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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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金相玉, 1890년 1월 5일~1923년 1월 22일)은 일제 강점기 치하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의열단원이다.

상세[편집 | 원본 편집]

3.1 운동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혁신당이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했고 암살단을 조직해 일본제국의 고관 및 민족반역자에 대한 응징 및 숙청을 기도하였다. 또한 오성헌병대분소를 습격해 장총 3정과 군도 1개를 탈취하였다.

1920년 8월 24일에 미국의원단이 동양 각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한다는 소식에 접하자 동지들과 함께 사이토 마코토 총독 외 다수를 암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탄로나 상하이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의열단에 입단, 사이토 총독이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행을 준비하자 이를 기회로 총살하려는 계획을 짰다. 상하이를 떠나면서 농부차림으로 변장하고 밤을 틈타 압록강 철교를 건너면서 경비를 사살하였다. 신의주에 들어와서는 세관검문소 보초를 권총으로 머리를 때려눕히는 등 본 아이덴티티 실사판급의 격투 끝에 국내 잠입에 성공하였다. 그렇게 서울에 와서 김한·서대순 등 동지들과 만나 조선총독을 총살하기 위한 치밀한 거사계획을 세웠으나 상하이 주재 일본경찰의 통보로 일제가 경계를 강화하자 조선총독 암살거사는 시일을 끌게 되고 대신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큰 피해를 입혔다.

그 후에도 도주하여 고봉근의 집에 숨었다가 행랑방 여자[1]의 밀고로 은신처가 탄로나 일본 경찰 20명과 총격전을 벌이며 도주하였다. 먼저 종로경찰서 유도사범이며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사살하였고 이마세·우메다 경부 등 수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추격하는 일본경찰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눈 덮인 남산을 거쳐 금호동에 있는 안장사에 이르러 효제동에 숨게 된다.

그러나 1923년 1월 22일 새벽 최후 은신처마저 일본경찰에게 탐지되고 400명에 달하는 경찰들이 효제동을 샅샅이 에워싸고 결국 포위당해 혼자서 쌍권총을 쥐고 대총격전을 3시간 반 동안에 벌여 구리다 경부를 비롯한 10여 명을 살상했으나 중과부적으로 결국 탄환마저 다하여, 마지막 남은 탄환 한발을 가슴에 겨누고 벽에 기댄 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자결, 순국하였다.

구본웅의 김상옥 그림.jpg
효제동의 이 광경을 생생히 본 구본웅[2]이 이 사건에 큰 감명을 받고 훗날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화폭에 담아내게 되었다 전한다.

외부 참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종로경찰서에서 일하던 친정오빠에게 꼬질렀다.
  2. 당시 중학생.