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명활성

Chirho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9월 28일 (월) 08:34 판 (→‎개요)

틀:문화재

개요

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시대의 산성이다. 문화재청의 고시로 2011년에 공식 명칭은 명활산성에서 명활성으로 변경되었지만, 통상 사극 등에는 아직 명활산성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남아있다. 애초에 당시 신라사람들이 부르던 명칭도 명활산성이었고.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신라 실성왕 4년(405년)에 왜병이 이 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적어도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짐잫할 수 있다.

특성

성을 쌓는 방법에서도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의 방식을 보이고 있다. 눌지왕 15년(431)에는 왜구가 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이는 이 성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경주)을 지키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임을 말해준다. 현재는 보문호가 산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당시의 지형을 완전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이 명활산의 위치 자체가 경주시내 동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일종의 감제고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산 정상에서 왕성인 월성까지는 불과 4km가 채 되지 않은 거리이며, 산성에서 왕성을 바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이다. 이러한 이유로 남산성, 선도산성, 북형산성과 함께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에 대항하여 경주를 지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산성이다.

역사

  • 이 성은 진흥왕 15년(544)에 다시 쌓았고, 진평왕 15년(593)에는 성을 확장했다. 현재는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져 겨우 몇 군데에서만 옛모습을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꽤나 규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진흥왕 당시 "명활산성작성비"가 발견되어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으며, 이외에 "명활산성비"로 보이는 비석조각이 안압지에서 발견되었다.
  • 선덕여왕 때는 비담이 이 곳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이 진압하였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비담의 난 참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