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명활성: 두 판 사이의 차이

21번째 줄: 21번째 줄:
==특성==
==특성==
성을 쌓는 방법에서도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의 방식을 보이고 있다. [[눌지왕]] 15년(431)에는 [[왜구]]가 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이는 이 성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경주)을 지키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임을 말해준다. 현재는 보문호가 산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당시의 지형을 완전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이 [[명활산]]의 위치 자체가 경주시내 동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일종의 감제고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산 정상에서 왕성인 [[경주 월성|월성]]까지는 불과 4km가 채 되지 않은 거리이며, 산성에서 왕성을 바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이다. 이러한 이유로 [[경주 남산성|남산성]], [[선도산성]], 북형산성과 함께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에 대항하여 경주를 지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산성이다.
성을 쌓는 방법에서도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의 방식을 보이고 있다. [[눌지왕]] 15년(431)에는 [[왜구]]가 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이는 이 성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경주)을 지키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임을 말해준다. 현재는 보문호가 산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당시의 지형을 완전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이 [[명활산]]의 위치 자체가 경주시내 동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일종의 감제고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산 정상에서 왕성인 [[경주 월성|월성]]까지는 불과 4km가 채 되지 않은 거리이며, 산성에서 왕성을 바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이다. 이러한 이유로 [[경주 남산성|남산성]], [[선도산성]], 북형산성과 함께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에 대항하여 경주를 지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산성이다.
==발굴조사==
[[File:명활성 북문지.jpg|명활성 북문지|섬네일]]
경주시에서 2013년 6월 26일부터 같은 해 11월 30일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북문이 있던 자리가 확인되었고 다량의 기와조각과 함께 성문을 고정하는 철제 부속인 확쇠, 띠쇠, 쇠못 등이 출토되어 문루가 있는 너비 3.6m의 외개형 문{{ㅈ|성 바깥쪽으로 열리는 문}}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문이 있던 자리 동편에는 반원형의 치성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성문의 방어력을 올리는 옹성의 역할과 유사한 성벽으로 휘어있는 성벽이라 곡성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구조는 보은 [[삼년산성]]이나 문경 [[고모산성]]에 이어 3번째로 확인된 것으로 신라의 석축 성벽의 전형적인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발굴 조사 결과 명활성 자체는 5세기 경 축조하여 이후 6시기에 이를 때 까지 지속적으로 개축되어 사용되어왔으나 647년 있엇던 비담의 난 이후 성이 폐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551년에 만들어진 명활산성 작성비문에 나온 고타문(古他門)이 산성의 북문에 해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
==역사==

2020년 9월 28일 (월) 08:42 판

틀:문화재

개요

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시대의 산성이다. 문화재청의 고시로 2011년에 공식 명칭은 명활산성에서 명활성으로 변경되었지만, 통상 사극 등에는 아직 명활산성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남아있다. 애초에 당시 신라사람들이 부르던 명칭도 명활산성이었고.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신라 실성왕 4년(405년)에 왜병이 이 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적어도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짐잫할 수 있다.

특성

성을 쌓는 방법에서도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의 방식을 보이고 있다. 눌지왕 15년(431)에는 왜구가 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이는 이 성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경주)을 지키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임을 말해준다. 현재는 보문호가 산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당시의 지형을 완전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이 명활산의 위치 자체가 경주시내 동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일종의 감제고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산 정상에서 왕성인 월성까지는 불과 4km가 채 되지 않은 거리이며, 산성에서 왕성을 바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이다. 이러한 이유로 남산성, 선도산성, 북형산성과 함께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에 대항하여 경주를 지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산성이다.

발굴조사

명활성 북문지

경주시에서 2013년 6월 26일부터 같은 해 11월 30일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북문이 있던 자리가 확인되었고 다량의 기와조각과 함께 성문을 고정하는 철제 부속인 확쇠, 띠쇠, 쇠못 등이 출토되어 문루가 있는 너비 3.6m의 외개형 문[1]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문이 있던 자리 동편에는 반원형의 치성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성문의 방어력을 올리는 옹성의 역할과 유사한 성벽으로 휘어있는 성벽이라 곡성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구조는 보은 삼년산성이나 문경 고모산성에 이어 3번째로 확인된 것으로 신라의 석축 성벽의 전형적인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발굴 조사 결과 명활성 자체는 5세기 경 축조하여 이후 6시기에 이를 때 까지 지속적으로 개축되어 사용되어왔으나 647년 있엇던 비담의 난 이후 성이 폐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551년에 만들어진 명활산성 작성비문에 나온 고타문(古他門)이 산성의 북문에 해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

  • 이 성은 진흥왕 15년(544)에 다시 쌓았고, 진평왕 15년(593)에는 성을 확장했다. 현재는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져 겨우 몇 군데에서만 옛모습을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꽤나 규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진흥왕 당시 "명활산성작성비"가 발견되어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으며, 이외에 "명활산성비"로 보이는 비석조각이 안압지에서 발견되었다.
  • 선덕여왕 때는 비담이 이 곳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이 진압하였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비담의 난 참조.

각주

  1. 성 바깥쪽으로 열리는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