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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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프랭크 카란디니 리 경
Sir Christopher Frank Carandini Lee

2013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출생 1922년 05월 27일(1922-05-27)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망 2015년 06월 07일 (93세)
런던 웨스트민스터
국적 영국
경력 1946–2015
직업 배우, 작가, 가수
소속 핀란드 군대 (1939)
영국 국방군 (1940)
왕립공군 (1941–46)
병역 1939–1946

크리스토퍼 프랭크 카란디니 리 경은 영국의 前 배우, 前 작가, 前 가수이다. 영원한 공포 영화의 아이콘이자 3세대에 걸쳐 존재감을 각인시킨 배우이다.

80년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영화들에 출연하며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들과 무게감 있는 선역들을 소화해내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대배우로 꼽힌다. 그는 생전 영화 200편 이상에 참여했으며, IMDb의 바이오그래피에는 "그는 그 세대 배우 가운데에서 그토록 많은 영화에 출연한 유일한 배우일지도 모른다"고 적혀 있다. [1]

유명한 역할로는 1957년 해머 스튜디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1960년대 해머 스튜디오 드라큘라 시리즈에서 드라큘라 백작,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서 악당, 스타워즈 프리퀄 트릴로지에서 두쿠 백작, 반지의 제왕호빗 삼부작에서 사루만 등이 있다. 2009년 "연기와 자선 사업에 대한 공헌"으로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인격적으로도, 연기자로서도 존경받는 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

1 배우가 되기까지[편집]

1922년 런던에서 군인 아버지 조프리 트롤로프 리와 유명한 미인이었던 어머니 콘테사 에스텔 마리[2] 슬하에서 태어났다. 형제자매로는 누나 잔드라 리(Xandra Lee)가 있다. 1926년 부모님이 이혼해서 어린 크리스토퍼 리는 어머니와 함께 스위스로 이주하여 살게 되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연기라는 것을 접해보게 된다. 학교 연극에서 룸펠슈틸츠헨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가족은 런던으로 돌아왔고 그의 어머니는 재혼을 하게 된다. 재혼 상대는 나중에 007 소설 시리즈 작가가 될 이안 플레밍의 삼촌이다. 한편 크리스토퍼 리는 서머 필즈 학교에서 계속 연기를 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학교에 후에 대배우가 될 패트릭 맥니가 있어서 주목도는 상대적으로 낮았다고 한다.

서머 필즈 학교는 수많은 학생을 이튼으로 보내는 프렙 스쿨이었다. 크리스토퍼 리도 이튼에 진학하려고 하였으나 수학 성적이 떨어져 학비를 더 내야 이튼에 갈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의 양아버지는 비싸진 학비를 견딜 여유가 없었기에 그는 웰링턴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웰링턴 대학에서 그는 라틴, 그리스어 공부 등 고전을 공부하며 장학금을 받고 생활한다. 그러나 1939년 그의 양아버지가 파산하면서 그는 웰링턴을 떠나게 된다.

그의 누나는 이미 취직을 한 상태였으나, 그는 할 일이 없었다. 누나가 여름휴가로 유럽으로 놀러가면서 그도 유럽으로 건너간다. 여기에서 그는 러시아에서 쫓겨난 왕공 가문들과 같이 생활하게 된다. 그는 누나가 영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유럽에 머물렀으나, 유럽 전역에 전운이 드리우기 시작하면서 그 역시 영국으로 돌아와 취직을 한다.

1.1 세계 2차 대전[편집]

비행 장교로서. 로마 해방 직후.

겨울전쟁이 발발하자 크리스토퍼 리는 자원하여 핀란드 전장으로 향한다. 그는 자원봉사자였기에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고 곧 영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원래 일자리에서 일하던 그는 어느 제약회사 직원으로 이직을 한 후 그 제약회사가 런던 밖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다시 방위군(Home Guard)에 지원한다. 1941년 폐렴으로 쓰러진 후, 그는 아버지처럼 육군에서 복무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영국 공군에 지원한다.

크리스토퍼 리는 조종사가 되기 위하여 의욕적으로 훈련을 받았으나 최종 훈련 중 시야가 흐릿해지며 두통을 느꼈는데, 이는 시신경 일부가 손상되었기 때문임이 밝혀졌다. 이로서 리는 조종사로는 더 이상 복무할 수 없게 된다. 리는 비행장을 전전하였으나, 조종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실의에 빠져 있었다. 동료 조종사가 죽음으로서 그의 실의는 더욱 깊어졌다.

그래도 뭔가 전쟁에 도움이 되고 싶었던 크리스토퍼 리는 영국 왕실 공군 정보 기관(RAF Intelligence)에 지원한다. 조종 장교(Pilot Officer)로 승진한 그는 아프리카 전선에서 비행장 간에 정보를 전달해주고, 폭격 시간을 조율하는 등 다양한 활약을 한다. 이탈리아로 재배치된 이후에는 비행 장교(Flying Officer)로 승진한다. 그는 승진을 거듭했으며, SAS의 전신이 되는 Special Operations Executive, Long Range Desert Patrol에서 근무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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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때때로 SAS와 연관되어 있었지만 저희는 지금까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이와 관련해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냥 제가 특수 부대(Special Forces)에 있었다고만 말하도록 하죠. 원한다면 더 의미를 부여하세요.[3]

2 연기자로서[편집]

2.1 초기[편집]

초보 연기자 시절.

종전 후 크리스토퍼 리는 원래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한다. 원래 직장에서 봉급을 올려주었으나,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는 자신을 상상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당국은 참전용사들을 대학으로 돌려보내 고전 교육을 받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는 라틴어를 너무 많이 잊었고, 통금 시간을 지키기 싫어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할 일이 없던 크리스토퍼 리에게 사촌 니콜로 카란디니는 "배우가 돼 보지 그러니, 크리스토퍼?"라며 배우가 될 것을 제안한다.

배우가 되는 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한 리는 어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반대했다. 그러나 리는 어머니의 친척 가운데에서 배우로 인기를 얻은 사람들이 많다며 어머니를 설득했다. 특히 어머니 쪽 증조할머니였던 마리 카란디니는 오페라 가수로서 유명세를 떨쳤다.

어머니를 설득한 이후 그는 7년 계약으로 '매력학교(Charm School)'라고도 불리는 Company of Youths에 들어가 훈련을 받는다. 매력학교는 Rank organisation에서 운영하는 스타 양성소였다. 이곳에서 크리스토퍼 리는 10년 동안 단역과 엑스트라를 전전하며 연기 훈련을 받는다. 초보 배우였던 그에게 가장 방해가 된 것은 195cm에 달하는 키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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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거기에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 거의 십 년을 보냈네요. 처음에는 저를 보고 배우를 하기에는 너무 키가 크다고 하더군요. 참 어리석은 말이죠. 피아노를 치기에는 너무 키가 작다는 말과 같습니다. "두고 봐라"라고 생각했죠. 처음에는 카메라 앞에서 쓸 기술을 전혀 몰랐지만, 그 10년 동안 저는 매일 정말 중요한 일 한 가지를 했습니다.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었죠. 그러다 보니, 때가 왔을 때 저는, 참 이상하지만, 아무 말도 안 하는 캐릭터(프랑켄슈타인의 저주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역)를 연기할 준비가 되어 있더군요.[4]

리는 1952년을 기점으로 조금씩 무명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지인이었던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British National Studios에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배역을 많이 맡게 된 것이다. 크리스토퍼 리는 1952년 한 해 동안 페어뱅크스 영화 중 16개에 등장했다. 물랑 루즈에 그가 출연한 것도 이 해였다. 이후 50년대 동안 크리스토퍼 리는 액션 배우로서 조금씩 입지를 넓혀나갔다.

2.2 1957~1976: 스타로 부상하다[편집]

2.2.1 해머 스튜디오와 만나다[편집]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에서 괴물 역을 맡은 크리스토퍼 리.

1957년은 공포 영화 팬들에게 매우 중요한 해다. 해머 스튜디오가 이끄는 공포 영화의 청동 시대(Bronze Age of Horror)가 시작된 해이기 때문이다. 청동 시대의 시작을 알린 것은 피터 쿠싱과 크리스토퍼 리가 처음으로 해머 스튜디오 영화에서 호흡을 맞춘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의 탄생이었다. 이 영화에서 크리스토퍼 리는 괴물 역을, 피터 쿠싱은 프랑켄슈타인 박사 역을 맡았다. 이 둘은 이후 20편을 넘는 영화에 공동 출연했으며,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후 리는 원조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었던 보리스 칼로프1958년작 "피의 복도"에 같이 출연하기도 했다.

Dracula 1958 c.jpg
드라큘라(1958)에서 크리스토퍼 리와 피터 쿠싱.

1958년, 크리스토퍼 리는 그의 인생이라 할 만한 배역인 드라큘라를 처음으로 맡았다. 드라큘라 (1958년 영화)에서 그가 보여준 드라큘라 연기와 피터 쿠싱이 보여준 반 헬싱 연기는 벨라 루고시보리스 칼로프의 뒤를 잇는 새로운 공포 아이콘들이 탄생했음을 알렸다.

1965년, "프린스 오브 다크니스"에서 그는 다시 드라큘라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에서 드라큘라는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는다. 크리스토퍼 리는 원래에는 대사가 있었으나 자신이 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대사 처리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다만 작가였던 지미 생스터의 말에 따르면, 애초에 드라큘라에게는 대사가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영화의 중심은 드라큘라를 부활시키는 과정이며, 드라큘라가 출연하는 시간 자체가 짧았기에 대사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사 없이도 크리스토퍼 리는 묵직한 존재감을 뽐내며 "드라큘라"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시작으로 후속 드라큘라 영화들은 드라큘라 백작 본인 대신 백작을 부활시키는 과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영화 속에서 백작은 점점 평면적이고 의미없는 캐릭터로 변해갔다. 크리스토퍼 리는 드라큘라 역할에 대한 애정을 잃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드라큘라 역할을 맡았다. 크리스토퍼 리의 말에 따르면, 해머 스튜디오는 반 애원, 반 협박으로 그를 계속해서 출연시켰다고 한다. 크리스토퍼 리의 출연료는 계속 올라가는데, 대규모 스튜디오가 아니었던 해머는 제대로 출연료를 줄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크리스토퍼 리 스스로도 "드라큘라" 이미지를 탈피하여 연기 도전을 하길 원했다. 그러나 해머 스튜디오는 "당신이 드라큘라 역할을 안 맡아주면 저 사람들은 모두 실업자 신세라고!"를 외치며 그를 억지로 출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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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런 과정이었죠. 전화가 울리고 제 에이전트가 이런 말을 합니다. "지미 카레라스(해머 스튜디오의 회장)가 전화 했습니다. 또 드라큘라 영화에요." 그리고 제가 말하죠. "집어치워! 드라큘라 영화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그러면 지미 카레라스가 발작적인 상태로 저한테 전화를 겁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짐, 하고 싶지 않아, 해야 할 의무도 없고." "아니, 자네는 이 역할을 맡을 의무가 있어!" 그리고 제가 말했죠. "왜?" 그가 대답하더군요. "이미 자네가 이 역할을 맡는다고 하면서 미국 배급업자한테 영화를 넘겼단 말일세. 이 역할을 맡지 않으면 자네도 잘 아는 사람들이 실직자가 될 것일세!" 심리적 협박이었죠. 그게 제가 그 영화들을 찍은 유일한 이유였습니다.[5]

 
— 크리스토퍼 리,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그는 드라큘라가 무덤에서 부활했다(Dracula has Risen From the Grave, 1968), 드라큘라의 환생 (1970), 드라큘라의 흉터 (Scars of Dracula, 1970), 드라큘라 A.D. 1972 (1972), 드라큘라 백작과 뱀파이어 신부 (1974) 등 드라큘라 영화 일곱 편에 출연했다. 원래 소설 드라큘라의 팬이었던 크리스토퍼 리였지만, 드라큘라 배역이 그의 배우 경력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1973년 이후에는 드라큘라 역할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말년까지도 그를 만나러 가는 사람들에게는 지인들이 "드라큘라 영화들을 언급하지 마세요!"라는 경고를 할 정도로 드라큘라 배역에 염증을 느꼈다고 한다.

미이라 (1959)에서의 크리스토퍼 리

이 기간 그는 드라큘라 이외에도 해머 스튜디오가 제작한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다. 1959년, "미이라"에서 미라 캐리스 역할을 맡았으며, "지킬 박사의 두 얼굴"(The Two Faces of Dr. Jekyll, 1960)에서는 지킬의 아내와 바람을 피는 지킬의 친구 역할을 맡았다. 그 후에는 "라스푸틴:미친 수도승"(Rasputin:The Mad Monk, 1966)에서 라스푸틴 역할을, "배스커빌 가문의 개" (1959)에서는 셜록 홈즈(피터 쿠싱 분)의 형, 마이크로프트 홈즈 역을 맡았다. 1976년 "악마에게 딸을"(To the Devil a Daughter, 1976)을 끝으로 해머 스튜디오가 공포 영화 제작을 중단할 때까지 크리스토퍼 리와 해머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2.2.2 다른 배역들[편집]

셜록 홈즈로 분한 크리스토퍼 리.

크리스토퍼 리가 해머 스튜디오 영화에 계속 출연하던 시기에도 그는 더욱 흥미로운 배역을 찾아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다. 악역, 선역을 가리지 않았다.

1959년 "배스커빌 가문의 개"로 시작된 홈즈와 리의 인연은 그 이후로도 이어졌다. 해머 스튜디오 영화는 아니었지만 1960년 "셜록 홈즈와 죽음의 목걸이"(Sherlock Holmes and the Deadly Necklace, 1960)에서 직접 셜록 홈즈 역할을 맡았다. 그는 영화 자체는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좋은(A movie well worth leaving alone)" 영화가 되어버렸다고 평했으나, 자신의 셜록 홈즈 연기에는 만족감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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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쉬운 영화였지요. 여러 가지 의미에서요. 영국 감독과 영국 미술 감독을 데리고 독일에서, 독일 배우들로 영화를 찍는 게 아니었습니다. 독일 제작자들이 이런 저런 스토리들을 뒤죽박죽으로 합쳐 놓은 것이 영화를 망쳤다고 생각해요. 제 홈즈 연기는, 제 생각이지만, 제가 연기한 최고의 역할 중 하나였어요. 홈즈가 쓰인 그대로를 표현하려고 했거든요, 참을성 없고, 시비를 잘 걸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그리고 분장을 하고 나니 저는 놀랄 정도로 그와 닮았었습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들 해석에서나 외모에서나, 저의 홈즈 연기는 다른 배우들의 연기와 비교해도 홈즈와 정말 유사하다고 말해요.[6]

 
— 크리스토퍼 리

크리스토퍼 리에게 셜록 홈즈 영화들은 그가 악역 전문 배우에서 탈출한 계기였다. "그 영화들 이후로는 배역이 다양해졌지요.[7] 아, 물론 무거운 배역들도 많이 맡았지요. 하지만 앤서니 홉킨스의 말처럼, '저는 인간을 연기하지, 악역을 연기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수많은 영화를 찍는 와중에 소프트코어 포르노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었다. 해리 타워스라는 영화 제작자의 부탁으로 유지니(Eugenie, 1970)라는 스페인 영화에 해설자 역으로 출연했던 것이다. 물론 포르노 영화라는 사실은 모르고 출연한 것이었다. 정사 장면들은 따로 촬영되어 영화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유지니가 포르노 영화라는 사실을 안 후 크리스토퍼 리는 노발대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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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배역을 맡기로 동의했을 때 그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전혀 알지 못했어요. 사드 후작에 대한 영화라고 말해주더군요. 저는 스페인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하루 동안 해설자 배역을 맡았습니다. 붉은색 디너 재킷을 입어야 했어요. 제 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두들 옷을 갖춰 입고 있었죠. 딱히 이상하다나 의아한 점은 없어 보였습니다. 친구 한 명이 "너, 올드 콤프턴 거리에서 상영하는 영화에 나오던데, 알고 있어?"라고 말해줬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변태(mackintosh brigade)들이 성인 영화를 보는 곳이었거든요. "웃기지도 않네"라고 대답했죠. 그래서 선글라스랑 스카프로 변장한 다음 그 영화관을 찾았는데 제 이름이 거기에 있더군요. 저는 노발대발했죠! 큰 소동이 있었어요. 제가 그 날 스페인을 떠난 후에 제 뒤에 있던 사람들이 죄다 옷을 벗었던 거예요.[8]

푸 만추로 분한 크리스토퍼 리.

물론 해머 스튜디오 밖에서도 이 시기 그의 커리어에서 공포 영화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는 영국과 유럽 본토를 오가며 수많은 공포 영화에 출연했다. 1965년에서 1969년 사이에는 푸 만추 시리즈에서 푸 만추 역할을 했으며, "살아 있는 죽은 자의 성" (1964), "사디즘 박사의 고문실" (The Torture Chamber of Dr. Sadism, 1967) 등에 출현했다. I, Monster (1971)년에서는 지킬 박사 역을 맡기도 했다. 그가 자기 영화 중 최고라고 꼽은 "위커 맨" (Wicker Man, 1973)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위커 맨에서 서머아일 경으로 분한 크리스토퍼 리

드라큘라 이미지를 탈피하고 더 재미있는 배역을 찾던 크리스토퍼 리는 작가 안토니 셰퍼와 만나 같이 영화를 만들 것을 약속한다. 감독으로는 로빈 하디가 선임되었다. 셰퍼와 하디는 "오래된 종교"에 대한 영화를 만들면 참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해머 스튜디오가 주도하던 당시 공포 영화계에서 매우 색다른 소재였다. 소재를 찾던 중 셰퍼는 자신이 읽은 소설-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경찰관이 어느 섬 마을에서 종교 의식으로 여자아이가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제보로 수사를 진행하는 데이비드 피너 작 "Ritual"-을 떠올렸다. 셰퍼와 리는 15000파운드를 주고 소설 판권을 구입했다. 소설을 직접 영화화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판단 하에 셰퍼는 소설의 기본 줄거리만 남기고 이야기를 새로 작성했다. 그렇게 위커 맨의 대본이 완성되었다. 크리스토퍼 리는 저예산 영화였던 위커 맨 제작을 돕기 위해 무료로 출연해주었다. 위커 맨은 당시 공포 영화의 주류에서 멀리 떨어진 독특한 영화였으며, 명작 고전 공포 영화 중 하나로 꼽힌다.

로슈포르 백작으로 분한 크리스토퍼 리

1973년에는 영화 삼총사에서 로슈포르 백작 배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칼싸움 장면에서 피를 보여주고, 등장인물들이 지쳐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액션 영화 장르의 현실성을 한 단계 높여놓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삼총사 촬영 과정에서 무릎을 다쳤는데, 말년까지도 무릎은 완치되지 않았다. 1989년에 크리스토퍼 리는 다시 로슈포르 백작 역에 복귀했다. 크리스토퍼 리에게 '삼총사'는 셜록 홈즈 배역과 함께 드라큘라 이미지를 탈피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한 영화였다. 이 영화 이후 그가 맡은 배역들을 보면 이는 매우 확연해진다.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1973년 이후 크리스토퍼 리는 공포 영화 배역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73에서 77년 사이 크리스토퍼 리가 맡은 가장 중요한 배역은 007 시리즈 영화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 등장하는 악당 프란시스코 스카라망가 역할이었다. 007과 크리스토퍼 리의 인연은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크리스토퍼 리의 사촌이자 007 소설 시리즈 작가 이언 플레밍이 1962년 이미 007 살인번호의 악당 노 박사(Dr.No) 역할을 제안했던 것이다. 크리스토퍼 리는 쌍수를 들고 이 배역을 환영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리가 배역을 수락했을 때는 이미 영화 제작사에서 조셉 와이즈만과 계약을 체결한 후였다. 결국 1974년이 되어서야 크리스토퍼 리는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서 바라고 바라던 007 악당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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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밍의 소설에서 그(프란시스코 스카라망가)는 서인도 출신 깡패에 불과하지만, 영화에서는 매력적이고, 재미있고, 위험하죠. 저는 그를 제임스 본드의 어두운 모습처럼 표현했어요.[9]

2.3 1977~1999: 미국으로 이주[편집]

1977년, 크리스토퍼 리는 평생동안 살아온 런던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한다. 공포 영화 전용 배우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피터 쿠싱빈센트 프라이스의 커리어를 보며 그의 영화 커리어에 대해 고민을 거듭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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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빈센트도 똑같았어요. 둘 다 훌륭한 진지한 영화들을 찍었지만 사람들은 공포 영화만 기억해요. 그게 제가 미국으로 간 이유였습니다. (런던에 남으면) 지금까지와 똑같은 상황이 계속될 거라는 게 뻔했습니다. 딕 위드마크나 빌리 와일더 같은 친구 몇 명이 런던에서 떠나지 않으면 저는 항상 똑같은 배역만 맡을거라고 이야기하더군요. [10]

"1941"에서의 크리스토퍼 리

미국으로 이주하고, 그가 기대한 큰 전환점이 왔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 그가 찍은 첫 영화는 "에어포트'77"(Airport'77, 1977)이었다. 그 후 그는 SNL에서 호스트로 나서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SNL 출연은 그의 배우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관객 중에 스티븐 스필버그등 영화계 주요 인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SNL에서 크리스토퍼 리는 자신이 코미디에도 적합한 배우임을 알렸고, 그 결과 스필버그가 만들 전쟁 코미디 영화 1941 (1979)에 출연할 것을 제의받을 수 있었다. 1980년에는 재난 코미디 영화 Airplane!에 출연할 것을 제의받았지만 거절했다. 그의 역할이었던 배리 루맥 박사 역은 레즐리 닐슨이 대신 맡았다. 그는 후에 이 배역을 거절한 것은 큰 실수(Big mistake)였다고 말했다.

1978년, 존 카펜터는 영화 할로윈에서 살인마 마이클 마이어스를 추적하는 정신과 의사 새뮤얼 루미스 배역을 크리스토퍼 리에게 제안했지만 거절받았고 대신 도널드 플레전스가 그 역을 맡았다. 수십년 후 크리스토퍼 리는 인터뷰에서 배우 인생에서 제일 큰 후회 중 하나가 루미스 역할을 맡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미국 생활 중 그의 가수 활동에 대한 주목도가 크게 올라갔다. 그 계기가 된 영화는 코미디 뮤지컬 영화 "캡틴 인빈서블의 귀환"(The Return of Captain Invincible, 1982)였다. 이 영화에서 크리스토퍼 리는 미국을 없애버리려는 파시스트를 연기하며 Name Your Poison과 Mister Midnight 두 곡을 불렀다.

90년대에도 그는 계속해서 활발한 배우 활동을 이어갔다. 셜록 홈즈와 빅토리아 폭포 사건 (1991)과 셜록 홈즈와 주연 여배우 (1992) 두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셜록 홈즈 역할을 맡았다. 1994년에는 피터 쿠싱과 공동 출연한 마지막 작품인 "피와 살:공포로 남은 해머 스튜디오의 유산" (Flesh and Blood: The Hammer Heritage of Horror, 1994)에 해설자로 참여했다. 이 다큐멘터리가 출시된지 두 달 후 피터 쿠싱이 사망해 이 다큐멘터리에 참여한 기간은 리와 쿠싱이 만난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 1998년에는 현대 파키스탄 건국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진나"(Jinnah, 1998)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 가운데 최고로 꼽은 무하마드 알리 진나 역을 맡았다.

90년대 후반부터 2001년 무렵까지 크리스토퍼 리는 잠시 주춤한다. 1998년작 진나 외에는 주요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주로 텔레비전에 출연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는 1997년, BBC와 A&E가 공동제작한 "아이반호"에서 템플러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 역을 맡았으며, 2000년에는 BBC 미니시리즈 고르멘하스트(Gormenghast, 2000)[11]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 시기 크리스토퍼 리는 미국에서 런던으로 돌아갔다.

2.4 2000년대: 두쿠와 사루만[편집]

사루만으로 분한 크리스토퍼 리.

2001년 반지 원정대에서 사루만 역을 맡으면서부터 그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1년에 한번씩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완독한다고 할 정도로 톨킨를 굉장히 좋아했던 그는 평생 간달프 역을 맡고 싶어했다. 그는 톨킨 생전에 그를 만나 "가장 간달프와 닮은 배우"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이를 평생 갈 자랑으로 여겼다.

그는 반지의 제왕 영화 제작 관계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톨킨을 실제로 만나 본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간달프 역을 맡기 위해서는 기마 장면, 전투 장면을 감당해내야 했다. 반지의 제왕 영화화가 결정되었을 때 그는 이미 나이를 먹어 액션 연기가 힘든 상태였다. 결국 간달프의 역할은 이안 맥켈런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루만으로서 위협적인 카리스마를 뽐내며 새로운 세대에게도 그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2002년 두 개의 탑, 2005년 왕의 귀환에서도 그는 계속 사루만 역을 맡았다. 다만 왕의 귀환에서 그의 출연분은 연장판에서만 볼 수 있다.

두쿠 백작으로 분한 크리스토퍼 리.

2002년 스타워즈 에피소드 2 : 클론의 습격2005년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에서 두쿠 백작 역을 맡아 또 한 번 강렬한 카리스마를 발산했다. 이 영화들에서 그는 직접 칼싸움 장면들을 연기했다고 한다. 물론 발을 상대적으로 많이 움직여야 하는 장면들은 대역을 썼다.

크리스토퍼 리는 팀 버튼이 선호하는 배우 중 한 명으로, 팀 버튼과 총 다섯 편의 영화에서 같이 작업했다. 2005년에는 유령 신부에서 목사 역할을 맡았으며,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는 윌리 웡카의 아버지 치과 의사 역을 맡았다.

이후 2008년에는 헬보이 2에 출연할 것을 제의받았으나 스케줄 문제로 거부했다. 2009년에는 "글로리어스 39"과 "앤드 오브 워"에 출연하였다.

2.5 2010년대: 마지막 배역들[편집]

영화 "휴고"에 출연한 크리스토퍼 리.

2010년에 그는 팀 버튼 감독 작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재버워키의 성우로 참여했다. 2011년에는 "레지던트"에 출연했는데, 이는 1976년 이후 처음으로 다시 해머 스튜디오 영화에 출연한 것이었다. 영화는 혹평을 받았지만[12] 크리스토퍼 리는 "훌륭하게 사악한"[13] 연기를 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영화 촬영 과정에서 케이블에 걸려 넘어져 등을 다쳐 수술을 받았다. 재활이 끝나지 않아 위커 맨의 후속작 "위커 트리"(The Wicker Tree, 2011)에서 그의 역할은 카메오에 그쳤다. 크리스토퍼 리가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감독 로빈 하디는 크게 아쉬워하면서도 리의 출연은 취소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렸으나, 리 본인의 강력한 의지로 카메오 출연이 성사되었다. 동년에는 영화 휴고에 출연했다.

2011년, 크리스토퍼 리는 호빗 삼부작에서도 사루만 배역을 맡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사우론에 의해 사루만이 타락해 가는 과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한다. 그러나 촬영지인 뉴질랜드까지 가기에는 지나치게 고령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그는 4일에 걸쳐 런던에서 타락하기 전의 고결한 마법사로서의 사루만을 연기했다. 2012년 11월에는 삼부작 첫 영화 호빗 : 뜻밖의 여정이, 2013년에는 두 번째 영화 호빗 : 스마우그의 폐허가, 2014년에는 마지막 영화 호빗 : 다섯 군대의 전투가 개봉하였다.

3 죽음: 길고 긴 여정의 마무리[편집]

2015년 5월 말, 그는 호흡 문제와 심장 기능 실패로 병원에 입원했다. 93번째 생일을 병원에서 맞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15년 6월 7일, 크리스토퍼 리는 세상을 떠났다. 사망 공표는 6월 11일에 있었다. 그는 평생 동안 연기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영화를 찾아다녔다. 사망 한달 전에도 9.11 테러를 다른 덴마크 영화 "11일" (The 11th)에 출연하기로 계약할 정도였다. 2013년, 조니 뎁이 은퇴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남긴 말은 그의 삶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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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들도 있어요 - 거짓말하는 사람들, 자기가 뭘 하는 건지 모르는 사람들, 바람과는 다르게 완성된 영화들-그래서 (조니 뎁이 은퇴하고 싶다는) 이유는 이해해요. 저는 항상 스스로에게 "그렇다면 연기 말고 난 뭘 할 수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저에게 영화를 만드는 것은 직업이 아니었어요, 제 삶이었지요. 예를 들어 전 노래도 부르고 책도 써 봤습니다. 그렇지만 연기야말로 제 삶의 원동력이고, 제가 하는 일이자 제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제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의 양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계속 일을 맡고 있어요, 성우나 해설자 역할이라도 말입니다. [14]

4 개인사[편집]

그의 어머니의 가문인 카란디니 가는 이탈리아에서 오랜 귀족 가문이었다. 카란디니 가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레더릭 바르바로사가 직접 문장을 하사한 이후로 계속해서 귀족의 지위를 누렸으며, 샤를마뉴의 후손을 자처해 왔다.

크리스토퍼 리는 이탈리아 방문 중 그의 어머니를 통해서 그도 샤를마뉴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카란디니 가의 친척들은, 더 이상 귀족은 아니었지만, 여러 요직에 올라 크리스토퍼 리에게는 소중한 인맥으로 작용했다. 그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크리스토퍼 리는 007 소설 시리즈 작가 이안 플레밍과 양사촌이 되었다.

그는 50년대에 귀족 집안의 자제 헨리에트 본 로센과 약혼을 하였다. 둘은 스톡홀름의 나이트클럽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 프리츠 본 로젠 백작은 어디까지나 평민 출신인 그에게 굉장히 까다로운 존재였다.

백작은 우선 결혼식을 1년 미루게 한 후 자신의 런던 친구들을 동원해 크리스토퍼 리가 적합한 사람인지 면접을 보게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사설 탐정들을 고용하여 크리스토퍼 리의 뒷조사를 하게 했다. 털어도 먼지가 안 나자 백작은 리에게 추천서를 요구했다. 리는 인터폴 영국 대표 조 잭슨, 배우이자 세계 2차 대전 전쟁 영웅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영국 코미디 영화의 큰 손으로 군림하던 존 볼팅 세 명에게 추천서를 받았다. 마지막 관문은 스웨덴 국왕에게 결혼을 허락받아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크리스토퍼 리는 '안데르센 동화' (Tales of Hans Anderson) 촬영 과정에서 스웨덴 국왕과 만난 일이 있었고, 결국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결국 이 둘은 결혼하지 않았다. 리가 배우의 길을 걷겠다는 결심이 점차 확고해지면서 "이 엉망진창인 배우의 세상에 던져지는 건", 즉 돈 없는 무명 배우와 결혼하게 되는 것은 헨리에트에게 가혹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양측의 동의로 둘의 약혼은 깨졌다.

그가 결혼하게 된 것은 무명에서 벗어난 후인 1961년이었다. 1960년 친구의 소개로 덴마크 출신 전직 모델이자 화가 비르깃 크뢴케(Birgit Krøncke)과 만나 결혼을 하게 된 것이었다. 슬하에는 딸 크리스티나 에리카 카란디니 리를 두었다. 크리스티나는 아버지와 함께 Rhapsody of Fire라는 밴드의 앨범 From Chaos to Eternity에 피처링으로 참가하여 노래를 불렀다.

5 가수 활동[편집]

크리스토퍼 리는 평생 노래하는 것을 즐겼지만 정식으로 보컬 트레이닝을 받은 적은 없었다. 배우 경력 초기에는 베이스 오페라 가수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15]그는 깊은 저음의 목소리로 베이스 가수로 활동했다. 처음으로 영화 상에서 크리스토퍼 리가 노래를 한 것은 위커 맨 OST "Tinker of the Rye"를 불렀을 때였다. 미국 이주 후에는 코미디 뮤지컬 영화 "캡틴 인빈서블의 귀환"(The Return of Captain Invincible, 1982)에서 "Name Your Poison", "Mister Midnight" 두 곡을 불렀다.

2000년대 이후 그는 심포닉 메탈 가수로 활동했다. 그 계기는 심포닉 메탈 밴드 Rhapsody of Fire와 합작하여 싱글 "The Magic of the Wizard's Dream" (아래 유튜브 영상)를 녹음한 것이었다. 그는 Rhapsody of Fire 앨범 4 개에 나레이터로 참여했으며, EP "The Cold Embrace of Fear – A Dark Romantic Symphony"의 뮤직 비디오에서는 마법사 왕 역을 맡기도 했다. 밴드 Manowar가 2010년 자신들의 첫 앨범 Battle Hymns을 재녹음하여 출시할 때 그는 사망한 오손 웰즈 대신 내레이터로 참여했다.

2006년에는 아리아 Toreador Song을 메탈로 커버하였으며, 2007년에는 이 노래가 삽입된 앨범 Revelations를 내놓았다. 2010년에는 그의 첫 메탈 앨범 Charlemagne: By the Sword and the Cross가 출시되어 각국 메탈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이 앨범으로 그는 Spirit of Metal 상을 수상하였다. 수상식장에서 그는 스스로가 새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젊은이같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2012년에는 이 앨범에 포함된 곡 중 "The Bloody Verdict of Verden"의 뮤직 비디오를 내놓았다. 이후로도 그는 메탈 가수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2012년 90세 생일에는 그의 두 번째 메탈 앨범 Charlemagne: The Omens of Death가 제작된다는 것을 발표하여 메탈 사상 최고령 가수로 등극했다. 동년 12월에는 EP "A Heavy Metal Christmas"를 출시하였다.

2013년 12월에는 A Heavy Metal Christmas의 후속 EP A Heavy metal Christmas Too를 내놓았다. 수록곡 Jingle Hell은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진입하는 쾌거를 올렸다. 이로서 크리스토퍼 리는 빌보드 차트에 오른 사상 최고령 가수가 되었다. 2014년에는 "Toreador March", "I, Don Quixote", "An Impossible Dream" 등이 수록된 EP Metal Knight를 출시했다.

6 필모그래피[편집]

7 디스코그래피[편집]

앨범
  • Christopher Lee Sings Devils, Rogues & Other Villains (1998)
  • Revelation (2006)
  • Charlemagne: By the Sword and the Cross (2010)
  • Charlemagne: The Omens of Death(2013)


EP
  • A Heavy Metal Christmas (2012)
  • A Heavy Metal Christmas Too (2013)
  • Metal Knight (2014)


싱글
  • Let Legend Mark Me as the King (2012)
  • The Ultimate Sacrifice (2012)
  • Darkest Carols, Faithful Sing (2014)

8 각주

  1. http://www.imdb.com/name/nm0000489/bio
  2. 당시 그의 어머니는 여러 화가들이 그릴 정도로 미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조각상도 제작되었다.
  3. Sir Christopher Lee interview: 'I’m softer than people think'"I was attached to the SAS from time to time but we are forbidden – former, present, or future – to discuss any specific operations. Let's just say I was in Special Forces and leave it at that. People can read in to that what they like."
  4. The Total Film Interview - Christopher Lee "I was around a long time – nearly ten years. Initially, I was told I was too tall to be an actor. That's a quite fatuous remark to make. It's like saying you're too short to play the piano. I thought, "Right, I'll show you..." At the beginning I didn't know anything about the technique of working in front of a camera, but during those 10 years, I did the one thing that's so vitally important today – I watched, I listened and I learned. So when the time came I was ready... Oddly enough, to play a character who said nothing."
  5. Landis, John (2011). Monsters in the Movies: 100 Years of Cinematic Nightmares. Dorling Kindersley. p. 45. ISBN 978-1-4053-6697-7. 영문 위키백과에서 재인용 후 번역. "The process went like this: The telephone would ring and my agent would say, "Jimmy Carreras [President of Hammer Films] has been on the phone, they've got another Dracula for you." And I would say, "Forget it! I don't want to do another one." I'd get a call from Jimmy Carreras, in a state of hysteria. "What's all this about?!" "Jim, I don't want to do it, and I don't have to do it." "No, you have to do it!" And I said, "Why?" He replied, "Because I've already sold it to the American distributor with you playing the part. Think of all the people you know so well, that you will put out of work!" Emotional blackmail. That's the only reason I did them"
  6. Davies, David Stuart. Holmes of the Movies: The Screen Career of Sherlock Holmes. Bramhall House, 영문 위키백과에서 재인용 후 번역. "I think it was a pity, this film, in more ways than one. We should never have made it in Germany with German actors, although we had a British art director and a British director. It was a hodge podge of stories put together by the German producers, who ruined it. My portrayal of Holmes is, I think, one of the best things I've ever done because I tried to play him really as he was written, as a very intolerant, argumentative, difficult man, and I looked extraordinarily like him with the make-up. Everyone who's seen it said I was as like Holmes as any actor they've ever seen both in appearance and interpretation."
  7. I've never been typcast since
  8. Farndale, Nigel (2011년 2월 12일). "Sir Christopher Lee interview". 런던: The Telegraph. "I had no idea that was what it was when I agreed to the role. I was told it was about the Marquis de Sade. I flew out to Spain for one day's work playing the part of a narrator. I had to wear a crimson dinner jacket. There were lots of people behind me. They all had their clothes on. There didn't seem to be anything peculiar or strange. A friend said: 'Do you know you are in a film in Old Compton Street?' In those days that was where the mackintosh brigade watched their films. 'Very funny,' I said. So I crept along there heavily disguised in dark glasses and scarf, and found the cinema and there was my name. I was furious! There was a huge row. When I had left Spain that day everyone behind me had taken their clothes off!"
  9. "The Total Film Interview – Christopher Lee". Total Film. 1 May 2005.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07-06-12. Retrieved 25 August 2013. " In Fleming’s novel he’s just a West Indian thug, but in the film he’s charming, elegant, amusing, lethal… I played him like the dark side of Bond."
  10. Sir Christopher Lee interview: 'I’m softer than people think', Nigel Farndale, The Telegraph, 2015년 6월 11일, “The same happened to Peter and Vincent. They made some wonderful serious movies but are only known for horror. That was why I went to America. I couldn’t see anything happening here except a continuation of what had gone before. A couple of friends, Dick Widmark and Billy Wilder, told me I had to get away from London otherwise I would always be typecast.”
  11. 혹시 정발명이 있다면 바꾸어주세요
  12. 로튼 토마토 기준으로 로튼 지수가 36%이다.
  13. The Resident - Review, The Guardian, "superbly sinister"
  14. Johnny Depp Retirement Saddens Christopher Lee, Liberty Voice. "There are frustrations – people who lie to you, people who don't know what they are doing, films that don't turn out the way you had wanted them to – so, yes, I do understand [why Depp would consider retiring]. I always ask myself "well, what else could I do?". Making films has never just been a job to me, it is my life. I have some interests outside of acting – I sing and I've written books, for instance – but acting is what keeps me going, it's what I do, it gives life purpose... I'm realistic about the amount of work I can get at my age, but I take what I can, even voice-overs and narration."
  15. 인터뷰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