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준이치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小泉純一郞
인물 정보
출생 1942년 1월 8일 (82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국적 일본
학력 야마자키초등학교
마보리중학교
요코스카고등학교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
직업 정치인(제87~89대 일본 총리)
종교 신토
정당 자유민주당
신체 169cm, A형
배우자 전처 미야모토 카요코
가족 외할아버지 고이즈미 마타지로
아버지 사메지마 준야, 어머니 고이즈미 요시에
첫째 누나 고이즈미 미치코, 둘째 누나 고이즈미 다카코, 셋째 누나 고이즈미 노부코, 남동생 고이즈미 마사야
장남 고이즈미 고타로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 둘째며느리 타키가와 크리스텔, 손자, 손녀
3남 미야모토 요시나가
활동기간 1972년 국회의원 당선
제87대 내각총리대신: 2001년 4월 26일~2003년 11월 18일
제88대 내각총리대신: 2003년 11월 19일~2005년 9월 20일
제89대 내각총리대신: 2005년 9월 21일~2006년 9월 26일

제87~89대 일본 총리를 지낸 정치인.

고이즈미 가문[편집 | 원본 편집]

일본의 많은 정치인들이 그러하듯, 고이즈미 준이치로 역시 집안 대대로 정치를 세습해온, 소위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고이즈미 가문은 준이치로의 외할아버지인 고이즈미 마타지로(小泉又次郞) 때부터 정치에 입문했다. 마타지로는 본래 야쿠자(폭력배) 출신이었으나[1] 수완이 좋아 정치계에 입문했고, 고향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서 국회의원이 된다. 이후 고이즈미 일족은 대대로 요코스카시를 지역구로 차지하고 있다.

마타지로는 게이샤였던 아야베 나오(綾部ナオ)와 결혼했지만,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양자와 양녀도 두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친자식을 낳고 싶었던 마타지로는, 이시카와 하츠(石川ハツ)라는 여자를 첩으로 들여 1907년 고이즈미 요시에(小泉芳江)라는 딸을 낳았다.[2] 요시에는 마타지로의 유일한 친자식으로 각별히 사랑받으며 자랐고, 1929년 일본여자대학 가정학과를 졸업했다.

마타지로는 훌륭한 청년을 데릴사위로 들여 가업(정치)을 물려주고 싶었으나, 요시에가 사메지마 준야(鮫島純也)라는 보잘것없는 남자와 사귀자 대단히 분노했다. 준야는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일찍이 양친을 모두 잃고서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다가, 당시 마타지로가 간사장을 맡고 있던 입헌민정당에서 사무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의 준야는 미남이어서, 요시에는 그런 준야에게 첫눈에 반한 것이었다. 마타지로의 눈에 준야는 사윗감으로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요시에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준야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계속 준야와의 결혼을 반대하자, 그녀는 가출까지 감행했다.

결국 마타지로는 하나뿐인 자식을 이기지 못했다. 그는 신문에 요시에와 준야를 찾는 광고까지 냈고, 준야가 고이즈미 가문의 가업(정치)을 계승하는 조건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찬성하겠다고 밝혔다. 도쿄 아오야마(靑山)의 아파트에서 동거하고 있던 요시에와 준야는, 그제야 마타지로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준야는 데릴사위가 되어 처가의 성씨를 따라 ‘고이즈미 준야’로 개명했고, 장인의 뒤를 이어 정치인이 되었다. 준야와 요시에의 사이에서는 첫째(장녀) 미치코(道子), 둘째(차녀) 다카코(隆子), 셋째(3녀) 노부코(信子), 넷째(장남) 준이치로, 다섯째(차남) 마사야(正也)가 태어났고, 5남매 모두 ‘고이즈미’ 성씨를 따랐다.

성장과 정치계 입문[편집 | 원본 편집]

준이치로는 요코스카시의 명문학교인 요코스카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삼수 끝에 일본의 최고 명문 사립대학으로 꼽히는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영국 University College London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1969년 아버지 준야가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일본으로 귀국하여 27세의 나이로 가업(정치)을 물려받는다.

처음 국회의원에 출마했던 1969년에는 낙선했지만, 자유민주당의 우두머리이자 제67대 일본 총리를 지낸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의 수하에서 정치를 배우면서 준이치로는 성장했다. 2년 후인 1972년에는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 줄곧 국회의원을 역임하다가 총리까지 되었다.

총리 시절과 퇴임 이후[편집 | 원본 편집]

총리 시절에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역사왜곡, 독도 문제, 시마네현(島根縣) 의회의 ‘다케시마(竹島)의 날’ 제정 등으로 한국과 험악한 관계였다. 한편 그는 재임 중에 민영화관광산업에 힘쓰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북한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했다.

일본 왕실의 왕위 계승 문제에 대해서는 의외로 꽤 진보적인 견해를 보였다. 일본 왕실에서는 남성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데, 나루히토 왕세자는 결혼 8년 만인 2001년에야 간신히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낳은 후로 더 이상 자녀를 두지 못했다. 게다가 1965년에 나루히토 왕세자의 남동생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가 태어난 이후로 공주들만 줄줄이 태어났다.[3] 때문에 ‘여성의 왕위 계승을 허용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왕실에서는 키쿠코 비가 공개적으로 찬성을 표했고, 준이치로도 여왕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만약 여성의 즉위가 허용되면, 아이코 공주가 할아버지 아키히토 일왕과 아버지 나루히토 왕세자의 뒤를 이어 일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파들은 강력히 반대했고, 토모히토 왕자는 “후궁을 두어서라도 아들을 낳아, 남성만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시대착오적 발언까지 했다.[4] 준이치로는 이러한 보수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결국 2006년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가 늦둥이 셋째 히사히토 왕자를 낳음으로써 일본 왕실에는 41년 만에 왕자가 태어났고, 여왕 허용론은 잠잠해져 버렸다.

퇴임 이후로는, 자신의 정치적 제자였던 아베 신조와 대립했다. 총리 시절에는 원자력발전소에 긍정적이었지만,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입장이 바뀌어 탈원전 운동을 하고 있다.

결혼과 이혼[편집 | 원본 편집]

1978년, 당시 36세였던 준이치로는 22세의 미야모토 카요코(宮本佳代子)와 결혼했다. 카요코는 에스에스(エスエス) 제약회사의 창업주인 타이도 쇼잔(泰道照山)의 외손녀이다.

카요코는 외할아버지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준이치로와 결혼했으나, 고이즈미 가문에서의 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고이즈미 일족은 모두가 합심하여 준이치로를 정치계에서 성공시키려고 노력했고, 카요코가 아무리 노력해도 고이즈미 일족의 눈에 그녀는 ‘정치인의 아내’로서 만족스럽지 못했다. 고이즈미 일족은 거대 제약회사 회장인 쇼잔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지원받길 기대했으나, 준이치로와 카요코의 결혼을 반대했던 쇼잔은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았고, 이 역시 갈등요소가 되었다.

또한 준이치로는 정치적으로나 사생활에서나 형제들과 무척 가깝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결혼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첫째 누나 미치코는 결혼하여 딸을 하나 낳았지만, 이혼하여 딸을 데리고 도로 친정으로 돌아왔으며 딸의 성씨도 ‘고이즈미’로 바꾸었다. 셋째 누나 노부코는 고등학교 졸업 후로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밑에서 정치를 배우며 일했고,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며 준이치로의 비서 역할을 했다. 남동생 마사야는 준이치로의 사설비서였다. 둘째 누나 다카코도 친정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시누이들과 시동생이 남편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챙기고, 아무리 노력해도 지적과 소외만 당하는 생활을, 카요코는 도저히 견디지 못했다. 주변에서 준이치로에게 충고도 했지만, 항상 준이치로는 부모와 형제들을 우선시하며 아내인 카요코를 홀대했다.

결국 결혼 4년 만인 1982년, 임신 6개월이던 카요코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준이치로와 이혼하여 고이즈미 가문을 떠났다. 어린 두 아들은 고이즈미 가에 두고 나와야 했으며, 이후로 고이즈미 일족은 카요코와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

준이치로는 “결혼보다 이혼에 훨씬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었다”며 재혼하지 않고 줄곧 독신으로 지냈고, 카요코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녀[편집 | 원본 편집]

  • 장남 고이즈미 고타로(小泉孝太郞): 1978년 7월 10일 (45세) 출생. 장남이지만 가업을 이어받지 않았고,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 1981년 4월 14일 (43세) 출생. 고이즈미 가문의 가업을 이어받아 정치인이 되었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나운서 타키가와 크리스텔과 결혼, 1남 1녀를 낳았다.
  • 3남 미야모토 요시나가(宮本佳長): 1982년생. 준이치로와 카요코가 이혼한 이후에 태어나 어머니 카요코의 슬하에서 자랐으므로, 형들과 달리 아버지의 성씨 ‘고이즈미’ 대신 어머니의 성씨 ‘미야모토’를 따랐다.

준이치로와 카요코의 이혼 당시, 고타로는 고작 4살이고 신지로는 1살이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헤어진 형제는 고모들과 가정부들의 손에 자라났다. 신지로는 2020년에 낳은 첫째(아들)의 이름을 ‘고이즈미 미치노스케(小泉道之助)’라고 지었는데, 형과 자신을 키워준 첫째 고모 ‘미치코(道子)’의 이름에서 道를 따서 작명한 것이다.

고타로와 신지로는 어머니뿐 아니라 동생 요시나가와도 만나지 못하고 자랐다. 요시나가는 아버지 준이치로와 친가 고이즈미 일족을 만나고 싶어서 연락했지만, 고이즈미 일족은 번번이 거절하며 만나주지 않았다. 2001년 준이치로의 어머니 요시에가 사망했을 때도 고이즈미 일족은 카요코와 요시나가의 문상을 거절했지만, 카요코가 강력히 버티자 간신히 문상을 허락했다. 그러나 잠깐의 문상이 끝나자 카요코와 요시나가는 곧장 빈소에서 쫓겨났고, 고이즈미 일족은 그들에게 일절 말을 걸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준이치로가 정치 일선에서 은퇴한 2010년에야 부자(父子) 4인이 한자리에 모여 만났고, 요시나가가 결혼하던 2013년에는 카요코까지 5명이 다함께 만났다. 이후 준이치로는 3명의 아들에게 우애롭게 지낼 것을 당부하는 등, 가족관계가 호전되고 있는 듯하다.

각주

  1. 온몸에 문신이 있어서, 별명이 ‘이레즈미(문신) 대신(いれずみ大臣)’이었다.
  2. 이후 하츠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3남매를 낳고 살았다.
  3. 1969년 4월 18일 구로다 사야코(55세), 1981년 12월 20일 아키코 공주(42세), 1983년 10월 25일 요코 공주(40세), 1986년 3월 8일 쓰구코 공주(38세), 1988년 7월 22일 센게 노리코(35세), 1990년 9월 15일 모리야 아야코(33세), 1991년 10월 23일 코무로 마코(32세), 1994년 12월 29일 카코 공주(29세), 2001년 12월 1일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22세).
  4. 정작 토모히토 왕자도 딸만 2명이다. (아키코 공주, 요코 공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