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지중해 세계

토론 문서에서 문서를 기르는데 동참해 주세요. 토론과 관련된 내용을 무단 수정할 경우 제재받을 수 있습니다.

틀:넘겨주기 있음 Greek-phoenician-colonies.jpg

고대 지중해 세계란?

서양사에서 고대 지중해 세계는 미케네 문명(B.C.1600)부터 서로마제국이 멸망(476년)까지를 말한다. 고대 지중해 세계는 문화, 정치, 사회등 여러 방면에서 이후 유럽의 역사가 발전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에게 문명(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

150년 전만 하더라도 이 문명은 신화 속에만 있던 것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하인리히 슐레이만이라는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트로이를 발견하면서 이 문명의 실체가 들어나기 시작했다. 이후 고고학자들의 공헌을 통해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이 구체적인 역사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미노아 문명은 미노스 왕의 이름을 따와 명명된 문명이다.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을 받은 미노아 문명은 크레타 섬에서 발전하였다. 미노아 문명은 인도-유럽어족보다는 소아시아어족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근거는 없다. 미노스 문명은 항해술이 발달했고, 다양한 상공업이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미노스의 미궁(Labyrinth)과 같은 유적지를 통해 미노아 문명이 상당히 높은 수준의 문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미노아 문명에는 노예거주지가 없다는 점에서 노예제의 유무가 불확실한 상황이다. 미노아 문명의 선상A문자가 해독되지 못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신화나 유물을 통해 미노아 문명이 제정일치 사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케네 문명은 선상B문자가 해독되면서 그리스인의 선조임을 알게 되었다. 미케네 문명은 인도-유럽어족이며, 선상B문자는 그리스어의 기원이 되었다. 펠로폰네소스 대륙에 위치한 미케네 문명은 미노아 문명을 통해 오리엔트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다. 미케네 문명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걸쳐 많은 소국가를 건설하였고, 서로 투장하였다. 이 투쟁은 미케네의 아가멤논이 제압하였고, 아가멤논은 그리스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후 아가멤논은 그리스보다 발전된 소아시아 지역으로의 진출을 고려했고, 트로이 전쟁을 기획했다.[1]

미케네 문명은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였다. 왕을 정점으로 하여 촌장인 파시레우(pasireu), 촌민인 다모(damo), 그리고 노예로 계층화된 사회였다. 미케네 시대의 왕국들의 특징은 오리엔트 국가의 형태와 유사한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메소포타미아 중심 도시였던 기르수나 마리에서 발견된 점토판의 내용과 미케네 일대에서 발견된 점토판 내용에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그리스는 산악지역이라 노동력을 대규모로 조직할 관개 농경의 필요성이 없었고, 당연히 이는 오리엔트 국가들에 비해 미약한 국가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되었다.[2] 원형무덤과 거석으로 이루어진 성벽은 이러한 귀족들의 권한이 방대했음을 증명한다. 미케네 문명은 미노아 문명과 달리 상무적(尙武的)이어서 문화예술의 중심은 전쟁과 사냥이 되었다. 또한 이 문명은 뱀여신을 숭배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케네 문명이 왜 몰락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통일된 의견이 없다. 바다에서 이주민이 몰려와서인지 아니면 발칸에서 그리스인들이 남하했는지 말이다. 아무튼 미케네 문명은 붕괴되었고, 이는 사회조직의 소멸과 전쟁의 생활화국가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이다. 이때 소아시아 서안으로 이주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란 속에서 지배층이 사라져버리고 전쟁반달의 지속으로 인해서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암흑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 마지막에 등장한 것이 호메로스오디세이아일리아드이다.[2]

그리스 세계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쇠퇴

그리스 세계의 가장 중요한 폴리스의 등장은 앞서 말한 암흑시기의 혼란이 진정된 이후이다. 이 시기 이민족의 이주가 마무리되고 사회는 안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농업기술의 향상으로 전보다 많은 곡식을 생산하게 된다. 사회적 안정과 식량생산량의 증가는 인구증가로 이어졌다. 문제는 그리스라는 지역이 산악지대가 많고 척박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인구는 증가되지만 토지는 부족하게 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3]

인구증가로 인한 식량부족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시도된 방법은 타 지역의 식량을 빼앗는 것이다.레이드가자! 이런 일이 빈번히 발생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식량을 지키기 위해서 언덕을 중심으로 모여서 방비를 하게 되었고, 이것이 폴리스의 기원이 되었다. [4]

폴리스 형성 이후 타 지역의 식량을 빼앗기 어려워지자 그리스인 들은 잉여인구를 방출하는 정책을 펼친다. 즉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5] 이러한 방법을 통해 그리스는 잉여 인구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귀족층들의 권한이 강대해졌다. 그 이유는 이 시기 전쟁은 1:1의 일기토 형식이었다. 당연히 1:1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장비발이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다고 한들 무장을 더 많이 갖춘 사람이 이긴다. 실전이나 게임이나 인생이나 탬발이다 그러니 이 당시 전장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말과 중장비를 스스로 조달할 수 있는 귀족뿐이었다. 전장에서 귀족의 역할이 중요했으니 이들이 정치적 권한을 독점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렇게 귀족들이 폴리스의 지배층으로 군림하였다.

폴리스의 발전(아테네)

아테네는 도리아인들의 남하에 이주한 선주민들에 의해 세워졌다. 신화에 의하면 영웅 테세우스가 사람들을 모아 건설했다고 전해진다. 아테네의 정치는 아르콘(Archon)[6]과 아레오파구스(Arefpagus)[7]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 두 조직모두 귀족을 중심적 기구였기고 평민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에 대해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다.

평민들의 불만이 확대되자 아르콘으로 선출된 드라콘(B.C. 621) 은 이들의 불만에 대해 억제해야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즉 중벌주의를 채택해 평민들의 어떠한 불만도 표시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특히 부채로 인한 자유의 상실을 명백히하여 평민들의 불만을 더욱 촉발시켰다. 이러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드라콘에 의해 첫 번째 개혁이 이루어졌다. 드라콘은 중벌주의, 죄가 있으면 강하게 처벌한다는 원칙을 고수했고, 부채로 인한 자유상실을 명백히 했다. 당연히 이는 많은 평민들의 불만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불만이 누그러진것은 조정자 솔론이 아르콘으로 임명된 결과였다. 솔론이 단행한 개혁의 특징은 평민들의 불만을 해소시키면서, 이로인해 발상하는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시킨 것이었다. 먼저 솔론은 평민들을 위해 부채를 말소시키고, 부채노예들을 해방했으며, 부채로 인한 인신예속을 금지했다. 이는 평민들에게 큰 호응을 주었다. 또한 솔로은 민회에 최하층도 참여시키고, 시민법정을 만들었으며, 부족마다 100명씩 추천하여 400인회를 설립했다. 하지만 이러한 평민들의 정치발언권의 획득은 기존 기득권층인 귀족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솔론은 재산에 따라 차등적으로 정치참여권을 부여하였다.[8] 솔론은 평민과 귀족들의 상반된 요구를 중재한 개혁을 했기에 조정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테네 정치체제의 변화는 메가라 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진입하는 메가라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기존 귀족들이 중심인 기사보다는 평민들의 중장보병이 가장 큰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메가라 전쟁을 통해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군사영웅으로 등장하였다. 그는 평민층의 지지를 받아 B.C. 561년 종신아르콘에 취임하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참주이다.[9]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평민들의 지지를 받아 정권을 장악했기에 평민들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먼저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얻게된 토지를 빈농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였다. 또한 상공업을 장려하였다.[10] 이러한 정책을 통해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참주제는 페이시스트라토스 사후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두 아들[11]들이 참주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이 둘은 무능했고, 사회혼란만 야기하였다. 이에 귀족파와 평민파는 힘을 합쳐 이들을 쫓아냈다. 이로써 참주제는 종식되었다. 그러나 참주제를 종식한 이후 정치체제를 어떻게 하느냐를 두고 귀족파와 평민파가 분쟁을 거듭했다. 귀족파는 기존의 솔론의 개혁[12]을 유지하자는 입장이었고, 평민파는 정치참여에 재산제한을 제거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이 두 주장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이 와중 등장한 인물이 클레이스테네스이다.

귀족 명문가 출신인 클레이스테네스는 평민파와 귀족파 간의 분쟁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평민파의 지도자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귀족파에 비해 군세가 부족한 그는 스파르타의 군세를 빌려 귀족파를 분쇄하였다. 정권을 확보한 클레이스테네스는 개혁을 추진하였다. 먼저 그는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평민층의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기존의 부족 중심의 행정구역을 지역 중심의 행정구역으로 재편하였다. 동시에 모든 구민에 참정권을 부여하여[13] 500인회를 설립하였다. 500인회는 솔론의 400인회와는 달리 재정, 전쟁, 외교 등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고 의결하는 기구로 바뀌었다. 또한 시민법정의 권한을 확대시켰다. 과거 부족중심의 행정구역에서는 부족장이 행정구역의 대표자임과 동시에 군지휘관이 되었다. 그러나 이를 지역중심으로 재편했기에 군지휘관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클레이스테네스는 10인의 군사지도자(스트라테고스;Strategos)[14]를 선출하게 한 다음 이들에게 군대지휘권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아르콘과 아레오파구스의 권한을 약화시켰다.[15]그리고 이 시기 도편추방제가 수립되기도 했다.

폴리스의 발전(스파르타)

스파르타스파르타!!!!!!!는 미케네 문명 말기 도리아인에 의해 세워진 나라이다. 그리스 북부에 살던 도리아인들은 남하하였고 그 중 일부가 펠로폰네소스의 스파르타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스파르타 근처의 라코니아 지역을 장악하였고(B.C. 8세기 중반) 이후 메세니아 평원을 장악하면서(B.C.8세기 말) 대형 폴리스로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스파르타인이 아닌 도리아인은 시민권은 없으나 자유민인 페리오이코이가 되었고, 비도리아계 주민들은 헤일로타이, 예속농민이 되었다. 이러한 계급체제는 메세니아 전쟁으로 통해 큰 변화를 경험하였다. 제1차 메세니아 전쟁(B.C. 725-705)을 통해 메세니아 일대를 장악한 스파르타는 그 지역 주민들을 페리오이코이로 만들거나 헤일로타이로 만들었다. 이는 제2차 메세니아 전쟁(B.C.640-620)을 야기시켰다. 스파르타의 통치는 가혹했고, 특히 페리오이코이나 헤일로타이들이 감당할 수준 이상을 요구했다. 이는 반란으로 이어졌다. 메세니아의 반란은 대규모로 일어났기에 진압하는데만 20년의 세월이 걸렸다.

스파르타의 체제를 만든것은 B.C. 9세기의 전설상의 인물인 리쿠르구스(Lycurgus)에 의해서 성립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메세니아 전쟁을 통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스파르타의 체제는 먼저 2명의 왕이 있고, 30인의 장로회가 있다. 이 곳에서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지만 여기서의 결정은 모두 민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또한 주요 국정운영은 민회가 선출하는 임기 1년의 에포르(Ephor) 5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에포르는 아르콘과 같은 집정관의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감사관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또한 스파르타는 전시체제를 항시 유지하였다. 사생활은 금지되어있었고, 30세까지 병영생활을 하도록 되어있었다. 스파르타인들이 병영생활과 전쟁에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생산은 페리오이코이와 헤일로타이 들에 의해 생산되었다. 즉 스파르타 사회는 5~10%의 스파르타인들을 나머지 95~90%의 페리오이코이와 헤일로타이가 지탱하는 구조였고, 스파르타인들은 오로지 전쟁만을 준비하는 전쟁기계였다. 당연히 이러한 군사문화 속에서 문화나 사상이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 전쟁은 최초의 동양과 서양 간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현대 올림피 종목인 마라톤의 유래가 되는 전쟁이다. 동시에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 사회에 큰 변화를 주었다.

페르시아는 B.C. 500년경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후 페르시아는 서부로 진출하였는데 그 중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을 장악하였다. 이오니아 지방은 그리스 식민지들로 이루어진 지역이었고, 당연히 폴리스 간의 알력이 극심하였다. 그래서 이오니아 지방은 가장 큰 폴리스인 리디아가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당하자(B.C. 548) 몰락하였다.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지방을 장악한 이후 그리스 지역으로 진출할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리스 지역은 척박했기에 그에 비해서 트라키아나 마케도니아 지역을 노렸다.[16]

페르시아가 척박한 그리스 지역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이오니아 반란(B.C. 499-494)에 의한 것이었다. 이오니아 주민들의 반란은 페르시아 입장에서 갑작스러운 것이었다.[17] 페르시아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하였지만 약 5년의 시간이 걸려 진압할 수 있었다.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한 이후 이 반란이 아테네와 그리스 폴리스들의 사주 및 지원을 받았다는 소식을 알게된 다리우스는 그리스의 폴리스들을 정벌할 생각을 구상하게 된다. 이로서 페르시아 전쟁의 서막이 올라갔다. 다리우스는 대군을 동원했기에 쉽게 전쟁이 끝날 것이라 예상했으나 아토스곳에 정박한 페르시아 함대가 갑작스런 폭풍우를 만나 대파되어 수십척이 파손되고 2만명의 병사가 죽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페르시아군은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B.C. 492)

이후 2년이 흘러 B.C. 490년 다리우스는 그리스 원정을 감행한다. 이를 제1차 그리스 원정이라고 말한다. 페르시아 군은 지난 원정 때 함대가 폭풍우로 파괴된 경험에 사모스 섬을 지나 우회하여 그리스로 향했다. 페르시아 군은 에레트리아를 점령하고 신전을 불태우는 등 초반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의 중장보병 밀집대형 전술로 6400명 가량의 병사들이 사망하면서 전투에 크게 패해 승세가 기울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마라톤 지역에서 철수하여 바로 아테네를 직접 공격하러 갔지만,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한 군세가 전부다 아테네로 달려와 방비를 하자 함대는 아테네 공격을 포기하고 뱃머리를 돌리게 되었다.[18]

이후에도 페르시아의 왕인 다리우스는 원정 준비에 몰두하였지만,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아들인 크세르크세스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처음에는 그리스 원정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측근들과 신하들이 계속해서 조언하자 그리스 원정을 결심하게 된다. 10년 간 공백기에 그리스도 페르시아 원정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했다. 아테네의 신임 스트라테고스가 된 테미스토틀레스는 대규모 함대가 필요함을 역설하였고 많은 반대들을 설득하면서 대함대를 건조하였다.

B.C. 480년 크세르크세스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그리스를 원정하였다. 이를 페르시아의 제2차 그리스 원정이라고 말한다. 크세르크세스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기에 그리스 원정이 쉽게 진행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괜히 육로와 해로로 따로 군대를 진군시킨게 아니다. 그러나 육군이 300!!!! 레오디나스의 스파르타 군에 의해 저지당하자 육해병진작전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나 테르모필레는 결국 함락되었고 아테네를 장악하게 되었다. 아테네를 장악한 다음 펠로폰네소스로 진입하기 위해 살라미스 해협을 장악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의 아테네군은 10년간 이날을 위해 준비했다.준비를 한 부대였고, 지리적 이점도 있었다. 거기에 페르시아 해군 지휘관의 방심한 지휘로 결국 대패하였다. 거기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겨울이 다가오자 크세르크세스는 군대를 물리게 되었다.

B.C. 479년 크세르크세스는 다시 병력을 모아 침공하였다. 페르시아의 제3차 그리스원정이다. 이번에는 해전보다는 철저히 육전을 택해 전투를 벌였다. 당연히 작년에 털린 아티카와 아테네는 쉽게 뚫렸다. 아테네 시민들은 다시 살라미스 섬으로 돌아가 스파르타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스파르타도 4만에 이르는 병력을 파견하였다. 또한 각 폴리스에서 지원군이 도착하여 10만의 군세를 유지하였다. 페르시아군과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붙게되었는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군이 승리하면서 페르시아의 3차 그리스 원정은 막을 내렸다.[19]

아테네 제국의 등장과 그리스 세계의 분열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동맹을 맺게된다. 이 동맹의 맹주국으로는 아테네가 선정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20] 물론 스파르타가 불만을 표시했지만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비해 명분이 약했다.[21] 이로써 아테네를 맹주로한 델로스 동맹[22]

델로스 동맹의 운영은 맹주국인 아테네가 위임받았다. 이는 델로스 동맹이 아테네 시를 위한 기구로 변질될 가능성을 마련하였다. 델로스 동맹은 반페르시아 투쟁을 지속하여 에게 해에서 페르시아 세력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오니아 지방은 다시 그리스 세계로 편입되었고, 에게 해는 델로스 동맹의 바다가 되었다. 페르시아의 위협이 종식되자 그리스 폴리스에서는 델로스 동맹을 해체하자는 의견이 등장하였다. 이에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서 각 동맹시들에 대한 아테네의 지배력을 강화시키고 해체론자들을 격파했다. 동시에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 금고를 델로스 섬에서 아테네 시로 옮기고, 각 동맹시들에게 분담금을 강제로 징수하였다. 이로써 아테네 제국이 등장하였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으로 인해 큰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델로스 동맹 자금을 통해 많은 선박을 건조하고 병력을 모집하였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물품을 구입했다. 당연히 델로스 동맹을 총괄하는 아테네 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아테네는 많은 물자와 자금이 순환하고 있었다. 에게 해의 모든 교역이 아테네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기에 아테네는 그 덕으로 큰 부와 번영을 누린 것이다. 그런데 델로스 동맹이 해체되면 지금까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구조는 무너질 것이었다. 아테네는 리디아나 다른 그리스 도시들처럼 특산품이 마땅치 않았다. 또한 그리스 아테네는 에게해에서 꼭 거쳐가야하는 크레타 섬과 같은 곳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델로스 동맹의 해체는 아테네 시의 종말이라고 볼 수 있었고, 이에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서 스스로 제국이 되어버린 것이다.[23]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그리고 델로스의 자금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된 아테네는 커다란 번영을 이루었다. 특히 민주정치는 이 시기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먼저 B.C. 462년 에피알테스는 귀족회의기구인 아레오파구스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켜 명예기관으로 남겨버렸다. 그래서인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에피알테스는 그 다음에 원인 모르게 살해당했다. 이 다음 등장한 사람이 페리클레스이다.

페리클레스는 민회의 권한을 대폭 상승시켰다. 과거 500인회에서 관할하던 외교, 전쟁, 민사 등의 다양한 문제들을 이제는 민회가 총괄하게 되었고, 500인회는 민회에 제출한 의안의 준비와 민회의 결정사항을 집행하는 기구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10인 스트라테고스 회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이제 스트라테고스 회의는 최고정무위원회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고, 오늘날의 내각과 같은 위치에 올랐다. 스트라테고스의 특징은 재선이 가능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페리클레스가 30년 넘게 아테네의 지도자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24]또한 모든 관리들은 추첨제였고 임기는 1년으로 제한하였다. 그리고 사법제도에 있어서 배심원 6000명으로 된 시민법정이 유일한 것이었다. 이들이 모두 모여서 재판심리를 진행하지는 않고, 500명 내외 위원회로 나누어져서 재판을 담당했다. 대부분의 관직의 추첨제와 순환제를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수당을 제공했기 때문이었고, 그 수당은 당연히 델로스 동맹 자금으로 지급되었다. [25]

제국으로 변모한 아테네 시의 통치는 당연히 다른 폴리스들에게 불만을 야기하였다. 특히 스파르타의 불만은 가장 강려크했다. 그래도 이미 델로스 동맹 자금으로 빵빵해진 아테네와 전쟁하기에는 스파르타도 두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아테네가 메가라를 위협하자 스파르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서부진출을 방어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다. 이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사실 아테네의 승리로 쉽게 끝날 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난지 얼마 안있어 아테네에 페스트가 돌았고, 아테네의 위대한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사망했다. 위대한 리더를 잃어버린 아테네 민주주의호는 바로 중우정치에 빠져 혼란을 거듭했다. 대표적인 예는 알키비아데스가 이탈리아 원정 중에 그를 규탄하여 파면시킨 것이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생존하기 위해서 스파르타로 넘어갔고, 가서 자신의 원정계획을 다 불었다. 당연히 아테네의 이탈리아 원정은 실패로 끝났고 여기서 아테네는 많은 병력과 함선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아테네는 아직 희망이 있었다. 해상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스파르타 해외식민지를 접수하면서 스파르타를 궁지에 몰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B.C. 406년 아테네 함대는 스파르타 함대를 에게해에서 격퇴하면서 승기를 잡았다. 그러나 그 전투 중에 폭풍우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익사하였다. 이에 격분한 익사자의 가족들은 민회에서 장군들의 구조작업이 철저하지 못하였음을 규탄하였고 6명의 장군이 집단처형되었다. 결국 해전에 능숙한 지휘관을 다 죽인 결과는 B.C. 405년 헬레스폰트 입구에서 스파르타 함대에 의해 패배하였다. 이로써 식량공급지인 흑해연안을 잃어버린 아테네는 쉽게 스파르타에 의해 함락당했다.

스파르타에 함락된 아테네는 30인의 독재를 거쳐 다시 민주정으로 복귀하였지만 이미 중우정치로 썩을대로 썩은 민주정이었다. [26] 아테네를 물리치고 그리스 세계의 주인이 된 스파르타는 아테네보다 더 심하게 동맹시들을 쥐어짜냈고 당연히 반발을 일으켰다. 이에 테베시와 아테네시를 각각 중심으로하는 반스파르타 연맹이 2개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아테네에 대한 동맹시들의 지지는 미약했고, 결국 아테네 해상동맹은 테베 중심의 보이오티아 동맹에 편입되었다. 스파르타는 1만대군을 파견하여 보이오티아 동맹을 격퇴하려고 하였다. 이에 테베는 6000명의 군사를 내보냈다. 병력상으로는 부족했지만 에파미논다스의 사선진으로 오히려 스파르타군을 씹어먹었다. 이후 전쟁의 주도권은 테베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이후에도 지속되는 분쟁 속에 그리스 사회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때 저 멀리 북쪽에서 어린 알렌산더가 대군을 끌고 내려와 장악해 버린다.

헬레니즘 세계

로마 세계

로마 세계란, 로마 건국(B.C.753)부터 서로마 제국 멸망(476년), 혹은 동로마 제국 멸망(1453년)까지를 말한다. 로마 세계는 유럽에 천주교와 기독교등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유일신 신앙이 뿌리잡히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서구인들의 야만인과 문명인을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의 시작이 되었다.

왕정

로마 건국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따르면, 종말한 트로이에서 살아남은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사위인 아이네이아스가 그의 일족을 이끌고 탈출했다고 한다. 이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돌아서 이탈리아 남해안을 지나 시칠리아 섬을 돌아 이탈리아 서해안을 북상한 결과, 현재 로마 터에 도달하였다. 이 터에서 아이네이아스가 정착하고 나서 여러 왕들이 치세를 마친 후, 기원전 753년에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하게 된다. 로물루스는 원래 레무스와 함께 쌍둥이였는데, 로마 건국 이후 레무스가 로물루스의 땅을 침범하자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죽인다.

로물루스의 치세

레무스가 죽은 이후, 로물루스는 도시를 제대로 건설하기 위해 팔라티누스 언덕 근처에 성벽을 쌓았다.

국정 부분에서는, 정치 기관을 3개로 나누었는데, 왕과 원로원민회가 바로 그 것이다.

공화정

제정

참고문헌

각주

  1. 트로이 전쟁에 대한 학설은 많다. 신화부터 지금 여기서 제시하는 안까지 말이다. 이 안을 택한 이유는 필자의 개인의견이지 주류의견은 아니다. 참고적으로 주류의견은 아직까지 없다.
  2. 2.0 2.1 배영수 편, 『서양사강의』, 파주:한울, 2007, pp.29-32.
  3. 멜서스의 인구론이 예언한대로 말이다
  4. 이 시기 폴리스는 성벽이 없는 그냥 언덕이었다,
  5. 참고적으로 여기서의 식민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그리스의 식민은 어떤 지역에 가서 현지인과 어울리는 것이고, 19세기의 식민은 다른 지역을 장악하여 착취하는 것이다.
  6. 집정관으로 군사담당, 종교담당, 민사담당 총 3인이었으나 나중에 9인으로 늘어났다.
  7. 귀족회의로 대부분의 중요한 사안을 결정했다.
  8. 이러한 사안때문에 금권정치라 불렸으며, 과거 6차 교육과정에서 솔론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9. 아르콘은 과거 종신제였지만 시간이 흘러 1년 임기제로 바뀌었다. 그런데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자신의 인기를 이용하여 종신아르콘으로 취임한 것이었다.
  10.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귀족은 토지를 기반으로 하고있다. 중세에서도 귀족은 토지, 즉 장원을 보유한 사람을 칭했다. 그렇기에 상공업을 장려한다는 것은 비귀족세력을 키우겠다는 의미이다.
  11. 히파르코스와 히피아스
  12. 재산에 따른 정치참여에 차등
  13. 단 20세 이상 성인남성으로 제한되어 있다.
  14. 군지휘관으로 시작한 스트라테고스는 시간이 흘러 아르콘이 점차 명예직화 되자 아르콘의 역할도 수행하게되었다, 아르콘과 달리 스트라테고스는 군지휘관이었기에 임기 1년에 중임이 가능했고, 이는 이후 페리클레스가 오랜기간 정치지도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15. 아르콘은 군사지도자임고 동시에 행정수반이었는데, 이 역할이 500인회와 스트라테고스에게 넘어가면서 명예직으로 변화하였다. 아레오파구스의 경우에는 재판권과 입법권이 500인회와 시민법정에 귀속되면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16. 그리스 지역은 척박할 때로 척박한 지역이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기후도 개판 평지도 없다. 거기에 광물이 많이 나오는 지역도 아니었다. 그에 비해서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지방은 충분한 평지와 광물들이 산재되어 있었다.
  17. 페르시아의 점령정책은 상당히 온건하다. 괜히 오랫동안 대제국을 유지한게 아니다.
  18. 당시 마라톤 전투를 위해 아테네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장병들을 동원했기에 아테네에서는 방비할 병력이 없었다. 그래서 만약 조금이라도 아테네군이 늦게 도착했다면 아테네는 불타고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은 성공했을 것이다.
  19. 이후 전개 사항은 페르시아 전쟁에 추가바람
  20.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1,2,3차 원정에 모두 참전하여 격퇴하는게 큰 공헌을 했다.
  21. 2차에서는 겨우 300명만 파견했고, 3차에서 본격적으로 나섰다.
  22. 델로스 섬에 동맹본부를 마련하여 델로스 동맹이라고 불린다.
  23. 다양한 가설 중 하나이다. 고대사는 현대사에 비해 증거나 자료가 부족하여 대부분 이렇게 가설로 채워져있는 경우가 많다.
  24. 사실상의 독재
  25. 이는 그리스가 민주주의를 실행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타인들의 희생을 담보로 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26. 이 민주정이 소크라테스를 죽인 민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