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자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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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자샤 파흘라비(아랍어: ‏رضا شاه پهلوی‎, 1878년 3월 16일 ~ 1944년 7월 26일)는 이란의 군주이자 정치인, 군인이다. 그는 이란의 의회에 의해 제정 이란 파흘라비 왕조의 초대 국왕으로 선출됐으며, 군부 독재 정권을 기반으로 서구식의 세속주의적인 정책을 펼쳐나갔다. 그 덕에 현대 이란의 국부라는 긍정적 평가와 전통을 탄압하고 계층 갈등을 조장한 군사 독재자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본래 그의 본명은 "레자 한"이였으며, 페르시아 카자르 왕조의 군인이었다. 당시 페르시아는 소련과 대영제국의 개입으로 각각 남북으로 분할되어 국토가 황폐화되고 많은 국민들이 죽어나갔다. 국왕이었던 아흐메드샤는 할 줄 아는 게 전혀 없었으며, 내각은 부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난세를 기회로 그는 이란에 주둔해있던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 사령관과 접촉하고 1921년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반대파들은 축출됐고, 레자 본인은 전쟁 장관을 거쳐 총리대신의 자리까지 올랐다.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혼란에 휩싸인 페르시아를 잘 수습해냈다.

이후 아흐메드를 축출시켜 유럽으로 망명케하여 카자르 왕조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이웃나라인 터키처럼 공화정을 세우려 했지만, 국민들과 의회의 요구로 1925년 12월 12일에 페르시아 파흘라비 왕조를 선포한 후 초대 국왕으로 등극했다.

내치적으로는 강력한 중앙집권제도를 수립했다. 그리고 페르시아 영토에 거주하는 소수민족들을 탄압하여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열강들과 맺은 각종 불평등조약들도 무효화시켜버리고, 국제 연맹에도 가입했다. 페르시아 남북을 지나는 대륙 종단 철도를 부설하고, 페르시아 최초의 대학교인 테헤란 대학교를 설립하고, 공업을 성장시키기도 했으며, 관료와 군대의 현대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심지어는 차도르와 꾸란에 의존하는 교육제도들을 철폐하는 등 이란을 머리부터 발끝가지 서구화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서구식 개혁제도는 기존의 보수적인 무슬림 성직자 계층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레자는 이것을 귀담아듣지 않고 탄압과 숙청으로만 일관했다(...).

하여튼 레자샤의 서구식 정책으로 페르시아는 터키 공화국과 더불어 중동에서 그나마 선진적인 국가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서구화를 추진한 반면, 외교적으로는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대통령을 비롯한 서아시아의 이슬람 국가 지도자들과 친선 관계를 다져나가며 유럽 세력에 단호하게 대처해나갔다. 민족주의자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1935년에는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제정 이란으로 고쳤다. 그러나 1941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을 이끌던 퓌러 아돌프 히틀러와 손을 잡는 바람에 소련과 대영제국의 공격을 받는다. 결국 그 해 9월 16일에 강제로 왕위를 아들인 모함마드 레자 파흘라비 왕세자에게 물려주고 내려온다.

왕위에서 내려온 이후엔 망명생활을 하다가 1944년 7월 26일남아프리카 공화국요하네스버그에서 세상을 떠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