국당, 새 비례 명단…당선권 모두 '황교안 색깔'
  3. '문빠공천'부터 '사천'논란까지, 통합당 강남공천에 무슨일이… 민주당도 손내밀었던 김미균…"30분만에 후보추천 철회를 경험"
  4. 민현주 "황교안, 김형오에 경선 부탁…黃, 친박 지도부에 휘둘려", 뉴시핌, 2020년 3월 26일
  5. 이는 30대의 65% 이상보다 더 높다. 또한 부산에서도 20대 연령층이 65%라는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6. 페미니즘 정책은 아니나 남성을 탄압하는 정책이었던 HTTPS 차단, 여성징병제 관련 대통령 의견, 성인지감수성 발언, 알페스 청원의 결과, 세월호 참사의 결과, 양심적 병역거부 상황, 기득권의 20대 남자 공격(유시민의 "20대 남자는 롤하고 축구보느라 공부하는 여자들에게 경쟁에 밀린다, 박영선의 "20대 남자는 경험치가 부족하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