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오 아기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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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오 아기날도 이 파미(Emilió Aguinaldo y Famy, 1869년 3월 23일 ~ 1964년 2월 6일)는 필리핀 제1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군인,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 국가원수로,아시아 최초의 공화국 국가원수가 독재자인건 함정 비아크-나-바또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필리핀 혁명군 최고 사령관 등의 자격으로 독립 운동을 펼쳐가며 스페인 제국에 저항했다. 미국의 지원에 힙입어 필리핀 혁명에서 승리하고 1899년 1월 23일에 필리핀 제1공화국을 건국하여 초대 대통령에 올랐으나, 미국의 통수로 필리핀-미국 전쟁이 발발하여 결국 패배하고 1901년 3월 23일에 체포되어 정계에서 은퇴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69년 3월 22일 스페인령 동인도 루손 섬 칼라바르손 지방 카비테 주 카비테 엘 비에호시(오늘날의 카윗군)에서 중국인과 타갈로그족의 피가 섞인 메스티소 명문가 집안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필리핀 군도 전역은 스페인 제국의 가혹한 식민 통치로 각종 반 스페인 봉기가 일어났다. 아버지인 카를로스 아기날도 이 하미르가 주지사인지라 어린 시절을 제법 부유하게 살았었다. 그러나 1878년 아버지를 여의게 되자,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배달부와 상점 점원 등의 잡역부로 활동하다가 어머니 트리니다드 파미의 농장 일을 돕는다.

농장 일을 그만 둔 뒤에는 산 후안 데 레트란 대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했으나, 1882년에 콜레라에 감염되어 그만뒀다. 그러나 17세가 되던 해에 스페인 군대 강제 징용이 시작됐으나 어머니의 도움으로 마을 공무원 한 자리를 얻어 강제 징용을 면할 수 있었다. 훗날 고향에서 가장 진보적인 비나카얀 마을의 바랑가이 까베사로 선출된다. 하지만 1894년에 막달로라는 가명을 쓰며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설립한 혁명 정당 카티푸난에 가입하기도 한다. 1895년에는 8월 카비테 시장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지방 정부의 개편을 요구한 마우라 법을 제정하게 한다.

필리핀 혁명[편집 | 원본 편집]

독립 전쟁[편집 | 원본 편집]

1896년 8월 30일 혁명군이 산 후안 델 몬테에서 스페인군의 무기고를 급습하면서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아기날도는 보니파시오에게 무기가 부족해서 패할 것이라고 경고했고 이는 현실이 되었다. 오직 아기날도가 이끄는 부대만 남아서 회전으로 그나마 선방했고 보니파시오의 신임도 얻게 된다. 비록 혁명군이 패했지만, 카비테 주에서 마닐라 시를 지나 필리핀 군도 전역에 혁명이 번져나가게 되었다.

보니파시오와의 갈등[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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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로스 선거[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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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직 취임[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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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미국 전쟁[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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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이후[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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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