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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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甲申政變. 1884년 12월 4일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 급진개화파가 척족 중심의 온건 개화파를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무력 정변. 일본의 협조를 받아 조선의 개혁을 이루기 위해 일으킨 정변이었으나, 사흘 만에 청군에게 진압되었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개화파의 성장[편집 | 원본 편집]

1876년 2월 2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 정부 내에서 서구의 앞선 기술, 문명을 받아들여야 국가를 보전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날로 증대했다. 고종 역시 개화 정책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여 국가의 재정, 군사업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의 수장인 총리대신은 영의정, 좌의정 등을 임명하였으나 명목상의 직책에 불과했고, 실제로 운영을 주도한 이들은 7사의 당상들이었다. 이들은 설립 초기에는 고종의 근위세력 및 민씨 척족들이 등용되었지만[1], 1881년 11월 이후에는 일본에 수신사로 갔던 박정양, 조준영, 엄세영, 홍영식, 이헌영, 민종목 등이 당상직을 맡았다.

통리기무아문은 군사제도를 개편했다. 종래의 5군영을 무위영과 정어영의 2영으로 개편했으며,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고,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근대적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외에도 무역에서 주로 쓰이는 특산물을 관리해 재정확보책을 강구하였고, 일본과 청국에 조사시찰단과 영선사를 파견했다. 이러한 개화정책 추진은 개화파가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지배세력으로서 500년간 군림했던 유학자들은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해 개화 정책을 강력히 비판했고, 일본에 쌀이 유출되는 것에 반감을 품은 백성들도 개화 정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구식군인 취급 받으면서 봉급도 오래도록 받지 못하던 기존의 5군영 군인들의 불만은 갈수록 커졌다. 그 결과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면서 민씨 척족은 대거 축출되었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뒤 통리기무아문을 철폐하고 개화 정책을 모두 폐기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집권은 오래가지 않았다. 청나라에 영선사로 가 있던 김윤식, 어윤중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라는 밀지를 받은 뒤 청국 정부에 파병을 요청했다. 청나라 조정은 처음엔 고종이 변란을 주도한 게 아닌가 의심했고, 서양이 개입할 걸 우려해 파병을 주저했다. 이에 김윤식이 서양은 마음대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이 이 기회에 조선을 공격하려 할 테니, 차라리 중국이 나서야 한다며 개입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청국 정부는 조선 대신 이유원(李裕元)과 만나서 고종이 이 정변을 원하는지 물어본 뒤,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자 조선 출병을 결정했다. 장수성은 조정의 명을 받들어 6천 병력을 이끌고 출정했다. 제독 오장경, 정여창, 마건충 등이 다섯 대의 배에 군병 4천 명을 이끌고 먼저 출발했고, 김윤식이 이들과 함께 갔다. 대원군은 인천항에 상륙한 뒤 피해 보상과 책임자 송환 등을 요구하는 일본군을 견제하기 위해 청군의 협조를 받아내고 싶었기에, 청군 지휘관의 초청에 응했다. 청군은 대원군이 진영에 오자마자 그대로 납치하여 톈진으로 끌고 갔고, 임오군란을 일으킨 군관들을 섬멸했다.

임오군란 후 개화 사상은 더욱 확산, 발전하였다. 임오군란 이전 들끓었던 위정척사운동은 대원군 세력이 제거되고 고종의 개화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 표명으로 인해 점차 약화되었다. 임오군란 이후 올라온 각종 상소들은 대부분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은 개혁안이 제시되었고, 조선의 부국강병을 촉구하고 서양의 발달된 기술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많았다. 당시 상소의 대부분은 기독교와 같은 서구의 도(道)는 거부해야 할 것으로 보았지만, 농업과 무기, 교통수단 따위는 수용할 것을 주장한 동도서기론을 표명했다. 고종은 이러한 의견을 전폭 수용하고 개화 세력에 힘을 실어줬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개화파가 대세로 자리잡았지만, 곧 분열하기 시작한다.

개화파의 분열[편집 | 원본 편집]

청군은 대원군 정권을 붕괴시키고 명성황후를 복위시킨 뒤에도 철수하지 않고 장기 주둔한 채, 조선 속방화를 위한 적극적인 간섭정책을 실시했다. 오장경과 위안스카이는 병권을 장악하고, 재정고문으로 파견된 진수당은 재정권을 장악했으며, 이홍장이 파견한 묄렌도르프는 해관을 장악하고 조선의 외교 정책을 주도했다. 1882년 음력 8월 28일에 체결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의 전문(前文)에 조선을 청국의 ‘속방(屬邦)’이라고 기재했으며, 오장경은 고종에게 "내가 3천 군대를 거느리고 여기에 와 있으므로 매사에 있어 황조(皇朝 ; 청국)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고 위협했다.[2] 서울에 주둔한 청군의 행패도 심했다. 한번은 군이 광통교 약국에서 의약품을 빼앗으려 하다가 약값을 요구하는 최씨의 아들을 사살하고 최씨에게도 총을 쏘아 중상을 입혔다. <한성순보>가 이를 보도하자, 청군은 <한성순보>를 발행하던 통리기무아문의 박문국을 습격했다. 조정은 이에 대해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이렇듯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통제 시도가 갈수록 심해지던 1882년 8월, 조선 조정은 임오군란의 후속 조치를 협의하기 위해 일본으로 수신사를 파견했다. 정사는 박영효, 부사에 김만식(金晩植), 종사에 서광범, 고문으로 김옥균, 민영익이 참가했다. 그들은 4개월간 일본에 머무르면서 군주의 문명화를 통한 개혁정책의 추진, 개혁세력의 정치적 기반 확대를 위한 정부 내의 부분적 개편, 그리고 개혁정책을 지원해주고 선전하기 위한 신문발간사업 등을 구상했다. 그들은 일본에서 귀국한 뒤 통리기무아문을 대신해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역할을 맡은 내아문의 당상에 임명되거나 군직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놓고 대립하기 시작했다. 민영익을 대표로 하는 민씨 척족과 청나라에서 보낸 고문 묄렌도르프는 당오전 발행을 주장했다. 반면 김옥균 등은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김옥균과 민씨 일파는 고종의 면전에서 여러 번 다투기도 했다. 고종은 민씨 일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당오전 발행을 추진하게 했다. 그러나 당오전이 물가 상승과 경제질서의 혼란 등 많은 문제를 야기하자, 고종은 김옥균에게 300만원의 국채위윔장을 맡겨 일본에서 차관을 얻어오도록 했다. 김옥균은 1883년 6월 차관 도입을 위해 일본에 건너갔으나 일본 정부의 비협조로 실패했다.

한편 1882년 12월 한성부판윤에 임명된 박영효는 치도국을 설치하고 도로정비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도로를 닦기 위해 민가를 철거하는 일을 둘러싸고 한성부민들의 반발에 부딪쳤고, 결국 박영효는 한성부판윤을 사직했다.1883년 3월 광주부 유수에 임명되어 신식군대를 양성하였으나, 1883년 10월 광주부 유수 역시 사임하였고 그가 양성한 신식군대는 친군 전영에 흡수되었다. 이렇듯 개화 정책이 자꾸 차질을 빛자,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 세력은 위기감을 느꼈다. 무장으로서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진압 후 친국을 받은 신중모(申重模)의 진술에 따르면, 김옥균은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고 한다.

서양 각국은 모두 독립국이다.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독립한 연후에야 개화할 수 있는데, 조선은 홀로 중국의 속국이 되어 있으니 심히 부끄럽다. 조선은 또한 어느 때에나 독립하여 서양제국과 동렬에 서겠는가.
각국인은 몸을 아끼지 않아 개화를 얻었는데, 조선은 홀로 불능하니 이것이 심히 한스럽다.

또한 박영효의 하인이었던 김태균(金泰均)의 진술에 따르면, 박영효는 평소 무리와 함께 모여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이제 국사를 돌아보면 망애하다. 간신이 권을 농간하고 재용이 고갈되었으니, 이름하여 개화라 하나, 개화가 아니다.

이렇듯 두 사람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조선의 개화가 불가능하다고 여겼고, 개화를 실행하려면 간신으로 여긴 민씨 척족 등 반대파를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그들은 청의 압력을 배제하고 독립을 이루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김옥균은 1883년 5월~1884년 4월 사이에 작성한 <조선개혁의견서>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전부터 청국이 속국으로 여겨온 것은 참으로 부끄럽다. 나라가 개화의 희망이 없는 것은 역시 여기에 원인이 없지 않다. 이에 첫째로 해야 할 일은 독립하여 완전 자주국을 수립하는 일이다. 독립하고자 하면 정치와 외교는 불가불 자력자강해야 한다. 그러나 저들을 섬기는 지금의 정부, 인물로서는 불가능하다.

또한 윤치호는 1882년 11월 23일 일기에서 청의 종속된 조선의 현실을 "남의 노예보다 더 심하다"라고 평하고, "어찌 떨쳐 일어나려 하지 않는가?"라며 조정을 장악한 정치세력을 함께 비판했다. 윤치호는 1884년 5월 28일자 일기에서도 친청적 입장을 지닌 민씨척족과 그 일파를 청으로부터 '자주'하려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렇듯 청을 배제하려는 급진개화파와 청의 비호를 받으려는 민씨 척족을 위시한 온건개혁파간의 대립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1884년 5월29일 청성회관을 둘러싼 '이범진 사건'이 벌어졌다. 청성회관 터는 이범진과 이범조, 이범대의 소유였는데, 이범조와 이범대는 청국에 땅을 팔았으나 이범진은 팔지 않았다. 이때문에 청성회관의 가운데 통로가 막혔다. 이에 청나라 상인이 강제로 이범진의 집안에 길을 만들어 통행했다. 이범진은 이에 항의하였으나, 청나라 상인 수십명이 이범진의 집에 쳐들어가서 이범진을 무수히 두들겨 팬 후 강제로 진술서를 쓰도록 했다. 이범진은 이에 분노하여 영국 영사에게 알려 청국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급진개화파 인사들은 이 사건을 통탄스럽게 여기고, 진상을 밝혀 외교적으로 대응하라고 촉구했다. 이를 그대로 둔다면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권리를 잃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 크고 욕되고 부끄러운 일"이라며 고종의 결단을 촉구했다. 그러자 명성황후의 측근이었던 윤태준이 반발했다.

상의(上意)를 격동하여 청조에 직소해서 북양대신(이홍장)을 욕보임으로써 뒷날 성상의 걱정을 일으키게 하는 자는 곧 난신적자다!

윤태준은 조선 정부에서 청조에 글을 보내어 이범진 사건을 외교문제화한다면, 이홍장을 욕보이는 꼴이 되어 뒷날 고종의 걱정거리가 될 걸 우려했다. 그는 사건을 확대하려 드는 이들을 난신적자로 몰아붙였다. 이에 김옥균은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우리나라 신민이 되어 마땅히 힘써 우리의 권리를 지키고 우리 왕실을 빛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글을 보내어 진씨의 죄를 성토하여 이홍장으로 하여금 욕됨을 깨닫게 한 것이 어찌하여 우리와 유관하다는 것인가. 만약 북양대신에게 욕된다고 하여 우리나라 권리 손상시키는 것, 우리 군부의 체면 잃는 것을 돌보지 않으려 한다면, 왜 이홍장의 밑으로 가 그 신하가 되지 않는가?

이 사건은 청의 진수당이 사과하고 웅정한이 동사의 자리에서 파직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후 1884년 윤5월 16일에 묄렌도르프가 외아문의 협판직에서 해임되어 중국으로 떠났다. 묄렌도르프는 1882년 12월 5일에 외아문의 협판에 임명된 후 줄곧 친청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민씨척족과 정치적 노선을 함께 했다. 묄렌도르프 본인이 쓴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당시 진수당, 일본, 영국공사 파크스와 심한 갈등을 벌이다 피곤함을 느껴 휴양을 갈망해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민씨 척족과 친청파는 묄렌도르프의 해임을 김옥균의 주선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실제로 김옥균 등은 묄렌도르프를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로운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비판하며 고종에게 해임해야 한다고 수시로 아뢰곤 했다. 이로 인해 양측간의 대립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급진개화파는 혁신적인 변화를 갈망했다.

세간에서는 "김옥균이 일본으로부터 차관 도입을 실패하여 입지가 좁아지자, 급진개화파 인사들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정변을 꾀했다"는 인식이 파다하다. 그러나 당시 그들의 입지는 전혀 위태롭지 않았다. 정변을 주도한 인사들은 주로 외아문과 내아문, 승정원, 6조 등 핵심 관직을 꿰찼다. 개화정책을 총괄하던 내아문에는 홍영식이 참의, 협판을, 서광범이 참의를 역임하였으며, 외교를 총괄하던 외아문에는 김옥균과 홍영식이 외아문 참의, 협판을 지냈다. 또한 왕명을 진달하는 승정원에는 김옥균, 서광범, 박영교가 승지를 역임했다. 6조에는 이조참의(김옥균, 홍영식), 호조참판(김옥균), 병조참판(홍영식) 등을 지냈으며, 그 외에 우정국 총판, 한성부 판윤, 광주유수, 동남개척사 등의 직임을 맡아 활동했다. 다만 박영효는 1883년 10월 광주유수에서 물러난 이래 관직에 접근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가 급진개화파 세력이라서라기보다는 왕실 부마로서의 지위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듯 급진개화파 세력은 강력한 영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민씨 척족 세력의 견제도 그만큼 심했다. 당오전 발행, 이범진 사건, 묄렌도르프 해임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민씨 척족들은 김옥균 등을 불신하고 기회만 되면 영향력을 박탈하려 했다. 윤치호는 1884년 5월 25일자 일기에 "여러 민씨들이 고우(古愚: 김옥균의 호)를 집어삼키려 한다"라고 기술하기도 했다. 급진개화파 세력은 민씨척족의 이같은 적대적 공세에 위기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위기감은 상대적인 것으로서 일방적으로 불리한 건 아니었다. 묄렌도르프는 자서전에서 "김옥균을 필두로 한 친일파는 왕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일본의 영향은 조선 군대에도 미쳤다"고 기술했으며, 위안스카이는 갑신정변 발발 20여 전인 9월 25일 이홍장에게 "고종이 일본에 미혹된 대신들에게 현혹되어 반청 자주노선을 추구하고 있으며, 친청 세력인 민영익, 윤태준, 김윤식 등이 소외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당시 정치적 위기감은 민씨 척족과 급진개화파 양쪽 모두 느꼈으며, 그만큼 대내외적인 정책을 둘러싸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고종은 이러한 양측의 대립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적절히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 유지하고자 했다. 청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민씨 척족을 중심으로 한 친청파를 중용하는 동시에 왕권 행사에 걸림돌이 되는 청의 외압을 걷어내기 위해 미국, 일본 등의 힘을 빌리고자 했고, 이를 위해 급진개화파를 또 다른 정치세력으로 키웠다. 그래서 친청파와 민씨 척족의 집요한 공작에도 불구하고 김옥균 등을 계속 중요한 관직에 임명하여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줬다. 그러나 급진개화파는 그런 고종을 "주저하고 의심이 많아 잠시의 편안함만을 얻으려 하고"[3], 매사를 스스로 결단하지 못한다"고 여겼다.[4] 그들은 고종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고 여기고, 독립과 개화를 달성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여겼다.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 인사들은 정변 당시 20 ~ 30대 젊은이였다. 그들은 나이대에 비해 고위직을 꿰차고 있었으며, 고종의 신임도 두둑히 받았다. 제도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기구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고 민씨 척족의 저항도 강했지만, 충분한 시간을 들여가며 동지규합에 힘써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면, 언젠가 조선의 정책 전반을 도맡았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이 일본처럼 하루빨리 근대화를 이뤄야 한다는 조급증에 사로잡혔고, 청군이 횡포를 부리고 청나라 인사들이 고종에게 불손하게 대하는 것에 분개한 나머지 입지를 천천히 다지기보다는 단숨에 정치판을 뒤집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들은 결국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접촉하여 정변을 준비한다.

정변을 주도한 인사들[편집 | 원본 편집]

  • 김옥균: 1851년생. 정변 당시 호조참판.
  • 박영효: 1861년생. 정변 당시 전 광주유수.
  • 홍영식: 1856년생. 정변 당시 군국사무 협판(軍國事務協辦).
  • 서광범: 1859년생. 정변 당시 병조참판.
  • 서재필: 1864년생. 정변 당시 전 조련국 사관장.

가담자들[편집 | 원본 편집]

정변 주도자들은 자신들보다 격이 떨어지는 하층양반들을 포섭, 활용했다. 특히 당시 정치체제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하층무관과 서얼 등을 그 대상으로 하였다. 이들은 정변의 구상과 계획, 실행방안 등을 협의하는 모임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견해를 일정하게 표출, 반영했다. 이들은 주로 행동 대원의 동원과 지휘, 고종과 민씨 척족의 동태 보고, 정전 시위 등의 임무를 담당했다. 이에 속하는 인사들은 박응학, 윤영관, 이건영, 유혁로, 양홍재, 이인종, 이희정, 이희덕, 오창모 등을 들 수 있다.

  • 박응학(朴應學): 장연현감,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총융중군을 지낸 박정화(朴鼎和)의 서자. 사관생도로, 정변시 서재필의 지휘 아래 정전을 시위하였다. 정변이 실패로 끝난 후 처형되었으며, 부친은 약을 먹고 자살했다.
  • 윤영관(尹泳寬): 경상좌병사 윤석오(尹錫五)의 아들. 사관생도 출신. 서재필의 지휘 아래 정전을 시위하였으나 고종을 호위하던 중 청군에게 피살되었다. 부친은 아들이 정변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관직을 박탈당했다.
  • 이건영(李建永): 사관생도 출신. 정변시 정전을 시위하다가 정변 실패 후 처형되었다.
  • 유혁로(柳赫魯): 도성의 경비를 담당하는 오위장. 김옥균의 신임을 받은 인물로, 탑골 승방의 모임에 동참하는 등 정변 모의에 적극 참여하였고 우정국 방화의 주역이었다. 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갔다가 갑오개혁 후 귀국하여 군부의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 양홍재(梁鴻在): 도성의 경비를 담당하는 오위장. 민영익이 수족처럼 믿는 사람이었으나 김옥균에게 민영익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 외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서 정변 당시의 행적은 파악하기 어렵다.
  • 이인종(李寅鍾): 종5품 관리. 김옥균의 심복으로, 행동대원들을 직접 포섭, 동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충의계를 조직하여 이희정, 오창모 등을 끌어들였으며, 김옥균에게 민영익과 청군의 동태를 파악해 보고하였다. 또한 김옥균, 박영효 등의 모의에 함께 하면서 당시의 정세 등을 논의했다. 정변 시 행동대원들을 총괄 지휘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우정국 방화의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정변 후 체포된 흔적은 보이지 않으나, 1895년 서재창(徐載昌)[5]과 함께 복직된 걸 보면 정변 시기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 이희정(李喜貞): 종3품의 무관직을 역임한 인물. 김옥균의 문인으로, 정변 당시 59세의 노령이었으나 이인종과 의형제를 맺고 충의계에 가입하는 등 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우정국 방화사건에 개입하고 대궐에 들어가 시위를 하기도 했다. 정변 실패 후 체포되어 능지처사되었다.
  • 이희덕: 이희정의 동생. 정변 시 김옥균 등의 부름을 받고 입궐하여 시위하였으며, 1884년 12월 12일 체포령이 내려졌으나 체포된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 오창모(吳昌模): 이인종 등과 함께 충의계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정변 때 김옥균 일당의 부름으로 입궐하여 시위를 담당했다. 정변 후 체포되어 문초를 당하던 중 장독으로 사망했다.

중인 신분으로 가담한 인사는 3명으로, 변수, 박대영, 그리고 성명 미상의 수문장을 들 수 있다.

  • 변수(邉燧): 역관 출신. 1882년 김옥균이 일본 수신사로 갈 때 수행하였으며, 일본 도쿄에서 양잠과 화학에 대해 공부하다 귀국했다. 이후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다시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1883년 6월 귀국 후 통상아문 주사로 일하다가 1884년 7월 통리군국사무아문의 주사에 임명되었다. 정변 모의 단계부터 함께 논의한 주도적 인물로, 늘 궁중에 있으면서 고종을 가까이 모시면서 김옥균에게 고종의 동정과 궁궐의 상황을 보고했다. 정변 시 외국 공사관에 연락을 취하기도 했으며, 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을 졸업하여 한국인 최초의 미국대학 졸업생이 되었으나 1891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 박대영(朴大永): 규장각을 관리하는 직임을 수행하던 인물. 민영익의 움직임과 청진영의 동태를 파악하여 보고하였으나, 정변시 직접 참여했음을 암시하는 기록은 없다.
  • 성명 미상의 수문장: 갑신정변 때 김옥균에게 금호문을 열어준 인물.

친군 전영의 군인들도 갑신정변에 참여했다. 지휘관 신복모는 박영효의 심복으로, 박영효가 광주유수로서 남한산성에서 군사를 모아 훈련시킬 때 일본식 군사훈련을 주도했다. 이후 친군 진영의 지휘관으로 발탁된 뒤 정변 모의에 가담하였다. 그는 행동대원 40명을 이끌고 대신 살해 및 궁궐 시위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고종을 호위하던 중 청군에게 살해되었다. 이외에도 주도자들의 하인들도 정변에 참여했다. 이들은 인정전 근처에 화약을 묻었다가 정변 당일 화약을 폭발시켰고, 김옥균을 수행했다.

환관과 궁녀들 중에도 정변에 가담한 이들이 있었다. 궁녀 고대수[6]는 10년 전부터 개화당에 가입하여 궁중의 비밀을 김옥균에게 전해줬으며, 정변시에는 통면전에 불을 붙이기로 약조했다. 또한 궁녀 이우석은 서광범의 하인 김봉균과 함께 인정전을 방화하는 임무를 맡아 인정전 아래에 화약을 묻어뒀다. 정변 실패 후 궁궐 내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1886년 1월 26일 처형되었다. 여기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환관 2명이 정변 모의에 참석하고, 왕의 동태를 소상히 알려줬다.

전개[편집 | 원본 편집]

청군의 철수와 정변 준비[편집 | 원본 편집]

1884년 8월, 청나라와 프랑스가 베트남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벌인 끝에 청불전쟁을 일으켰다. 청나라는 이에 앞서 1884년 5월 23일경 한성에 주둔시킨 3,000 병력 중 1,500명을 베트남으로 이동시켰다. 이후 청불전쟁이 발발하였고, 프랑스 함대가 청나라의 복건함대를 격파했다. 김옥균 등은 청이 조선에서 대규모 군사 행동을 벌일 여력이 없을 거라 판단하고, 미국 공사 푸트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의 독립할 기미가 어찌 이때에 있다 하지 않겠는가?

김옥균 등은 정변을 벌이기로 마음 먹고, 1884년 10월 30일 한성에 도착한 신임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를 찾아가 정변을 조만간 일으키려 하니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당초 김옥균이 차관을 받으러 일본에 왔을 때는 적극 반대했으나, 막상 조선에 온 뒤에는 김옥균에게 호의를 보이며 접근했다. 이에 김옥균 등은 일본공사관의 호위병 150명을 빌려달라고 요청했고, 다케조에는 공사관 병력 150명과 일화(日貨) 300만엔을 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함경남병사로서 북청의 함경남병영에서 신식군을 훈련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던 윤응렬(尹雄烈)이 10월 27일 약 470명을 이끌고 한양으로 왔다. 그는 급진개화파 측 인사였지만, 정변의 실패 위험성을 보고 11월 27일 정령관을 사임했다. 고종은 220명을 북청으로 돌려보내고, 나머지 250명은 친군영 후영에 배치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은 1884년 11월 4일 박영효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이때 회의에 참여한 시마무라(島村久) 서기관은 "청나라 병사를 구축하는 일은 우리의 1개 중대 150명으로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다. 이에 고무된 김옥균 등은 거사일자를 결정함에 있어서, 일본공사가 공사관의 일본군을 조선개화당의 정변에 가담시켜도 좋은가의 질문을 11월 25일 일본 외무성에 우편선 천세환(千歲丸)편으로 보냈다. 그 회답이 천세환이 인천에 다시 들어오는 12월 7일 오게 되어 있었는데, 일본 정부가 반대할 것을 염려하여 거사일자를 3일 앞선 12월 4일로 정하였다. 그날은 마침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 개국 축하 만찬회가 열리는 날이어서, 제거 대상으로 삼은 인사들이 우정국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또한 일본군의 역할에 대해서도 왕궁호위와 청군에 대한 방비만을 맡고, 국내 수구파 제거와 내정개혁에는 간여하지 않으며 이것은 오직 개화당이 맡을 것을 사전에 요구하여 동의를 얻었다.

정변[편집 | 원본 편집]

1884년 12월 4일 저녁,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郵政局) 낙성식 축하연이 열렸다. 이날 여러 대신들이 참석한 건 물론이고 독일인 외교고문 묄렌도르프, 미국 공사 푸트, 영국 총영사 애시턴, 청국총판 진수당, 일본 공사관 서기관 시마무라 등 각국 외교관들도 참석했다. 저녁 8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돌연 "불이야!"라는 고함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놀라 밖을 보니, 담장 밖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참석자들은 모두 놀라 일어섰는데, 우영사(右營使) 민영익(閔泳翊)이 혼자 나가서 살펴보겠다고 하여 연회장은 일단 진정되었다. 민영익이 불을 끄려고 문밖으로 나오자 잠복하고 있던 자객 다섯 사람이 칼을 휘두르며 습격했다. 민영익은 중상을 입고 피를 흘리면서 연회장으로 되돌아와 대청 위에 쓰러졌다. 묄렌도르프가 급히 응급처치한 후 부축하여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뿔뿔이 흩어졌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창덕궁 안으로 곧장 내달렸고, 미리 내통하고 있던 수문장이 금호문을 열어줬다. 이들은 금호문을 통과한 뒤 고종의 침실로 들어갔다. 환관들이 놀라 연유를 물었지만, 김옥균은 답하지 않고 환관 유재현을 불러 기침을 청하라 했다. 유재현은 중궁전 승전색을 맡은 인물로, 명성황후의 신임을 두텁게 받으면서도 급진개화파 세력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윤치호가 "우리 개화당의 한 사람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7]유재현이 여러 번 사유를 묻자, 김옥균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 국가 위난의 때를 당하여 너희들 환관배가 어찌 감히 여러 말을 하느냐!

고종은 이 소리를 듣고 침실에서 일어나 김옥균을 불렀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은 곧 침전에 들어가 우정국에서 사변이 벌어졌으니 피하라고 권했다. 그러면서 일본 공사에게 병력을 보내달라고 청할 것을 아뢰었다. 고종이 "그대로 하라"고 윤허하였지만, 옆에 있던 명성황후가 물었다.

만일 일병을 청하면 청병은 장차 어찌하리요?

김옥균은 청병도 청한다고 거짓말하고, 박영효를 일본 공사에게 보냈다. 이때 환관 유재현도 일본공사관에 청병하러 갔다가, 대궐 문이 잠겨 있고 바깥에서 별 일 없는 걸 보고 이 사실을 명성황후에게 알렸다. 명성황후는 이를 수상하게 여기고 김옥균에게 변란의 유래를 물었다. 이때 인정전 부근에서 화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김옥균은 군관 한규직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가 장병의 직임으로 이 변란을 당하여 병졸을 인솔하여 호위할 바를 생각지 아니하고 홀몸으로 불경한 복색을 차리어 상심을 놀라게 하니, 이 사변의 출처는 네가 참말로 알 것이다.

뒤이어 유재현을 향하여 말했다.

너 같은 자가 대세를 알지 못하고 아녀자의 버릇을 하니, 이로부터 말이 많은 자는 참수하겠다.

결국 유재현 등은 입을 다물었고, 고종은 흰 헝겁에 "일본공사는 와서 나를 호위하라"(日本公使來護我)고 쓴 친서를 써서 김옥균에게 전달했다. 이 친서에 의해 일본영사관 1개 중대와 일본경찰 병력 1개 중대 150명이 출동하여, 서재필이 이끄는 사관생도들과 함께 고종과 명성황후가 피신한 경우궁을 에워쌌다. 김옥균 등은 무관 10여 명에게 문을 지키게 해서, 사변을 듣고 오는 대신들을 막아서게 했다. 그후 한규직, 이조연,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유재현, 윤태준 등 민씨 척족 및 온건개화파 인사들이 모조리 참살당했다. 그후 날이 밝자, 서재필이 여러 장사를 시켜 환관 유재현을 정전에 결박해 놓고 살해했다. 고종이 연거푸 "죽이지 마라", "죽이지 마라"라고 하교하였으나 듣지 않았다.[8]

이렇게 해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변을 확보한 급진개화파는 고종의 사촌 형인 이재선(李載先)을 12월 5일 자정에 궁으로 불러들이고 부패관료와 척신 세력을 제거하고 새 정부를 구성할 것이니 협력해줄 것을 요청하며, 왕실과 연합정부 구성을 제안하였다. 개화파와 왕실은 새정부의 각료 선정에 착수하였으며, 미국 공사관을 비롯, 각국 공사관에도 정변 소식을 전달하고 지지를 요청하였다. 뒤이어 신정부 수립에 착수하여 내각을 다음과 같이 세웠다.

영의정 이재원(李載元: 고종의 종형)


좌의정 홍영식

전후영사 겸 좌포장 박영효

좌우영사 겸 대리외무독판, 우포장 서광범

좌찬성 겸 우참찬 이재면(李載冕)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 신기선(申箕善)

예조판서 김윤식

병조판서 이재완(李載完: 이재원의 아우)

형조판서 윤웅렬(尹雄烈)

공조판서 홍순형(洪淳馨: 왕대비의 조카)

호조참판 김옥균

병조참판 겸 정령관 서재필

도승지 박영교(朴泳敎)

한성부 판윤 김홍집

이후 신정부는 14개 조항의 혁신정강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대원군은 가까운 시일내에 돌려 보내고 조공하는 허례를 폐지할 것.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사람의 능력으로써 관직을 택하게 하며 관직으로써 사람을 택하지 않을 것.

3.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간사한 관리들을 근절하고 백성의 곤란을 구하며, 겸하여 국가재정을 유족하게 할 것.

4. 내시부(內侍府)를 폐지하고 그중에서 재능있는 자가 있으면 등용할 것.

5. 그동안 국가에 해독을 끼친 탐관오리 중에서 심한 자는 처벌할 것.

6. 각도의 환상제도(還上制度)는 영구히 폐지할 것.

7. 규장각(奎章閣)을 폐지할 것.

8. 순사제도(巡査制度)를 시급히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9.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

10. 그동안 유배(流配)·금고(禁錮)된 사람들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할 것.

11. 4영(四營)을 합하여 1영(一營)을 만들고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近衛隊)를 시급히 설치할 것.

12. 모든 국가재정은 호조로 하여금 관할케 하며, 그밖의 일체의 재무관청은 폐지할 것.

13. 대신과 참찬은 합문 안의 의정소에서 매일 회의를 하여 정사를 결정한 후에 왕에게 품한 다음 정령(政令)을 공포해서 정사를 집행할 것.

14. 정부는 육조외에 무릇 불필요한 관청에 속하는 것은 모두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토의하여 처리케 할 것.

청군의 역습과 정변 실패[편집 | 원본 편집]

12월 5일 아침 정변 소식을 접한 한양 주둔 청군 지휘관 위안스카이는 크게 당황했다. 그는 개화당의 지지자로 위장한 심상훈(沈相薫)을 경우궁으로 들여보내 명성황후와 접촉하게 하였다. 명성황후는 비로소 급진개화파가 민씨 척족을 몰아내기 위해 정변을 일으켰다는 걸 파악하고, 고종에게 말했다.

경우궁이 좁아 대비께서 생활하기 불편합니다. 창덕궁으로 환궁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고종도 이를 적극 지지했다. 김옥균은 창덕궁이 너무 넓어서 지키기 어렵다며 반대 의사를 보였지만, 고종의 거듭된 청에 고심하다가 경우궁 옆의 이재원의 집인 계동궁(桂洞宮)으로 국왕과 왕비의 거처를 옮겼다. 이재원의 집은 경우궁보다는 넓었으나 궁궐보다는 규모가 작아서 창덕궁보다는 쉽게 방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창덕궁 환궁을 계속 요구했고, 고종도 김옥균에게 부탁했다. 김옥균은 이를 계속 거부했는데, 김옥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자기의 병력이면 청군의 공격도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이를 받아들였다. 김옥균이 나중에 이를 알고 다케조에에게 항의헀지만, 다케조에는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결국 김옥균 등은 12월 5일 오후 5시 국왕과 왕비의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겨야 했다.

김옥균 등은 창덕궁에 도착한 뒤 국왕을 중심에 놓고 내위(內衛)는 개화당의 장사들(충의계 맹원들과 사관생도들 약 50명), 중위(中衛)는 일본군(약 150명), 외위(外衛)는 친군영(親軍營) 전후영병(前後營兵)(약 750명)으로 하여금 3중으로 방위하게 하였다. 이후 고종에게 14개 조항의 혁신정강을 바쳤고, 고종은 이에 서명했다. 그런데 다케조에가 돌연 일본의 병력으로서는 오랫동안 왕궁에 머물 수 없으므로 철병하겠다고 통고했다. 이에 김옥균이 조선군이 지금 총을 분해소제하는 중이니[9] 단독으로 전투능력을 완전히 정비할 때까지 3일만 더 머물러 있다가 철병할 것을 설득하자, 다케조에는 승복하였다.

고종이 혁신정강을 재결하고 대정유신(大政維新)의 조서(詔書)를 내린 이 날 오후 3시, 청군 1,500명은 두 부대로 나누어 돈화문과 선인문으로 각각 공격하여 들어왔다. 마침 이때에 우편선 천세환이 입항하여 일본외무성의 일본공사에 대한 훈령이 전달되었다. 다케조에는 훈령을 읽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훈령엔 "조선 개화당의 정변에는 절대로 가담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외위(外衛)를 담당한 친군영 전후영의 750명의 조선군이 청군에 맞서 응전했으나, 수십명의 전사자를 내고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여 흩어져 버렸다. 다음은 중위(中衛)를 담당한 일본군의 차례였으나, 그들은 제대로 전투도 하지 않고 철병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급진개화파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사관생도 150명 뿐이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유혁로, 변수 등은 일본 공사 다케조에와 일본군을 따라 달아나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오직 홍영식과 박영교 및 생도 7인만이 고종을 따라 북묘로 갔다. 이후 청군이 고종이 북묘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오를 거느리고 맞이하러 갔다. 이때 홍영식과 박영교가 고종의 어의를 끌어당기면서 가지 말라고 청했다. 여러 군영 병사들이 고종을 모시고서 인교(四人轎)에 태우니 홍영식 등은 또 고함을 지르며 막아섰다. 그러자 격분한 장병들이 공격하여 홍영식, 박영교 및 생도 7명을 죽였다. 그후 국내에 남은 급진개화파 인사들이 철저히 색출되어 수십명이 피살되면서,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났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갑신정변은 조정에서 대세로 자리잡았던 개화 정책에 제동이 걸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급진개화파가 정변을 주도했기 때문에, 이후 조선 유학자들에게 있어 개화는 곧 반역으로 받아들여졌다. 윤치호는 일기에 원래 개화라고 하면 듣는 이들 중에서도 그다지 반발하는 이들이 없었는데, 갑신정변이 터지고 나니까 "개화하자는 사람들은 죄다 외세를 끌어들여서 반역하는 사람들이다." 라는 말이 돌았다고 기술했다. 그나마 김홍집, 어윤중을 필두로 하는 온건개화파는 조정에 남아서 근대적 개혁을 조심스럽게 추진했지만, 그 속도는 이전에 비해 현저히 느렸다. 본격적인 개혁은 갑오개혁에 이르러서야 시행될 수 있었고, 그나마도 일본의 간섭 떄문에 불완전했다.

고종은 일본이 갑신정변에 연루된 것을 파악하고 일본 정부에 항의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갑신정변 동안 조선 민중의 습격으로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들이 살해되었으니 사과와 배상금 지급을 요구했다. 조선 정부가 "너희가 도망치면서 공사관 건물을 스스로 방화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반역자들을 비호하고 있으니 협상할 가치가 없다"며 거부하자, 일본 정부는 이노우에 가오루를 전권대사로 임명하고 2개의 대대병력과 7척의 군함을 앞세워 조선을 압박했다. 결국 조선 정부는 굴복하여 1885년 1월 9일 한성조약을 체결하여 배상금 지불과 일본인을 살해한 폭도 처벌, 사죄단 파견을 약속했다.

한편, 청나라는 갑신정변 집압에 성공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공고히 다졌으나, 청불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일본과 더 이상 마찰을 빛고 싶지 않았다. 이에 청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만나 "양군 모두 조선 반도에서 철수하고, 조선에 대해 군사 고문을 파견하지 않으며, 장래 조선에 출병할 경우 상호 통지(行文知照)한다, 파병이 불가피할 경우에도 속히 철수시켜 주둔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톈진 조약을 체결했다. 이중 파병 시 상호통보 조항은 동학 농민 혁명 때 조선 정부의 파병 요청을 받은 청나라가 일본에 이 사실을 통보할 때 일본이 군대를 파병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며, 이는 청일전쟁으로 이어진다.

각주

  1. 민영익, 민태호, 민겸호, 민치상 같은 이들이 7사의 주요 당상에 포진했다.
  2. 윤치호 일기 1883년 10월 3일자 기록
  3. 윤치호 일기 1883년 12월 21일자 기록
  4. 윤치호 일기 1884년 1월 23일자 기록
  5. 서재필의 친동생. 일본 도야마 육군 유년학교에서 신식훈련을 받고 별기군 작전관에 임명되어 근무하다가 형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 함께 했다. 정변 실패 후 은신, 도피했으나 관군에게 잡혀 19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6. 본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몸이 건장하기가 마치 남자와 같으며 힘이 세서 남자 5, 6명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여서 '고대수'라는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7. 윤치호일기 1884년 9월 17일자 기록
  8.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유재현이 고종에게 수라상을 바쳤을 때 김옥균이 수라상을 차면서 "이때가 어느 때인데 수라상으로 한가하게 지낼 수 있느냐?"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유재현이 "너희는 모두 세도가로서 무엇이 부족하여 이렇게 천고에도 없는 역적질을 하느냐?"라고 꾸짖자, 김옥균이 칼을 빼어 그를 내려쳐 죽였다고 한다.
  9. 급진개화파는 정변 수개월 전에 미국으로부터 최신식 소총 3천정을 구입해다가 사용하지 않고 각 영의 무기고에 보관해뒀다. 그들은 정변 당일 이를 꺼내어 무장을 강화하려 했으나 총에 녹이 슬어 있어서 분해소제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