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인민해방군

중국어: 中国人民解放军 Zhōngguó Rénmín Jiěfàngjūn

중국 공산당 소속의 군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군은 아니나 중국 공산당이 사실상 중국 정부를 구성하므로 중국 인민해방군을 해외에선 중국군이라고도 많이 부른다[1]. 중국 내에서는 약칭으로 해방군을 사용한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1927년 8월 1일 홍농군(紅農軍)으로 창설되었다. 중일전쟁 당시에는 팔로군이란 칭호로도 불렸고 1947년에 인민해방군으로 개칭했다. 1949년 국민당이 중국에서 밀려나면서 중국 본토를 장악했다.

본래는 계급이 없었으나 1955년에 계급을 설치하면서 10명의 원수와 10명의 대장을 두었다. 1965년에 계급을 폐지했다가 1988년에 부활시켰다.

조직 구성[편집 | 원본 편집]

통수권은 국가주석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중군위) 주석에게 있다. 국가주석들이 중군위 주석을 맡지만 아닐 때도 있었다. 중군위는 민간인 주석 외에 제복군인인 부주석 2인, 국방부장, 총참모장, 후근부장, 장비부장, 정치주임, 해군사령원, 공군사령원, 제2포병부대사령원 등 총 11명으로 구성된다.

교리[편집 | 원본 편집]

인민전쟁교리[편집 | 원본 편집]

인민전쟁(人民戰爭)교리는 인민해방군이 중일전쟁국공내전을 거치면서 수립한 교리이다. 마오쩌둥의 군사사상이 녹아들어가 있는 교리로 그 내용은 심히 대륙의 위상이 돋보인다. 우선 넓은 영토를 바탕으로 전략적 후퇴를 감행하며 적을 중국 깊숙히 끌어들이고, 유격부대들이 곳곳에서 적을 괴롭힌다. 중국의 광활한 영토 때문에 심히 넓어진 전선과 후퇴하는 해방군을 쫓아 중국 깊숙히 들어온 적군은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 이 때 해방군이 분산되고 피로한 적들을 격파해 승리한다는 내용인데, 이 교리 때문에 인민해방군은 일정 수준 이상의 병력을 유지해야 했다. 물론 해방군도 병력을 줄여보자는 생각은 있어서 1958년에는 237만(!)명으로 병력을 줄였지만 중-소 국경분쟁이 일어난 1975년에는 다시 병력이 급증해 661만명에 이르는 병력을 보유하는 등[2] 전쟁위험이 고조될 때마다 병력은 600만 수준으로 증가했다. 인민전쟁교리는 중국의 인력과 영토를 바탕으로 기술적 우위를 가진 적으로부터 종심방어를 수행하는 것이 핵심이었으나 공업과 경제가 발전하면서 인민전쟁 교리대로 했다간 주요공업지대를 적들에게 내주게 생겼고 또 인민전쟁 교리 자체가 항일유격전과 국공내전의 경험으로 수립된 것이라 공군과 해군에 대한 고려가 되어있지 못했다. 결국 한계에 부딪힌 인민전쟁교리는 현대적 인민전쟁교리로 발전하게 되었다. [3]

현대적 인민전쟁교리[편집 | 원본 편집]

고집불통 마오쩌둥이 죽고 덩샤오핑이 집권하면서 인민전쟁교리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선 중-소 국경분쟁을 경험하면서 "기술력 격차를 물량으로 해소하려다간 인민군 다죽겠다 이놈들아!" 라는 결론이 나왔고, 개혁개방 이후 생긴 공업지대를 보호해야 하는데 인민전쟁교리는 거점 보호와는 거리가 먼 교리였으며 결정적으로 1979년 중월전쟁에서 인민해방군은 베트남군에 탈탈 털려버렸다. 현대적 인민전쟁교리는 종심방어대신 전면방어를 강조하고, 적 유인보다는 공세를 강조하였으며 군사기술에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라크전에서 이라크가 미국에게 탈탈 털리는것을 본 중국은, 더 이상 양으로 승부할수 없다 판단하고 1990년대 이후로 질적으로 높이면서 현대화를 거치게 되어, 오늘날 미군과 대치하게 된다.

구성[편집 | 원본 편집]

남성, 여성을 모병하는 모병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계급[편집 | 원본 편집]

편제[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사실 모든 공산주의 국가의 군대는 '국군'이 아닌 당에 속한 '당군'이다. 이것은 북한도 마찬가지
  2. 중앙일보, 최종확인일 2015.10.19
  3. 성인모(2014), 중국 인민해방군의 현대화와 전문화 추진-군사교리 변화를 중심으로. 전략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