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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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는 메꽃과의 쌍떡잎 뿌리 채소로, 온대에서는 일년생이지만 열대에서는 숙근성으로 분류하고 있다. 주로 전분이 많고 단 맛이 나는 혹줄기를 가진 재배용 작물이다. 꽃은 나팔꽃과 유사한 꽃이 핀다. 씨앗으로도 번식하나 영양 뿌리를 얻기 위해 경작할 때에는 씨앗으로 경작하지 않는다.

형태

뿌리

고구마에서 먹는 부분에 해당되는 게 뿌리 부분인데, 가는뿌리, 굳은뿌리, 덩이뿌리로 구분되어 있다. 고구마는 뿌리에 영양분이 축적되어 둥그렇게 크기가 커지며 이런 종류의 뿌리를 덩이뿌리라고 부른다. 습한 땅이나 질소질이 많은 토양에서는 가는뿌리와 굳은뿌리가 많고 칼리질 비료가 많은 토양에서는 덩이뿌리가 많다.

생육 초기에는 뿌리가 땅 밑의 비교적 얕은 부분에서 옆으로 퍼지지만 점차 깊이 자라 땅 속 1m 이상의 깊이까지 도달한다. [1]

줄기

즐기는 둥글고 털이 거의 없는 것에서부터 많은 것까지 있으며 잎의 앞 끝은 뿌리와 만나는 줄기 아랫부분에 비해 털이 많고 담색(淡色)이다. 생육습성에 따라 직립형과 포복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직립형은 줄기의 길이가 짧아 60cm 정도인 것도 있으며 포복형은 길어서 6m에 달하는 것도 있다.[2]

고구마는 쌍떡잎식물이라 종자가 발아할 때 2매의 떡잎이 나오고 덩이뿌리에서 싹이 나올 때에는 떡잎이 나오지 않고 본엽만이 나온다. 잎의 모양은 둥근 심장형으로부터 단풍잎처럼 잎이 갈라진 것까지 여러 모양이 존재한다. 잎의 색깔은 성숙한 잎의 경우 대체로 녹색이지만 그 정도에 차이가 있으며 어린잎은 녹색에서부터 짙은 자주색까지 품종에 따라 색깔이 다르며 잎맥과 잎자루의 색도 녹색에서 자주색까지 품종에 따라 다르게 존재한다.[3]

꽃 모양은 메꽃이나 나팔꽃과 비슷하다. 꽃 밑부분에는 꽃받침이 5개 존재하며 꽃부리는 담홍색으로 길이가 5cm 정도에 끝이 얕게 5조각으로 갈라져 있다. 수술은 5개로 밑부분이 꽃부리에 부착되어 있지만 수술끼리는 분리되어 있고 수술 중 하나는 암술보다 길며 나머지는 암술보다 길이가 약간 짧지만 품종에 따라 길이가 다르다. 암술은 1개가 있으며 길이가 1.5cm 내외이다. 꽃의 내면 기부에는 황색의 꿀샘이 있다.[4]

기원

고구마의 원산지는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한 멕시코 유카탄반도 지역과 남아메리카 베네수엘라의 오리노코 강 하구 지역 사이로 알려지고 있다. 이 지역에서 적어도 2000년 이상 인간에 의해 이용되었으며 현재 재배되고 있는 재배종이 해당 지역에서 야생되고 있다.[5]

남아메리카에서는 페루의 고구마 잔존물이 기원전 8,000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본다.

전파

남태평양

남태평양에서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이 진출하기 이전부터 고구마를 식량으로 재배해왔다고 한다. 어떻게 전파 되었는지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페루 항해인들이 뗏목을 타고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로 전파시킨 것이 유력하다고 보고 있다.

유럽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이후, 다른 여려 작물과 함께 고구마가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아시아

스페인 탐험가들에 의해 필리핀 마닐라와 몰루카 제도로 전파되었고 포르투갈 사람에 의해 말레이 군도에 전달되었으며 필리핀 루손섬으로부터 중국 푸젠으로 전파되었다.

1605년경에는 중국 푸젠에서 류큐와 대만으로 전파, 류큐에서부터 일본 본토로 전파되었으며 1723년에 대마도에 고구마가 전해졌다고 알려져 있다.[6]

한국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최초로 고구마를 본 사람은 1719년 통신사로서 일본에 파견된 신유한이다. 그가 길가에 위치한 주점에서 고구마를 구워서 파는 것을 본 것이 고구마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7]

본격적인 고구마 전래는 이광려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는 고구마의 이점을 알고 조선에 도입되기를 간절히 원하여 두 차례가량 연행사를 수행하는 역관을 통해 직접 종자를 얻으려했지만 실패했고 1762년, 연행사로 북경에 가는 서지수에게 부탁하여 고구마 종자를 얻는데 성공하였지만, 가지고 오는동안 관리를 잘못하여 종자가 죽어버리고 만다.[8] 이후, 이광려는 1764년 강계헌에게 부탁하여 일본을 거쳐 온 고구마 종자를 구한 다음 재배에 성공하였지만 보관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다음해에 종자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9]

그래서 한국의 고구마 전래는 일본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1763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조엄(趙曮)이 대마도(對馬島)에서 고구마 종자를 구한 다음, 부산진에 보내어 당시 부산진 참사 이응혁에게 보관하게 한 다음 1764년 봄, 절영도 조도 맞은 편 야산에 재배하게 했다.[10]

한편, 1764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강필리는 1765년 고구마 종자를 구하고 또한 종식방(種植方)[11]을 구하여 『감저보(甘藷譜)』라는 책자를 발간하였다. 강필리는 고구마 종자를 구하여 탐라(耽羅, 현 제주도)를 비롯한 인근 군현에까지 재배 방법과 함께 나누어 주어 남해안 연안 지역에 고구마 재배를 보급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고, 비변사에까지 보냈다. 1766년 동래부사에서 물러나서는 고구마 종자를 확보하여 한성(漢城, 현 서울)에 실어 보내고 동래에서도 종자를 남겨 심게 하였다.[12] 1813년 김장순과 선종한, 이 두사람이 고구마 보급에 노력을 쏟아 감저신보란 책을 썼으며 1834년 서유구가 전라관찰사로 있을 때 종저보를 지어 호남지방에 고구마 심기를 권장하였다.[13]

어원

고구마는 유희가 1824에 쓴 물명고에 고금아의 형태로 처음 나타난다. 고구마라는 이름의 유래는 일본 쓰시마 지방의 방언에서 고구마를 일컫는 코코이모孝行藷를 차용한 것인데, 이 때, 일본어 이모(藷/芋/薯)가 우리말 ‘마’로 변형되었다.

고구마는 저(藷) 또는 감저(甘藷), 감서(甘薯) 등으로도 불렸는데, 고구마를 들여오고 60년 뒤에 청나라 사람들이 들여온 감자를 ‘북방에서 온 감저’라는 뜻으로 북감저(北甘藷)라고 부르면서 고구마는 한동안 남감저(南甘藷), 단감자 sweet potato 등으로도 불렸다. 현재도 제주도에서는 고구마를 감저라고 부르고, 감자는 고구마와 구분하여 지실(地實)이라고 부른다. 또, 전라도, 충청도 등 양호(兩湖) 지방에서는 무수감자나 무감자라고도 부른다.

일본에서는 사츠마이모(サツマイモ) 또는 감저(甘藷)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번서(番薯/蕃薯), 감서(甘薯) 또는 디과(地瓜 dìguā)라고 한다.

특성

고구마는 재배적지가 광범위하여 척박한 토양에서도 상당한 양의 수확을 얻을 수 있으며 재해에 비교적 강하다. 또한, 생육기간의 조절이 쉬우며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많은 작물이다. 하지만, 기계화가 어려워 생력화가 어렵고[14] 수분함량이 많아 장기간 저장이 어렵다는 결점이 존재한다.[15]

재배

재배 환경

고구마의 생육온도 범위는 15~38°C인데 30~35°C에서 가장 왕성하게 자란다. 덩이뿌리 부분은 지온이 20~30°C 정도가 적절하다. 뿌리가 내리는 데에는 15°C 이상의 온도가 필요하나 30°C 이상에서는 뿌리의 수가 줄어들고 발근일수도 급격히 길어진다.[16]
일조의 경우, 일조가 부족하면 지상부에서 생산된 물질이 덩이뿌리로 옮겨가지 않고 지상부에 이용되어 줄기와 잎은 많아지나 고구마의 수확이 감소된다.[17]
고구마는 건조에 비교적 강하지만 생육기간 중 강우량이 적으면 줄기가 웃자라고 덩이뿌리의 크기가 감소하여 고구마의 수확량이 감소하고 수확기 때 강우량이 많으면 고구마의 품질이 저하되고 저장력이 약해진다.[18]

토양의 경우, 수분이 너무 많으면 고구마 뿌리의 생육이 재해되고, 수분이 너무 적으면 지상부 및 덩이뿌리의 무게가 같이 감소되며. 토양의 통기가 잘 될수록 고구마 뿌리의 수량이 증가한다. 또한, 토양의 산도에 대한 적응성이 큰 편이지만 알칼리성 토양보다는 산성토양에서의 수량이 많은 편이다.[19]

육모 환경

싹이 트는 기간에는 30~33℃를 유지하고 싹이 튼 이후에는 23~25℃가 싹의 생장에 좋다. 모판흙의 수분을 충분히 유지시킬 필요가 있는데 수분이 부족할 경우, 생육이 나쁘고 싹이 굳어지기 쉬워지고 수분이 너무 많으면 모판흙의 온도가 내려가거나 웃자라기 쉽다. 일조를 적당히하여 싹이 웃자라거나 싹이 굳어지는 일을 피해야하며 밭에서와는 달리 질소분을 넉넉하게 유지해야 좋은 싹을 기를 수 있다.[20]

아주심기

수확

수확시기

고구마는 9℃ 이하의 낮은 온도를 접하면 저장성이나 싹 트는 힘이 낮아지므로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수확을 마무리 지어야한다. 보통기 재배를 기준으로 9월 하순부터 10월 상·중순까지 수확을 해야 한다.

사료용으로 이용할 경우, 줄기와 잎도 이용하기 때문에 늦게 거두면 낙엽이 되어 이용가치가 낮아지므로 다소 이르게 거둬들인다.

씨고구마로 저장할 경우, 일찍 캐면 높은 온도에서 저장이 시작되어 저장력이 낮아지고 너무 늦으면 서리의 피해를 입어 저장성이 낮아지므로 9℃ 이하로 낮아지기 전에 수확하여 저장한다.

비가 온 뒤에 바로 수확하거나 토양이 습할 때는 고구마의 수분함량에 높아서 저장고에 넣었을 때 저장고 내의 습도를 상승시켜 호흡작용을 방해 받아 유해물질이 생기고 생활력이 약해저 썩기 쉬우므로 고구마 수확은 맑은 날이 계속될 때 하는 것이 좋다.

[21]

수확방법

고구마를 캘 때, 상하지 않도록 해야 저장성이 향상되고 상품으로서의 가치도 높다. 덩굴은 낫으로 자르고 걷어낸 다음 괭이나 쇠스랑으로 캔다. 고구마를 수확은 양날 쟁기로 갈아엎은 다음 고구마를 줍거나 고구마 굴취기를 사용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22]

저장

저장용 고구마

저장용 고구마는 저장병해에 강하고 저장 적온에서 싹이 잘 트지 않는 품종으로 정해야 하고 9℃ 이하의 냉온에 접했거나 서리를 맞은 고구마를 저장해서는 안된다. 그 외에도 잘라지거나 상처를 입었거나 껍질이 많이 벗겨진 고구마도 저장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은데 병균침입이 쉽기 때문이다.[23]

저장 환경

저장 가능 온도는 10~17℃이지만 제일 적절한 온도는 12~15℃ 정도이다. 9℃이하에 오래두면 냉해를 입어 썩기 쉬워진다. 반대로 온도가 높아지면 싹이 트게 되어 상품가치가 크게 낮아진다. 대체로 0℃에서 24시간, -5℃에서 18시간, -15℃에서 3시간 정도 노출되면 냉동해를 입게 된다. 고구마의 어는 온도는 -1.3℃ 정도이다.

저장고가 건조하면 수분을 잃어 껍질이 굳어지고 부패될 수 있으며 싹과 뿌리의 상태가 나빠진다. 저장고의 습도가 너무 높으면 온도가 낮아질 때, 수분이 고구마 표면에 맺혀 열의 전도가 나빠지고 부패하기 쉽다. 저장 중 저장고의 알합한 습도는 85~90%정도이다.

[24]

저장방법

  • 굴저장 방법
  • 가열식저장법
  • 옥외 움저장법
  • 옥내 움저장법
  • 옥외 간이움저장법
  • 온돌저장법

[25]

용도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대부분이 식용으로 소비되었으나, 최근에는 부식용이나 삶은 고구마, 튀김, 군고구마 등 간식으로 주로 이용된다. 녹말용으로 30% 정도 사용되고 엿·포도당·과자류·식용가공품·의약품·화장품 등 다방면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 알코올, 위스키, 소주 등의 원료로서도 적지 않게 소요된다. 특히 한국에서는 쌀이 소주를 빚는데 금지되었을 때에 고구마로 주정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소주가 화학주로 오해 받기도 하는데, 고구마로 에탄올을 만들기 때문에 고구마가 한국의 희석식 소주의 주원료이다. 동물의 사료로도 이용이 되기도 한다.

각주

  1. 농촌진흥청, 『고구마 재배』, 2006, pp.46-47
  2. Ibid., pp.48-49
  3. Ibid., p.49
  4. Ibid., pp.49-50
  5. Ibid., p.23
  6. Ibid., pp.23-24
  7. 노성환, 「조선통신사와 고구마의 전래」, 『동북아문화연구』, 제23집,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10, p.539
  8. Ibid., pp.539-541
  9. 염정섭, 「조선 후기 고구마의 도입과 재배법의 정리과정」, 『한국사연구 134』, 한국사연구회, 2006, pp.116-117
  10. 노성환, op.cit., p.542
  11. 種植 : 종식, 씨를 뿌리고 식물을 심는 일 - 네이버 한자사전
  12. 염정섭, op.cit.,pp.117-118
  13. 농촌진흥청, op.cit.,p.24
  14. Ibid., pp.41-42
  15. Ibid., p.45
  16. 농촌진흥청, 『고구마 재배』, 2006, p.100
  17. Ibid., p.101
  18. Ibid., p.102
  19. Ibid., pp.102-105
  20. Ibid., pp.106-107
  21. Ibid., pp.186-187
  22. Ibid., pp.187-188
  23. Ibid., p.189
  24. Ibid., p.190
  25. Ibid., pp.193-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