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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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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전까지는 어느정도 중요한 궁궐이었는데, [[1553년]]에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을 제외한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1554년]] 봄에 다시 지었는데, 50년도 지나지 않아서 [[임진왜란|왜쌍놈들의 침략]]으로 인해 한양이 왜놈들에게 함락돼서 불타 완전히 소실된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어느 정도 중요한 궁궐이었는데, [[1553년]]에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을 제외한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1554년]] 봄에 다시 지었는데, 50년도 지나지 않아서 [[임진왜란|왜쌍놈들의 침략]]으로 인해 한양이 왜놈들에게 함락돼서 불타 완전히 소실된다.  


그후 월산대군의 집을 [[덕수궁|경운궁]]<ref>고종 때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다</ref>으로 쓰다가 광해군 때 창덕궁, 창경궁을 다시 재건했다. 그리고 <s>경복궁은 짓지않고</s> [[경희궁]]과 인경궁을 새로 짓는다. 그렇게 273년동안 지어지지 않다  {{날짜/출력|1865-4-26}}(고종 2년 음력 [[4월 2일]])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s>사실상 흥선대원군</s>가 다시 지으라 명령해서 중건되기 시작해 [[1868년#6월|1868년 6월]] 말에 완성됐다. 현재 남아 있는 경복궁의 전각들은 이때 지어진 것.
그후 월산대군의 집을 [[덕수궁|경운궁]]<ref>고종 때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다</ref>으로 쓰다가 광해군 때 창덕궁, 창경궁을 다시 재건했다. 그리고 <s>경복궁은 짓지않고</s> [[경희궁]]과 인경궁을 새로 짓는다. 그렇게 273년동안 지어지지 않다  {{날짜/출력|1865-4-26}}(고종 2년 음력 [[4월 2일]])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s>사실상 흥선대원군</s>가 다시 지으라 명령해서 중건되기 시작해 [[1868년#6월|1868년 6월]] 말에 완성됐다. 현재 남아 있는 경복궁의 전각들은 이때 지어진 것.

2015년 7월 20일 (월) 22:30 판

Gyeongbokgung Palace Night.jpg

개요

景福宮 / Gyeongbokgung

조선시대에 지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 최초로 지어진 조선 왕조의 법궁이며, 사적 제117호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경복궁.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한양에 성곽종묘, 궁궐 등을 짓게 했는데 경복궁은 1395년에 완공되었다. 경복궁(景福宮)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는데, 조선왕조실록 태조 8년 10월 7일의 기록에 따르면, 시경 주아편의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을 모시리라)에서 끝의 景福에서 따운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것은 태조가 궁궐의 이름을 지어달라[1]고 하자 즉석에서 지었다고 한다. 경복궁의 여러 전각들의 이름을 지은 것도 정도전.

하지만 태종이 왕자의 난을 겪은 경복궁 대신 창덕궁을 지으며 사실상 경복궁보다 창덕궁이 법궁의 역할을 하나, 세종 때 법궁의 지위를 되찾는다. 그렇게 200여년동안 중요한 궁궐로 여겨졌지만 임진왜란때 왜놈들이 종묘 등을 표함하여 경복궁을 싸그리 다 태워버려서 터만 유지해놓게 된다. 고종 때가 돼서야 흥선대원군이 불탄 경복궁을 재건했다. 이때 지어진 경복궁은 원래 경복궁과 차이가 있었다 한다.

역사

임진왜란 전까지는 어느 정도 중요한 궁궐이었는데, 1553년에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을 제외한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1554년 봄에 다시 지었는데, 50년도 지나지 않아서 왜쌍놈들의 침략으로 인해 한양이 왜놈들에게 함락돼서 불타 완전히 소실된다.

그후 월산대군의 집을 경운궁[2]으로 쓰다가 광해군 때 창덕궁, 창경궁을 다시 재건했다. 그리고 경복궁은 짓지않고 경희궁과 인경궁을 새로 짓는다. 그렇게 273년동안 지어지지 않다 틀:날짜/출력(고종 2년 음력 4월 2일)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사실상 흥선대원군가 다시 지으라 명령해서 중건되기 시작해 1868년 6월 말에 완성됐다. 현재 남아 있는 경복궁의 전각들은 이때 지어진 것.

그러나 국고가 모라르는 형편에 지으면서 당백전 발행과 서울 사대문 통행세 등의 무리한 정책으로 결국 흥선대원군이 물러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후에 우리나라 최초로 전기가 들어오는 곳이 된다. 이제부터 망해간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경복궁 건청궁에서 시해당한다[3]. 그리고 1910년 한민족 최악의 치욕 경술국치 직후 일장기가 근정전에 걸렸다고도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동안 일제는 광화문 뒤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웠으며, 경복궁의 전각들을 훼손하거나 일본으로 가져갔다.

8·15 광복 이후에 복원시도가 여러 차레 있었으나, 대부분 무산되거나 하였다.

만약 100% 복원을 하려면 청와대를 옮기거나 없애야 한다.개네들이 설마 그러겠니? 박정희 시절 때 복원시도가 있었는데 더 망했다. 석굴암처럼 광화문에 콘크리트칠해서 훼손시켰다. 뭐 그건 그 시절 시대상이 그랬다 치더라도, 더 큰 치명적인 실수는 광화문의 위치를 근정전이 아닌 조선총독부를 기준으로 했다는 것. 조선총독부는 남산에 세워졌던 신사인 조선신궁을 바라보도록 지어져, 경복궁에서 5도 가량 틀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복원된 광화문 역시 마찬가지로 틀어지게 되어버렸다. 또한 경복궁 내부에 민속박물관을 세워, 복원이 더욱 어려워지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점점 원래의 모습을 잃어간다

민주화 이후 김영삼 정권이 조선총독부 건물을 없애며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이제야 망했어요가 끝났다 1990년 시작 당시에는 36동밖에 없었다는데 지금은 125동. 물론 아직 많이 남았다.[4]

1990년부터 2010년까지 1차복원사업이 진행됐으며, 소주방을 복원하는 것부터 시작해[5] 민속박물관 철거까지 2010년부터 2030년까지 20년동안 2차복원사업이 진행된다.[6] 또 현재의 광화문 역시 원래 자리를 찾아 복원되었다.

주석

각주

  1. , ‘지금 도읍을 정하여 종묘에 제향을 올리고 새 궁궐의 낙성을 고하게 되매, 가상하게 여겨 군신(群臣)에게 여기에서 잔치를 베푸노니, 그대는 마땅히 궁전의 이름을 빨리 지어서 나라와 더불어 한없이 아름답게 하라
    今定都享廟, 而新宮告成, 嘉與群臣宴享于此。 汝宜早建宮殿之名, 與國匹休於無疆。
  2. 고종 때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다
  3. 하지만 숨어살았다는 내용의 외교문서가 발견되어 죽었는지 확실치 않다
  4. 고종 당시에는 500여 동. 이제 겨우 25% 복원한 거다.
  5. 소주방은 틀:날짜/출력에 개관됐다
  6. 경복궁의 76%가 복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