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지중해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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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지중해 세계란?

고대 지중해 세계는 미케네 문명(B.C.1600년대)부터 서로마제국이 멸망(476년)까지를 지칭하는 시대를 말한다. 이 시기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실현되었고, 알렉산더가 페르시아제국을 무너뜨리고 헬레니즘 세계를 이룩했으며, 로마는 카르타고를 이기고 갈리아와 각 주변지역을 장악해나가면서 지중해를 로마의 해로 만들었다.

에게 문명

19세기만 하더라도 에게 문명은 신화 속 이야기였다. 이를 진실이라 주장하면 골룸이었다. 그런데 고졸에 일리아드에 푹 빠진 덕후 하인리히 슐레이만이 독학으로 고고학을 배우더니 사업으로 번 돈을 전부다 트로이 유물을 찾으러 소아시아 지역을 뒤진다. 당시 기성학계나 일반사람들의 생각은 트로이는 신화 속 이야기인데 유적이 있겠어?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트로이 유적이 등장한 것이었다. 이후 미케네가 발견되면서 에게문명은 신화가 아니라 역사가 되었고 많은 고고학자들이 이를 발견하기 위해 그리스와 터키 일대로 몰려들었다.

아마추어덕후 고고학자의 공헌으로 시작된 에게문명 발굴은 가속화되었고 에게문명,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이 발견되었다.

미노아 문명

미노아 문명은 미노스 왕그 미노타우루스를 가둔 왕 맞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미노아 문명은 크레타 섬에서 발전하였는데 오리엔트 문명에 큰 영향을 받았다.[1] 미노아 문명은 크레타 섬이나 에게 해의 섬에서 발전했기에 성벽을 건축하지 않았다. 대신 항해술이 발달했고, 상공업이 발전하였다.

미노타우루스의 미궁(Labyrinth)은 미노아 문명이 고도의 건축기술을 보유했음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독특하게도 미노아 문명에서는 노예거주지가 발견되지 않았다. 미케네 문명의 경우 대규모 노예전용거주시설이 발견되었지만 미노아에서는 이와 비슷한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노예제가 존재했는지 안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또한 미노아 문명은 제정일치 사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2]

미케네 문명

미케네 문명은 그리스인의 선조이다.[3] 펠로폰네소스 대륙에 위치한 미케네 문명은 미노아 문명을 통해 오리엔트의 선진문물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미케네 문명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대륙 전역에 걸쳐 수많은 소국가를 형성하였고, 서로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미케네의 아가멤논에 의해 제압되었고, 아가멤논은 그리스 전역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후 아가멤논은 그리스보다 발전되고 부유한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역을 장악하려고 했고, 그래서 이오니아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가장 강력한 국가인 트로이를 침공하여 트로이 전쟁을 일으켰다.

미케네 문명은 피라미드 사회이다. 왕을 정점으로 하여 촌장인 파시레우(pasireu), 촌민인 다모(damo), 그리고 노예로 계층화된 사회였다. 미케네 시대의 왕국들의 특징은 오리엔트 국가의 형태와 유사한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메소포타미아 중심 도시였던 기르수나 마리에서 발견된 점토판의 내용과 미케네 일대에서 발견된 점토판 내용에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그리스는 산악지역이라 노동력을 대규모로 조직할 관개 농경의 필요성이 없었고, 당연히 이는 오리엔트 국가들에 비해 미약한 국가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되었다.[4]

미케네의 원형무덤과 거석으로 이루어진 성벽은 귀족들의 권한이 컸음을 증명하고 있다. 미케네 문명은 미노아 문명과 달리 상무적(尙武的)이어서 문화예술의 중심은 전쟁과 사냥이 되었다. 또한 이 문명은 뱀여신을 숭배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케네 문명이 왜 몰락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통일된 의견이 없다. 바다에서 이주민이 몰려와서인지 아니면 발칸에서 도리아 인들의 남하로 인한 것인지, 또는 화산이나 지진 등 천재지변에 의한 것인지 등등 아무튼 미케네 문명은 망했다. 이는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국가가 황폐화되는 사회조직의 소멸과 전쟁의 생활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 소아시아 서안으로 이주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란 속에서 지배층이 사라져버리고 전쟁반달의 지속으로 인해서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 암흑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 마지막에 등장한 것이 호메로스오디세이아일리아드이다.[4]

그리스 세계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쇠퇴

그리스 세계의 가장 중요한 폴리스의 등장은 앞서 말한 암흑시기의 혼란이 진정된 이후이다. 이 시기 이민족의 이주가 마무리되고 사회는 안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농업기술의 향상으로 전보다 많은 곡식을 생산하게 된다. 사회적 안정과 식량생산량의 증가는 인구증가로 이어졌다. 문제는 그리스라는 지역이 산악지대가 많고 척박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인구는 증가되지만 토지는 부족하게 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먹을게 없어!!!

인구증가로 인한 식량부족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시도된 방법은 타 지역의 식량을 빼앗는 것이다.레이드가자! 약탈이 빈번히 일어나자 자신들의 식량을 지키기 위해서 언덕을 중심으로 모여서 방비를 하게 되었고, 이것이 폴리스의 기원이 되었다. [5]

폴리스 형성 이후 타 지역의 식량을 빼앗기 어려워지자 그리스인들은 잉여인구를 방출이라쓰고 추방이라 읽게하는 정책을 펼친다. 즉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6] 이러한 방법을 통해 그리스는 잉여 인구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귀족층들의 권한이 강대해졌다. 그 이유는 이 시기 전쟁은 1:1의 일기토 형식이었다. 당연히 1:1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장비발이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다고 한들 무장을 더 많이 갖춘 사람이 이긴다. 게임이나 인생이나 탬발이다 그러니 이 당시 전장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말과 중장비를 스스로 조달할 수 있는 귀족뿐이었다. 전장에서 귀족의 역할이 중요했으니 이들이 정치적 권한을 독점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렇게 귀족들이 폴리스의 지배층으로 군림하였다.

폴리스의 발전(아테네)

아테네는 도리아인들의 남하에 이주한 선주민들에 의해 세워졌다. 신화에 의하면 영웅 테세우스가 사람들을 모아 건설했다고 전해진다. 아테네의 정치는 아르콘(Archon)[7]과 아레오파구스(Arefpagus)[8]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 두 조직모두 귀족을 중심적 기구였기고 평민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에 대해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다.

평민들의 불만이 확대되자 아르콘으로 선출된 드라콘(B.C. 621)은 이들의 불만에 대해 억제해야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즉 중벌주의를 채택해 평민들의 어떠한 불만도 표시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특히 빚이 많아서 못 갚으면 노예가 되는 것을 법으로 규정하였다.고대판 신체포기각서 이는 평민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그 수위는 높아져만 갔다.

평민들의 높은 불만은 솔론에 의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신임 아르콘인 솔론은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였다. 먼저 솔론은 평민들을 위해 부채를 말소시키고, 부채노예들을 해방했으며, 부채로 인한 인신예속을 금지했다. 또한 솔론은 민회에 최하층도 참여시키고, 시민법정을 만들었으며, 부족마다 100명씩 추천하여 400인회를 설립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평민들의 경제적 요구사항과 정치적 요구사항을 만족시켜주었다. 하지만 평민들의 요구사항을 만족시키는 것은 기존 귀족층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솔론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재산에 따라 차등적으로 정치참여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신설하였다.[9] 솔론의 개혁은 평민과 귀족들의 불만을 해소하면서 서로를 만족시켰고, 이에 그는 조정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솔론에 의해 수립된 아테네의 정치체제인 금권정치제는 메가라 전쟁을 통해서 크게 변화되게 된다. 메가라 지역은 아테네가 있는 아티카 평원에서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진입하는 지역에 있었다. 아테네는 이곳을 장악하여 그 지역의 평원과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진입하려는 발판을 만들려고 하였다. 메가라 전쟁은 기존의 전쟁과 다르게 흘러갔다. 과거 전쟁이 귀족 중심의 기사들에 이루어졌다면, 메가라 전쟁은 평민 중심의 중장보병이 핵심적이 역할을 하게 되었다.

메가라 전쟁과정에서 평민층이 급성장하였고, 이는 귀족층과의 평민층 간의 권력투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등장한 사람이 그리스판 나폴레옹 페이시스트라토스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메가라 전쟁 중에 큰 업적을 남긴 전쟁영웅이었다. 그는 평민층의 지지를 받아 종신아르콘에 취임하였다.(B.C.561) 그는 참주가 된 것이다.[10]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평민층의 지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평민들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정권획득과정에서 얻게 된 토지를 빈농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였고, 상공업자들의 권한과 특권을 많이 부여하여 상공업을 장려시키려 하였다.[11]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평민층의 힘을 강화하여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동시에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페이시스트라토스 사후 그의 두 아들인 히파르코스와 히피아스가 참주직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이 둘은 무능했다. 결국 이들의 정책은 평민과 귀족 모두에게서 불만을 야기했고 귀족파와 평민파가 힘을 합쳐 이 둘을 쫓아내어 참주정을 종식시켰다.

참주제를 종식시킨 이후 평민파와 귀족파는 이후 아테네의 정치체제에 대해서 분쟁을 거듭했다. 기존의 솔론식 제도[12]를 유지하자는 입장이었고, 평민파는 솔론식 제도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이 두 주장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이 와중 등장한 인물이 클레이스테네스이다.

귀족 명문가 출신인 클레이스테네스는 평민파와 귀족파 간의 분쟁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평민파의 지도자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귀족파에 비해 군세가 부족한 그는 스파르타의 군세를 빌려 귀족파를 분쇄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정권을 확보한 클레이스테네스는 개혁을 추진하였다.

먼저 그는 부족중심의 행정구역을 지역중심으로 재편하였다. 이는 귀족들의 세력약화를 유도한 것이었다. 귀족들의 권한이 부족 내 지위에서 결정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지역적 편제로 전환시켜 부족이라는 개념을 약화시키려 한 것이었다. 또한 이 제도를 만들면서 발생하게 된 군사지휘권 문제[13]를 해결하기 위해서 10인의 군사지도자(스트라테고스;Strategos)를 선출하여 이들에게 군대지휘권을 부여하였다.

두 번째로 구민 모두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솔론식 제도에서 정치참여의 제한을 철폐하고 구민이고 20세 이상 성인남성이라면 모두에게 참정권을 주었다.

세 번째는 500인회를 설립하였다. 500인회는 솔론의 400인회와는 달리 재정, 전쟁, 외교 등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고 의결하는 기구로 바뀌었다. 과거 아레오파구스 회의가 지니고 있던 권한의 대부분이 500인회로 넘어왔다.

네 번째로 시민법정의 권한을 강화시켜 시민법정이 모든 사법적 재판을 결정했다.

이러한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아르콘과 아레오파구스의 권한을 약화시켰고, 동시에 귀족들의 권한도 약화되었다. 또한 클레이스테네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 같은 참주가 또다시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도편추방제를 도입하였다.

폴리스의 발전(스파르타)

THIS IS 스파르타는 미케네 문명 말기 도리아인에 의해 세워진 나라이다. 그리스 북부에 살던 도리아인들은 남하하였고 그 중 일부가 펠로폰네소스의 스파르타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스파르타 근처의 라코니아 지역을 장악하였고(B.C. 8세기 중반) 이후 메세니아 평원을 장악하면서(B.C. 8세기 말) 대형 폴리스로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스파르타인이 아닌 도리아인은 시민권은 없으나 자유민인 페리오이코이가 되었고, 비도리아계 주민들은 헤일로타이, 예속농민이 되었다. 이러한 계급체제는 메세니아 전쟁으로 통해 큰 변화를 경험하였다. 제1차 메세니아 전쟁(B.C. 725-705)을 통해 메세니아 일대를 장악한 스파르타는 그 지역 주민들을 페리오이코이로 만들거나 헤일로타이로 만들었다. 이는 제2차 메세니아 전쟁(B.C. 640-620)을 야기 시켰다. 스파르타의 통치는 가혹했고, 특히 페리오이코이나 헤일로타이들이 감당할 수준 이상을 요구했다. 이는 반란으로 이어졌다. 메세니아의 반란은 대규모로 일어났기에 진압하는데만 20년의 세월이 걸렸다.

스파르타의 체제를 만든 것은 B.C. 9세기의 전설상의 인물인 리쿠르고스(Lycurgus)에 의해서 성립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메세니아 전쟁을 통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스파르타의 체제는 먼저 2명의 왕이 있고, 30인의 장로회가 있다. 이곳에서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지만 여기서의 결정은 모두 민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14] 또한 주요 국정운영은 민회가 선출하는 임기 1년의 에포르(Ephor) 5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에포르는 아르콘과 같은 집정관의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감사관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또한 스파르타는 전시체제를 항시 유지하였다. 사생활은 금지되어 있었고, 30세까지 병영생활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스파르타인들이 병영생활과 전쟁에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생산은 페리오이코이와 헤일로타이 들에 의해 생산되었다. 즉 스파르타 사회는 5~10%의 스파르타인들을 나머지 95~90%의 페리오이코이와 헤일로타이가 지탱하는 구조였고, 스파르타인들은 오로지 전쟁만을 준비하는 전쟁기계였다. 당연히 이러한 군사문화 속에서 문화나 사상이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 전쟁은 최초의 동양과 서양 간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현대 올림픽 종목인 마라톤의 유래가 되는 전쟁이다. 동시에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 사회에 큰 변화를 주었다.

페르시아는 B.C. 500년경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후 페르시아는 서부로 진출하였는데 그 중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을 장악하였다. 이오니아 지방은 그리스 식민지들로 이루어진 지역이었고, 당연히 폴리스 간의 알력이 극심하였다. 그래서 이오니아 지방은 가장 큰 폴리스인 리디아가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당하자(B.C. 548) 몰락하였다.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지방을 장악한 이후 그리스 지역으로 진출할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리스 지역은 척박했기에 그에 비해서 트라키아나 마케도니아 지역을 노렸다.[15]

페르시아가 척박한 그리스 지역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이오니아 반란(B.C. 499-494)에 의한 것이었다. 이오니아 주민들의 반란은 페르시아 입장에서 갑작스러운 것이었다.[16] 페르시아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하였지만 약 5년의 시간이 걸려 진압할 수 있었다.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한 이후 이 반란이 아테네와 그리스 폴리스들의 사주 및 지원을 받았다는 소식을 알게 된 다리우스는 그리스의 폴리스들을 정벌할 생각을 구상하게 된다. 이로서 페르시아 전쟁의 서막이 올라갔다. 다리우스는 대군을 동원했기에 쉽게 전쟁이 끝날 것이라 예상했으나 아토스 곳에 정박한 페르시아 함대가 갑작스런 폭풍우를 만나 대파되어 수십 척이 파손되고 2만 명의 병사가 죽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페르시아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B.C. 492)

이후 2년이 흘러 B.C. 490년 다리우스는 그리스 원정을 감행한다. 이를 제1차 그리스 원정이라고 말한다. 페르시아 군은 지난 원정 때 함대가 폭풍우로 파괴된 경험에 사모스 섬을 지나 우회하여 그리스로 향했다. 페르시아 군은 에레트리아를 점령하고 신전을 불태우는 등 초반에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의 중장보병 밀집대형 전술로 6400여명의 병사들이 사망하여 크게 패배했다. 그런데 페르시아 군은 그리스 군에 의해 마라톤에서 전황이 좋게 돌아가지 않자 전투 중간에 병력의 상당수를 정박해 놓은 배에 탑승시켜 아테네로 향했다.빈집털이!!! 이 작전은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 전투로 인해 기진맥진한 그리스 군대가 마라톤에서 아테네로 하루 만에 올 일은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마라톤에서 싸웠던 전 부대가 고스란히 아테네 시에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본 페르시아 해군은 뱃머리를 돌려 퇴각하였다.[17]

이후에도 페르시아의 왕인 다리우스는 원정 준비에 몰두하였지만,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아들인 크세르크세스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처음에는 그리스 원정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측근들과 신하들이 계속해서 조언하자 그리스 원정을 결심하게 된다. 10년 간 공백기에 그리스도 페르시아 원정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했다. 아테네의 신임 스트라테고스가 된 테미스토틀레스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빨리 배 만들어 주세요.’‘’를 주구장창 시전하여 결국 수많은 반대를 속에서 대함대를 건조하였다.의지의 그리스인

B.C. 480년 나는 관대하다크세르크세스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그리스를 원정하였다. 이를 페르시아의 제2차 그리스 원정이라고 말한다. 크세르크세스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육해병진작전을 시행했다. 그래서 그리스 원정은 금방 끝이 날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육군이 300!!!! 레오디나스의 스파르타 군에 의해 저지당하자 육해병진작전이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래도 페르시아 군대는 막강하였다.

아테네는 페르시아 대군이 몰려오고 있고, 스파르타는 겨우 300명만 보내주고 이런 상황에서 육전은 가망이 없음을 알고 전 시민을 살라미스로 이주시켰다. 빈공백지인 아테네를 장악한 크세르크세스는 전쟁이 막바지에 들어섰다고 생각했다. 그는 살라미스로 도망친 아테네인들을 격퇴하기 위해 대함대를 그곳을 파견하였다. 페르시아 해군은 페니키아 최정예 해군이었기에 듣보잡의 그리스 해군에게 질리는 없을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의 아테네군은 10년간 이날을 위해 준비했다.준비를 한 부대였다. 방심한 페르시아 해군 지휘관들은 아테네 군의 기습을 당해 크게 패배하였고 해군이 패배하고 전쟁이 장기화될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에 겨울도 다가오자 크세르크세스는 군대를 물리게 되었다.

B.C. 479년 크세르크세스는 다시 병력을 모아 침공하였다. 페르시아의 제3차 그리스원정이다. 이번에는 해전보다는 철저히 육전을 택해 전투를 벌였다. 당연히 작년에 털린 아티카와 아테네는 쉽게 뚫렸다. 아테네 시민들은 다시 살라미스 섬으로 돌아가 스파르타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스파르타도 4만에 이르는 병력을 파견하였다. 또한 각 폴리스에서 지원군이 도착하여 10만의 군세를 유지하였다. 페르시아군과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붙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군이 승리하면서 페르시아의 3차 그리스 원정은 막을 내렸다.[18]

아테네 제국의 등장과 그리스 세계의 분열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동맹을 맺게된다. 이 동맹의 맹주국으로는 아테네가 선정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19] 물론 스파르타가 불만을 표시했지만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비해 명분이 약했다.[20] 이로써 아테네를 맹주로 한 델로스 동맹이 탄생하였다.[21]

델로스 동맹의 운영은 맹주국인 아테네가 위임받았다. 초기 델로스 동맹의 운영은 나름 건전하게 운영되었다. 델로스 동맹은 반페르시아 투쟁을 지속하여 에게 해에서 페르시아 세력을 물리치고 이오니아 지방을 그리스 세계로 다시 편입시켰다. 문제는 페르시아의 위협이 종식된 이후였다.

델로스 동맹의 목적인 페르시아 위협이 해결된 상황에서 델로스 동맹을 해제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에 대해 맹주국인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지속을 외쳤고, 이를 각 도시국가들에게 설파했다. 요약하자면 지금은 조용한 페르시아가 다시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의견에 동의한 도시국가들에 의해 델로스 동맹은 유지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의 자금을 횡령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테네는 페르시아나 기타 외부세력에 맞서기 위해 모은 델로스 동맹 자금을 아테네 시에 투입했다. 그야말로 횡령한 것이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 자금을 쓰는 것만으로도 많은 경제적 이득을 취하였다. 선박의 건조와 병력의 모집, 군수품 구입이 모두 아테네에서 이루어졌기에 아테네에서는 많은 물자와 자금이 모여들었고, 이런 물적집적지 역할로 인해 아테네는 큰 번영을 누렸다. 그럼에도 아테네는 여기서 더 나아가 델로스 동맹 자금을 마음대로 횡령하기 시작했다.

아테네는 직접 민주주의를 실행하기 위한 비용을 모두 델로스 동맹 자금에서 융통하였다. 공직자 임금, 회의 거마비, 각 시민생활지원금 등등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그리고 델로스의 자금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된 아테네는 커다란 번영을 이루었다. 특히 민주정치는 이 시기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먼저 B.C. 462년 에피알테스는 귀족회의기구인 아레오파구스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켜 명예기관으로 남겨버렸다. 그래서인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에피알테스는 그 다음에 원인 모르게 살해당했다. 에피알테스 다음으로 등장한 사람이 페리클레스이다.

페리클레스는 민회의 권한을 대폭 상승시켰다. 과거 500인회에서 관할하던 외교, 전쟁, 민사 등의 다양한 문제들을 이제는 민회가 총괄하게 되었고, 500인회는 민회에 제출한 의안의 준비와 민회의 결정사항을 집행하는 기구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10인 스트라테고스 회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이제 스트라테고스 회의는 최고정무위원회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고, 오늘날의 내각과 같은 위치에 올랐다. 스트라테고스의 특징은 재선이 가능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페리클레스가 30년 넘게 아테네의 지도자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22] 또한 모든 관리들은 추첨제였고 임기는 1년으로 제한하였다. 그리고 사법제도에 있어서 배심원 6000명으로 된 시민법정이 유일한 것이었다. 이들이 모두 모여서 재판심리를 진행하지는 않고, 500명 내외 위원회로 나누어져서 재판을 담당했다. 대부분의 관직의 추첨제와 순환제를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수당을 제공했기 때문이었고, 그 수당은 당연히 델로스 동맹 자금으로 지급되었다.[23]

제국으로 변모한 아테네 시의 통치는 당연히 다른 폴리스들에게 불만을 야기하였다. 특히 스파르타의 불만은 가장 강려크했다. 그래도 이미 델로스 동맹 자금으로 빵빵해진 아테네와 전쟁하기에는 스파르타도 두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아테네가 메가라를 위협하자 스파르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서부진출을 방어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다. 이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사실 아테네의 승리로 쉽게 끝날 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난 지 얼마 안 있어 아테네에 페스트가 돌았고, 아테네의 위대한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사망했다. 위대한 리더를 잃어버린 아테네 민주주의는 곧바로 중우정치에 빠져 혼란을 거듭했다. 대표적인 예는 알키비아데스가 이탈리아 원정 중에 그를 규탄하여 파면시킨 것이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생존하기 위해서 스파르타로 넘어갔고, 가서 자신의 원정계획을 다 불었다. 당연히 아테네의 이탈리아 원정은 실패로 끝났고 여기서 아테네는 많은 병력과 함선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아테네는 아직 희망이 있었다. 해상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스파르타 해외식민지를 접수하면서 스파르타를 궁지에 몰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B.C. 406년 아테네 함대는 스파르타 함대를 에게 해에서 격퇴하면서 승기를 잡았다. 그러나 그 전투 중에 폭풍우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익사하였다. 이에 격분한 익사자의 가족들은 민회에서 장군들의 구조작업이 철저하지 못하였음을 규탄하였고 6명의 장군이 집단 처형되었다. 중우정치의 표본 결국 해전에 능숙한 지휘관을 다 죽인 결과는 B.C. 405년 헬레스폰트 입구에서 스파르타 함대에 의해 패배하였다. 이로써 식량공급지인 흑해연안을 잃어버린 아테네는 쉽게 스파르타에 의해 함락 당했다.

스파르타에 함락된 아테네는 30인의 독재를 거쳐 다시 민주정으로 복귀하였지만 이미 중우정치로 썩을 대로 썩은 민주정이었다.[24] 아테네를 물리치고 그리스 세계의 주인이 된 스파르타는 아테네보다 더 심하게 동맹시들을 쥐어짜냈고 당연히 반발을 일으켰다. 이에 테베시와 아테네시를 각각 중심으로 하는 반스파르타 연맹이 2개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아테네에 대한 동맹시들의 지지는 미약했고, 결국 아테네 해상동맹은 테베 중심의 보이오티아 동맹에 편입되었다. 스파르타는 1만 대군을 파견하여 보이오티아 동맹을 격퇴하려고 하였다. 이에 테베는 6000명의 군사를 내보냈다. 병력 상으로는 부족했지만 테베군의 지휘관인 에파미논다스는 사선진으로 스파르타군을 씹어 먹었다. 이후 전쟁의 주도권은 테베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이후에도 지속되는 분쟁 속에 누구 하나가 주도적인 세력이 되지 못하였다. 그리스세계가 혼란에 빠져있을 때, 북쪽에서 성장한 마케도니아 왕국이 그리스 세계를 전부다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스 문화

그리스 문화는 오리엔트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리스 세계의 독특성으로 인해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특히 철학은 서양철학의 원류를 형성하였고,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하였다.

그리스 역사는 새로운 역사서술을 탄생시켰다. 그리스의 역사서술은 오리엔트의 연대기적 서술을 넘어서는 새로운 역사서술이었다.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의 저술인 『역사』는 페르시아 전쟁을 주제로 하였지만 그 내용은 두 문명 간의 충돌로 설명하였다. 다만 그는 그리스 중심적인 서술을 하였고, 페르시아를 전제적인 국가로 그리스를 자유로운 국가로 설명하였고, 그리스를 선 / 페르시아를 악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이 있었지만 문명사적인 배경과 유래를 넓게 고찰한 점에서 높이 평가 받는다.

또 다른 역사가인 투키디데스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펠로폰네소스의 전쟁사를 저술하였다. 그는 다양한 사료를 수집하여 이를 전체적 서술과 유기적으로 연결하였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 그의 서술을 과학적 비판적 역사서술의 시조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저술은 전쟁의 경과에만 초점을 맞춰, 그 당시 기원전 5세기 아테네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는 점에서 한계로 지적된다.

그리스 문학은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기원으로 본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트로이아 전쟁을 주제로 한 영웅과 신에 대한 서사시이다. 이는 그리스인들에게 성경과도 같은 것이었으며 그리스인들의 교육에 필수적인 교재였다. 이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그리스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7세기 보이오티아의 헤시오도스는 그리스 농민들의 삶과 노동의 귀중함을 주제로 시를 불렀고, 또한 『신통기』를 통해 신의 계보를 정리하였다. 기원전 6세기경에는 에게 해의 레스보스 섬 출신 사포라는 여류시인과 보이오티아의 핀다로스 등의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서정시가 등장하였다.[25]

기원전 5세기경에는 비극이 주류를 이루었다. 비극은 기원전 6세기 말에 등장하였다. 최초의 비극작가는 아이스퀼로스이다. 그는 총 70편을 작성하였다고 하나 전해지는 것은 7편이다. 그의 작품인 『페르시아인』,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교만과 신에 대한 도전이 받는 응징의 무서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대표작인 『오레스테스 3부작』은 트로이아 전쟁영웅 아가멤논 왕가의 비극을 그렸다.[26][27]

소포클레스도 100여 개의 작품을 썼다고 하나, 현존하는 것은 7편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안티고네』[28]와 『오이디푸스 왕[29]이 있다. 에우리피데스도 70여 편을 썼다고 하나, 19편만 남아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히폴리토스』, 『메데이아』가 있다.[30]

비극 다음에 등장한 것이 바로 희극이다. 현재 알려진 희극작가는 아리스토파네스 한 명이다. 하지만 그보다 많은 사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리스토파네스도 수많은 작품을 썼다고 전해지지만 남아있는 것은 11편이 전부이다. 희극은 주로 풍자와 조롱을 주제로 했기에 그 당시 유명한 인물을 상대로 한 조롱이 주제이다. 『구름』에서는 소크라테스를 야유했고, 『개구리』에서는 아이스퀼로스와 에우리피데스를 에우유리피데스로 바꾸어서 조롱하였다.[31]

그리스의 미술은 풍부한 대리석을 기본으로 하여 독자적인 미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그리스 미술의 특징은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단순하면서도 고귀하고 잔잔하면서도 위대함을 표현하였다. 특히 기중에 대한 형식으로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그리고 코린트식이 전해지고 있고, 고대 그리스 예술의 정점이라 표현되는 파르테논 신전의 경우 도리아식으로 지어졌다.[32]

조각의 경우 페리클레스 시대 제일의 조각가인 페이디아스의 아테네 여신상이 최고라 전해지지만 남아있지 않는다. 기원전 4세기 스코파스나 프락시텔레스 등의 작품을 볼 때, 그리스 조각은 인체의 인상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각은 현존하는 것이 없고, 대부분 모조품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33]

그리스 회화는 별로 없으나 아테네 도자기를 통해서 그 형태를 알 수 있다. 기원전 7~6세기부터 아테네인들은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넣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그림은 일상생활에 쓰인 도자기에 그려졌기에 이를 통해서 당시 그리스인들이 생활 속에서 예술을 중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34]

헬레니즘 세계

알렉산더가 사망한 기원전 323년부터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기원전 30년까지를 헬레니즘 시대라 부른다.[35] 헬레니즘 세계는 알렉산더 대왕의 유산을 바탕으로 세워진 세계이다. 알렉산더의 성공은 너무나도 경이적이었다. 저 서방의 조그만 나라가 거대한 페르시아를 이수스 전투가우가멜라 전투, 총 두 번이나 이길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거기에 페르시아 제국 너머 인도까지 도달한 그의 업적은 신화적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다. 얼마나 신화적이었으면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그를 신격화하였다.[36]

알렉산더의 거대한 제국은 알렉산더가 갑자기 젊은 나이에 죽으면서 알렉산더 제국은 휘하 장군들과 후계자들 사이에서 권력다툼이 일어났다. 이 권력다툼 속에서 알렉산더 제국은 3개의 주요 가문으로 분열되었다. 오리엔트와 소아시아 일부를 장악하는 시리아의 셀레우쿠스 가문,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가문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누스 가문이었다. 3개 국가로 정립된 이후에도 이들은 서로 전쟁을 지속하였다.

알렉산더 사후 헬레니즘 세계는 지속되는 전쟁과 분쟁으로 인해 점점 축소되었다. 먼저 가장 이질적인 중앙아시아 지역이 떨어져나갔고, 소아시아에서는 다양한 소규모 국가들이 독립하였다. 헬레니즘 세계가 분열과 전쟁을 거듭하는 동안 서쪽에서는 로마가 이탈리아를 통일하면서 당시 서지중해의 지배자인 카르타고에 도전하였다.

헬레니즘 세계의 사회

헬레니즘 세계는 알렉산더 제국의 유산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알렉산더 제국은 동 지중해 세계와 오리엔트 세계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하였다. 이 경제적 통합은 이후 제국이 분열되어도 그 명맥은 유지되었다. 특히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지역을 제외하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알렉산더 제국 시절 통용되던 주화와 언어를 사용하였고, 이는 상공업을 발전시켰다. 상업의 발전 속에서 신용거래와 금융이 발전하였다.

또한 알렉산더가 페르시아의 금괴를 얻고 이 금괴를 부하들에게 상여금으로 주거나 건물을 짓기 위해 사용하면서 많은 소비가 발생했고, 이는 도시 발전을 촉진시켰다. 헬레니즘 세계의 대표적인 도시로는 알렉산드리아(당시 인구 50만), 페르가뭄, 비잔티움, 로도스 섬, 안티오크가 있었다. 이 지역 모두 상공업이 발전하였다.

상공업의 발전으로 인한 도시의 발전은 도시민들에게 공급되는 식량의 양이 늘어났고, 이는 식량부족으로 이어졌다. 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헬레니즘 세계의 국가들은 국유지를 분배하고 노예로 경영하는 대농장이 등장하였다.[37]

헬레니즘 사회는 중산층인 그리스인들이 하층민인 원주민들을 착취하는 구조였고, 이 구조는 이 둘 사이의 소요와 분쟁을 야기시켰다. 이런 분쟁이 점차 많아지고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지만 당시 헬레니즘 국가들은 이런 분쟁을 제어하거나 통제하지 못하였고, 결국 국력이 약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헬레니즘 문화

헬레니즘 문화에 대해 과거의 설명은 동서문화의 융합이었다. 그러나 최근 헬레니즘 문화에 대한 해석은 그리스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로 보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 아티카 지방어인 코이네가 공용어로 쓰였고, 아티카 지역의 화폐가 공용화폐로 사용되었다. 그렇기에 헬레니즘 문화는 그리스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적인 문화이다.

그리스 문화에서 특히 철학부분에서는 키프로스의 제노가 창시한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가 창시한 에피쿠로스 학파가 있다. 스토아 학파는 세계시민론을 주창하였지만 이는 이상적인 의견이었고, 현실인 행복을 추구하였다. 스토아 학파는 현실적 행복은 금욕을 통해 이룰 수 있다는 금욕주의를 주창하였다. 에피쿠로스 학파도 개인의 행복을 중시하였는데, 특히 즐거움(pleasure)을 좋은 것이라 주장하였다. 다만 에피쿠로스의 즐거움은 정신적인 즐거움을 의미했지만 시간이 흘러 향락주의로 변질되었다.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모두 개인주의를 강조하였고, 이는 과거 철학과 다른 특징이다.

헬레니즘 미술은 현실적이고 개성화되었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라오콘군상이 있다. 또한 이 시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70만권에 이르는 장서가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해 다양한 학문이 발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38] 천문학에서는 아리스타르코스(B.C. 310–230)가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 측정방식에서 지동설은 맞지 않았고, 이에 서기2세기 프톨레마이오스는 힙파르코스(B.C. 190-126)의 천동설(지구중심설)을 채택하여 천문학총론(Almagest)를 제작하였다.

수학의 분야에서는 에우클레이테스 또는 유클리드가 기하학을, 아폴리니우스가 삼각법을 고안하였다. 과학에서는 아르키메데스(B.C. 297-212)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지리학분야에서도 발전이 있어 에라토스테네스(B.C. 275-174) 지구의 지름을 계산하였는데 이는 오차가 200마일(321km)밖에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정확한 것이었다.[39]

로마 세계

로마 세계란, 로마 건국(B.C.753)부터 서로마 제국 멸망(476년), 혹은 동로마 제국 멸망(1453년)까지를 말한다. 로마 세계는 유럽에 천주교와 기독교등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유일신 신앙이 뿌리잡히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서구인들의 야만인과 문명인을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의 시작이 되었다.

더 읽어볼 거리

  • 민석홍. 『서양사개론』. 서울: 삼영사. 2004.
  • 배영수 편. 『서양사강의』. 파주: 한울. 2007.
  • 프랑수아 슈아르 지음. 김주경 옮김. 『알렉산더』. 서울: 해냄출판사. 2004.
  • 민석홍 · 나종일 · 윤세철 지음. 『세계문화사』.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15.

각주

  1. 미노아 문명 유적지에서 발견된 선상A문자석판과 오리엔트 문명의 석판과 유사한 문양이나 유사한 글자가 많기 때문이다.
  2. 참고로 미노아 문명은 미케네 문명과 달리 문자(선상A문자)가 해독되지 않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3. 미케네 문명의 문자인 선상B문자가 해독되었고, 그 문자가 그리스어와 유사하며 그리스어의 기원으로 추정되기에 미케네 문명은 그리스인의 선조로 본다. 미노아는 아니다
  4. 4.0 4.1 배영수 편, 『서양사강의』, 파주:한울, 2007, pp.29-32.
  5. 이 시기 폴리스는 성벽이 없는 그냥 언덕이었다,
  6. 참고적으로 여기서의 식민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그리스의 식민은 어떤 지역에 가서 현지인과 어울리는 것이고, 19세기의 식민은 다른 지역을 장악하여 착취하는 것이다.
  7. 집정관으로 군사담당, 종교담당, 민사담당 총 3인이었으나 나중에 9인으로 늘어났다.
  8. 귀족회의로 대부분의 중요한 사안을 결정했다.
  9. 이것 때문에 금권정치라 불렸으며, 과거 6차 교육과정에서 솔론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0. 아르콘은 과거 종신제였지만 시간이 흘러 1년 임기제로 바뀌었다. 그런데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자신의 인기를 이용하여 종신아르콘으로 취임한 것이었다.
  11.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귀족은 토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중세에서도 귀족은 토지, 즉 장원을 보유한 사람을 칭했다. 그렇기에 상공업을 장려한다는 것은 비귀족세력을 키우겠다는 의미이다.
  12. 재산에 따른 정치참여에 차등
  13. 과거 부족중심의 행정구역에서는 부족장이 행정구역의 대표자임과 동시에 군지휘관이 되었다.
  14. 왕과 장로회가 중요사안을 결정하고 이것을 민회에 가져가서 민회의 승인을 받아야 성립된다. 왕과 장로회는 정책 입안을 민회는 정책 승인을 해주는 기구이다.
  15. 그리스 지역은 척박할 때로 척박한 지역이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기후도 개판 평지도 없다. 거기에 광물이 많이 나오는 지역도 아니었다. 그에 비해서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지방은 충분한 평지와 광물들이 산재되어 있었다.
  16. 페르시아의 점령정책은 상당히 온건하다. 괜히 오랫동안 대제국을 유지한 게 아니다.
  17. 당시 마라톤 전투를 위해 아테네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장병들을 동원했기에 아테네에서는 방비할 병력이 없었다. 그래서 만약 조금이라도 아테네군이 늦게 도착했다면 아테네는 불타고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은 성공했을 것이다.
  18. 이후 전개 사항은 페르시아 전쟁에 추가바람
  19.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1,2,3차 원정에 모두 참전하여 격퇴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20. 2차에서는 겨우 300명만 파견했고, 3차에서 본격적으로 나섰다.
  21. 델로스 섬에 동맹본부를 마련하여 델로스 동맹이라고 불린다.
  22. 사실상의 독재
  23. 이는 그리스가 민주주의를 실행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타인들의 희생을 담보로 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24. 이 민주정이 소크라테스를 죽인 민주정이다.
  25. 민석홍, 『서양사개론』, 서울: 삼영사, 2004, p.83
  26. 아가멤논이 전쟁에 이기려고 딸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치고 이에 분노한 부인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자신의 애인과 함께 아가멤논을 죽인다. 이후 아들 오레스테스는 누이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와 그 애인을 죽인다는 이야기로 막장 중의 막장이다. 예나 지금이나 막장은 최고의 소재이다.
  27. 민석홍, 『서양사개론』, 서울: 삼영사, 2004, pp. 83-84.
  28. 숙부인 테베의 참주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끝까지 스스로의 양심의 소리에 따라 죽는 안티고네의 이야기.
  29. 자기도 모르게 부친을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이야기. 막장은 최고의 코드
  30. 민석홍, 『서양사개론』, 서울: 삼영사, 2004, p.84
  31. 민석홍, 『서양사개론』, 서울: 삼영사, 2004, p.85
  32. 민석홍, 『서양사개론』, 서울: 삼영사, 2004, p.85
  33. 민석홍, 『서양사개론』, 서울: 삼영사, 2004, p.86
  34. 민석홍, 『서양사개론』, 서울: 삼영사, 2004, p.86
  35. 배영수 편, 『서양사강의』, 파주:한울, 2007, p.52
  36. 예를 들어 피르다우시가 쓴 『왕들의 서』에따르면, 죽어가는 다리우스가 알렉산더를 보면서 ‘I'm your fatherbrother.’라 말했다고 전한다. 즉,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의 이복동생이고 정치적인 혼란 속에 마케도니아로 가서 왕자가 되었다는 개소리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프랑수아 슈아르의 『알렉산더』 p.102 참조
  37. 이집트는 제외한다. 이집트는 당시 모든 경제를 국가가 통제하는 기구였다.
  38. 그러나 로마의 침략과정에서 소실되어 정확히 어떤 분야가 발달했는지는 알 수 없다
  39. 이는 지구가 둥글었다는 것을 그리스시대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