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선

경부선
노선도
나라 대한민국
종류 일반철도(간선), 광역철도[1]
번호 302
구간 서울 ~ 부산
영업거리 441.7 km
역 수 90개
소유자 대한민국 정부 (국가철도공단 위탁)
운영자 한국철도공사 (KORAIL)
개통일 1905년 1월 1일
시설 정보
궤간 1,435 mm (표준궤)
선로 6 (서울 ~ 구로)
4 (구로 ~ 두정)
2 (천안 ~ 부산)
전기 교류 25 kV, 60 Hz, 가공전차선
신호 ATS, ATP

대한민국의 철도에서 가장 중요한 노선으로,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 서울특별시부터 제2의 도시이자 항구 도시, 대표적 물류 관문인 부산광역시를 연결하는 노선이다. 경부선이라는 명칭은 서울[2]을 뜻하는 경(京)과 부산의 부(釜)를 합친 것이다.

일제시대의 노선표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과거 공식문서에서는 경부선이 아닌 경부본선(京釜本線)을 사용했고, 경부선은 본선(경부본선)과 지선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2019년부터 공식문서에서도 경부본선이 아닌 경부선을 사용한다.[3]

역사[편집 | 원본 편집]

건설까지의 경위[편집 | 원본 편집]

노선 선정

경부선의 부설은 1898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경부철도합동조약을 체결하게 되면서 본격화되었으나, 그 이전부터 일본은 대륙으로의 군사력 투사에 있어 핵심 병참노선으로 이해 투사에 중요한 수단이라 할 수 있는 이 노선의 사전조사를 기 실시하고 있었다.

1892년에 수렵을 위장하여 고노 타카노부(河野天瑞)[4]를 필두로 한 측량반이 노선 측량과 답사에 착수하였다. 당시 답사경로는 낙동강 우안[5]을 따라 삼랑진, 밀양, 대구, 상주, 문의, 청주를 경유하는 240마일의 경로였다고 한다.[6]

이후 1894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한일잠정합동조관에 의해 일본이 강압적으로 철도 부설을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경인과 경부철도의 부설을 위한 절차에 착수한다. 이 해 11월에는 센고쿠 미츠구(仙石貢)[7]외 10여명으로 구성된 측량반을 파견하여 부설경로를 결정하기 위한 답사를 실시하였다. 이들은 청주, 영동, 추풍령을 넘어 금산, 인동, 대구, 밀양을 지나 부산에서는 구덕산을 관통하여 부산에 이르는 경로를 계획하였으며, 병행하여 조령, 문경, 상주, 선산을 거치는 루트와 경주, 문경을 통하는 루트를 비교선으로 답사하였다. 이 당시에 지형적으로 내륙산간지를 통과하는데 가장 유리한 지점이었던 추풍령을 종단하는 루트를 발견하였다.

경부철도합동조약이 체결되면서 경부철도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경부철도주식회사의 발기위원인 오오에 타쿠(大江卓)[8] 는 기사와 함께 대한제국 정부의 협조 하에 99년에 다시 예정선로 답사를 실시하였다. 이들은 영등포, 수원을 거쳐, 진위, 둔포, 전의를 거쳐 공주를 경유해 신교[9]에 이르러 강경까지의 지선을 계획하고, 다시 동진하여 진산, 금산을 지나 영동을 경유하여 과거 경유선에 합류, 그리고 대구 이후 현풍, 영산, 구포를 경유해 부산진 해안을 따라 부산에 이르는 294마일의 경로를 계획하였다. [10]

이러한 경로를 택한것은 충남 및 전라남북도의 농업생산물 수송을 유치하는 경제적 이유와 함께, 당시 대한제국 정부가 직접 경목철도의 부설을 하기로 결정을 하고 그 사업권을 제3국에 부여하거나 할 경우 병행선이라는 주장을 통해 부설을 봉쇄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아울러 강경까지의 지선을 통해 당시 금강의 하항인 강경항을 통해 자재의 반입을 꾀하여 공사기간의 단축 및 공사비 절감을 꾀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종적으로 1900년에 이르러 이들 답사 경과를 종합하여 경부철도의 기사장으로 임명된 가사이 아이지로(笠井愛次郎)[11] 는 철도의 실측에 착수하였다. 당시 가사이 기사장은 식민 철도가 아닌 중국 등의 대륙을 연결하는 중요 간선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가급적 최단거리의 선형을, 구배 역시 최대한 평탄한 100분의 1구배(10‰)를 기준으로 예외적으로 80분의 1 구배(12.5‰)를 적용하게 계획하였다.[12]

이러한 방침 하에서, 장대터널 건설이 예상되는 구덕산 관통 대신 부산진에서 초량을 경유하여 낙동강을 따라 북상, 청도, 밀양을 경유하는 것으로 하였다. 또한 평택에서 영동까지는 한때 검토하던 공주, 논산 경유 및 강경지선과 가급적 직선형으로 전의를 경유해 내륙을 가로지르는 방안이 비교되었으나, 최종적으로 대전, 전의를 경유하는 노선으로 1903년에 이르러서 확정되었다.[13]

궤간레일의 결정

한편으로 당시 경부철도의 궤간은 대한제국 정부의 국내철도규칙에 의해서 4피트 8인치½의 표준궤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표준궤 부설에 대해서 일본 국내에서는 그 건설비와 운영비가 막대하게 드는 상황에서 경부철도 주식회사의 지본금은 2,500만엔으로 협궤로 완공하는데도 상당히 버거울거라는 우려 하에 궤간 변경의 주장이 제기되었다. 당시 철도작업국[14]은 이미 확보된 자재를 사용할 수 있는 미터 궤간에 의한 공사를 주장하였고[15], 한편으로 일본 군부에서는 본토에서 사용중이어서 자재와 차량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3피트 6인치 궤간을 채용할 것을 주장하였다.[16]

또한 철도작업국은 레일의 규격 역시 일본 본토와 동일한 60파운드(미터당 30kg) 레일을, 군부에서는 더 저렴한 50파운드(미터당 25kg) 레일의 채용을 주장하였다.[17] 이 역시 건설비를 최대한 저렴하게, 그리고 가능한 자재를 조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제기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가사이 기사장은 대륙 연결 간선으로서의 경부철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표준궤로 부설할 것을 강력히 천명하였고, 궤도 역시 중국에서 채용한 80파운드(미터당 40kg)레일 대신 75파운드(미터당 37kg)의 레일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당시 경부철도 주식회사의 대표였던 시부사와 에이치의 결정으로 최종적인 건설규격이 되었다.

착공 및 완성[편집 | 원본 편집]

경부철도주식회사 설립

노선 선정이 진행되는 한편으로 1896년부터 한국에 상당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관료 및 자본가들은 경부철도의 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한 민간회사를 만들고자 주식회사의 설립 특허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수상 이하 일본 정부 각계에 청원하고 있었다. 이는 일본 국내에서 일종의 애국운동으로 번져서 경제계 유력자 약 150명을 끌어들여 경부철도 주식회사 발기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이후 수상 및 정계 원로에 요청하여 1900년 2월에 '한국경부철도속성에 관한 건의안'을 통과시켰으며, 그 해 2월 21일에 '제국신민의 외국에 있어서 철도 부설에 관한 법률안'이 중의원과 귀족원에 의해 통과되었다. 이 법률은 주식회사 성립에 대한 보조금 및 사채모집, 주식회사 설립 등에 대한 각종 특혜를 부여하는 등 경부철도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후 정부는 특별보조 명령을 내려 정부가 이자지급 보증하는 등의 예산지원까지 붙여지게 되었다.[18]

이후 자본금 모집은 거국적인 동원이라고 할 만큼 각계각소에 홍보와 참여 요구를 벌였다. 그 결과 전국 각지에서 주주를 포섭할 수 있었으며, 서구 열강으로부터의 차관 내지 자본 참여를 배제할 수 있었다. 이는 경부철도의 건설이 단순한 민간적 사업이 아닌 일본의 국가적 이해관계가 강하게 엮인 국책사업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방증이라 할 것이다.

초기 공사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경부철도는 1901년 8월 20일 한강 이남의 영등포에서 북부 기공식을 거행하였으며, 동년 9월 21일에 부산 초량에서 남부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이에 따라 영등포~사근천(군포 남측)간 13마일간, 그리고 초량~구포간의 11마일의 공사가 개시되었다.

공사는 선로의 연장을 따라 순차적으로 착공되어, 북부선은 명학, 진위[19]에 1903년 말에 이르렀다. 한편으로 금강을 통해 자재를 반입하여 부강에서 전의까지 36마일 여의 공사가 1904년 1월까지 진척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지대를 터널로 경유하려던 노선이 대한제국 정부의 반대로 인해 1902년에 군포를 경유 사시현으로 우회하는 선형으로 변경되었다.

한편 남부는 초량~구포 구간의 11마일 간은 1901년 10월부터 초량으로부터 공사가 순차적으로 진척되어 1903년 말에는 공사 진척이 밀양을 지나 성현에 이르고 있었다. 터널 공사가 다수 존재하여 토목의 준공은 1904년에 이르러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러일전쟁과 속성공사

경부철도가 건설되는 와중에 러일간의 긴장 강도가 올라가면서 군사수송상의 필요가 상승함에 따라 빠른 공사가 요구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1903년 12월 2일 경부철도 주식회사에 대해 일본정부는 속성명령을 내려서, 해당 철도를 1905년중에 전 구간을 개통할 것을 지시하였다. [20]

경부철도로서는 일개 사설회사로서 이러한 요구에 대응하기 어렵다고 보고 조직을 개편하여 주요 임원을 관선으로 변경하기로 하고, 회사가 발행하는 채권에 대해 정부의 지불보증을 해 줄 것, 그리고 부설비에 대한 보조를 일본 정부에 건의하였다. 일본정부는 이를 가결하여, "경부철도 속성 보조 및 책임 지출에 대한 자구안"이라는 칙령으로 공포하였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서 정세가 급박해짐에 따라 1904년 연내에 영등포에서 초량에 이르는 전 노선을 개통하도록 명령을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이미 어느정도 진척이 있던 부산~성현 간의 남부 구간과 영등포~부강 간의 구간 외에 미완성 상태의 성현~부강 간의 121마일 구간의 급속 진행에 착수하였다. 북부에서는 부강에서 영동까지, 남부에서는 성현에서 영동까지의 공사를 진척하여, 1904년 10월에는 남부구간이 준공되었으며, 여기에서 심천까지 6.6마일을 더 북진하였다. 반면 북부 구간은 11월에 이르러서 남은 구간을 준공하였다. 다만 급속 공사를 위해 이들 구간 중 일부에서 규격을 낮추어 구배나 곡선 반경등이 열악한 임시선로를 부설하였다. 특히 대전 이남의 증약, 구복 터널 공사의 지연 때문에 스위치백 식의 가설선로를, 또한 남부에서는 성현 터널을 대체하여 8단 스위치백의 가설선로를 부설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들 공사를 진행하는 와중에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철도 건설은 더 한층 긴급수단이 되었다. 이 와중에 공사 진척이 느린 70마일 구간에 대해서 24파운드(미터당 12kg)의 레일을 채용한 임시 협궤철도 안까지 제기가 되어서 긴급발주 형태로 자재를 도입해 반입하였으나, 제물포 해전에서 러시아 군함이 조기에 격침되어 철도부설의 긴급성이 크게 줄어들어서 임시철도는 중단되었다.

이후 공사가 진척됨에 따라 열차 운행이 가능한 구간에 대해서는 일반인의 편승 및 화물의 임시영업이 개시되었으며, 1905년 1월 1일자로 전구간 정식 개통을 달성하게 되었다.

노동 동원과 저항 운동

한편으로 경부선 및 경의선의 건설은 한반도에서는 유례가 없을 만큼의 대규모 토목공사였고, 그만큼 막대한 노동력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그만큼 민간에 발생한 폐해도 적지 않았다. 건설 초기에는 한국계 토건업체가 노동 송출과 부자재의 공급을 하였으며, 영세농민이나 임노동자들의 임금노동 위주로 충원이 되었으며 급여 수준도 초기에는 심하게 열악하지는 않았기에, 중간 착취나 노동강도 문제로 분쟁이 생기는 정도였다. 그러나 러일간 분쟁이 가시화 되어 속성공사가 추진되면서 일본계 토건업체나 심지어 일본군의 철도대대나 공병대까지 투입되는 상황이 되면서 인근 주민을 강제동원하고, 지방관청으로부터 자원을 공출하는 식이 되면서 갈등이 첨예화되었다. 여기에 군표나 수표 지급에 따른 교환 손실, 다단계 하청에 따른 부당 공제, 농번기 강제동원이나 징발, 약탈 등으로 인한 손실등은 고스란히 한국인들의 피해로 이어졌다. 또한 폭행이나 살인까지 벌어져 치안이 지극히 악화되었고, 지방관들 조차 일인들을 통제할 수 없어 오히려 구타를 당하는 지경까지 이르기까지 하였다.[21].

이런 불만은 철도 시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게 된다. 선로에 바위를 올려놓거나, 시설물을 파괴하는 일이 일어나고, 열차에 돌은 던지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였다. 또한 이런 파괴행위가 의병운동으로 조직화되어 역을 습격하기에 이르기도 하였다. 또한, 노동 동원에 개입하여 이득을 보던 일본계 건설업자나 지방관이나 아전들이 습격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런 저항 사례 중 특히 잘 알려진 것으로, 1905년 11월 22일에 발생하였던 열차 투석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유리파편을 뒤집어써서 경상을 입은 사건이 있다. 이러한 저항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은 한국정부에 치안을 압박하다 못해, 러일전쟁기에는 치안 유지를 위해 군정과 군율을 동원해 폭압적으로 대응하기까지 하였다.[22]

개통 이후 일제강점기까지[편집 | 원본 편집]

국유화와 조직개편

러일전쟁이 1905년 9월에 강화조약으로 종결되면서 일본은 사실상 한반도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철도 사업에 대해서도 구태여 주식회사의 형태로 놔둘 이유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이미 1902년에 경인철도를 경부철도 주식회사에 합병하여 영등포 이북 구간을 경부철도가 공용하도록 개편해 둔 상태였지만, 한편으로 전쟁중에 임시군용철도통감부에서 건설권을 강탈에 부설을 실시한 경의선 및 건설중인 경원선이 별개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일본 정부 부처간의 논의 끝에 조선통감부를 설치하고 여기에서 경영케 하도록 하는 방침이 결정되어, 1906년 6월에 경부철도를 정부가 매수하여 국유화 하는 것이 결정되었다.[23]

이에 따라 동년 7월에 통감부 철도관리국이 설치되어 한국 내에 설치된 경인, 경부, 경의, 경원 각 철도의 통일 경영을 개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의 경기 냉각으로 경영여건이 극히 악화되었던 바 그 조직을 추곳하고 경비절감을 꾀할 수 밖에 되어 이후 1909년에는 다시 통감부 철도청으로 개칭하여 조직을 축소개편하였고, 이후 다시 일본 본토의 철도원 소관으로 일원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총독부가 설립되면서, 1년여만에 최종적으로 총독부 철도국이 한국 내의 철도를 총괄하게 되었다.[24]

초창기 개량공사

국유화 이후 선로상태가 열악한 가설선 수준의 경의철도 개량이 일단락 되면서 경부선의 본격적인 개량이 추진되었다. 다수의 임시 가설구간이 존재하던 철도였기 때문에 급구배와 급곡선을 최대한 축소하려는 공사를 실시하였다. 대표적으로 약목~김천 사이의 구간은 금오산 남쪽의 산기슭을 터널로 관통하는 선형이었는데, 이를 폐지하고 구미, 대신을 경유하는 완경사의 우회선을 새로 건설하기도 하였다.

또한 초량까지만 건설된 철도를 남쪽으로 연장하고, 부산항의 축조와 더불어 열차가 직접 부두에 진입할 수 있는 인입선 공사를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부산역과 구 부산잔교역이 정비되어서 전체 구간을 완성하게 되었다. 또한 1912년에는 한강교량을 복선화, 1914년에는 노량진용산의 구내 개량사업을 완료하여 경인선과 공용하는 구간의 용량을 확충하였다.

성현터널 주변 역시 1920년에 개량공사에 착수하여 2,323m의 신규 터널을 굴착하고 터널 전후의 경사도도 20퍼밀에서 10퍼밀로 완만하게 바꾸었으며, 이때 남성현역을 설치하여 1923년 5월부터 운행을 개시하게 되었다. [25]

복선화

경부선은 일제 당시 가장 핵심 간선으로서 지속적인 개량과 정거장의 증설, 열차 증강이 이어졌으나. 1930년대에 이르러 근본적인 시설 개량이 필요할 정도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경의선과 함께 복선화 및 시설 대개량이 결정되어 1937년부터 착수가 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신간선의 전신인 탄환열차 건설계획이 구상되고 있는 상황으로, 이에 호응하여 가급적 구배와 곡선이 최소화된 노선으로의 개량이 꾀해지지만 중일전쟁의 개전에 따른 물가상승 및 자재난으로 인해서 극적인 개량에는 이르지 못하고, 최소곡선반경 600m, 최대경사는 8퍼밀로 하되 하행선로에 한해 10퍼밀까지 허용하는 기준 하에 복선화 개량이 착수되게 되었다[26].

개량공사 이전에 이미 1918년에는 부산~부산진간, 그리고 1919년에 영등포~서울간의 복선이 사용 개시되어 있었다. 1937년의 복선화 방침이 확정될 즈음에 1936년부터 이미 일대의 공사가 착착 착수되어서, 1937년에는 부산진~삼랑진간 46.3km와 영등포~대전간 158.1km의 복선 공사가 착수되었으며, 1940년에는 삼랑진~대전간 234.0km구간이 착수되었다.

부산진~삼랑진간은 1940년 4월에 복선운전이 개시되었으며, 삼랑진~대전간은 1943년에 완성구간에 한한 복선운전이, 대전~영등포간은 1939년 6월에 복선운전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당초 1944년에 전구간의 복선운전을 실시하는 방침은 전쟁으로 인한 공사의 급증과 물가, 자재난으로 인해서 그 달성이 매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었다. 특히 1939년에는 철강 등 주요자재의 할당제도가 실시되면서 교량 등의 핵심 시설물 건설을 위한 자재 확보가 어려워서 그 진척이 심각하게 지연되었다. 1944년 7월에 사이판 함락에 따른 전황의 악화에 따라 전쟁 중의 물자 전가수송이 더더욱 중시되게 되면서, 만철이나 조선 내의 사철 등지에서 레일을 공출하여 복선화 및 조차장 건설 등에 자재를 충당하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이에 힘입어 1944년 12월에는 복선의 부설이 완료되어, 1945년 2월 25일에 전 구간의 복선 운전이 개시되었다. 다만, 교량 부설이 크게 지연된 낙동강교량과 경의선 청천강교량 및 대령강교량은 단선 운행이 실시되었으나, 최종적으로 1945년 6월 1일에 전 구간의 복선화가 완료되었다.

해방 이후[편집 | 원본 편집]

해방 직후 상황

경부선은 핵심 항만인 부산항과 서울을 연결하는 철도로서 해방 직후의 혼란에서 경인선과 함께 가장 우선적으로 복구와 운행 재개가 이루어졌다. 차량과 시설은 전쟁 당시의 육운전가수송으로 인한 혹사와 인력, 자재 부족으로 인한 보수의 미비로 인해 상당히 피폐해져 있었고, 해방 전후에는 석탄 등의 수급마저 멈춰서 사실상 운행중단 상태에 빠져있었다. 이 상황 하에서 행정을 인수한 미군정은 정상화를 위해 한국인 직원의 협조를 얻기 위해 일본인 직원의 해고 및 귀국을 단행하였고, 이로 생긴 공백을 해결하기 위해 미군의 철도대대를 1945년 11월부터 각각 서울과 부산에 투입하였다.[27]

해방 이후 탄광시설의 사보타지와 수입 유연탄 확보의 곤란으로 인해 1947년에 이르도록 열차 운행은 상당한 파행을 겪었지만, 이후 점차적으로 운행태세를 회복하기 시작했고 여객과 화물 수송량 역시 계속 증가하였다. 미국이 전시수송용으로 제작하여 유럽 등지에 투입하던 소리2형 증기기관차를 이시기에 대거 한국에 공여하여 동력차 수급에 기여했지만, 예비부품의 부족과 좌우대립으로 인한 사보타지, 분단 등으로 생긴 석탄, 전력 수급의 장애 등이 겹치면서 해방당시의 상황은 지극히 불안정하였으나, 정부수립 이후 느리게 정상화를 향해가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 상황에서 결정타를 입힌 것은 한국전쟁의 발발이었다. 개전 초기에 빠른 전선 후퇴 과정에서 정부는 경부선을 따라 후방으로 철수하였고, 이후 미군의 거부폭격으로 인해 서울 및 용산 일대의 철도시설이 큰 타격을 입었으며, 한강철교, 금강철교, 낙동강철교 등 주요 병참선에 걸치는 경부선의 철교 역시 폭파 처분되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의 철수에 따라 서울을 수복하고 복구작업이 개시되었지만, 1951년 1.4후퇴로 인해 재차 서울에서 철수하였다. 1951년 3월 14일에 이르러서야 재수복이 달성되었으며, 당시 격전과 남북간의 시설 사용거부 조치로 서울지구의 시설은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산업화 연간의 발전[편집 | 원본 편집]

여객수송의 발전

1955년 UN군 관할의 군수수송 우선 체제에서 다시 한국정부로 철도 관할이 이관되면서, 경부선을 위시한 각 철도의 복구와 발전이 본격화되었다. 동년 8월 15일에 특급 통일호가 운행개시하면서 서울~부산간의 7시간대 운전이 개시되었으며, 이는 이후 디젤 견인열차인 무궁화호가 6시간 30분, 그리고 이후 이보다 빠른 재건호의 투입으로 일제당시의 특급 보다 빠른 6시간 10분대 주파를 달성하게 되었다.

이후 산업화 연간의 여객과 화물의 물동량이 급증하면서 경부선의 교통량은 이후 지속 증가추세를 보이게 된다. 이에 따라 설비의 현대화도 적극 추진되어, 자동폐색장치(ABS)의 도입 및 관광호 운행의 안전확보를 위한 ATS의 도입도 1960년대에 이루어진다.

1974년에는 서울 지하철 및 경인, 경원선과 연계하여 서울~수원 간의 전철화가 개통되어 전동열차의 운행이 개시되었다. 다만 이 당시에는 일반열차들과 복선을 공유하였기에 배차간격은 40분에 1대 정도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컨테이너 수송과 화물 기능의 집적화

경부선 화물의 주종을 이루는 컨테이너 화물의 도입은 1973년에 용산~부산간의 노선으로 최초로 시작되었다. 이후 도로의 발달로 유개차 수송에 의존하던 일반 잡화들이 쇠퇴하였으나, 컨테이너 수송은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하였다. 이후 화물취급의 효율화를 위하여 남부화물기지(현재의 오봉역) 및 부산진역의 개량, 부곡역의 조차장화 및 대전조차장 설치가 이루어졌으며, 경부선 각역의 대피선 증설 및 유효장 확대 또한 병행되었다.

혼잡문제의 대두

핵심 간선인 경부선 연선은 다수의 인구와 대량의 산업이 집적되어 있었던 만큼 산업화 시기의 높은 경제성장률에 힘입어 그 여객과 화물 수요가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처리능력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다수의 대책이 제안되었으며, 그 중에는 경부고속철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경제규모나 재정적 여유가 부족한 상황에서 실제 적극적인 추진은 90년대까지 미루어졌으며, 그 중간 대안으로 전철화와 복복선화가 추진되었다. [28]

영등포에서 수원에 이르는 부분 복복선화는 1976년 6월에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포함되어 77년부터 80년까지의 계획으로 추진되었으며, 1981년 12월 23일에 개통되었다. 이를 통해 일반열차와 전동열차가 별개의 선로를 사용하게 되면서 선로용량이 대폭 확충되었으나, 수원역에서 전동열차 회차시의 교차지장이 잔존하여 이 부분이 추후 추가 복복선화가 진행될 때 까지 병목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1975년에 경부선 전구간에 걸친 전철화계획이 수립되었다. 이는 특히 1973년 10월 발발한 "욤 키푸르" 제4차 중동전쟁으로 인해 제1차 오일쇼크로 유가가 급등하면서 철도운영에 상당한 위기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럽 혼성 차관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투입 대비 효율에 대한 의문으로 중단되기도 하였으며[29], 이후 전철화 계획은 신경부선 등의 고속전철 대안과 경합하면서 추가로 진척되지 못한 채 다음 시대를 기다리게 되었다.

고속화와 PP새마을의 등장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고속철도 도입 지연을 만회하기 위한 여객열차의 증속이 추진되었다. 이미 관광호 차량 도입시점에 150km/h 대응이 가능한 객차를 도입하고 있었으나, 신호 및 시설 수준은 이에 미치지 못할 뿐더러, 동력차의 성능 역시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종합적인 증속을 추진하기 위하여 선로, 차량, 신호, 운전분야에 걸쳐 경부선 속도향상위원회가 1984년 6월 7일 구성되었으며, 차량의 개선 및 궤도 중량화, 시설 기준 개량, 등의 개량과 함께 최고속도 135km/h를 낼 수 있는 표준선구를 설정하여 최대한의 속달화를 추진하였다.[30]

이를 통해 1985년 열차시각 개정을 통해 기존 4시간 40분에 주파하던 새마을호는 4시간 10분의 운전시간을 달성하게 되었다.[31] 물론 이를 위해서 정차역은 이른바 "서대동부"라 불리는, 대전과 동대구만 정차하는 극단적인 속달운전을 실시하는 상황이었으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속도를 달성하였다.

이후 1987년에는 새마을호의 고급화를 달성하기 위한 전후동력형 새마을호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 차량은 경량화된 동력차(축중 17톤)을 전후에 연결한 동차형의 차량으로, 고출력에 기반한 고속성능과, 종착역에서의 입환이 생략되어 그 운용효율이 높아서 상당기간 경부선의 간판열차로 활약하였다.

근래의 발전[편집 | 원본 편집]

병점차량기지 신설 및 복복선 구간 연장

PP새마을의 투입과 여객열차의 증강이 잇따르긴 했지만 90년대의 경부선은 혼잡이 격심하여 주말에는 좌석매진이 일상이었다. 또한, 수원역에서 전동열차의 반복을 위해서 교차지장이 생기는 문제로 전동열차 증강의 어려움은 물론, 안전 문제[32]까지 있어서 그 해결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경부선 복복선을 천안까지 연장하고, 중간에 병점에 차량기지를 신설하여 전동열차를 대폭 증강, 지속되는 좌석난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91년에 천안까지의 복복선화 사업에 착수하였으며[33], 중복투자 논란 및 용지매수 지연 등의 우여곡절을 거치면서[34] 당초 계획된 95년에서 5년여가 지연된 끝에 2003년 4월 30일에는 수도권전철의 병점연장 및 병점차량기지가 이루어져 수원역에서의 교차지장 문제가 해소되었으며, 2005년 1월 20일에는 천안 연장과 상시 급행열차 운행이 개시되었다.

전철화

경부고속철도가 1992년 기공되어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전구간 동시개통이 아닌 단계별 개통으로 변경되었고 이에 따라 기존선인 경부선을 활용한 운행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장기 보류되었던 수도권전철 구간 외의 구간의 전철화가 결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2004년에 경부선 대전조차장~옥천역구간, 신동역~부산역구간의 개량과 전철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병행하여 급곡선구간의 직선화와 건널목 입체화, 터널 및 교량의 개량공사 등도 진행되었다.

또한 경부선 잔여구간의 전철화 역시 2002년에 착공, 순차적으로 진행되어서 천안~대전조차장 까지의 전철화가 2005년에, 옥천~신동 구간의 전철화가 2006년에 달성되어 디젤기관차에 의해 운행하던 일반열차들의 전기견인이 개시되었다.[35].

연표[편집 | 원본 편집]

개통부터 해방까지[편집 | 원본 편집]

  • 1901년 6월 25일 : 경부철도주식회사 설립
  • 1901년 8월 22일 : 북부구간(영등포~명학) 기공식
  • 1901년 9월 21일 : 남부구간(초량~구포) 기공식
  • 1903년 11월 1일 : 경인철도 인수 합병
  • 1904년 12월 28일 : 일본정부 경부철도 속성칙령 발표
  • 1905년 1월 1일 : 서울~초량 간 전구간 445.6km 영업개시
  • 1907년 1월 40일 : 급행열차 융희호 운행
  • 1909년 11월 11일 : 부산~초량간 복선운전 개시
  • 1916년 11월 1일 : 김천~대구간 개량공사로 구미 경유로 변경
  • 1920년 10월 15일 : 초량~부산진간 복선운전 개시
  • 1923년 3월 1일 : 성현터널 구간 개량공사 준공
  • 1925년 7월 17일 : 을축대홍수로 운행중단
  • 1925년 9월 30일 : 경성역(현 서울역 구 역사) 준공
  • 1936년 7월 7일 : 부산진~삼랑진간 및 대전~영등포간 복선화 공사 착공
  • 1938년 5월 1일 : 영등포역을 남경성역으로 변경
  • 1939년 6월 15일 : 대전~영등포간 복선운전 개시
  • 1940년 4월 1일 : 부산진~삼랑진간 복선운전 개시
  • 1943년 4월 1일 : 남경성역을 영등포역으로 환원
  • 1945년 6월 1일 : 경부선 전구간 복선운전 완공

해방 이후[편집 | 원본 편집]

  • 1946년 11월 13일 : 영등포역 구내 충돌사고
  • 1950년 6월 28일 : 한강철교 폭파
  • 1950년 6월 30일 : 서울, 용산지구 사용거부 폭격 실시
  • 1950년 7월 12일 : 금강철교 폭파
  • 1950년 8월 3일 : 왜관~약목간 낙동강철교 폭파
  • 1950년 9월 23일 : 경부선 복구 개시
  • 1951년 4월 3일 : 한강철교 임시선 개통
  • 1951년 4월 18일 : 낙동강철교 가복구 준공
  • 1951년 6월 12일 : 한강철교 A선 가복구 준공
  • 1951년 7월 15일 : 서울~부산간 직통여객열차(103, 104열차) 운행
  • 1952년 4월 30일 : 낙동강철교 본복구공사 준공 개통
  • 1952년 6월 30일 : 한강철교 B선 복구
  • 1954년 1월 3일 : 경부선 병점~오산간 건널목 사고(789열차와 육군 트럭 충돌. 사망 56명, 부상 78명)
  • 1955년 3월 2일 : 부산역 구내 열차화재사고(6열차 객차 발화, 사망 42명, 부상 45명)
  • 1955년 6월 1일 : UN군으로부터 철도운영권 인수
  • 1955년 8월 15일 : 서울~부산간 특급 통일호 운행
  • 1957년 8월 30일 : 특급 통일호 운전시간을 7시간으로 단축
  • 1958년 2월 3일 : 영등포역 406열차 객차전복 탈선사고(사망 5명, 부상 30명)
  • 1960년 1월 26일 : 서울역 승객 압사사고(사망 31명)
  • 1960년 2월 21일 : 특급 무궁화호 운행 개시, 운전시간 6시간 30분 달성
  • 1962년 5월 15일 : 특급 재건호 운행 개시, 운전시간 6시간 10분 달성
  • 1966년 3월 16일 : 경부선 화물열차 수출호 최초 운행
  • 1966년 7월 21일 : 특급 맹호호 운행 개시, 운전시간 5시간 45분 달성
  • 1966년 12월 7일 : 영등포~시흥간 장대레일 갱환 설치 완공
  • 1967년 8월 31일 : 증기기관차 종운식(서울역)
  • 1969년 2월 10일 : 특급 관광호 운행 개시
  • 1969년 4월 5일 : 열차자동정지장치(ATS) 설치공사 완료
  • 1969년 6월 10일 : 초특급 관광호, 4시간 45분으로 운전시간 단축
  • 1970년 11월 25일 : 수도권 전철화 조사 측량 착수
  • 1971년 4월 7일 : 전철공사 착공
  • 1971년 12월 29일 : 동대구역 역사 신축 준공

수도권전철 개업 이후[편집 | 원본 편집]

  • 1974년 6월 30일 : 수도권전철 공사 완공 및 구로 전철역사 준공
  • 1974년 8월 15일 : 서울~수원 구간 전철화 개통과 함께 통근형 전동차(1호선) 운행 개시. 남영역, 대방역, 가리봉역, 관악역, 명학역, 화서역 개업 및 증약역 폐지. 지선인 구로선(구로~가리봉) 개통 (현재의 경부3선으로 추정)[36]
  • 1977년 12월 30일 : 부산역 및 용산역 컨테이너 기지 준공
  • 1981년 12월 23일 : 경부 영등포~수원간 복복선 개통
  • 1984년 8월 31일 : 경부선 서정리~천안간 새마을호 150km/h 주행 시운전 성공
  • 1987년 7월 6일 : 전후동력형 새마을호 열차 운행 개시
  • 1991년 11월 23일 : 영등포~구로간 3복선 개통
  • 2003년 4월 30일 : 경부선 수원 병점간 복복선 개통
  • 2005년 1월 20일 : 경부선 병점~천안간 복복선 개통
  • 2005년 3월 31일: 가리봉역 이름을 가산디지털단지로 변경[37]
  • 2005년 7월 1일 : 경부선 조치원~대전조차장 간 전철화 개통
  • 2006년 12월 8 일 : 경부선 전구간 전철화 개통
  • 2006년 12월 15일 : 광명셔틀열차 개통(용산~광명간)
  • 2019년 4월 17일: 노선번호를 201에서 302로 변경[38]

운행[편집 | 원본 편집]

높은 이동 수요 탓에 전 구간에 걸쳐서 여객 · 화물 가릴 것 없이 많은 열차가 운행된다. 여기서는 여객 열차 위주로 서술한다.

대한민국 철도의 특성상, 서울로 들어갈 수 있는 경로가 제한되어 있어 경부선은 서울과 부산 간을 잇는 열차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호남선, 전라선, 장항선 등의 열차도 사용한다. 이외에도 경전선 방면 열차 역시 말단부에서 경부선을 사용하여 운행한다. 때문에 들어오는 계통이 상당히 다양하며, 여기서는 경부선 열차로 불리는 노선들에 대해서만 기재해둔다.

고속철도[편집 | 원본 편집]

KTX는 최초 운행 시부터 경부선 기존선을 활용하고 있다. 서울 ~ 금천구청의 경우 모든 서울·용산을 정차하는 고속열차가 사용하며, 이 외에도 접근성을 위해 기존선 경유 열차도 운행되고 있다. 고속선은 경부고속선을 참조하기 바라며, 기존선 경유 열차는 다음과 같다.

또, 경전선 KTX와 SRT는 동대구~밀양 구간을, 서대구에 정차하는 일부 KTX는 신동~동대구 구간을 사용한다. 자세한 사항은 마찬가지로 KTXSRT 문서를 참조.

ITX · 새마을호[편집 | 원본 편집]

ITX도시간 철도(Intercity)의 기능을 수행하는 열차로 차량은 ITX-마음ITX-새마을을 사용한다. 새마을호도 같은 기능을 하는데 장항선 열차로만 운행된다. 정차역은 주요역만을 나열하였으며, 기울임체를 사용한 역은 동해선 구간이다.

  • ITX-마음 (1100): 서울 - 영등포 - 수원 - 천안 - 대전 - 김천 - 구미 - 동대구 - 밀양 - 구포 - 부산 (1일 2왕복)
  • ITX-새마을 (1000): 서울 - 영등포 - 수원 - 천안 - 조치원 - 대전 - 김천 - 구미 - 동대구 - 밀양 - 구포 - 부산 (1일 7왕복)
  • ITX-새마을 (1020): 서울 - (1000번대와 동일) - 구포 - 부전 - 신해운대 (1일 1왕복, 주말 1왕복 증편)

무궁화호[편집 | 원본 편집]

무궁화호지역간 수송(Regional)을 주로 담당하는 열차로, ITX-새마을 (1000)에 더해 더 많은 역을 정차하나 정차역의 패턴은 일정치 않다. 현재 운행되는 경부선 열차는 다음과 같다. 마찬가지로 정차역은 주요역만을 나열하였으며, 운행횟수는 구간운행 열차를 포함한다.

  • 무궁화호 (1200, 1300): 서울 - 영등포 - 수원 - 평택 - 천안 - 조치원 - 대전 - 김천 - 구미 - 동대구 - 경산 - 밀양 - 구포 - 부산 (1일 23왕복[39])

광역전철[편집 | 원본 편집]

최초에 수도권 전철이 개통할 당시부터 서울과 수원간의 지역 통근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역간 거리를 좁혀 역을 신설하여 국철로써 운행된 것이 경부선에서의 수도권 전철 운행의 시작이었다. 대한민국이 발전하면서 서울과 부산간의 이동 수요가 크게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호남선, 전라선 등의 열차도 이 노선을 쓰는 탓에 서울부터 천안까지의 선로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때문에 1990년대부터 수도권 전철을 천안까지 연장하는 계획이 시작되었으며, 2005년부터 해당 구간에 수도권 전철이 운행되고 있다.

역 목록[편집 | 원본 편집]

서울 ~ 천안[편집 | 원본 편집]

  • : 수원 경유 KTX, I: ITX-마음, ITX-새마을 및 새마을, : 무궁화호, : 1호선 급행열차 (청량리~천안·신창)
  • 1호선 일반열차는 해당 구간의 모든 역에 정차
  • : 경부선, 경전선 계통
  • : 호남선, 전라선, 장항선 계통
  • ●: 모든 열차 정차, ▲: 일부 열차 정차, ┃: 모든 열차 통과
번호 km 정거장 I 연계 노선 소재지
0.0 서울 경의선 (연결): 경의·중앙선
1호선, 4호선, 공항철도
GTX A노선 (예정)
용산구
- (분기점) 1호선 (연결)
134 1.7 남영
135 3.2 용산 용산선, 경원선: 경의·중앙선
4호선 (신용산역, 수도권 전철간 환승 할인 없음)
4.0 (분기점) 용산삼각선 (연결)
136 5.8 노량진 9호선 동작구
137 7.3 대방 신림선 영등포구
138 8.1 신길 5호선
139 9.1 영등포 신안산선 (예정)
140 10.6 신도림 2호선 본선 · 신정지선 구로구
141 11.7 구로 경인선 (연결): 1호선 직결운행
구로기지선 (연결)
13.0 (분기점) 구로삼각선 (연결)
P142 14.1 가산디지털단지 7호선 금천구
P143 16.1 독산
P144 17.3 금천구청
17.7 (분기점) 시흥연결선 (연결): 1호선 직결운행
P145 19.6 석수 신안산선 (예정) 안양시
P146 21.5 관악
P147 23.9 안양 경강선 (예정)
P148 26.1 명학
P149 27.5 금정 과천선 · 안산선: 4호선 군포시
P150 29.7 군포
P151 31.3 당정
P152 33.9 의왕 남부화물기지선 (연결) 의왕시
P153 36.8 성균관대 수원시
P154 39.4 화서
P155 41.5 수원 분당선 · 수인선: 수인·분당선
P156 44.4 세류
P157 48.7 병점 병점기지선 (연결): 1호선 직결운행 화성시
P158 51.1 세마 오산시
P159 53.8 오산대
P160 56.5 오산
P161 60.5 진위 평택시
P162 64.3 송탄
P163 66.5 서정리 평택고속연결선 (연결) (예정)
P164 71.3 평택지제 수서평택고속선: SRT
71.8 (분기점) 평택삼각선 (연결)
74.7 (분기점) 평택직결선 (연결)
P165 75.0 평택 평택선 (연결)
P166 84.4 성환 천안시
P167 89.8 직산
P168 93.6 두정 천안직결선 (연결): 1호선 직결운행
P169 96.6 천안 천안직결선 · 장항선: 1호선

소정리 ~ 추풍령[편집 | 원본 편집]

  • : 수원 경유 KTX, I: ITX-마음 및 ITX-새마을, : 무궁화호
  • ●: 모든 열차 정차, ▲: 일부 열차 정차, : 일부 ITX-새마을만 정차, ┃: 모든 열차 통과
번호 km 정거장 I 연계 노선 소재지
107.4 소정리 세종특별자치시
114.9 전의
122.6 전동
126.1 서창 오송선 (연결)
129.3 조치원 충북선 (연결)
134.9 내판
139.8 부강 부강화물선 (연결)
144.4 매포
151.9 신탄진 대덕구
157.5 회덕
161.6 대전조차장 경부고속선, 호남선 (연결)
166.3 대전 1호선
경부고속선, 대전선 (연결)
동구
173.6 세천
경부고속선 직결운행
182.5 옥천 옥천군
190.8 이원
196.4 지탄
200.8 심천 영동군
204.6 각계
211.6 영동
226.2 황간
234.7 추풍령

신암 ~ 부산[편집 | 원본 편집]

  • : 구포 경유 KTX, I: ITX-마음 및 ITX-새마을, : 무궁화호
  • ●: 모든 열차 정차, ▲: 일부 열차 정차, : 일부 ITX-새마을만 정차, ┃: 모든 열차 통과
번호 km 정거장 I 연계 노선 소재지
240.7 신암
경부고속선 직결운행
김천시
246.2 직지사
253.8 김천 경북선 (연결)
263.5 대신
269.2 아포
276.7 구미 구미시
281.3 사곡
- 북삼 (미개통) 칠곡군
289.5 약목
296.0 왜관
302.2 연화
305.9 신동 신동화물선 (연결)
308.2 연결선 (분기) 대구북연결선 (연결)
313.3 지천 서구
318.9 서대구
323.1 대구 1호선 북구
326.3 동대구 1호선
경부고속선 (연결)
동구
331.8 고모 수성구
333.4 가천 대구선 (연결)
338.6 경산 경산시
345.7 삼성
353.1 남성현 청도군
361.8 청도
367.4 신거
372.2 상동 밀양시
381.6 밀양
392.6 미전 미전선 (연결)
394.1 삼랑진 경전선 (연결)
403.2 원동 양산시
412.4 물금 양산화물선 (연결)
421.8 화명 북구
425.2 구포 3호선
430.3 사상 2호선, 부산김해경전철, 사상하단선 (예정)
가야선 (연결), 경전선 (예정)
사상구
439.9 부산진 동해선, 우암선, 1호선 (연결) 동구
441.7 부산 1호선
경부고속선 (연결)

폐역[편집 | 원본 편집]

지선[편집 | 원본 편집]

제1간선이다보니 아무래도 지선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몇몇 지선은 꽤 긴 수준이다.

일반 지선
화물선
연결선
역과 역간을 연결하는 노선들로, 주로 입체교차를 위해 만든 노선들이다.
삼각선
일제시대에 건설된 경부선의 지선은 모두 부산 방면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서울에서 출발한 열차가 지선을 이용하려면 방향을 돌려야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오송선, (구)대전선, 미전선이 건설되었다.
기지선

천안직결선[편집 | 원본 편집]

천안직결선
종류 일반철도(지선)
번호 30207
구간 두정 ~ 천안
영업거리 3.1 km
역 수 2개
개통일 1979년 6월 15일
시설 정보
선로 2
신호 ATS
나머지 정보는 경부선과 동일

두정역천안역을 잇는 노선으로, 경부선을 입체교차해 장항선과 연결하는 기능을 가진 노선이다. 수도권 전철 1호선은 원래 천안역 분기로, 경부선과 장항선 방면으로 직결할 계획이 있었으나, 장항선 방면으로 직결할 계획만 남아있던 탓에, 장항선 구간은 개통하지 않았지만 장항선 천안역 구내를 사용하도록 배선이 잡혔다. 이 때문에 고빈도로 운행되는 경부선과 수도권 전철 1호선 열차는 입체교차 전철 노선이 필요했고, 연결선을 이설 신설하게 된다.

경부선을 따라 천안역 북쪽에서 내려와 장항선으로 가는 모든 열차는 이 노선을 이용한다. 경부2선에서 분기하기 때문에, 장항선 일반열차는 반드시 두정역 초입에서 감속하여 선로전환기를 건너야만 하는 난점이 있다.

옛 천안직결선은 천안 서부 성정동 부지를 크게 맴돌아 천안역 구내로 들어가는 노선이었으며, 이는 안성선과 직결하기 위했던 구조물로, 장항선의 전신이 사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는 개량되어 경부선 바로 옆에 붙어서 분기하고 있으며, 해당 부지는 천안축구센터 부지로 전용되어 사용 중이다.

번호 km 정거장 연계 노선
P168 0.0 두정 경부선 (연결)
P169 3.1 천안 장항선 (연결)
경부선

용산삼각선[편집 | 원본 편집]

용산삼각선
종류 일반철도(지선)
번호 30201
구간 경부선 분기점 (한강철교 인근) ~ 경원선 분기점 (한강대교 밑)
영업거리 0.5 km
개통일 불명
시설 정보
선로 1
신호 ATS
나머지 정보는 경부선과 동일

경부선 3선(전동급행) 하행과 경원선 하행 방향을 잇는 삼각선으로, 단선 평면교차 삼각선이다. 한강철교(A/B선) 북단에서 분기하며, 아주 좁은 곡선반경을 그리며, 경원선 한강대교 밑 절연구간으로 이어진다. 경원선 쪽은 공간도 모자라서 곡선부 통과 싱글슬립 분기기를 사용할 정도며, 때문에 운전에 여러모로 애로사항이 꽃피는 노선. 하지만 수도권 철도가 너무 빈약한 나머지 중앙선과 경부선을 직접 잇는 선로는 충북선까지 내려가야 있고, 다행히도 경부선 접속이 그나마 중요성이 조금 떨어지는 3선이다보니 어쩔 수 없이 이 노선이 사용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자주 있다. 현재는 과감하게 분기를 이설해서 싱글슬립 및 장대 절연구간 문제가 해소되었다.

km 정거장 연계 노선
0.0 삼각선 (경부선) 경부선 (연결)
0.5 삼각선 (경원선) 경원선 (연결)

구로삼각선[편집 | 원본 편집]

구로삼각선
종류 일반철도(지선)
번호 30202
구간 경부선 분기점 (구로기지 옆) ~ 경인선 분기점 (구일역 직전)
영업거리 1.2 km
개통일 불명(1992년~1996년 사이)
시설 정보
선로 1
신호 ATS
나머지 정보는 경부선과 동일

경부선과 경인선을 이어주는 삼각선이다. 경부선의 구로역가산디지털단지역 사이에서 분기하여 경인선의 구로역과 구일역 사이에서 경인선과 합류한다.

구로삼각선이 합류하는 경부선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열차빈도가 높은 지점으로, 정시성을 크게 개의치 않는 화물열차만 정기적으로 운행하며 그나마도 반드시 경부선을 경유해야만 하는 화물 위주로 소수만 설정되어 있다. 경인선 화물열차들 다수가 운전에 애로사항이 많은데도 용산삼각선을 경유하는 경로로 잡히는 이유가 이 구간을 통과하기가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여객열차는 경인선 임시열차가 극히 드물게 설정된다. 역시 경부선 통과가 어렵기 때문.

km 정거장 연계 노선
0.0 삼각선 (경부선) 경부선 (연결)
1.2 삼각선 (경인선) 경인선 (연결)

오송선[편집 | 원본 편집]

오송선
종류 일반철도(지선)
번호 30208
구간 서창 ~ 오송
영업거리 4.6 km
역 수 2개
개통일 1978년 5월 1일
시설 정보
선로 2
신호 ATS
나머지 정보는 경부선과 동일

경부선 상행과 충북선 하행을 잇는 삼각선. 최초 개업시에는 서창선이라고 불렸으며, 동시에 서창신호장이 개설되었다. 조치원 방면의 충북선이 단선인데도 불구하고 삼각선이 복선이다. 미전선과 비슷한 케이스지만, 미전선은 그래도 여객 열차가 더 자주 다니는 경로니 그렇다 쳐도, 이 쪽은 여객열차가 별로 다니지 않음에도 복선이다. 그도 그럴 것이, 충북선은 중앙선 · 태백선 방면의 화물열차가 경부선에 도달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경로고, 오송선은 수도권 방향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긴 노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화물열차가 상당히 많이 다니기 때문에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는 노선.

km 정거장 연계 노선
0.0 서창 경부선 (연결)
4.6 오송 충북선 (연결)

각주

  1. 서울~용산, 조치원~대전조차장, 구미~경산
  2. 서울의 명칭을 따져보면 엄밀히는 경성부의 영향으로 남은 것이기는 하다.
  3. 국토교통부고시 제2019-173호. 단, 철도거리표에서는 구분을 위해 '본선'으로 표기한다.
  4. 1857년생. 1925년 몰. 한문 시인 고노 텟토(河野鉄兜)의 아들. 1883년에 공부성 철도국 입국. 토목기사로 구레 진수부 건설공사 등에 관여하였다.
  5. 북향 기준, 남향 기준일 때는 좌안이 된다. 낙동강의 동쪽 하안 지역
  6. (1977) 《한국철도사》 제2권. 철도청, 9쪽
  7. 1857년생, 1931년 몰. 철도관료로 1884년 공부성 철도국 입부, 1896년에 퇴직하여 치쿠호 철도, 큐슈철도 사장을 역임. 1914년에 철도원 총재, 이후 철도대신 등을 역임하고, 1929년에 남만주철도 총재 취임.
  8. 1847년 생, 1921년 몰. 도막운동 참여로 경력을 시작하여, 메이지 이후 가나가와현 부지사까지 역임하다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수감. 이후 중의원 역임. 동경주식거래소 대표 역임, 말년에는 사회단체인 제국공도회를 설립.
  9. 新橋. 설명에 따르면 논산서 10리, 강경서 20리 지점.
  10. 상게서, 9-10쪽.
  11. 1857년생, 1935년 몰. 토목기사로 일본토목(주)에 입사하여 큐슈철도, 지쿠호 철도, 모지항 축항 등에 종사. 이후 철도학교(현재의 이와쿠라 고교), 철도협회 등을 설립하였다. 1901년에 경부철도 기사장으로 입사하여, 1906년에 퇴사. 이후 도네발전(주) 사장, 조소철도(주) 취제역 등을 역임.
  12. 상게서, 11-12쪽.
  13. 상게서, 13쪽.
  14. 이후 철도원을 거쳐 철도성이 된다. 일본국유철도의 원류.
  15. 이는 추정컨대, 당시 이미 프랑스가 경부철도 및 경의철도 부설을 주장하고 있고, 경의선의 경우 대한제국 정부가 서북철도국을 통해 직접 공사를 추진하면서 재정상 미터궤를 잠정 채용하려는 의도를 보이기도 한지라, 여기에 편승하여 프랑스로부터 자재 도입을 꾀한 것으로 생각된다.
  16. 상게서, 15쪽.
  17. 상게서, 15쪽.
  18. (1999) 《한국철도100년사》. 철도청, 69-70쪽
  19. 현재의 진위역이 아닌 과거 존재했던 역으로, 오산과 서정리 사이에 존재했었다. 개업 당초의 역명 목록에는 무배치역으로 존재했으나, 1910년 경 시간표에서는 이미 폐지되었다. 현재 진위역 서북쪽에 위치해 있던 것으로 추정.
  20. 상게서. 30쪽.
  21. 상게서. 147-161.
  22. 상게서. 162-173
  23. 교통부 편 (1958). 《한국교통60년약사》. 교통교양조성회, 33쪽
  24. 상게서, 36-38쪽.
  25. 센코카이 (2017). 《조선교통사》 제2권. BG북갤러리, 52-57쪽
  26. 상게서, 66-68쪽.
  27. (1992) 《한국철도사》 제4권. 철도청, 76-77쪽
  28. 세종종합기술단 (1976). 《경부선 서울~부산간 수송력증강기본조사》. 삼광문화사, 9-12쪽
  29. “늘려야할 간선수송량 경부선전철화 계획 백지화 따른 과제”, 《매일경제》, 1974년 11월 28일 작성.
  30. (1999) 《한국철도차량 100년사》. (사)철도차량기술검정단, 1540-1546쪽
  31. "새마을호 서울→부산 30분 단축|여객열차 증설…운행시간 개편". 중앙일보, 1985년 11월 9일 보도.
  32. 과거 수원역의 전철 승강장은 1선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다, 표준선구 종점이어서 상당한 고속으로 통과열차가 지나다녔었다. 안전대책으로 통과 열차 접근시에는 경광등과 경보음이 울리는 장치까지 설치되어 있었을 정도.
  33. “수도권전철 천안까지 연장”, 《동아일보》, 1991년 1월 17일 작성.
  34. “수원~천안 전철건설 중단될듯”, 《동아일보》, 1994년 5월 2일 작성.
  35. “경부선 개통 된지 101년만에 전구간 전철화완료”, 《전력신문》, 2006년 12월 10일 작성.
  36. 철도청 고시 제37호
  37. 청계천 시작지점 ‘청계광장’ 이라 불러주세요, 한겨레
  38. 국토교통부고시 제2019-173호
  39. 전구간은 9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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